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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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라누스는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인물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평민과의 갈등으로 추방당했다. 그는 볼스키족에게 망명하여 로마를 공격했으나, 가족의 간청에 굴복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코리올라누스의 삶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그의 귀족주의적 성향과 군사적 영웅주의, 가족애 등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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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라누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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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519년경 |
사망 | 불명 |
출신 계급 | 파트리키 |
씨족 | 마르키우스 씨족 |
로마자 표기 | Gnaeus Marcius Coriolanus (Cn. Marcius Coriolanus) |
군사 경력 | |
활동 시기 | 기원전 5세기 |
역할 | 로마 장군 |
2. 생애
=== 이름 ===
리비우스는 그를 '그나이우스 마르키우스'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후기 라틴 작가들이 사용한 형태이다. 반면 그리스 작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그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라고 불렀고, 이는 플루타르코스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계승되었다. 오길비는 디오니시우스가 연대기 작가 리키니우스 마케르에서 유래된 별도의 전통을 따랐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그나이우스의 약자는 '''Cn.'''이고, 가이우스는 '''C.'''이므로 혼동하기 쉬우며, 어느 쪽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불분명하다.
=== 초기 생애와 군사적 업적 ===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뛰어난 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검술을 연마하며 지칠 줄 모르는 노력가였다.[3]
코리올라누스의 첫 출진은 20세가 되려던 기원전 499년경에 일어난 레길루스 호반 전투였다. 그는 쓰러진 아군을 보호하며 적을 쓰러뜨려 시민관을 받았다. 이 명예는 그를 더욱 큰 명예로 이끌었고, 어머니가 이를 기뻐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몫까지 어머니를 모시려고 결혼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3]
기원전 493년, 집정관 포스투무스 코미니우스 아우룬쿠스의 군대에서 복무하며 볼스키족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코미니우스는 볼스키족의 도시 코리올리를 포위하였는데, 안티움에서 온 볼스키 지원군이 로마군을 공격하고 코리올리에서도 군대가 출격하여 로마군을 협공했다. 이때 마르키우스는 소규모 로마군을 이끌고 코리올리에서 출격한 볼스키군을 격퇴하고, 도시 성문을 돌파하여 성벽을 따라 있는 집에 불을 질렀다. 코리올리 시민들의 비명에 볼스키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패배하였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마르키우스는 '코리올라누스'라는 코그노멘을 얻었다.[3]
=== 평민과의 갈등과 추방 ===
기원전 491년, 볼스키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지 2년 후, 로마는 곡물 부족 사태를 겪었다. 상당량의 곡물이 시칠리아에서 수입되었고, 원로원은 이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을 논의했다. 코리올라누스는 기원전 494년의 제1차 ''평민 계급 철수''로 인해 발생한 친평민적 정치 개혁을 철회하는 조건으로만 곡물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코리올라누스의 제안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민중들은 그의 제안에 격분했고, 호민관들은 그를 재판에 회부했다. 원로원은 코리올라누스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최소한 관대한 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기원전 494년, 로마에서는 플레브스(평민)가 고리대금업에 시달리면서 파트리키와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다. 사비니족이나 볼스키족의 공격이 이어졌고, 원로원 강경파가 다시 세력을 얻는 일이 반복되었다. 독재관조차 중재할 수 없었고, 플레브스는 로마를 떠나 성산에 농성하며 모든 것을 보이콧했고, 최종적으로 호민관의 설립을 쟁취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이러한 타협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로마에서는 성산 사건 당시 플레브스가 파종 등을 게을리하여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호민관은 파트리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병역 거부를 호소했다. 그것을 본 코리올라누스는 수하들을 이끌고 안티움에 침입하여 크게 약탈하고, 과시하듯이 대량의 전리품과 함께 귀국하여 사람들을 분하게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492년과 다음 해인 491년은 곡물을 수입함으로써 겨우 버텼다. 볼스키족 사이에 역병이 유행하여 그들이 싸울 의지를 잃었던 것도 로마에게는 다행이었다. 원로원에서는 이 곡물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논의했지만, 코리올라누스는 특히 강경파였으며, 호민관 특권 박탈 등을 요구하는 격렬한 논쟁을 펼쳤다. 플레브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호민관 루키우스 시키니우스 벨루투스는 그를 고발했다. 파트리키도 온갖 수단을 써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리비우스는 코리올라누스가 재판에 출두하지 않고 유죄 판결을 받아 망명했다고 했으며,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니시오스)는 안티움의 약탈품을 국고에 넣지 않았던 것 등을 지적받아, 재판 결과 국외 추방되었다고 한다.
=== 볼스키족으로의 투항과 로마 공격 ===
코리올라누스는 로마에서 추방된 후, 로마의 적이었던 볼스키족에게 망명했다.[5] 그는 볼스키족 지도자 아티우스 툴루스 아우피디우스의 집에서 환대를 받으며 함께 거주했다.[5]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변장을 하고 탄원자로서 아우피디우스의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코리올라누스와 아우피디우스는 볼스키족을 설득하여 로마와의 휴전을 깨고 침공을 위한 군대를 일으키도록 했다.[6] 리비우스는 아우피디우스가 루디 로마니 대축제 기간에 로마 원로원을 속여 볼스키족을 로마에서 추방하도록 하여 볼스키족 사이에 악의를 불러일으켰다고 기록했다.[6]
코리올라누스와 아우피디우스는 볼스키 군대를 이끌고 로마와 그 동맹 도시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키르케이에서 로마 식민지인들을 추방하고, 사트리쿰, 롱굴라, 폴루스카, 코리올리 등 이전 볼스키족 도시들을 되찾았다. 또한 라비니움, 코르비오, 비텔리아, 트레비아, 라비치, 페둠을 점령했다.[7]
볼스키 군대는 로마로 진군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로마 외곽 5마일 지점인 클루일리안 참호에 주둔하며 약탈을 일삼았다.[7] 코리올라누스는 평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귀족들의 재산은 보호함으로써 로마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7]
로마에서는 집정관 스푸리우스 노티우스와 섹스투스 푸리우스가 방어를 준비했으나, 평민들은 평화를 요구하며 원로원을 압박했다. 원로원은 사절단을 보냈지만 코리올라누스는 거부했다. 사제단도 파견되었지만 소용이 없었다.[7]
결국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 베투리아와 아내 볼룸니아, 그리고 두 아들을 포함한 로마 여인들이 볼스키족 진영으로 가서 코리올라누스에게 공격 중단을 간청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이들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여 군대를 철수시키고 포위를 풀었다.[8] 로마는 이 여성들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포르투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을 세웠다.[8]
=== 가족의 간청과 철군 ===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 베투리아(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볼룸니아로 알려짐)와 그의 아내 볼룸니아(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버질리아로 알려짐),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한 로마의 부인들이 볼스키족 진영으로 가서 코리올라누스에게 로마에 대한 공격을 중단해달라고 간청했다.[8]
로마 공화정 수립의 주역이자 민중의 친구로 사랑받았던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의 여동생 발레리아가 이들을 이끌고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 베투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여자들은 베투리아를 설득하여 코리올라누스의 아내 볼룸니아와 아들들과 함께 코리올라누스에게 갔다.[8]
코리올라누스는 처음에는 완고했지만, 어머니 베투리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베투리아는 "나는 적으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아들로부터 왔는가."라며 간절하게 도리를 설파했고, 아내와 아들, 그리고 여자들의 눈물어린 애원에 코리올라누스는 마침내 굴복하여 가족과 포옹한 후, 진영을 철수했다.[8]
로마는 이 여성들의 봉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포르투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을 세웠다.[8]
=== 죽음 ===
코리올라누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8] 리비우스는 코리올라누스가 불우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다고 기록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안티움으로 돌아간 후, 툴루스 아우피디우스의 선동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변론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과격한 일부 사람들이 그를 덮쳐 살해했다. 볼스키족 사람들은 그를 위해 훌륭한 장례를 치렀고, 로마에서도 여성들의 요청으로 10개월간 복상했다.[9]
디오니시오스는 코리올라누스의 죽음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고 언급했다.
한편, 로마는 코리올라누스를 설득하여 로마 공격을 중단시킨 여성들의 공헌을 기념하여 포르투나 신전을 건립했다.[8] 플루타르코스는 원로원이 여성들을 칭찬하기 위해 신전을 건립했다고 전하며, 여성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신상을 봉헌했다고 한다. 디오니시오스는 신전이 코리올라누스가 철수한 지 1년 후인 기원전 487년 12월에 첫 축제를 열었고, 이듬해 7월에 완성되었다고 기록했다.
2. 1. 이름
리비우스는 그를 '그나이우스 마르키우스'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후기 라틴 작가들이 사용한 형태이다. 반면 그리스 작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그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라고 불렀고, 이는 플루타르크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계승되었다. 오길비는 디오니시우스가 연대기 작가 리키니우스 마케르에서 유래된 별도의 전통을 따랐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그나이우스의 약자는 '''Cn.'''이고, 가이우스는 '''C.'''이므로 혼동하기 쉬우며, 어느 쪽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불분명하다.2. 2. 초기 생애와 군사적 업적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뛰어난 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검술을 연마하며 지칠 줄 모르는 노력가였다.[3]코리올라누스의 첫 출진은 20세가 되려던 기원전 499년경에 일어난 레길루스 호반 전투였다. 그는 쓰러진 아군을 보호하며 적을 쓰러뜨려 시민관을 받았다. 이 명예는 그를 더욱 큰 명예로 이끌었고, 어머니가 이를 기뻐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몫까지 어머니를 모시려고 결혼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3]
기원전 493년, 집정관 포스투무스 코미니우스의 군대에서 복무하며 볼스키족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코미니우스는 볼스키족의 도시 코리올리를 포위하였는데, 안티움에서 온 볼스키 지원군이 로마군을 공격하고 코리올리에서도 군대가 출격하여 로마군을 협공했다. 이때 마르키우스는 소규모 로마군을 이끌고 코리올리에서 출격한 볼스키군을 격퇴하고, 도시 성문을 돌파하여 성벽을 따라 있는 집에 불을 질렀다. 코리올리 시민들의 비명에 볼스키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패배하였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마르키우스는 '코리올라누스'라는 코그노멘을 얻었다.[3]
2. 3. 평민과의 갈등과 추방
기원전 491년, 볼스키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지 2년 후, 로마는 곡물 부족 사태를 겪었다. 상당량의 곡물이 시칠리아에서 수입되었고, 원로원은 이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을 논의했다. 코리올라누스는 기원전 494년의 제1차 ''평민 계급 철수''로 인해 발생한 친평민적 정치 개혁을 철회하는 조건으로만 곡물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원로원은 코리올라누스의 제안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민중들은 그의 제안에 격분했고, 호민관들은 그를 재판에 회부했다. 원로원은 코리올라누스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최소한 관대한 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기원전 494년, 로마에서는 플레브스(평민)가 고리대금업에 시달리면서 파트리키와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다. 사비니족이나 볼스키족의 공격이 이어졌고,원로원 강경파가 다시 세력을 얻는 일이 반복되었다. 독재관조차 중재할 수 없었고, 플레브스는 로마를 떠나 성산에 농성하며 모든 것을 보이콧했고, 최종적으로 호민관의 설립을 쟁취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이러한 타협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로마에서는 성산 사건 당시 플레브스가 파종 등을 게을리하여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호민관은 파트리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병역 거부를 호소했다. 그것을 본 코리올라누스는 수하들을 이끌고 안티움에 침입하여 크게 약탈하고, 과시하듯이 대량의 전리품과 함께 귀국하여 사람들을 분하게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492년과 다음 해인 491년은 곡물을 수입함으로써 겨우 버텼다. 볼스키족 사이에 역병이 유행하여 그들이 싸울 의지를 잃었던 것도 로마에게는 다행이었다. 원로원에서는 이 곡물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논의했지만, 코리올라누스는 특히 강경파였으며, 호민관 특권 박탈 등을 요구하는 격렬한 논쟁을 펼쳤다. 플레브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호민관 루키우스 시키니우스 벨루투스는 그를 고발했다. 파트리키도 온갖 수단을 써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리비우스는 코리올라누스가 재판에 출두하지 않고 유죄 판결을 받아 망명했다고 했으며,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니시오스)는 안티움의 약탈품을 국고에 넣지 않았던 것 등을 지적받아, 재판 결과 국외 추방되었다고 한다.
2. 4. 볼스키족으로의 투항과 로마 공격
코리올라누스는 로마에서 추방된 후, 로마의 적이었던 볼스키족에게 망명했다.[5] 그는 볼스키족 지도자 아티우스 툴루스 아우피디우스의 집에서 환대를 받으며 함께 거주했다.[5]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변장을 하고 탄원자로서 아우피디우스의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코리올라누스와 아우피디우스는 볼스키족을 설득하여 로마와의 휴전을 깨고 침공을 위한 군대를 일으키도록 했다.[6] 리비우스는 아우피디우스가 루디 로마니 대축제 기간에 로마 원로원을 속여 볼스키족을 로마에서 추방하도록 하여 볼스키족 사이에 악의를 불러일으켰다고 기록했다.[6]
코리올라누스와 아우피디우스는 볼스키 군대를 이끌고 로마와 그 동맹 도시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키르케이에서 로마 식민지인들을 추방하고, 사트리쿰, 롱굴라, 폴루스카, 코리올리 등 이전 볼스키족 도시들을 되찾았다. 또한 라비니움, 코르비오, 비텔리아, 트레비아, 라비치, 페둠을 점령했다.[7]
볼스키 군대는 로마로 진군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로마 외곽 5마일 지점인 클루일리안 참호에 주둔하며 약탈을 일삼았다.[7] 코리올라누스는 평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귀족들의 재산은 보호함으로써 로마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7]
로마에서는 집정관 스푸리우스 노티우스와 섹스투스 푸리우스가 방어를 준비했으나, 평민들은 평화를 요구하며 원로원을 압박했다. 원로원은 사절단을 보냈지만 코리올라누스는 거부했다. 사제단도 파견되었지만 소용이 없었다.[7]
결국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 베투리아와 아내 볼룸니아, 그리고 두 아들을 포함한 로마 여인들이 볼스키족 진영으로 가서 코리올라누스에게 공격 중단을 간청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이들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여 군대를 철수시키고 포위를 풀었다.[8] 로마는 이 여성들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포르투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을 세웠다.[8]
이후 코리올라누스의 운명은 불분명하나,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8] 일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안티움으로 은퇴했으나, 로마와 볼스키족 양쪽에 배신 행위를 한 탓에 아우피디우스가 그를 재판에 회부하고 암살했다고 한다.[9]
2. 5. 가족의 간청과 철군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 베투리아(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볼룸니아로 알려짐)와 그의 아내 볼룸니아(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버질리아로 알려짐),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한 로마의 부인들이 볼스키족 진영으로 가서 코리올라누스에게 로마에 대한 공격을 중단해달라고 간청했다.[8]로마 공화정 수립의 주역이자 민중의 친구로 사랑받았던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의 여동생 발레리아가 이들을 이끌고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 베투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여자들은 베투리아를 설득하여 코리올라누스의 아내 볼룸니아와 아들들과 함께 코리올라누스에게 갔다.[8]
코리올라누스는 처음에는 완고했지만, 어머니 베투리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베투리아는 "나는 적으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아들로부터 왔는가."라며 간절하게 도리를 설파했고, 아내와 아들, 그리고 여자들의 눈물어린 애원에 코리올라누스는 마침내 굴복하여 가족과 포옹한 후, 진영을 철수했다.[8]
로마는 이 여성들의 봉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포르투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을 세웠다.[8]
2. 6. 죽음
코리올라누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8] 리비우스는 코리올라누스가 불우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다고 기록했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안티움으로 돌아간 후, 툴루스 아우피디우스의 선동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변론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과격한 일부 사람들이 그를 덮쳐 살해했다. 볼스키족 사람들은 그를 위해 훌륭한 장례를 치렀고, 로마에서도 여성들의 요청으로 10개월간 복상했다.[9]
디오니시오스는 코리올라누스의 죽음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고 언급했다.
한편, 로마는 코리올라누스를 설득하여 로마 공격을 중단시킨 여성들의 공헌을 기념하여 포르투나 신전을 건립했다.[8] 플루타르코스는 원로원이 여성들을 칭찬하기 위해 신전을 건립했다고 전하며, 여성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신상을 봉헌했다고 한다. 디오니시오스는 신전이 코리올라누스가 철수한 지 1년 후인 기원전 487년 12월에 첫 축제를 열었고, 이듬해 7월에 완성되었다고 기록했다.
3. 로마-볼스키 관계 속 한국의 관점
3. 1. 로마와 볼스키족의 갈등
3. 2. 한국 역사와의 유사성
4. 현대적 해석과 평가
4. 1. 셰익스피어의 희곡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는 그의 "로마 연극" 중 마지막 작품으로, 코리올라누스를 반민중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묘사하여, 원시 파시스트 지도자로 해석하는 전통을 만들었다.[1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코리올라누스》(1951)는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다.[11]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랄프 파인즈가 주연 및 감독을 맡은 2011년 영화 《코리올라누스》의 기반이 되었다.존 데니스의 연극 《그의 조국 침략자》는 1719년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최근의 자코바이트 봉기를 하노버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언급했다.
하인리히 요제프 폰 콜린의 1804년 연극 《코리올란》은 그를 비극적 영웅에 대한 독일 낭만주의적 관점과 관련하여 묘사했다. 베토벤의 1807년 《코리올란 서곡》은 폰 콜린의 연극을 위해 작곡되었다.
T. S. 엘리엇은 1931년에 "코리올란"이라는 시를 썼다.
《전투의 천둥》은 코리올라누스 전설을 바탕으로 한 1963년 이탈리아 영화이다.
스티븐 세일러의 2007년 소설 《로마》는 코리올라누스를 귀족 어머니와 평민 아버지의 자식인 평민으로 묘사한다. 그는 군사적 용맹과 인맥 덕분에 원로원 지위를 얻지만, 호민관 직책 폐지를 요구하다 평민들의 표적이 되어 재판 전에 도망친다.
《권력의 48가지 법칙》은 코리올라누스를 법칙 4: "항상 필요한 것보다 적게 말하라"를 위반하는 사례로 사용하며, 그의 추방 이유로 평민들을 끊임없이 모욕한 점을 든다.
수잔 콜린스의 소설 시리즈 《헝거 게임》에서 주요 적대자는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로 명명되었으며, 프리퀄인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코리올라누스 스노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2]
4. 2. 대중문화
랄프 파인즈가 주연 및 감독을 맡은 2011년 영화 《코리올라누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11]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는 영웅을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코리올라누스를 반민중주의적, 심지어 원시 파시스트 지도자로 해석하는 오랜 전통을 만들어냈다.[1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코리올라누스》(1951)는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다.[11]존 데니스의 연극 《그의 조국 침략자》는 1719년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최근의 자코바이트 봉기를 하노버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언급했다.
하인리히 요제프 폰 콜린의 1804년 연극 《코리올란》은 그를 비극적 영웅에 대한 독일 낭만주의적 관점과 관련하여 묘사했다. 베토벤의 1807년 《코리올란 서곡》은 폰 콜린의 연극을 위해 작곡되었다.
T. S. 엘리엇은 1931년에 "코리올란"이라는 시를 썼다.
《전투의 천둥》은 코리올라누스 전설을 바탕으로 한 1963년 이탈리아 영화이다.
스티븐 세일러의 2007년 소설 《로마》는 코리올라누스를 귀족 어머니와 평민 아버지의 자식인 평민으로 묘사한다. 그의 생애 동안 로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그의 태도는 설명된 바와 같다. 그는 군사적 용맹과 인맥 덕분에 원로원 지위를 얻는다. 그가 호민관 직책 폐지를 요구하자 그는 평민들과 그들의 대표들의 표적이 된다. 그는 그를 사회적, 재정적으로 망하게 할 재판 전에 도망쳐서 위에서 설명한 볼스키와의 동맹을 찾는다. 로마에 대한 그의 군사 작전은 성공적이며 그의 군대는 도시의 성벽에 접근하고 있었으나, 그의 귀족 어머니와 아내를 포함한 로마 여성들의 호소로 인해, 그는 군대에 철수를 명령했고, 결국 그의 군대에 의해 살해된다.
《권력의 48가지 법칙》은 코리올라누스를 법칙 4: "항상 필요한 것보다 적게 말하라"를 위반하는 사례로 사용하며, 그의 추방 이유로 평민들을 끊임없이 모욕한 점을 든다.
수잔 콜린스의 소설 시리즈 《헝거 게임》에서 주요 적대자는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로 명명되었다. 프리퀄인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오로지 코리올라누스 스노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콜린스는 역사적 코리올라누스와 허구적 코리올라누스 사이의 유사점을 언급한다.[12]
4. 3. 역사적 진실성 논란
일부 현대 학자들은 코리올라누스 이야기의 일부에 의문을 제기한다.[10] 코리올라누스 생애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3세기의 작품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이는 코리올라누스의 생애에서 약 200년이 지난 시점이며, 기원전 390년 로마의 갈리아족 침략 이전에는 권위 있는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다. 코리올라누스 자체가 역사적 인물인지와는 관계없이, 이 이야기는 볼스키족이 라티움을 유린하고 로마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던 기원전 5세기 초의 어둡고 불행했던 시기에 대한 진정한 대중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4. 4.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4. 4. 1. 귀족주의 비판
코리올라누스의 귀족 중심적 사고방식과 평민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렵다. 그의 언행은 로마 공화정 내에서도 극단적인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현대의 관점에서는 더욱 비판받을 여지가 크다. 특히 대한민국과 같이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에서는 이러한 귀족주의적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4. 4. 2. 군사적 영웅주의에 대한 경계
그의 군사적 업적은 인정할 만하지만, 전쟁 영웅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은 경계해야 한다.4. 4. 3. 가족애와 인간적 면모
가족의 간청에 마음을 돌린 코리올라누스의 모습은 인간적인 연민과 갈등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5. 각주
참조
[1]
서적
Marcius Coriolanus, Gnaeus
https://doi.org/10.1[...]
[2]
서적
A Commentary on Livy, Books 1–5
Clarendon Press
[3]
서적
Ab urbe condita
https://en.wikisourc[...]
[4]
서적
Ab urbe condita
https://en.wikisourc[...]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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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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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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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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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sourc[...]
[9]
서적
Coriolanus
[10]
웹사이트
Gnaeus Marcius Coriolanus
https://www.livius.o[...]
2019-11-16
[11]
서적
The Theatre of Bertolt Brecht: A Study from Eight Aspects
Methuen
[12]
뉴스
All the Hidden Meanings of the Names in the New Hunger Games
https://slate.com/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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