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홍범도는 186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군대에서 탈영 후 의병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 싸웠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 투쟁을 이어갔으며, 1937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1943년 사망했다. 2021년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 흉상 이전 논란이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권업회 - 이상설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와 탁지부 재무관을 역임하며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독립을 호소하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에서 사망했다. - 권업회 - 최재형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러시아로 이주하여 재산을 축적한 후 연해주 동포의 자립과 교육을 지원하고 동의회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지원했으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 13도 의군 - 이상설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와 탁지부 재무관을 역임하며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독립을 호소하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에서 사망했다. - 13도 의군 - 이범윤
이범윤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간도 관리사, 연추 의병부대 지도자, 13도 의군 창의군 총재, 권업회 총재, 의군부 및 대한독립군단 총재 등을 역임하며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홍범도 - 고려공산당
고려공산당은 1920년대 초 러시아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인 공산주의 정당으로, 한인사회당에서 시작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았으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열되어 자유시 참변을 겪은 후 해체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창당에 영향을 주었고 초기 공산주의 및 민족 해방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 홍범도 - 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붉은 군대에 공격받아 와해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독립군 내부 갈등과 소련의 정책적 판단이 작용한 결과이며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상흔을 남겼다.
| 홍범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홍범도 |
| 한자 | 洪範圖 |
| 로마자 표기 | Hong Beom-do |
| 출생일 | 1868년 8월 27일 |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평양부 서문안 문열사 부근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 사망일 | 1943년 10월 25일 |
| 사망지 | 소련 카자흐 SSR 키질로르다 (현재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 |
| 묘지 | 대전현충원 |
| 별명 | 범도(範道), 호는 여천(汝千) |
| 본관 | 남양 |
| 종교 | 대종교 |
| 부모 | 홍윤식(부) |
| 경력 | |
|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 |
| 소속 | 대한독립군 |
| 서훈 | [[파일: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x10px]]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 군사 활동 | |
| 주요 전투 | 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자유시 참변 |
2. 생애
홍범도는 1868년 평안북도 자성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 군대 나팔수, 제지 공장 노동자, 금강산 승려 등 다양한 삶을 경험했다. 1895년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으며, 1907년에는 일제의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맞서 포수 의병을 조직,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대한독립군 사령관으로서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20년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며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독립군 통합 운동을 통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를 역임했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연루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소련으로 이주하여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국제대회에 참석하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키질로르다에서 집단 농장과 고려극장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868-1907)
홍범도는 1868년 평안남도 평양부 서문(보통문) 내 문열사 부근에서 빈농이었던 홍윤식의 아들로 태어났다.[21][22][23] 증조부 홍이팔은 홍경래의 가까운 친척으로 홍경래의 난에 가담해서 처형되었다. 할아버지 홍동철은 멸족되다시피 했으나 난리통에 식솔을 이끌고 평양에 은신해 살았다.홍범도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하며 젖동냥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지만,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 아버지마저도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다. 홍범도는 숙부의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살다 부잣집 머슴살이를 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3년 15살이 되던 해 머슴살이를 청산하고자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가 되었다. 군인이 되었지만 부대 내 차별과 폭행이 난무하자 자신을 괴롭히던 상관을 살해하고 군 생활 4년 만에 탈영했다. 황해도 수안의 제지 공장 취직했지만 임금 체불 문제로 말다툼 끝에 공장주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다. 이후 1890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서 승려 지담(止潭)의 상좌승으로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 스님에게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근처 절에 있던 비구니 단양 이씨(이옥구 또는 이옥녀)와 열애 끝에 임신시켜 함께 환속하여 처가가 있던 함경북도 북청으로 향했다. 도중에 건달패들에 의해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만삭의 몸이었던 그녀는 간신히 풀려나 천신만고 끝에 고향 북청에 갈 수 있었고, 홍범도는 그녀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포수라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밑천을 다 털어 총을 구매해 사냥꾼 생활을 했다.
1895년 1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시기에 강원도 회양군에서 포수였던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다.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4명의 의병 부대를 조직한 후, 의병대장 유인석을 만나 합류하였다. 일본군과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동지였던 김수협이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의병들의 기세가 사그라지자 유인석과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체하고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 노동자로 은신했지만 일본군의 감시가 끊이지 않아 함경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때려눕히고 총 3자루를 빼앗고, 황해도 지경산을 거쳐 도착한 함경도 덕원에서 덕원읍에 탐관오리였던 좌수 전성준을 공격하여 금품을 빼앗아 나눠주고 1897년 함경남도 북청에 갔다.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만났다. 헤어진 지 5년 만의 재회였다.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화전농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9월 3일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등과 산포수 70명으로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갑산(甲山) · 삼수(三水) · 혜산(惠山) · 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2. 2. 의병 투쟁과 만주 망명 (1907-1919)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등과 함께 산포수 70명으로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15]홍범도는 500여 명이 넘는 의병을 이끌었다. 순종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계속 공격하자, 일본군은 홍범도의 아내인 단양 이씨(이옥구 또는 이옥녀)와 그의 아들 양순을 인질로 삼았다. 일본군은 홍범도에게 백작 벼슬을 제안하며 회유하였지만, 단양 이씨는 이를 거절하고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일본군은 아들 양순을 내세워 재차 홍범도를 회유하려 했지만, 홍범도는 아들에게 총을 겨눌 만큼 항일 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아들 홍양순은 이후 아버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1908년 6월 16일 정평배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08년 10월, 홍범도는 동지 세 사람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0년 한일 병합 후에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근거지를 옮겨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1919년에는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2. 3. 독립군 활동과 봉오동·청산리 전투 (1919-1921)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홍범도는 만주로 망명하여 장백현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간도 국민회의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진입,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21][22][23]1919년 8월, 홍범도는 4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회령, 자성, 갑산군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두 차례 더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조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과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1]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군대가 함경북도 강양동에서 일본군 부대를 공격했다. 다음 날, 일본군 부대가 대한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는 삼둔자에서 일본군을 포위, 격파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청산리 대첩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2]
6월 6일과 7일, 일본군은 제19사단에서 1개 대대를 파견하여 나남(羅南)에 주둔시켰다. 이 일본군 대대가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연합군을 지휘하여 봉오동 산악 지대에 매복,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157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반면, 한국군은 1,200~1,300명 중 1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3]
이 봉오동 전투는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승리는 한국군과 한국 북부군 사령부, 그리고 중국과 한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이후 1920년대 독립 투쟁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3]
같은 해 10월,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다시 한번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청산리 등지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학살과 방화를 포함한 잔혹한 초토화 작전으로 보복했다. 이에 맞서 한국 독립군은 군사적 반격을 개시했고, 1920년 12월, 홍범도의 부대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4]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홍범도는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간도 참변 이후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으려던 중,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분란이 발생했다. 홍범도는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 편에 서서 상하이파 공산주의자와 간도 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홍범도가 하루빨리 통합을 마무리하고 항일 무장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당시 홍범도는 대한의용군이나 고려혁명군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한다.[21][22][23]
2. 4. 자유시 참변과 소련 이주 (1921-1937)
1921년, 홍범도와 그의 부대는 일본군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그해 6월, 소련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중국과 한국 근처의 러시아 국경을 확보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일본군이 홍범도와 다른 한국 독립군을 추격하여 소련으로 들어올 것을 우려한 소련은 한국군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한국군의 거부는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져, 소련 적군이 한국 독립군을 학살했고, 홍범도와 그의 부대는 무기와 안전한 지역을 잃고 붕괴되었다.[5] 역사학계에서는 홍범도가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당시 홍범도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한다.[21][22][23]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국제대회에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원동(遠東)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로 참석한다.[24] 1927년 소련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에게 고려인이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강제 이주 당했다. 당시 소련은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인 및 일본군 간첩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많은 고려인들을 황량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25][26][27][28]
2. 5. 강제 이주와 사망 (1937-1943)
1937년 스탈린의 소련 내 한국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홍범도는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5] 당시 소련은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인 및 일본군 간첩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25][26][27][28]키질로르다로 이주한 후, 홍범도는 집단 농장에서 일하거나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근무했다.[29][30][31][32]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는 키질로르다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현지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29][30][31][32]
3. 유해 봉환과 대한민국으로의 귀환 (2021)
윤보선 대통령 시절인 19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으며,[36][37] 2021년 광복절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북한 주민들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옮기려 했으나, 북한과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들은 홍범도 장군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카자흐스탄에 홍범도 장군의 묘소와 기념공원 건립을 지원했다.
2020년 양국 정부 간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장하는 데 합의했으나,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되었다.[5] 2021년 8월, 카자흐스탄 대통령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Jomart Tokayev)의 대한민국 공식 방문을 앞두고 KC-330 Cygnus를 통해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다.[6] [7][5]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직접 영접하고 헌화했다.[5]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5]
2021년 8월 15일 유골이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옮겨졌고, 이틀간의 국민 추도 기간을 거친 후 8월 18일 광복절에 맞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17][18]
4. 사후 평가 및 논란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북한 주민들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인 19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으며,[36][37] 2021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옮기려 했으나, 북한과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반발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들은 홍범도 장군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신 카자흐스탄에 홍범도 장군의 묘소와 기념공원 건립을 지원했다.
2020년 양국 정부 간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장하는 데 합의했으나,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시행이 연기되었다.[5] 2021년 8월, 카자흐스탄 대통령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Jomart Tokayev)의 대한민국 공식 방문을 앞두고 KC-330 Cygnus를 통해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다.[6] [7][5]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직접 영접하고 헌화했다.[5]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5]
1998년 10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021년 8월 15일 유골이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옮겨졌고, 이틀간의 국민 추도 기간을 거친 후 8월 18일 광복절에 맞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17][18]
4. 1. 흉상 설치 및 철거 논란
2018년 삼일절에 맞춰 육군사관학교 충무관(생도 학습관)에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5명의 흉상이 설치되었다.[8][19] 그러나 2023년 8월, 윤석열 정부의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과거 공산주의 이력을 이유로 흉상 철거를 발표했다.[8][9] 이 결정은 국민적 비판과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일각에서는 매카시즘에 비유하기도 했다.[10]당초 정부는 5개의 흉상을 모두 이전하려 했으나, 반대 여론에 따라 홍범도 장군 흉상만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홍범도 장군의 소비에트 공산당 가입과 자유시 사건 참여를 철거 이유로 언급했다.[11]
이러한 논쟁은 대한민국의 정치 환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여당인 국민의힘은 반공주의에 더욱 우려를 표명하는 반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일제강점기 친일파 행위에 대한 비판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12][13]
2023년 8월 31일, 육군사관학교 내에 있던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기로 결정되었다. 과거 소련 공산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경력이 문제시되어[16], 북한과 싸울 인재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이다.[19] 하지만 사관학교 동창회가 이전 방침을 지지하는 한편,[16] 당시 소련이 식민지 지배를 받는 약소 세력을 지원하던 시대였고, 또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연금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지적도 있어,[20] 이러한 경력을 이유로 이전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5.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출생년도 | 사망년도 |
|---|---|---|---|
| 증조부 | 홍이팔 | 1770년 | 1821년 |
| 조부 | 홍동철 | 1807년 | 1890년 |
| 아버지 | 홍윤식[38] | 1833년 | 1877년 |
| 어머니 | 이름 미상 | 1835년 | 1868년 |
| 부인 | 단양 이씨 이옥구 또는 이옥녀 | 1873년 | 1908년 |
| 장남 | 홍양순 | 1892년 | 1908년 |
| 차남 | 홍용환 | 1900년 | 1921년 |
| 부인 | 이인복 | ||
| 딸 | 홍연식 | ? | 1986년 |
| 외손녀 | 김알라 | 1942년 | |
| 친척 | 홍경래 | 1780년 | 1811년 |
6. 대중문화 속 홍범도
참조
[1]
웹사이트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한국학중앙연구원) : 봉오동전투(Battle of Bongo-dong)
http://terms.naver.c[...]
[2]
웹사이트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 한국일보사(Company of Hangook Ilbo), 1987
""
[3]
웹사이트
두산백과(Doopedia) : 봉오동전투(Battle of Bongo-dong)
http://terms.naver.c[...]
[4]
웹사이트
대한독립군
https://terms.naver.[...]
2018-06-16
[5]
웹사이트
Remains of Korean independence fighter Hong Beom-do return from Kazakhstan
https://www.koreaher[...]
2023-07-10
[6]
뉴스
Remains of Korean independence fighter Hong Beom-do return from Kazakhstan
https://en.yna.co.kr[...]
Yonhap News Agency
2021-08-15
[7]
뉴스
Gen. Hong Beom-do’s remains to return home
https://www.donga.co[...]
The Dong-a Ilbo
2021-08-13
[8]
웹사이트
Why statues have become a centre of ideological dispute
https://asianews.net[...]
2023-09-16
[9]
웹사이트
Ideological dispute over historical figures engulfs Korean politics
https://www.koreatim[...]
2023-09-16
[10]
웹사이트
Reframing South Korean Identity: The controversy of General Hong Beom-do’s bust
https://koreapro.org[...]
2023-09-16
[11]
웹사이트
Defense Ministry examines relocation of bust sculpture of Hong Beom-do to Yongsan
https://www.donga.co[...]
2023-09-21
[12]
뉴스
South Korean politics is one big row about history
https://www.economis[...]
2023-10-26
[13]
웹사이트
Why statues became center of ideological dispute
https://www.koreaher[...]
2023-10-26
[14]
웹사이트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22- 남양홍씨(南陽洪氏)(당홍계)
http://www.shinailbo[...]
2011-11-15
[15]
웹사이트
""
http://bumdo.mir9.co[...]
[16]
뉴스
洪範図将軍の胸像、韓国陸軍士官学校外に移転へ
https://www.chosunon[...]
2023-08-31
[17]
뉴스
独立運動家・洪範図の遺骨埋葬 文大統領「独立戦争の英雄」
https://jp.yna.co.kr[...]
2021-08-10
[18]
뉴스
洪範図将軍の遺骨 故国に帰還
https://world.kbs.co[...]
2021-08-21
[19]
뉴스
陸軍士官学校 洪範図将軍胸像を校外へ移転
https://world.kbs.co[...]
2023-09-01
[20]
뉴스
【コラム】合意が消えた政治、侮辱を受ける歴史=韓国(1)
https://japanese.joi[...]
2023-09-04
[21]
뉴스인용
"홍범도, 자유시 사변 '독립군 몰살' 가담" 주장은 '거짓'
https://www.ohmynews[...]
2024-08-14
[22]
웹인용
[팩트체크]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
https://www.yna.co.k[...]
2023-08-31
[23]
뉴스인용
[사실은] "홍범도 논란의 핵심, 역사의 소급 적용"
https://news.sbs.co.[...]
2024-08-14
[24]
뉴스인용
긴장한 눈빛, 그는 꼿꼿했다…홍범도 장군 100년전 영상 공개[영상]
https://www.joongang[...]
[25]
저널인용
고려인 강제 이주 원인과 민족 정체성
https://www.dbpia.co[...]
[26]
저널인용
The reasons for deportation of Korean Diaspora of Russia·CIS and identity of races
https://www.kci.go.k[...]
[27]
웹인용
고려인
https://encykorea.ak[...]
2023-08-31
[28]
웹인용
1937년, 애도받지 못한 비극 — 고려인 강제이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 DiverseAsia
https://diverseasia.[...]
2023-08-31
[29]
웹인용
[외통방통] 홍범도 장군, 그는 왜 카자흐스탄에 잠들었나…
https://imnews.imbc.[...]
2023-08-31
[30]
웹인용
북한 "홍범도 유해 고향 평양에 묻혀야"…南 봉환추진에 '발끈'
https://www.yna.co.k[...]
2023-08-31
[31]
웹인용
北, 홍범도 유해 봉환 계획 비난…"평양에 묻혀야"
http://m.yonhapnewst[...]
2023-08-31
[32]
웹인용
“북, 김일성 항일업적 묻힐까 홍범도 유해 송환에 소극적”
https://www.rfa.org/[...]
2023-08-31
[33]
뉴스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카자흐에 특사 파견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34]
웹인용
대전에 ‘홍범도장군로’ 생겼다
https://www.hani.co.[...]
2023-08-31
[3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ww.dnc.go.k[...]
2023-08-31
[36]
웹인용
故 홍범도 장군 훈장 추서식 > 대한민국 청와대
http://webarchives.p[...]
2023-08-31
[37]
뉴스
건국공로훈장수상자(건국공로훈장수상자) 프로필 길이 살아있는 先烈(선열)의 얼
https://newslibrary.[...]
1962-02-26
[38]
간행물
여천 홍범도장군 연보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