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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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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189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문학과 무대 예술에 몰두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경험하며 반전 사상을 갖게 되었고,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브레히트는 서사극 이론을 정립하여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소외 효과를 통해 관객의 비판적 시각을 유도하고자 했다. 1933년 나치의 집권으로 망명 생활을 시작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동독으로 귀환하여 베를리너 앙상블을 설립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연구되며, 연극, 영화,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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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의 브레히트
1954년의 브레히트
본명오이겐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
출생1898년 2월 10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
사망1956년 8월 14일
사망지동독 동베를린
직업극작가
연출가
시인
영화 각본가
배우자마리안네 초프 (1922년 결혼, 1927년 이혼)
헬레네 바이겔 (1930년 결혼)
자녀프랑크 반홀처
한네 히오프
슈테판 브레히트
바르바라 브레히트-샬
친척발터 브레히트 (남동생)
작품 활동
사조서사극
영향프랑크 베데킨트
게오르크 뷔히너
에르빈 피스카토어
마르크스주의
성경
영향을 준 인물하이너 뮐러
장뤼크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라스 폰 트리에
대표 작품서푼짜리 오페라
갈릴레이의 생애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
사천의 선인
코카서스의 백묵원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
기타 정보
관련 인물베를리너 앙상블
서명

2. 생애

1898년 독일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첫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다. 특히 《서푼짜리 오페라》는 베를린에서 100회가 넘는 공연을 기록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전쟁 체험을 통해 자기 계급에 등을 돌려 점차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 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 정당인 나치가 집권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좌파 탄압이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중에도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생애》(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을 집필하며 반(反)파시즘 투쟁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47년 12월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 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브레히트는 동독을 택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2. 1. 초기 생애 (1898-1924)

1898년 바이에른 왕국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 공장 지배인이었던 아버지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와 어머니 조피 브레히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바이에른 복음주의 루터교회 신자로, 브레히트는 어머니의 종교에 따라 루터교 세례를 받았다.[22] 4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08년 9년제 실과 김나지움 (Realgymnasium)에 진학했다. 일찍부터 시와 평론 등을 썼으며, 1914년 『아우크스부르크 신문』에는 베르톨트 오이겐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당시 16세였던 브레히트의 시가 게재되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독일 문학에서는 이단이었던 크리스티안 디트리히 그라베, 게오르크 뷔히너, 프랑크 베데킨트 등을 애독했다. 또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문에 대한 관심으로 성경에 친숙해졌으며, 16세에 희곡 『성경』을 집필했다.

1917년 뮌헨 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후에 의학부로 전과)했다. 잠시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을 오가며 문학, 음악, 무대 예술에 몰두했다. 1918년, 그라베의 생애를 소재로 한 한스 요스의 『고독한 사람』의 공연에서 힌트를 얻어, 불량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처녀 희곡 『바알』을 집필했다. 이 해 10월 소집된 브레히트는 아우크스부르크 육군 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감염증(전염병과 성병) 병동에 배속되었지만, 한 달 정도 만에 독일 제국이 패전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나,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브레히트는 이미 2월에 이 사건을 소재로 희곡 『스파르타쿠스』 초고를 집필했으며, 이것이 후에 『밤에 두드리는 북』이 되었다. 이 시기에 좌파 독일 독립 사회 민주당 (USPD)에 관심을 가졌다. 7월,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제했던 의사의 딸 파울라 반홀처(애칭 비)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 베데킨트를 기려 프랑크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브레히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고, 프랑크는 후에 다른 남성과 결혼한 비에게 맡겨졌다.

2. 2. 베를린 시대 (1924-1933)

1922년 여름, 『밤을 두드리는 북』이 뮌헨의 실내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그 해의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며 일약 각광을 받았다. 브레히트는 이 뮌헨 극장의 문예부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말, 첫 번째 아내 마리안네 초프와 결혼했다.[37] 1923년에는 『바알』, 이어서 『도시의 정글』을 왕궁 극장에서 상연했다. 같은 무렵, 훗날 두 번째 아내이자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헬레네 바이겔을 만났다. 1924년,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에드워드 2세』를 번안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의 생애』를 연출하여, 뮌헨의 실내 극장에서 상연했다.[38] 이 작품에서 브레히트는 절제된 의상과 소품을 사용하고, 병사 역의 배우에게 백분칠을 했다. 이러한 연출의 간소함은, 후에 그가 주재하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특징이 된다.

1923년 9월, 카를 추크마이어와 함께 막스 라인하르트가 이끄는 도이체스 극장의 문예부원으로 채용되어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39] 10월, 국립 극장에서 『에드워드 2세의 생애』가, 도이체스 극장에서 『도시의 정글』이 상연되면서 브레히트는 인지도를 높여갔다.

1926년 무렵부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기 시작하여, 『자본론』을 정독했다. 또한 1926년에 시집 『가정용 설교집』을 출판하여 시인으로도 평가를 받았다.[40]

1927년부터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의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1928년,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각색하여 『서푼짜리 오페라』를 발표하였고, 이 작품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에서는 1년 이상 롱런했고, 세계 각지에서도 상연되어 이후 브레히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1]

1930년 무렵부터 브레히트는 새로운 연극의 형태를 모색하여 "교육극" (Lehrstück)이라고 칭하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42] 1930년의 『처치』에서는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와 공동 작업을 했고, 그와의 협력 관계는 이후 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 무렵 발터 벤야민과 알게 되어 친교를 맺었다. 벤야민은 브레히트의 이해자가 되어 그의 작가론을 몇 편 집필했다.

1932년에는 전면적으로 협력한 영화 『쿨레 왐페』를 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스포츠 운동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옹호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본국 독일에서의 검열로 상영이 금지되었다. 격렬한 항의 운동의 결과, 11곳을 삭제하고 미성년자 관람 금지라는 조건으로, 1932년 5월에 공개되었다[79]。또한 연극에서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개작한 작품을 상연했다.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다음 날(1933년 2월 28일), 브레히트는 유대인이었던 아내 바이겔과 함께 프라하행 기차에 탑승하여 망명길에 올랐다.[43]

2. 3. 망명 시기 (1933-1947)

1933년 나치가 집권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좌파 탄압이 시작되자, 브레히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49] 망명 중에도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생애》(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을 집필하며 반(反)파시즘 투쟁을 이어갔다.

1933년 5월, 나치당 정부는 브레히트의 저작 출판을 금지하고 분서 대상으로 삼았다. 1935년에는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1938년까지 브레히트는 나치 치하 소시민의 삶을 그린 연작극 《제3 제국의 공포와 비참》을 썼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체코슬로바키아 진격으로 덴마크마저 위험해지자, 1939년 4월 브레히트는 스톡홀름으로 이주했다. 1940년 4월, 나치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헬싱키로 피신했다가, 1941년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에 정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7년 12월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브레히트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2. 4. 동독 귀환과 사망 (1947-1956)

1947년 미국에서 극단적인 반공주의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HUAC)의 심문을 받았다.[61] 심문 다음 날, 브레히트는 파리를 경유하여 취리히로 도망쳤다. 서독으로 입국이 허가되지 않아 취리히에 1년간 머물며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했다.

1948년 10월, 프라하를 경유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어 동독에 도착했다. 동베를린에 거처를 마련한 브레히트는 1949년베를리너 앙상블을 결성했다.[61] 같은 해 11월, 브레히트 연출의 제1회 공연 『푼틸라 영감과 하인 마티』가 초연되었다. 1949년에는 바이겔 주연의 『어머니 마리아 보테와 아이들』이 취리히에서 초연되었다.

1950년대에는 고전 개작에 착수하여 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의 『가정교사』,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레이너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비버 모피』, 몰리에르의 『돈 후안』 등을 개작했다.

1950년 예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953년에는 동서 베를린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54년 베를리너 앙상블이 독일 극장에서 현재의 본거지인 쉬프바우어담 극장으로 이전했다. 1954년 파리 국제 연극제에서 최우수 공연 및 최우수 연출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인 1955년에는 『코카서스의 백묵원』도 2위를 차지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61]

1955년,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했다. 1956년 8월 14일, 심장병으로 베를린에서 사망했다.[61] 유언에 따라 시신은 주석 관에 안치되었으며, 묘는 베를린 시 중앙부에 있는 시립 도르테아슈타트 묘지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의 묘를 마주보며 만들어졌다.

어린 시절 류마티스열에 걸렸고, 이로 인해 심비대가 발생했으며, 평생 동안 만성 심부전과 시덴함 무도병을 앓았다.[62] 1951년에 촬영된 브레히트의 방사선 사진 보고서에 따르면, 심장이 심하게 손상되어 좌측으로 비대해졌고 대동맥 융기가 돌출되었으며 펌프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한다. 브레히트의 동료들은 그를 매우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머리를 흔들거나 손을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시덴함 무도병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62]

헬레네 바이겔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묘, 도르테아슈타트 묘지


브레히트 부부의 묘

3. 주요 작품

브레히트는 희곡, 시, 소설,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의 시는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 인간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73]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 등이 있다. <1492년>은 이민 심사 판사가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가하기 위해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73]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을 "서사극(Episches Theater)"이라 칭하며, 기존의 "극적 연극"(Dramatisches Theater)과 구분했다. 그는 "극적 연극"이 관객을 배역에 감정 이입시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서사극"은 배우가 사건을 설명하고 관객에게 비판적 사고를 촉구하여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63] 아리스토텔레스비극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으로 정의한 것을 비판하며 자신의 연극을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 칭했고, "극적 연극"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미식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 중 특히 잘 알려진 것은 소외 효과(Verfremdungseffekt)이다. 이는 일상적인 것에 위화감을 주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고방식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이 용어는 브레히트 이후 일반적인 문학 이론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프란츠 카프카 등 브레히트 이전의 작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3. 1. 희곡

브레히트는 초기에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했으나, 이후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다.[26] 그의 초기 작품인 《바알》, 《밤의 북》, 《도시의 정글》에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점차 사회적 인식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관객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이화효과(낯설게 하기)를 창출하는 서사극 이론을 확립했다.

1922년에는 희곡 《밤을 두드리는 북》이 뮌헨에서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고,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22] 1923년에는 《바알》과 《도시의 정글》이 상연되었다.

1926년 무렵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기 시작했고, 1927년부터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협업을 시작했다.[32] 1928년에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각색한 《서푼짜리 오페라》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79] 이 작품은 독일에서 1년 이상 장기 공연되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상연되며 브레히트의 대표작이 되었다.

1930년 무렵부터는 새로운 연극 형태인 "교육극"(Lehrstück)을 시도했다.

브레히트는 망명 중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갈릴레이의 생애》(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이 이 시기에 쓰여진 대표작이다.

주요 희곡은 다음과 같다.

제목발표 연도초연 연도비고
바알(Baal)1918년1923년라이프치히
밤에 울리는 북(Trommeln in der Nacht)1919년1922년뮌헨
영국의 에드워드 2세의 생애(Leben Eduards des Zweiten von England)1923년1924년크리스토퍼 말로의 개작
남자는 남자다(Mann ist Mann)1926년1926년
파처(Fatzer)1926년
마하고니(Mahagonny)1927년1930년라이프치히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1928년1928년베를린,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각색, 1931년 영화화
린드버그의 비행(Der Flug der Lindberghs)1928년
예스맨, 노우맨(Der Jasager. Der Neinsager)1929년 - 1930년요곡 곡행(곤파루 젠치쿠 작)을 각색
도살장의 성 요한나(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öfe)1929년
처치(Die Maßnahme)1930년
어머니(Die Mutter)1931년막심 고리키의 개작
둥근 머리와 뾰족한 머리(Die Rundköpfe und die Spitzköpfe)1932년1936년코펜하겐
일곱 개의 대죄(Die sieben Todsünden)1933년
카라 부인의 총(Die Gewehre der Frau Carrar)1936년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es)1937년1937년파리
율리우스 카이사르 씨의 사업(Die Geschäfte des Herrn Julius Caesar)1937년 - 1939년
철은 얼마인가(Was kostet das Eisen)1939년
Der gute Mensch von Sezuande1939년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39년1941년취리히
갈릴레오의 생애(Leben des Galilei)1939년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0년1949년
아르투로 위의 억제할 수 없는 흥륭(Der 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슈베이크(Schweyk im Zweiten Weltkrieg)1943년야로슬라프 하셰크병사 슈베이크의 모험을 각색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1944년원곡 회란기를 각색
안티고네(Antigone)1947년프리드리히 휠덜린의 번역을 기초로 한 소포클레스의 개작
가정교사(Der Hofmeister)1949년렌츠의 개작
달력 이야기(Kalendergeschichten)1949년
비버 털(Biberpelz und roter Hahn)1950년하우프트만의 개작
코리올라누스(Coriolanus)1951년셰익스피어의 개작
투란도트(Turandot oder Der Kongreß der Weißwäscher)1953년
돈 후안(Don Juan)1952년몰리에르의 개작
북과 나팔(Pauken und Trompeten)1954년


3. 2. 시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 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73]

일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73]

  • 《가정용 설교집》 (1927년)
  • 《부코의 비가》 (1955년)

4.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 서사극

브레히트는 에르빈 피스카토르와 브세볼로드 메이예르홀드의 실험을 종합하고 확장하여 극장을 정치극을 위한 장이자 변증법적 유물론의 비판적 미학을 창조하는 장으로 탐구하면서 "서사극"의 이론과 실제를 결합하여 발전시켰다.

서사극은 연극이 관객이 눈앞의 등장인물이나 행동에 감정적으로 동일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인 자기 성찰과 무대 위 행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히트는 절정의 카타르시스 경험이 관객을 안일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관객이 사회적 불의와 착취를 인식하고 극장을 나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기를 원했다.[63]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을 "서사극(Episches Theater)"이라고 칭하며, 기존의 연극("극적 연극", Dramatisches Theater)과 자신의 연극을 구분했다. 브레히트에 따르면 "극적 연극"은 관객이 배역에 감정 이입하도록 유도하며 사건을 무대에서 재현(리프레젠테이션)함으로써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이에 반해 "서사극"은 배우가 무대를 통해 사건을 설명(데몬스트레이션)하며 관객에게 비판적인 사고를 촉구하여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게 하려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러한 "서사극"을, 비극을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며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불렀고, 반면 "극적 연극"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미식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드라마를 매체로 보는 브레히트의 모더니즘적 관심은 드라마의 "서사 형식"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드라마 형식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다양한 장,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구성주의 "몽타주"의 발전, 파블로 피카소의 시각 예술에서 입체파 "콜라주" 도입 등 다른 예술 분야의 유사한 모더니즘 혁신과 관련이 있다.[64]

브레히트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극작가로는 하이네르 뮐러가 있다. 뮐러는 브레히트의 『파차』를 "백 년에 한 작품"이라고 칭하는 한편, 브레히트의 『아르투로 우이의 성공』 등을 연출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센다 코레야와 이와부치 타츠지가 브레히트 연구의 중심 인물이다.

4. 1. 소외 효과 (Verfremdungseffekt)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Verfremdungseffektde였다.[65] 이는 "낯설게 하기 효과", "거리 두기 효과" 등으로 번역되며, 종종 "소외 효과"로 잘못 번역되기도 한다.[65] 브레히트는 이 효과에 대해 "사건에서 자명하고 친숙하며 명백한 특징을 제거하고 그들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66]

관객이 극 중 인물이나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대신,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사회적 불의와 착취를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소외 효과의 목표였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장을 나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기를 원했다.[63]

소외 효과를 위해 브레히트는 다양한 연극적 장치를 사용했다.

  •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행위[66]
  • 거칠고 밝은 무대 조명[66]
  • 노래를 삽입하여 극의 흐름을 중단[66]
  • 설명용 플래카드[66]
  • 텍스트를 3인칭 또는 과거 시제로 전환[66]
  • 무대 지시를 큰 소리로 말하기[66]


이러한 기법들은 관객에게 연극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의 재현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브레히트는 연극적 사건의 구성된 본질을 강조함으로써 관객의 현실 또한 똑같이 구성되었으며, 따라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다.

브레히트는 중국 연극의 영향을 받아 ''소외 효과''를 논거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전통적인 중국 연기는 또한 소외 효과를 알고 있으며, 이를 가장 미묘하게 적용한다"라고 언급했다.[67]

5. 브레히트와 한국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의 작가로, 그의 작품과 사상은 1970년대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민중극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작품은 군사독재 시절 억압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의 서사극 이론은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마당극 등 민중극 운동 발전에 기여했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데 유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가 동독 체제를 옹호한 행적은 비판받기도 한다.

5. 1. 한국에 미친 영향

브레히트의 작품과 사상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민중극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억압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의 연극 이론은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마당극 등 민중극 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5. 2. 한국에서의 수용과 논쟁

브레히트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데 유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동독 체제 옹호 행적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연극 이론은 여전히 한국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변형되어 활용되고 있다.

6. 평가 및 유산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연극을 "서사극"이라고 칭하며, 관객이 배역에 감정이입하는 대신 비판적인 사고를 하도록 유도했다. 브레히트는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에 빗대어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불렀다.

브레히트 연극론 중 특히 잘 알려진 것은 "소외 효과(Verfremdungseffekt)"이다. 이는 일상적인 것에 위화감을 일으켜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이 용어는 브레히트 이후 일반적인 문학 이론으로 사용되었으며, 프란츠 카프카 등 이전 작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브레히트의 후계자로는 하이네르 뮐러가 꼽힌다. 뮐러는 브레히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연출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센다 코레야와 이와부치 타츠지가 브레히트 연구의 중심 인물이었다. 센다는 브레히트 희곡 번역 및 상연을 통해 초기 소개에 기여했고, 이와부치는 브레히트 전집 번역 및 센다 번역의 비판적 검증을 수행했다. 츠츠이 야스타카와 같은 작가도 브레히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연구되며,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성찰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의 서사극 이론과 소외 효과는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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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문서 Brooker writes that "the term 'alienation' is an inadequate and even misleading translation of Brecht's ''Verfremdung''. The terms 'de-familiarisation' or 'estrangement', when understood as more than purely formal devices, give a more accurate sense of Brecht's intentions. A better term still would be 'de-alienation'".
[66] 인용 Brecht, quoted by Brooker (1994, 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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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서적 映画史上ベスト200シリーズ・ヨーロッパ映画200 キネマ旬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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