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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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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동은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로, 낙랑공주와의 혼인과 자명고 파괴 사건, 그리고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한 자살로 유명하다. 호동은 용모가 아름다워 대무신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32년 4월 옥저에서 낙랑국 최리를 만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였다. 고구려가 낙랑국을 공격하기 위해 낙랑공주에게 자명고와 북을 파괴하도록 하였고, 이후 고구려는 낙랑국을 멸망시켰다. 대무신왕의 계모의 모함으로 호동은 자살했으며, 여러 희곡, 영화, 드라마, 소설, 발레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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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고구려의 왕자
이름호동
로마자 표기Hodong
한글호동
한자好童
출생미상 (22년 전후)
사망32년 11월 (음력)
사망 원인자살
국가고구려
왕조고구려
배우자낙랑공주
아버지대무신왕
어머니태후 해씨
형제자매해우(원비 소생의 이복형제)
친척민중왕(작은아버지)
업적
관련 활동낙랑 정벌

2. 생애

호동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대무신왕이 총애하여 '호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3] 32년 4월에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을 때 낙랑국의 왕 최리를 만났다. 최리는 호동의 용모를 보고 "당신의 생김새를 보니 도무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북쪽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고, 호동을 낙랑국으로 데려가 자신의 딸 낙랑공주에게 소개했다.[13] 최리는 호동에게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제안을 했다.[10]

대무신왕은 낙랑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낙랑국에는 적병이 오면 저절로 울려 위기를 알리는 과 나팔이 있어 곤란함을 느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북과 나팔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11]。 낙랑공주는 호동을 위해 무기고에 잠입하여 칼로 북과 나팔을 파괴했다.[11]

이후 고구려는 낙랑국을 공격했다.[11]。 최리는 북과 나팔이 파괴되어 고구려의 침공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군비를 갖추지 못했고, 고구려군이 낙랑국에 침공하고 나서야 북과 나팔이 파괴된 것을 알고 속수무책으로 항복했다. 최리는 북과 나팔을 파괴한 낙랑공주를 죽였다.[11]중국일본 학계에서는 낙랑국왕은 낙랑군 태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9]

호동은 대무신왕의 계모인 해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황후인 원비는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호동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대무신왕에게 참언했다.[12]。 호동은 원비의 참언에 해명하면 원비의 악행이 드러나 대무신왕을 걱정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해명하지 않고 자살했다.[11]

호동의 출생년도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불분명하다. 대무신왕부여대소왕을 살해하여 부여를 멸망시키고, 그 막내 동생이 갈사왕이라고 칭한 것이 22년이다.[14] 이 이후에 갈사왕의 손녀가 대무신왕과 맺어져 호동이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불과 10년 후인 32년에 호동과 낙랑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되므로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부여가 아직 건재했고 고구려와 적대하던 시절부터 대무신왕과 갈사왕의 손녀가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14]

2. 1. 낙랑공주와의 혼인

32년(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갔다가 낙랑국최리(崔理)를 만나 그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였다.[13] 최리는 호동의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것을 보고 "당신의 생김새를 보니 도무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북쪽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고, 그를 낙랑국까지 데려가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에게 소개했다.[13] 호동은 혼자 고구려로 돌아와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 낙랑 무기고 안의 북과 나팔을 부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예를 갖춰 맞이하겠다고 하였다. 그 북과 나팔은 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물건이었다.[5] 낙랑공주는 북을 찢고 나팔을 쪼갰으며 이에 호동은 자신의 아버지인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5] 최리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와서야 그 침입과 딸의 배반을 알았다.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5]

낙랑국의 주권은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한국 학계에서는 독립된 왕국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낙랑이라는 명칭을 낙랑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2][3][4]

호동의 출생년도나 나이에 대한 기술은 없고 불분명하지만, 대무신왕부여대소왕을 살해하여 부여를 멸망시키고, 그 막내 동생이 갈사왕이라고 칭한 것이 22년이다.[14] 이 이후에 갈사왕의 손녀가 대무신왕과 맺어져 호동이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그로부터 불과 10년 후인 32년에 호동과 낙랑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되므로, 다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부여가 아직 건재했고 고구려와 적대하던 시절부터 대무신왕과 갈사왕의 손녀가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14]

2. 2. 낙랑국 멸망

고구려 제3대 왕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은 옥저로 사냥을 갔다가 낙랑국최리를 만났다. 낙랑국의 주권은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한국 학계에서는 독립된 왕국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낙랑이라는 명칭을 낙랑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2][3][4]

호동을 위해 낙랑공주는 칼로 북과 뿔피리를 부수었고, 그 후 고구려가 낙랑국을 공격했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파괴되어 고구려의 침략을 알 수 없어 그 공격에 대비할 수 없었다. 그는 고구려의 침략 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파괴된 것을 알았지만, 고구려에 항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최리는 북과 뿔피리를 부순 낙랑공주를 죽였다.[5]

호동은 대무신왕의 계모인 해씨의 아들이었으므로, 고구려의 왕비는 호동이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태자가 될까 두려워했다. 왕비는 호동이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대무신왕에게 올렸다.[6] 그 후 호동은 그 모함을 해명하면 왕비의 죄악이 드러날 것이고 대무신왕이 불안해할까봐 자살했다.[5]

호동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대무신왕은 그를 총애했고, 호동이라는 이름도 그 때문에 붙여졌다.[13] 32년 4월에 호동이 옥저에 출두했을 때 만난 낙랑국의 최리는 호동의 용모의 아름다움에 "당신의 생김새를 보니 도무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북쪽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고, 호동을 함께 낙랑국까지 데려가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에게 소개했다.[13]

호동의 출생년도나 나이에 대한 기술은 없고 불분명하지만, 대무신왕부여대소왕을 살해하여 부여를 멸망시키고, 그 막내 동생이 갈사왕이라고 칭한 것이 22년이다.[14] 이 이후에 갈사왕의 손녀가 대무신왕과 맺어져 호동이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그로부터 불과 10년 후인 32년에 호동과 낙랑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되므로, 다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부여가 아직 건재했고 고구려와 적대하던 시절부터 대무신왕과 갈사왕의 손녀가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14]

2. 3. 태자 다툼과 자살

대무신왕의 원비는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자신에게 음행을 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6] 대무신왕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왕비가 울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걸자 결국 호동에게 를 주려고 하였다. 호동은 해명하면 왕비의 죄악이 드러나고 대무신왕이 불안해할까봐 스스로 해명하지 않고 자살했다.[5]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떻게 효도라 할 수 있겠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칼에 엎드려 죽었는데, 그때가 대무신왕 15년 11월(음력)이었다. 다음 달 해우가 태자가 되었다. 호동의 출생년도나 나이는 불분명하지만, 32년4월옥저에서 낙랑국최리를 만나 그의 딸 낙랑공주와 인연을 맺은 기록이 있다.[13][14]

3. 가계

유리명왕의 손자이자 대무신왕과 해씨 부인의 아들이다.[19] 어머니 해씨 부인은 갈사부여 도두왕의 질녀(조카딸)이다.[19] 동생은 모본왕이다.[19] 낙랑공주와 혼인하였다.

4. 호동이 등장하는 작품

4. 1. 희곡

1947년 유치진의 희곡 《자명고》와 1978년 최인훈의 희곡 《둥둥 낙랑둥》, 그리고 《왕자 호동》이 호동을 소재로 한 희곡 작품이다.

4. 2. 영화

1956년 영화 ''왕자호동과 낙랑공주''에서 배우 김동원이 호동 역을 연기하였다. 1962년 영화 ''왕자 호동''에서는 배우 김진규가 호동 역을 연기하였다. 1971년에는 용유수 감독의 애니메이션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가 제작되었다.

4. 3. 드라마

1964년 KBS 드라마 《국토만리》에서 배우 이묵원이 호동 역을 연기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는 최원홍김진우가 호동 역을 맡았다. 2009년 SBS 드라마 《자명고》에서는 정경호여진구가 호동을 연기했다.

4. 4. 소설

이태준은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소설 시리즈 《왕자호동》을 발표하였다.

4. 5. 발레

호동을 소재로 한 발레 작품으로는 유치진의 《자명고》(1947)와 최인훈의 《둥둥 낙랑둥》(1978)이 있다. 또한, 《왕자 호동》(The Prince Hodong)이 있다.

참조

[1] 서적 韓国時代劇秘話 王朝を揺るがす男と女の物語 https://books.google[...] Gakken 2012-04-28
[2] 서적 Solitary Sage: The Profound Life, Wisdom and Legacy of Korea's "Go-un" Choi Chi-won https://books.google[...] lulu.com
[3] 서적 Solitary Sage: The Profound Life, Wisdom and Legacy of Korea's "Go-un" Choi Chi-won https://books.google[...] lulu.com
[4] 서적 Samguk Sagi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5] 서적 渤海小考 その3 : 高句麗 I http://libir.josai.a[...] 城西大学国際文化研究所
[6] 서적 韓国時代劇秘話 王朝を揺るがす男と女の物語 https://books.google[...] Gakken 2012-04-28
[7] 서적 韓国時代劇秘話 王朝を揺るがす男と女の物語 学研パブリッシング 2012-04-28
[8] 서적 朝鮮三国志 高句麗・百済・新羅の300年戦争 新紀元社 2012-07-24
[9] 서적 Solitary Sage: The Profound Life, Wisdom and Legacy of Korea's "Go-un" Choi Chi-won lulu.com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韓国時代劇秘話 王朝を揺るがす男と女の物語 学研パブリッシング 2012-04-28
[13] 서적 韓国時代劇秘話 王朝を揺るがす男と女の物語 学研プラス 2012-04-10
[14] 서적 韓国時代劇秘話 王朝を揺るがす男と女の物語 学研プラス 2012-04-10
[15] 웹사이트 갈사국이 22년 4월에 세워졌는데, 대무신왕과 갈사국왕 손녀의 혼인은 그 이후의 일이 되어야 하므로, 32년 당시 호동의 나이는 10세 전후로 학계에서는 호동이 22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db.history.g[...]
[16] 문서 참고로 대무신왕은 4년 생이다. 《삼국사기》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년
[17] 문서 《삼국사기》13권 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1년 “始祖 東明聖王 姓高氏”
[18] 문서 초기 왕족의 이름은 보통 해로 시작하며 《[[삼국유사]]》1권 왕력에서는 해가 성씨라고 하였다.
[19] 웹사이트 모본왕이 원자로 먼저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지만, 학계에서는 호동이 모본왕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www.kci.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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