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국민회
1. 개요
간도국민회는 3·1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결성된 단체로, 대한국민회, 북간도국민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초기에는 간민자지회로 시작하여 중국 당국의 요청으로 간민회로 개칭되었으며, 연길, 화룡, 왕청 등에 지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련 자치 활동을 수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독립군 부대 통합에 참여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며 독립 의식을 고취했다. 자체 군대인 대한국민회군을 조직하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기여했으나, 간도 참변 이후 해산되었다.
| 유형 | 정치, 군사 |
|---|---|
| 창립일 | 1914년 1월 |
| 해산일 | 1921년 4월 |
| 창립자 | 구춘선 |
| 소속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하위 조직 | 대한국민회 북간도국민회 훈춘국민회 국민군 |
| 위치 | 옌지, 지린 성, 중국 |
| 한글 | 간도국민회 |
|---|---|
| 한자 | 間島國民會 |
| 로마자 표기 | gandogukminhoe |
| MR 표기 | kandokukminho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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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회 -
권업회
권업회는 191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종호, 최재형, 홍범도 등이 조직한 단체로, 농업, 상업, 공업, 교육 진흥을 표면적인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며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
대한독립군단 -
김인 (독립운동가)
안동 김씨 가문 출신 독립운동가 김인은 상하이에서 대한제국 애국 관련 교육을 받고 대한독립군 감독관으로 활동하다 중국 청두에서 사망,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다. -
대한독립군단 -
김홍일 (1898년)
김홍일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건국 후까지 군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중국 국민혁명군 소장, 한국광복군 참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고, 6.25 전쟁 당시 한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으며, 주중화민국 대사와 야당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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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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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2. 별칭
대한국민회는 간도 지역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 대한국민회
* 북간도대한국민회
* 북간도국민회
* 간도대한민회
* 대한민회
3. 결성 배경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대한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초기에는 간민자지회(墾民自治會)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중국 당국의 요청으로 간민회로 개칭되었다.
1913년 1월 26일, 이동춘, 김립 등 25명의 발기인이 약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향회 창립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같은 해 4월 26일, 백옥보가 간민회 총회 임시 회장으로 선출되어 간민회 창립 회의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김약연이 회장으로, 백옥보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민정부, 교육부, 법무부, 재정부, 식산부 등 9개 부서의 임원을 임명했다. 이후 연길, 화룡, 왕청 등 3개 현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 아래에 많은 분회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한인 거주민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자율적으로 해결되었고, 중국 정부 또한 한인 문제에 대해 간민회와 협의했다. 간민회는 한인 거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여, 북간도 지역은 이후 반일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3·1 운동 이후, 용정에서 독립 시위를 주도했던 의사부(議事部)는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로 개칭되었고,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면서 다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되었다. 각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각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자치 기구를 만들었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이를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소속된 간도국민회로 발전시켰다.
4. 주요 활동
간도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만주 동부 지역 독립군 부대 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봄, 조안무의 지휘 아래 국민군이라는 자체 군대를 조직하고, 회원들에게 회비를 걷어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기관지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행하여 독립 의식을 고취했다.
1920년 3월과 5월, 임시정부 지시에 따라 열린 통합 회의에 참여하여 간도국민회가 행정 기관, 대한북군사령부가 군사 기관 역할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간도국민회는 대한북군사령부를 지원하고 군사 관련 사무를 제공했다.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에서 홍범도, 최진동 부대가 일본군과 교전하는 과정에서, 대한북군사령부 내 최진동 군사부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1920년 8월, 연석회의에서 최진동의 군무부 총사령관은 대한북군사령부에서 물러났고, 홍범도는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최진동의 군무부와 경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5. 조직
간도국민회는 1913년 1월 26일 이동춘, 김립 등 25명의 발기인과 약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된 간민자지회(墾民自治會)가 그 시초이다. 중국 당국의 요청으로 '자주'라는 단어를 삭제하여 간민회로 개칭되었다. 4월 26일, 백옥보가 간민회 총회 임시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약연이 회장, 백옥보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정부, 교육부, 법무부, 재정부, 식산부 등 9개 부서의 임원이 임명되었고, 연길, 화룡, 왕청 등 3개 현에 지부를 설치하여 한인 거주민 관련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했다. 중국 정부 또한 한인 문제에 대해 간민회와 협의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동부 용정 등 북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간도국민회로 재편되었다. 용정에서 독립 시위를 주도했던 의사부는 조선독립기성회, 상하이 임시정부 조직 후 대한국민회로 개칭되었다. 각 지방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필요성을 느껴 각 단체 대표들이 자치 기구를 만들었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이를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소속된 간도국민회로 발전시켰다.
1920년 1월, 간도국민회는 중앙총회로 개칭되었고, 구춘선과 이명순이 회장, 박관일이 부회장을 맡았다.
5.1. 지부
1920년 1월, 간도국민회 본부는 연길현 춘양향 합마당에 설립되었으며, 회장에 구춘선, 부회장에 강구우, 서기에 고동환, 김정, 재무에 김규찬, 경위부장에 박두화, 편집부장에 이완, 통신부장에 최윤주가 임명되었다. 본부는 지부 수가 증가하고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중앙총회로 개칭되었고 지인향으로 이전되었다. 5개의 지방총회와 52개의 지부가 있었다. 중앙총회는 연길현 지인향 의란구에 위치했으며 강구우가 회장을 맡았다. 동부 지방총회는 연길현 지인향 화룡촌, 서부 지방총회는 연길현 숭례향 묘구, 남부 지방총회는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 북부 지방총회는 왕청현 춘화향 합수평에 위치했다. 이후 훈춘 대한국민회 회원 21,000명을 모집하고 지부를 80곳으로 확대했다.
5.1.1. 평양 대한국민회
평양에는 본부가 있었고, 각 군에는 평의회가, 각 면에는 지방 자치회가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1919년 9월 평양 신양리 신학교에서 기독교인들을 모아 결성되었으며, 회장 박인관, 서기 박승명, 평의원 임영석, 고진한, 황보덕삼, 이치수, 재무 박치록, 서기 전흥건 등이 있었다. 그 목적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소통하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군사 및 재정 관련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했으며, 동만주의 통합 기구임을 선언했다.
5.1.2. 북간도 국민회
북간도 국민회는 지린성 왕청현 하마탕에 위치했으며, 산하에 8개의 지방 협의회와 약 130개의 지부를 둔 민정 기관이었다. 본부에는 구춘선 회장, 서상용 부회장을 비롯한 55명의 임원이 있었다. 북간도 국민회는 대한 국민 의회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5.1.3. 훈춘 대한국민회
1919년 3월 31일, 만주 훈춘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발발한 후 조직되었다. 훈춘현 기독교인 단체였던 기독교친목회를 기반으로 결성된 강력한 항일 운동 단체였다. 본부는 훈춘현 출신 박봉식의 집에 위치했으며, 임원은 다음과 같다.
| 직책 | 이름 |
|---|---|
| 회장 | 이명순 |
| 부회장 | 박관일 |
| 서기 | 서윤묵, 여남섭, 오종범 |
| 재무 | 오현경 |
| 통신부장 | 나정화 |
| 사회부장 | 황병길 |
반란 발생 시 조직 지휘는 황병길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회원 수는 3,000명이었으며, 훈춘현 회원 수는 200명이었다.
6. 대한국민회군
간도국민회는 자체 군대인 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을 조직하여 조안무가 지휘관으로 45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제1중대장은 조권식, 제2중대장은 임병극이었고, 군사위원회 위원은 마룡하, 마천룡, 이원, 최기학, 최여진 등이었다. 대한국민회군의 본부는 춘흥촌 근처에, 군사학교는 만주 연길현 명월구에 설립되었다.
1920년 3월과 5월, 임시정부 지시에 따라 열린 독립군 부대 통합 회의에서 간도국민회는 행정 기관, 대한북로독군부는 군사 기관 역할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조안무 지휘 아래 4개 부대를 조직하여 각 부대에 100명씩 배치하고, 제1연대장 최문무, 제2연대장 홍범도, 제3연대장 강승범, 제4연대장 조권식을 임명했다.
간도국민회는 군자금을 모금하여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하도록 지원했다.
6.1. 장비
1920년 8월 중순, 일본 경찰 자료에 따르면 대한국민회는 소총 600정, 탄약 7만 발, 권총 160정, 수류탄 120발을 보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