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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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중국, 북한, 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시대에는 여진족 방어를 위해 개척되었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면서 국경이 정해졌다. 중국은 두만강 하구를 통해 일본해로 진출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왔으며, 유엔 개발 계획을 통해 두만강 유역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두만강은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탈출하는 주요 경로로 이용되기도 하며, 1990년대 북한 기근 당시 많은 탈북자들이 이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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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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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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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
한국어 | 두만강 |
한자 | 豆滿江 |
중국어 간체 | 图们江 |
중국어 정체 | 圖們江 |
중국어 병음 | Túmén Jiāng |
중국어 웨이드-자일스 | Tʻu²-mên² Chiang¹ |
한국어 (조선어) | 두만강 |
한자 (조선어) | 豆滿江 |
로마자 표기 (조선어) | Dumangang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조선어) | Tuman'gang |
중국어 (조선어) | 도문강 |
중국어 한자 (조선어) | 圖們江 |
중국어 로마자 표기 (조선어) | Domungang |
중국어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조선어) | Tomun'gang |
몽골어 | Түмэн гол |
몽골어 로마자 표기 | Tümen gol |
만주어 | ᡨᡠᠮᡝᠨ ᡠᠯᠠ |
만주어 로마자 표기 | Tumen ula |
러시아어 | Туманная река |
러시아어 로마자 표기 | Tumannaya reka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두만강 (Duman River) 투만 강 (Tuman River) |
어원 | 고대 튀르크어 및 몽골어, "tümen" (만) |
위치 | 북한, 중국, 러시아 |
북한 지역 | 함경북도, 량강도 |
중국 지역 | 지린성 |
러시아 지역 | 프리모르스키 지방 |
길이 | 521 km |
유역 면적 | 33,800 km² |
발원지 | 백두산 |
하구 | 동해 |
하구 위치 | 동해, 러시아, 북한 |
하구 좌표 | 42° 17′ 34″ N, 130° 41′ 56″ E |
하구 고도 | 0 m |
왼쪽 지류 | 가야하 훈춘강 |
수계 | 동해 |
역사적 정보 | |
19세기 서양 명칭 | 미 키앙 (Mi Kiang) |
관련 정보 | |
관련 지역 | 남평진 |
두만강 지역 개발 프로그램 | 두만강 지역 개발 프로그램 |
2. 역사
조선 시대, 세종은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여 최윤덕 등에게 명하여 두만강 유역을 개척하고, (려연·자성·무창·우예)을 설치하였다. 이후 두만강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반도를 가르는 국경이 되었으며, 북안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안은 북한 함경북도이다.
15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조선의 영토였던 녹둔도가 두만강 하구에 있었다.[20][21] 녹둔도는 약 4 km2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두만강 하류의 섬이었으나,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18세기에 연해주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연해주에 붙은 녹둔도까지 점령하였다.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는 우스리강 이동, 두만강 북쪽의 땅(현재의 연해주)을 러시아에 할양하고 일본해로의 출해권을 상실했다. 1886년 7월 4일, 중국과 러시아는 '''훈춘의정서'''를 체결하여 두만강 하구에서 국경까지의 거리를 15킬로미터로 정하고, 중국은 두만강 하구까지의 출해권을 획득했다. 이 협상에 참여한 '''오대징'''은 중국에서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1938년 7월~8월에는 두만강 하구의 만주-소련 국경에서 장고봉 사건이 발생, 사건 이후 두만강이 기뢰로 봉쇄되어 선박의 항행이 두절되었다. 1985년 길림성은 대소(對蘇) 무역 전개 F·S 연구 프로젝트 팀을 설립, 동북사범대학과 길림성 사회과학원이 중심이 되어 두만강 지역을 연구했다. 이들은 "두만강 출해권의 이용은 근거가 있으며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고, 1986년에는 "국제 협의를 통해 출해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87년 3월, 중국 국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국가해양국은 두만강 출해권 조사팀을 길림성에 파견, "우리나라의 두만강 출해권 회복에 관한 건의"를 작성했다.
1989년 2월, 두만강 항행권 및 일본해 정치경제 상황 세미나가 길림성과 국가해양국의 공동 주최로 개최되었고, 같은 해 북한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진출 권리를 구두로 인정했다(고 한다). 1990년 5월 27일·28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1차 시험 항해'''를 실시하여 52년 만에 항로를 회복했다. 같은 해 7월 16일~18일, 장춘에서 동북아시아 경제기술 발전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유엔개발계획이 중점 사업으로 채택한 두만강 지역 개발 제안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출해권 회복 검토 과정에서 나왔다. 1990년 12월 4일, 아사히 신문은 북한이 중국 선박의 두만강을 통한 일본해 진출을 인정하여 중국이 반세기 만에 일본해 쪽 항구를 갖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1991년 3월, 유엔개발계획(UNDP)은 두만강 유역 개발을 제5차 유엔 개발 사업 계획(92년~96년)에 결정했다. 같은 해 5월 16일, 중국과 소련은 "중소 동단변경 협의"(동부 국경 협정)에 서명하여 중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의 두만강 자유 항행 가능성이 열렸다. 같은 해 6월 3일~14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2차 시험 항해'''를 실시했다. 1995년 3월 28일, 한국일보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두만강 하구에서 일본해로의 출해권 회복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북한이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6.25 전쟁 당시 압록강은 잠깐이나마 강변의 초산군과 혜산시를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군이 점령했지만, 두만강은 한 번도 대한민국이 차지해 보지 못했으며 미래에 곧 다가오게 될 남북통일을 해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북한을 탈출하는 난민(탈북자)들이 국경을 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인민군의 삼엄한 감시 하에 놓여 있다. 두만강 하구 부근에서 중국 영토는 끝나고 러시아 영토 하산이 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1997년에 확정되었다.
1990년 7월 중국 장춘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길림성 부서기장 정사성(丁士晟)의 제안을 받아들여[17][18], 국제연합 개발계획(UNDP)의 주도로 두만강 개발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은 두만강 하류의 훈춘시를 국경 개방 도시로 지정하여 훈춘변경경제협작구로 지정하고, 북한은 라진·선봉(현 라선특별시)을 자유경제무역지대(경제특구)로 지정하여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두만강 하구 부근 북한 측에는 북한의 철도와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잇는 "두만강역"이 있다. 과거에는 양국 간 철도의 궤간이 달라 여기서 여객열차는 대차 교체, 화물열차는 화물의 환적이 이루어졌지만, 사선궤도가 설치되어 직통 운행이 가능해졌다.
2. 1. 명칭의 유래
두만강은 두만(豆滿), 도문(圖們) 외에도 역사적으로 두만(豆漫, 豆慢), 도문(徒門), 통문(統門), 토문(土門) 등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만주어의 음역에서 비롯된 것이다.[19] '두만'의 원래 뜻은 만주어로 '만(萬)'을 뜻하는 투먼/tumenmnc에서 유래되었다.[19]2. 2. 조선 시대
15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조선의 영토였던 녹둔도가 두만강 하구에 있었다.[20][21] 녹둔도는 약 4 km2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두만강 하류의 섬이었으나,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18세기에 연해주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연해주에 붙은 녹둔도까지 점령하였다.2. 3.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일제강점기에는 육진 개척으로 조선인의 이주가 활발했다. 6.25 전쟁 당시 압록강은 강변의 초산군과 혜산시를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군이 잠시 점령했지만, 두만강은 대한민국이 차지하지 못했으며, 남북통일 이후에나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2. 4. 근대 국경 분쟁
15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조선의 영토였던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섬이었으나,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18세기에 연해주와 연결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연해주에 붙은 녹둔도까지 점령하였다.[20][21] 1990년, 소련과 북한은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선을 강 중앙으로 설정, 섬의 영토는 러시아 측에 남게 되었으나, 대한민국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러시아에 영토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8]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는 우스리강 이동, 두만강 북쪽의 땅(현재의 연해주)을 러시아에 할양하고 일본해로의 출해권을 상실했다. 1886년 7월 4일, 중국과 러시아는 '''훈춘의정서'''를 체결하여 두만강 하구에서 국경까지의 거리를 15킬로미터로 정하고, 중국은 두만강 하구까지의 출해권을 획득했다. 이 협상에 참여한 '''오대징'''은 중국에서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1938년 7월~8월에는 두만강 하구의 만주-소련 국경에서 장고봉 사건이 발생, 사건 이후 두만강이 기뢰로 봉쇄되어 선박의 항행이 두절되었다. 1985년 길림성은 대소(對蘇) 무역 전개 F·S 연구 프로젝트 팀을 설립, 동북사범대학과 길림성 사회과학원이 중심이 되어 두만강 지역을 연구했다. 이들은 "두만강 출해권의 이용은 근거가 있으며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고, 1986년에는 "국제 협의를 통해 출해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87년 3월, 중국 국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국가해양국은 두만강 출해권 조사팀을 길림성에 파견, "우리나라의 두만강 출해권 회복에 관한 건의"를 작성했다.
1989년 2월, 두만강 항행권 및 일본해 정치경제 상황 세미나가 길림성과 국가해양국의 공동 주최로 개최되었고, 같은 해 북한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진출 권리를 구두로 인정했다(고 한다). 1990년 5월 27일·28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1차 시험 항해'''를 실시하여 52년 만에 항로를 회복했다. 같은 해 7월 16일~18일, 장춘에서 동북아시아 경제기술 발전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유엔개발계획이 중점 사업으로 채택한 두만강 지역 개발 제안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출해권 회복 검토 과정에서 나왔다. 1990년 12월 4일, 아사히 신문은 북한이 중국 선박의 두만강을 통한 일본해 진출을 인정하여 중국이 반세기 만에 일본해 쪽 항구를 갖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1991년 3월, 유엔개발계획(UNDP)은 두만강 유역 개발을 제5차 유엔 개발 사업 계획(92년~96년)에 결정했다. 같은 해 5월 16일, 중국과 소련은 "중소 동단변경 협의"(동부 국경 협정)에 서명하여 중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의 두만강 자유 항행 가능성이 열렸다. 같은 해 6월 3일~14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2차 시험 항해'''를 실시했다. 1995년 3월 28일, 한국일보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두만강 하구에서 일본해로의 출해권 회복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북한이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3. 지리
두만강은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홍토수(紅土水)를 원류로 한다. 석을수(石乙水), 홍단수(紅端水), 서두수(西頭水), 홍기하(紅旗河), 하이란강(해란강, 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등의 지류와 합쳐져 동해로 흘러드는 547 km(서두수의 발원지부터는 610 km)의 강이다. 유역 면적은 33,800 km²이며, 《한청문감(漢淸文鑑)》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서 지리명이 유래되었다.
강의 남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와 함경북도에 속하고, 북쪽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이다. 강의 하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라선시와 러시아 하산스키 군 사이의 국경이다.
- 서두수(西頭水)는 조선 측의 지류이다.
- 훈춘하(珲春河)는 중국 측의 지류이다.
- 가야하(嘎呀河)는 중국 측의 지류이다.
3. 1. 지리적 특징
두만강은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홍토수(紅土水)를 원류로 한다. 석을수(石乙水), 홍단수(紅端水), 서두수(西頭水), 홍기하(紅旗河), 하이란강(해란강, 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등의 지류와 합쳐져 동해로 흘러드는 547 km(서두수의 발원지부터는 610 km)의 강이다. 유역 면적은 33,800 km²이며, 《한청문감(漢淸文鑑)》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서 지리명이 유래되었다.강의 남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와 함경북도에 속하고, 북쪽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이다. 강의 하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라선시와 러시아 하산스키 군 사이의 국경이다.
3. 2. 주요 지류
- 서두수(西頭水)는 조선 측의 지류이다.
- 는 중국 측의 지류이다.
- 가야하(嘎呀河)는 중국 측의 지류이다.
4. 생태
두만강에는 두만강 연어조개(Brachymystax tumensis)와 큰머리납줄개(Gobio macrocephalus)와 같이 여러 인기 어종이 서식하고 있다.[9] 2016년, 중국은 지역 수산업을 확장하고 증가하는 해산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80만 마리의 연어 치어를 두만강에 방류했다.[10]
5. 탈북 경로
두만강은 수년 동안 탈북하는 북한 주민들이 중국 국경을 넘는 데 이용되어 왔다. 1990년대 기근 당시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넜고, 최근 탈북자들도 압록강을 건너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두만강을 이용하고 있다.[12] 두만강이 선호되는 이유는, 두 나라 국경 대부분을 따라 흐르는 빠르고 깊고 넓은 압록강과 달리 두만강은 얕고 폭이 좁기 때문이다.[2] 일부 지역에서는 걸어서 건널 수도 있고, 짧은 거리를 헤엄쳐 건널 수도 있다.[2] 겨울에는 얼어붙어 건조한 상태로 건너갈 수 있다.[12][11]
두만강을 건너려는 탈북자들은 종종 오염 물질과 위험한 국경 순찰을 무시하고,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며 수주, 수개월, 심지어 수년을 보내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중국과 북한 국경의 긴 황량한 구간은 전혀 순찰되지 않는다"고 한다.[2]
탈북자들은 러시아로 두만강을 건너는 경우가 드물다. 러시아 쪽 두만강은 중국 쪽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순찰되기 때문이다.[2] 또한, 러시아의 북한계 주민 규모가 훨씬 작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중국의 더 많은 한국인 인구와 비교했을 때 보상이 크지 않다. 마지막으로 북한 당국은 탈북자와 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찾아 러시아에 잠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최덕근이 국경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해된 사건은 한국 당국이 탈북자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들었다.[2]
두만강은 또한 식량과 돈을 구하려는 군인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건너지기도 한다. 일부 중국 마을 주민들은 공격 때문에 국경 지역을 떠났다.[12]
하산호 전투 등 이 지역의 과거 분쟁 역사는 가수 김정구의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언급되었는데, 이 노래는 한국 전쟁 당시 그러한 비극과 탈북으로 인해 갈라진 가족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되었다.[13] 두만강을 따라 벌어지는 인도적 위기는 2010년 장편 영화 ''두만강''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14]
5. 1. 탈북 경로로 선호되는 이유
두만강은 탈북하는 북한 주민들이 중국 국경을 넘는 데 수년 동안 이용되어 왔다. 1990년대 기근 당시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넜고, 최근 탈북자들도 압록강보다 두만강을 선호하는데, 이는 두만강이 얕고 폭이 좁기 때문이다.[2][12] 일부 지역에서는 걸어서 건널 수도 있고, 짧은 거리를 헤엄쳐 건널 수도 있으며, 겨울에는 강이 얼어붙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2][11][12]중국과 북한 국경의 긴 구간은 순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뉴욕 타임스''는 보도했다.[2] 탈북자들은 러시아로 두만강을 건너는 경우가 드문데, 이는 러시아 쪽 두만강이 중국 쪽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순찰되기 때문이다.[2] 또한 러시아의 북한계 주민 규모가 작아 충분한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점도 탈북 경로로 선호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2]
두만강은 식량과 돈을 구하려는 북한 군인 등이 불법적으로 건너기도 하며, 이로 인해 일부 중국 마을 주민들은 공격 때문에 국경 지역을 떠나기도 했다.[12]
하산호 전투 등 이 지역의 분쟁 역사는 가수 김정구의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언급되었으며, 이 노래는 한국 전쟁 당시 탈북으로 인해 갈라진 가족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되었다.[13] 두만강을 따라 벌어지는 인도적 위기는 2010년 장편 영화 ''두만강''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14]
5. 2. 탈북의 어려움과 위험
두만강은 수년 동안 탈북하는 북한 주민들이 중국 국경을 넘는 데 이용되어 왔다. 1990년대 기근 당시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넜고, 최근 탈북자들도 압록강을 건너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두만강을 이용하고 있다.[12] 두만강이 선호되는 이유는, 두 나라 국경 대부분을 따라 흐르는 빠르고 깊고 넓은 압록강과 달리 두만강은 얕고 폭이 좁기 때문이다.[2] 일부 지역에서는 걸어서 건널 수도 있고, 짧은 거리를 헤엄쳐 건널 수도 있다.[2] 겨울에는 얼어붙어 건조한 상태로 건너갈 수 있다.[12][11]두만강을 건너려는 탈북자들은 종종 오염 물질과 위험한 국경 순찰을 무시하고,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며 수주, 수개월, 심지어 수년을 보내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중국과 북한 국경의 긴 황량한 구간은 전혀 순찰되지 않는다"고 한다.[2]
탈북자들이 러시아로 두만강을 건너는 경우는 드물다. 러시아 쪽 두만강은 중국 쪽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순찰되기 때문이다.[2] 또한, 러시아의 북한계 주민 규모가 훨씬 작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중국의 더 많은 한국인 인구와 비교했을 때 보상이 크지 않다. 북한 당국은 탈북자와 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찾아 러시아에 잠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최덕근이 국경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해된 사건은 한국 당국이 탈북자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들었다.[2]
두만강은 또한 식량과 돈을 구하려는 군인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건너지기도 한다. 일부 중국 마을 주민들은 공격 때문에 국경 지역을 떠났다.[12]
하산호 전투 등 이 지역의 과거 분쟁 역사는 가수 김정구의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언급되었는데, 이 노래는 한국 전쟁 당시 그러한 비극과 탈북으로 인해 갈라진 가족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되었다.[13] 두만강을 따라 벌어지는 인도적 위기는 2010년 장편 영화 ''두만강''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14]
5. 3. 인도적 위기
두만강은 수년 동안 탈북하는 북한 주민들이 중국 국경을 넘는 데 이용되어 왔다. 1990년대 기근 당시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넜고, 최근 탈북자들도 압록강을 건너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두만강을 이용하고 있다.[12] 두만강이 선호되는 이유는, 두 나라 국경 대부분을 따라 흐르는 빠르고 깊고 넓은 압록강과 달리 두만강은 얕고 폭이 좁기 때문이다.[2] 일부 지역에서는 걸어서 건널 수도 있고, 짧은 거리를 헤엄쳐 건널 수도 있다.[2] 겨울에는 얼어붙어 건조한 상태로 건너갈 수 있다.[12][11]두만강을 건너려는 탈북자들은 종종 오염 물질과 위험한 국경 순찰을 무시하고,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며 수주, 수개월, 심지어 수년을 보내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중국과 북한 국경의 긴 황량한 구간은 전혀 순찰되지 않는다"고 한다.[2] 탈북자들은 러시아로 두만강을 건너는 경우가 드물다. 러시아 쪽 두만강은 중국 쪽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순찰되기 때문이다.[2] 또한, 러시아의 북한계 주민 규모가 훨씬 작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중국의 더 많은 한국인 인구와 비교했을 때 보상이 크지 않다.
1996년 최덕근이 국경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해된 사건은 한국 당국이 탈북자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들었다. 두만강은 또한 식량과 돈을 구하려는 군인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건너지기도 한다. 일부 중국 마을 주민들은 공격 때문에 국경 지역을 떠났다.[12]
하산호 전투 등 이 지역의 과거 분쟁 역사는 가수 김정구의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언급되었는데, 이 노래는 한국 전쟁 당시 그러한 비극과 탈북으로 인해 갈라진 가족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되었다.[13] 두만강을 따라 벌어지는 인도적 위기는 2010년 장편 영화 ''두만강''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14]
6. 두만강 개발 계획
1990년 7월 중국 장춘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길림성 부서기장 정사성(丁士晟)의 제안을 받아들여[17][18], 국제연합 개발계획(UNDP)의 주도로 두만강 개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두만강 하류의 훈춘시를 국경 개방 도시로 지정하여 훈춘변경경제협작구로 지정하고, 북한은 라진·선봉(현 라선특별시)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하여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 중국의 두만강 출해권 문제 ===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는 우스리강 이동, 두만강 북쪽의 땅을 러시아에 할양(현재의 연해주)하면서 일본해로의 출해권을 상실했다. 1886년 7월 4일, 중국과 러시아는 '''훈춘의정서'''를 체결하여 두만강 하구에서 국경까지의 거리를 15킬로미터로 정하고, 중국은 두만강 하구까지의 출해권을 획득했다. 15킬로미터 지점에는 토(T)계비를 세웠다. 이 협상에 참여한 '''오대징'''은 중국에서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1938년 7월~8월, 두만강 하구의 만주-소련 국경에서 장고봉 사건이 발생한 이후 두만강이 기뢰로 봉쇄되어 선박의 항행이 두절되었다. 1985년, 길림성은 대소(對蘇) 무역 전개 F·S 연구 프로젝트 팀을 설립하고, 동북사범대학과 길림성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두만강 지역을 연구했다. 이들은 "두만강 출해권의 이용은 근거가 있으며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고, 86년에는 "국제 협의를 통해 출해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87년 3월, 중국 국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국가해양국은 두만강 출해권 조사팀을 길림성에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두만강 출해권 회복에 관한 건의"를 작성했다. 1989년 2월에는 길림성과 국가해양국의 공동 주최로 두만강 항행권 및 일본해 정치경제 상황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1989년, 북한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진출 권리를 구두로 인정했다(고 한다). 1990년 5월 27일·28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1차 시험 항해'''를 실시하여 52년 만에 항로를 회복했다. 이 시험 항해에는 22명의 전문가와 기술자가 참여했다. 1990년 7월 16일~18일, 장춘에서 하와이 이스트-웨스트 센터와 중국 아시아태평양 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동북아시아 경제기술 발전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길림성 정부 부비서장인 정사성 교수의 "황금의 삼각지대"라는 논문을 바탕으로, 중국측 대표가 두만강 지역 개발을 제안했다. 이 안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출해권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후에 유엔개발계획이 중점 사업으로 채택했다. 1990년 12월 4일, 아사히 신문은 북한이 중국 선박의 두만강을 따라 일본해로 나가는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에, 중국은 반세기 만에 일본해 쪽에 항구를 갖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1991년 3월, 유엔개발계획(UNDP)은 두만강 유역 개발을 제5차 유엔 개발 사업 계획(92년~96년)에 결정했다. 1991년 5월 16일, 중국과 소련 양국은 "중소 동단변경 협의"(동부 국경 협정)에 서명하여, 중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이 자유롭게 두만강을 항행할 가능성이 열렸다. 1991년 6월 3일~14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2차 시험 항해'''를 실시했다. 1995년 3월 28일, 한국일보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두만강 하구에서 일본해로의 출해권 회복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북한이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6. 1. 중국의 두만강 출해권 문제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는 우스리강 이동, 두만강 북쪽의 땅을 러시아에 할양(현재의 연해주)하면서 일본해로의 출해권을 상실했다. 1886년 7월 4일, 중국과 러시아는 '''훈춘의정서'''를 체결하여 두만강 하구에서 국경까지의 거리를 15킬로미터로 정하고, 중국은 두만강 하구까지의 출해권을 획득했다. 15킬로미터 지점에는 토(T)계비를 세웠다. 이 협상에 참여한 '''오대징'''은 중국에서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는다.1938년 7월~8월, 두만강 하구의 만주-소련 국경에서 장고봉 사건이 발생한 이후 두만강이 기뢰로 봉쇄되어 선박의 항행이 두절되었다. 1985년, 길림성은 대소(對蘇) 무역 전개 F·S 연구 프로젝트 팀을 설립하고, 동북사범대학과 길림성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두만강 지역을 연구했다. 이들은 "두만강 출해권의 이용은 근거가 있으며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고, 86년에는 "국제 협의를 통해 출해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87년 3월, 중국 국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국가해양국은 두만강 출해권 조사팀을 길림성에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두만강 출해권 회복에 관한 건의"를 작성했다. 1989년 2월에는 길림성과 국가해양국의 공동 주최로 두만강 항행권 및 일본해 정치경제 상황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1989년, 북한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진출 권리를 구두로 인정했다(고 한다). 1990년 5월 27일·28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1차 시험 항해'''를 실시하여 52년 만에 항로를 회복했다. 이 시험 항해에는 22명의 전문가와 기술자가 참여했다. 1990년 7월 16일~18일, 장춘에서 하와이 이스트-웨스트 센터와 중국 아시아태평양 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동북아시아 경제기술 발전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길림성 정부 부비서장인 정사성 교수의 "황금의 삼각지대"라는 논문을 바탕으로, 중국측 대표가 두만강 지역 개발을 제안했다. 이 안은 중국 선박의 일본해 출해권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후에 유엔개발계획이 중점 사업으로 채택했다. 1990년 12월 4일, 아사히 신문은 북한이 중국 선박의 두만강을 따라 일본해로 나가는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에, 중국은 반세기 만에 일본해 쪽에 항구를 갖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1991년 3월, 유엔개발계획(UNDP)은 두만강 유역 개발을 제5차 유엔 개발 사업 계획(92년~96년)에 결정했다. 1991년 5월 16일, 중국과 소련 양국은 "중소 동단변경 협의"(동부 국경 협정)에 서명하여, 중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이 자유롭게 두만강을 항행할 가능성이 열렸다. 1991년 6월 3일~14일, 중국은 '''두만강 하구 제2차 시험 항해'''를 실시했다. 1995년 3월 28일, 한국일보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두만강 하구에서 일본해로의 출해권 회복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북한이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6. 2. 국제 협력
6. 3.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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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10> 잊혀진 섬 녹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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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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