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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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사국은 《삼국사기》에 '갈사'로 표기된 나라로, 부여에서 분리되어 대소왕의 동생 갈사왕이 건국했다. 22년에 건국되어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다가 68년 도두왕 때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나라를 바치고 멸망했다. 갈사국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압록강 북쪽 또는 발해만 일대로 추정된다. 갈사왕, 그의 아들, 그리고 도두왕까지 3명의 왕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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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사국 | |
---|---|
개요 | |
국명 | 갈사부여 (曷思夫餘), 갈사국 (曷思國) |
유형 | 부여의 유민 국가 |
존속 기간 | 기원전 ? 년 ~ 68년 |
위치 | 두만강 하류 |
수도 | 미확인 |
언어 | 부여어 |
종교 | 미확인 |
역사 | |
건국 | 동부여에서 추모왕에게 패배한 갈사왕이 압록곡에 나라를 세움. 혹은 북부여의 해두가 세웠다는 설도 있음. |
주요 사건 | 고구려에 조공을 바침. 후한과 외교 관계를 맺음. |
멸망 | 68년, 고구려 태조왕에게 항복하며 멸망.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역대 군주 | 갈사왕 (初代) 도두 (末代) |
외교 | |
주요 관계 | 고구려 (종속 관계, 조공) 후한 (외교 관계) |
기타 | |
현재 위치 |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2. 국명
《삼국사기》에는 국명이 '갈사'라고 표기되어 있다. 후세에 '국'을 붙여서 '갈사국'이라고 부르거나, 갈사국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임을 강조하기 위해 '갈사부여'라고 쓰기도 한다. 전문 학술지에는 주로 '갈사' 또는 '갈사국'이라는 표기가 많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한 교양 서적에는 '갈사부여'라고 쓰기도 한다.[6]
갈사국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소국으로,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이 22년에 세웠다. 갈사왕은 대소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여가 혼란에 빠지자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무리와 함께 피신하여 갈사국을 건국하였다.[7]
3. 역사
갈사국은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갈사왕의 손녀 해씨부인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 호동을 낳았다.[6] 갈사왕의 아들 이름과 재위 기간은 전해지지 않으며, 손자인 도두가 68년에 나라를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으면서 갈사국은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었다.[8]
3. 1. 건국
22년 2월,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은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따르는 무리 100여 명과 함께 피신하였다.[7] 갈사왕은 4월 경에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을 때,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인 뒤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7]
3. 2. 고구려와의 관계
22년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여가 혼란에 빠지자, 갈사왕은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100여 명의 무리와 함께 피신하였다. 갈사왕의 손녀 해씨부인이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 호동을 낳은 것으로 보아, 갈사국은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왕실 간 혼인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6]
갈사왕의 아들 이름과 재위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손자인 도두가 68년에 나라를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았다.[8] 이로써 갈사국은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3. 3. 멸망
22년 2월,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여가 혼란에 빠지자,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무리와 함께 피신하였다. 같은 해 4월 경,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을 때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인 뒤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7]
갈사왕의 손녀 해씨부인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 호동을 낳은 것으로 보아, 갈사국은 고구려와 친선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갈사국은 고구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안전을 보장받은 것으로 추정된다.[6]
갈사왕 아들의 이름이나 재위 기간은 전해지지 않으며, 손자인 도두(都頭)가 왕위에 오른 뒤 68년에 나라를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았다.[8] 이로써 갈사국은 멸망하여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4. 위치
갈사국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갈사왕이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국 왕을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압록강 북쪽[9] 또는 발해만 일대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갈사'라는 말은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으로서,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 지역을 말한다고 하면서,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로 일컬었다고 주장하였다.[10] 이 주장에 따르면, 갈사국의 위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이 된다.
5. 역대 국왕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갈사왕(曷思王) | 22년 ~ ? | 부여 금와왕의 막내아들, 해씨(解氏)[1] |
성명 미상 | ? ~ ? | 갈사왕의 아들, 해씨(解氏)[5] |
도두왕(都頭王) | ? ~ 68년 | 갈사왕의 손자[2][3], 고구려에 항복[1][4] |
갈사국은 3대 48년간 지속되었으며, 역대 국왕들의 재위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갈사왕은 형인 대소왕이 암살된 후 동부여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100명의 추종자와 함께 남쪽 갈사강으로 이동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갈사국
https://terms.naver.[...]
[2]
웹사이트
갈사국
http://encykorea.aks[...]
[3]
웹사이트
갈사국
https://terms.naver.[...]
[4]
웹사이트
우대
https://terms.naver.[...]
[5]
웹사이트
도두
https://terms.naver.[...]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 왕조 실록
http://book.naver.co[...]
웅진닷컴
2004
[7]
서적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2010
[8]
서적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2010
[9]
뉴스
조선민족과 문화상으로 본 백구백인(百區百人)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0-07-25
[10]
서적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http://book.naver.co[...]
역사의 아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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