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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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진동은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관리 책임자의 아들로,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중국 옌볜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준비, 군무도독부를 설치하고 홍범도 등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봉오동 전투 이후 러시아에서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했으나, 중국으로 돌아와 군벌 간의 대립 속에 체포, 석방되었다. 이후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를 거부하여 1941년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지만, 친일 행적 논란으로 유족과의 갈등이 있으며, 국가보훈처의 보훈 취소 처분 대상에 거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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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 | |
---|---|
기본 정보 | |
출생 | 1901년 8월 27일 |
사망 | 1950년 9월 28일 (49세) |
국적 | 대한민국 |
활동 | |
분야 | 독립운동 |
서훈 | |
1990년 | 건국훈장 애족장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김순이 |
자녀 | 최해청 최광림 최봉학 최명재 최금봉 최금순 최금단 |
2. 생애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동간도 옌볜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첫째 아들로, 1880년대 중반 부모와 함께 중국 연변으로 이주했다. 동생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1900년대 초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하던 최진동은 그의 양자가 되어 대규모 토지를 물려받았다. 동생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로 일하면서 황무지였던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 봉오동은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였다.[5]
최진동 형제들은 조선인 마을을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은 뒤, 봉오동 학교를 설립해 역사, 지리, 군사 훈련에 매진했다. 이동휘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했고, 200여 명의 병력을 최신 무기로 무장시켰으며, 러시아와 중국 군인들을 초빙해 군사 훈련도 시켰다.[5]
1919년 병력을 670명으로 확대한 최진동은 군무도독부를 설치했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수천여 명의 통합 부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압록강 일대의 일본 수비대 300여 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봉오동임을 확인하고 반격을 준비했지만, 최진동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5]
1920년 5월,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나라 잃은 설움을 털어내고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일깨웠다.[5] 그러나 실제 전투 참가자들은 청산리 전투와 함께 "전과가 300배는 과장된 것"이라고 언급했다.[3]
봉오동 전투 이후 최진동은 러시아 옴스크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친일파 암살단의 최고 고문과 독립운동 단체 통합 준비 모임의 위원을 역임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온 뒤 군벌 간 대립 중에 오패부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3년 후 석방되었다.[5]
1930년대에 최진동은 독립 운동을 포기하고 일본 통치 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중, 1941년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최진동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에 불응한 대가였다. 모진 고초 끝에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11월 별세하였다. 장례는 일본 헌병에 의해 철저히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5]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진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나, 친일 전력을 가진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곧 잊혀졌다. 1992년 한중 국교 회복 이후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었고, 2006년 4월 봉오동에 묻혔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최진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동생 최운산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5] 2020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194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광복군 뿌리가 독립군 연합 부대이며,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가보훈처 검증에서 보훈 취소 처분 대상에 거론되고, 중일 전쟁 발발 무렵 친일 활동 지적도 나오면서 유족 측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4]
2. 1. 초기 생애와 배경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동간도 옌볜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첫째 아들로, 1880년대 중반 부모와 함께 중국 연변으로 이주했다.[5]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 출신이다.[1] 동생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1900년대 초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하던 최진동은 그의 양자가 되어 대규모 토지를 물려받았다. 동생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로 일하면서 황무지였던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 봉오동은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였다.[5]2. 2. 독립운동
최진동은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동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첫째 아들로, 1880년대 중반 부모와 함께 중국 연변으로 이주했다.[5]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 출신이다.[1] 동생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1900년대 초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중국인 부호의 양자가 되어 대규모 토지를 물려받았고, 동생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로 일하면서 황무지였던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 봉오동은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군사 요충지였다.[5]최진동 형제들은 조선인 마을을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은 뒤 봉오동 학교를 설립해 역사, 지리, 군사 훈련에 매진했다. 이동휘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했고, 200여 명의 병력을 최신 무기로 무장시켰으며, 러시아와 중국 군인들을 초빙해 군사 훈련도 시켰다.[5]
봉오동 전투 이후 러시아 땅으로 이동한 최진동은 오므스크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친일파 암살단의 최고 고문과 독립운동 단체 통합 준비 모임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온 뒤 군벌 간의 대립 중에 오패부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3년 후 석방되었다.[5]
1930년대에는 완전히 독립 운동을 포기하고 일본 통치 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그는 1941년 일본 헌병에 끌려갔다. 최진동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에 불응한 대가였다. 모진 고초 끝에 간신히 풀려났으나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11월 별세하였다. 장례는 철저히 일본 헌병에 의해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5]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진동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친일 전력을 가진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극성으로 곧 잊혀졌다. 그의 업적이 조금씩 재조명된 것은 한중 국교가 회복된 1992년의 일이다. 2006년 4월에는 봉오동에 묻힌 유해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최진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동생 최운산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5] 2020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1940년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 연합 부대이며,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지만, 국가보훈처의 검증에서 보훈 취소 처분 대상에 거론되고 있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친일 활동을 했다는 지적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유족 측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4]
2. 2. 1.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길림성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을 때 지휘관이었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알려졌다.[2] 최진동은 동생 최운산과 함께 1900년대 초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이후 대규모 토지를 물려받고, 봉오동 일대를 사들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 요충지로 만들었다. 봉오동 학교를 설립해 역사, 지리,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200여 명의 병력을 최신 무기로 무장시켰다.[5]1919년 최진동은 군무도독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670명으로 확대했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과 수천여 명의 통합 부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압록강 일대의 일본 수비대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봉오동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반격을 준비했지만, 최진동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5]
1920년 5월,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주민들을 먼저 대피시켰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산 위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독립군 부대를 매복시킨 뒤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 깊숙이 들어오자 산 정상과 등성이에서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를 빼앗았다. 이 전투는 나라 잃은 설움을 털어내고,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일깨우기에 충분한 전과였다.[5]
하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가했던 인물들은 청산리 전투와 함께 "전과는 적어도 300배는 과장된 것"이라고 언급했다.[3]
2. 3. 봉오동 전투 이후
봉오동 전투 이후 최진동은 러시아 옴스크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친일파 암살단의 최고 고문과 독립운동 단체 통합 준비 모임의 위원을 역임했다.[5] 그러나 중국으로 돌아온 뒤 군벌 간 대립 중에 오패부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수감되었다.[5]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중, 1941년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이는 최진동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가 토지 기부를 요구했으나 최진동이 불응한 데 따른 것이었다. 모진 고초 끝에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11월 별세하였다. 장례는 일본 헌병에 의해 철저히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5]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진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친일 전력을 가진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곧 잊혔다. 그의 업적이 재조명된 것은 1992년 한중 국교 회복 이후였다. 2006년 4월, 봉오동에 묻혔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안장되었다. 최진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생 최운산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5]
1930년대 최진동은 독립 운동을 포기하고 일본 통치 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했다.[4] 중일 전쟁 발발 무렵에는 친일 활동을 했다는 지적도 나오면서 유족 측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4]
2. 4. 최후
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그는 다음 해인 1941년 일본 헌병에 끌려갔다. 최진동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에 불응한 대가였다.[5] 모진 고초 끝에 간신히 풀려난 그는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11월 별세하였다. 장례는 철저히 일본 헌병에 의해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5]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 장군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친일 전력을 가진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극성으로 곧 잊혔다. 그의 업적이 조금씩 재조명된 것은 한중 국교가 회복된 1992년의 일이다. 2006년 4월에는 봉오동에 묻힌 유해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최진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동생 최운산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5]
3. 사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4] 2020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 연합 부대이며, 국방부가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최진동을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칭송했다.[4]
3. 1. 친일 행적 논란과 유족과의 갈등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 출신이다.[1]1920년 6월,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을 때 지휘관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알려졌으며, 99년 후에는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2], 실제로 전투에 참가했던 인물들로부터 청산리 전투와 함께 "전과는 적어도 300배는 과장된 것"이라고 언급되었다.[3] 1930년대에는 완전히 독립 운동을 포기하고, 일본 통치 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했다.[4]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020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1940년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 연합 부대이며,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지만, 사실 국가보훈처의 검증에서 보훈 취소 처분 대상에 거론되고 있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친일 활동을 했다는 지적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유족 측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4]
4. 가족 관계
최진동은 전처에게서 딸 둘과 아들 셋, 후처 최순희에게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어 모두 여덟 명의 자식을 두었다. 먼저 얻은 세 아들의 이름은 국신(國臣), 국량(國良), 국빈(國斌)으로 지었다.[6] 최국량은 최진동의 둘째 아들이다. 최국량의 딸인 최정선은 봉오동에서 태어나 200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인근 석현에서 평생을 살았다.[7][8] 2005년 국내로 봉환된 할아버지 최진동의 유해를 따라 고국 땅을 밟았으며, 2010년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9][10] 최금자는 최진동의 손녀로, 지린성 투먼에 거주하다 2005년 귀국했다.[11]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최씨 | |
어머니 | 이씨 | |
전처 | 딸 둘, 아들 셋 | |
후처 | 최순희 | 딸 둘, 아들 하나 |
장남 | 최국신(崔國臣) | |
차남 | 최국량(崔國良) | |
삼남 | 최국빈(崔國斌) | |
손녀 | 최정선 | 최국량의 딸, 2005년 귀국, 2010년 대한민국 국적 취득 |
손녀 | 최금자 | 2005년 귀국 |
5. 평가
최진동은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 출신이다.[1]
1920년 6월,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을 때 지휘관이었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99년 후에는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2] 그러나 실제 전투 참가자들은 청산리 전투와 함께 "전과가 적어도 300배는 과장된 것"이라고 증언했다.[3] 최진동은 1930년대에 독립 운동을 포기하고 일본 통치 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했다.[4]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2020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1940년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 연합 부대이며,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최진동을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검증에서는 보훈 취소 처분 대상에 거론되었고, 중일 전쟁 발발 무렵 친일 활동을 했다는 지적도 나오면서 유족 측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4]
참조
[1]
웹사이트
독립유공자 공훈록 - 최진동
https://e-gonghun.mp[...]
공훈전자사료관
2022-03-21
[2]
웹사이트
抗日100周年で続々とロードショーされる韓国「反日映画」の試写会に行ってみた
https://bunshun.jp/a[...]
文春オンライン
2019-08-06
[3]
웹사이트
韓国で反日映画続々公開も当事者自ら「神話に近い」と認める
https://www.zakzak.c[...]
zakzak
2019-07-31
[4]
웹사이트
野党「文在寅政権、親日派追い込もうとして自分の足元に火」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2020-08-20
[5]
저널
"[항일독립전쟁 영웅 최진동] 봉오동·청산리 전투 일본군을 궤멸시킨 장본인"
https://news.naver.c[...]
인천일보
2017-11-08
[6]
저널
"[연재]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19. 빛나는 형제 최진동과 최운산 2"
http://www.hanion.co[...]
한겨레온
2019-03-17
[7]
저널
얼굴도 모르던 독립유공자 6촌 자매 '눈물의 해후'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5-08-25
[8]
저널
할아버지가 지킨 고국… 반지하 사는 칠순 손녀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5-08-12
[9]
저널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정선 여사] 봉오동 승리 이끈 것은 최진동 장군"
http://www.incheonil[...]
인천일보
2017-11-08
[10]
저널
반지하서 궁핍한 삶… 내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다
http://www.kihoilbo.[...]
기호일보
2015-08-17
[11]
저널
'"꼭 한국 돌아가야 한다는 조상 말 때문에 귀국했지만, 현실은 냉담"'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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