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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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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夫餘, 扶餘 등 다양한 한자로 표기되었다. 기원전 1세기 초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으며, 동명왕 해모수를 신화적 창시자로 한다. 부여는 농업을 기반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주변 국가와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494년 물길의 침입으로 멸망했으며, 고구려, 백제, 두막루 등으로 이어졌다. 부여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계,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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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국명부여 (夫餘/扶餘)
유형왕국
존속 기간기원전 2세기 ~ 494년
위치중국 동북부
지도
3세기 부여 지도
3세기 부여 지도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주요 통치자해모수?
부루
잔 (孱) (마지막)
주요 통치자 재임 기간?–?
기원전 86년 – 기원전 48년
? – 494년
칭호
역사
건국기원전 2세기경
멸망494년
주요 사건동부여 건국
고구려 건국
백제 건국
언어
사용 언어부여어, 한문 (문어)
종교
주요 종교불교, 무교
화폐
통화(정보 없음)
선대 국가
국가예맥, 옥저
후대 국가
국가동부여, 고구려, 백제
현재
현재 국가중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러시아

2. 국호

부여의 국호는 한자로 夫餘, 扶餘, 扶余, 夫余 등으로 표기된다. 중국 문헌에서는 夫餘로, 한국 문헌에서는 扶餘로 쓰는 경향이 있다.

부여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신명)에서 유래하여 개발(開發)→자만(滋蔓)→평야(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설이다.[75] 두 번째는 《자치통감》의 “初,夫餘居於鹿山,”(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자리잡았다.)[76]라는 구절에서 “鹿山”과 사슴[鹿]을 만주어로 Puhu, 몽골어로 буга(buga)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夫餘를 사슴의 뜻으로 보는 설이다.[77] 이 중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부여라는 명칭의 어원을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평야를 의미하는 부리(夫里) 등과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로 보아 부여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여겨진다.[78]

산해경》에 나오는 “有胡‘不與’之國” (호족의 나라인 ‘부여’가 있어...)[79]이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예(濊)의 한음(漢音) huì(‘후이’)에서 부여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설[80]도 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다.[81][82]

3. 역사

부여는 시투안산 및 량취안 고고학 문화의 청동기 시대 정치체에서 등장했으며, 연나라는 기원전 3세기 초 랴오둥 정복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철기 기술을 도입했다.[22] 무제(재위: 265년 - 290년) 시대에 서진에 조공했다. 태강 6년(285년), 선비족 모용부모용외에게 습격당하여 왕 의려가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망명했다. 무제는 부여 구원 조서를 내렸으나,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따르지 않아 파면되고 하감이 대신했다. 286년, 부여 후왕 '''의라'''가 하감에게 구원을 요청, 하감은 독우 가침을 보내 부여국을 요녕성철령시개원시에 재건했다. 가침은 모용외를 크게 패배시키고 모용부를 몰아내 의라를 복국시켰다.[55]

초기 부여는 녹산에 있었으나, 백제 침입으로 부락이 쇠퇴, 흩어져 서쪽 전연 근처로 이주했다. 동진 영화 2년(346년) 정월, 전연 모용황모용준모용각 등 7천 기병으로 부여를 습격, 부여왕 현왕과 5만여 명 부락민을 포로로 잡았다. 현왕은 진군장군(鎮軍將軍) 벼슬을 받고 모용황의 딸과 결혼했다.

부여는 북위 시대까지 존재, 태화 18년 (494년) 물길에게 멸망했다. 부여족 후예(북부여)는 두막루국이라 칭하며 대까지 존속했다.

3. 1. 기원

부여는 산해경에 처음 등장하며, 복승의 《상서대전》에는 "무왕을 이기자 해동의 여러 오랑캐, 즉 '부여' 등이 모두 길을 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기》 〈화식열전〉에는 진시황 때 상인 오씨과와 거래한 사람 중에 부여 사람이 등장한다.[83][84] 또한 '연 ……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이웃한다'[85]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 이 흥한 이후, 부여에 신하로서 복속했다."[86]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한은 후한(23~220년)이 아니라 전한(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여는 전한 때부터 동쪽의 읍루(숙신)를 복속시킬 정도로 강성했다.[87][88]한서》 〈지리지〉에도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접한다'[89]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늦어도 1세기 초 후한 때에는 왕호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90][91]

부여는 맥족(貊族)이 고조선(예인(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라는 설[92](濊)의 일부가 (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예맥(濊貊)족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설[93]이 있다.[94]

부여 왕국의 신화적 창시자는 해모수이며, 문자 그대로 "부여의 성스러운 왕"을 의미한다. 건국 이후, 천자(해모수해모수|解慕漱중국어)가 새로운 궁궐로 왕실을 옮겼고, 그는 왕으로 선포되었다.

고구려의 창시자인 주몽은 해모수와 유화부인(유화부인|柳花夫人중국어)의 아들로 묘사되는데, 유화부인은 압록강의 신 하백(하백|河伯중국어)의 딸이다.[18][19][20][21]

부여가 건국되기 전 이 지역에는 족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쑹화강 상류의 약수(약리대수, 현재 랄린허)를 건너 남하하여 부여를 건국하기 이전의 칭화 고성("예성", 둘레 약 800m, 전한 초기부터 존재, 현재 헤이룽장 성하얼빈 시빈 현)도 발견되었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흉노요서군에 침입하여 그 태수를 살해하고, 어양군, 안문군에도 침입하여 도위를 격파하고 3천 명 이상을 살해했다. 이에 한나라는 장군 위청을 안문군에서, 장군 이식대군에서 파견하여 천 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이 사건에 즈음하여 동이의 예의 군주인 남려 등 28만 명이 한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에,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했다. 원삭 3년(기원전 126년) 봄, 창해군을 폐지했다.[42]

논형》 〈길험〉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 북이(北夷)에 탁리국이 있었다. 국왕이 시녀를 임신시키자 죽이려 했다. 시녀는 '이전에 하늘에 있던 닭의 알 같은 영기가 제게 내려와 임신했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속았다. 그 후 그녀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명하여 돼지 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음은 마구간으로 옮기자, 말 또한 숨을 불어넣었다. 그것을 왕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여, 어머니에게 데려다 기르게 하고, 동명이라고 이름 지었다. 동명은 성장하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고 흉폭했기 때문에, 왕은 동명이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은 나라를 도망쳐 남쪽으로 달려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강물 표면을 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동명은 부여의 땅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43]

위서》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도 부여 출신이며, 무리를 이끌고 부여에서 동남쪽으로 도망쳐 건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해부루가 다스리고 있었지만, 후에 태양신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해부루는 동쪽으로 물러나 다른 나라(동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신화에는, 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인물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남방계 신화에 공통된 난생신화[44]와 불우한 출생을 가진 귀인이 동물의 도움을 받아 극복한다는 귀종유리담의 공통된 요소가 보인다.

3. 2. 영토

부여의 영토 범위는 《삼국지[95], 《후한서[96] 등에 기록되어 있다.

  • 부여는 만리장성[97] 이북의 현도군 북쪽 천리에 있었다. 《한원》에서도 《위략》을 인용하면서, 만리장성 북쪽으로 1천리에 있다고 하였다.[98]
  • 동쪽으로 읍루(挹婁)와 접하고 있었다. 읍루의 후신인 숙신이 부여에서 60일이면 갈 수 있다고[101] 하여, 부여 중심부로부터 대략 1,000리의 거리에 있었다. 당시 읍루는 부여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 부여의 영역은 읍루의 동쪽인 연해주 일대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102]
  • 서쪽으로는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선비(鮮卑)와 접하고 있었다. 《한서》(漢書)의 기록[103]에 따르면, 오환과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서 서로 접하고 있었으며, 부여의 서쪽에 오환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 부여의 서쪽에 선비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 말 ~ 2세기 초 후한이 흉노를 격파한 후 급속히 장성한 선비족들은 이전 흉노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 부여와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여의 서쪽은 서요하(西遼河) 일대였다.[106]
  • 북쪽으로 약수(弱水)와 접하였다. 《후한서》의 기록[107]으로 보면 후한 대의 부여의 북쪽 강역은 약수(弱水)임이 분명하나, 약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쑹화강 유역에 있었던 부여와 그 동변이 연해주의 해변지대까지 이르렀던 숙신의 북쪽을 경유하여 흐르는 큰 강으로는 아무르강 외에는 없다. 따라서 부여의 북쪽은 아무르 강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112][113]
  • 남쪽으로는 고구려현도군, 오환(烏桓)과 인접하였고, 진대(晋代)에 이르러서는 선비 모용씨의 진출로 선비와 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부여의 지역이 사방 2,000리였다는 것은, 오늘날 지린성 창춘 시의 눙안 현[115] 중심지 솽양 구와 쓰핑 시 이퉁 만족 자치현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무단강과 그 너머의 장광재령산맥(長廣才嶺山脈)과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 지방, 북쪽으로는 아무르강 이남, 서쪽으로는 다싱안링산맥과 요하(遼河) 하류, 남쪽으로는 백두산 줄기에 이르고, 휘발하(輝發河)를 경계로 고구려와 접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116][117]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에서 천여 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나라의 넓이는 2천 리 사방이다.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길림성 제2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단산 문화에 이어지는 포자연 유형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포자연 유형에 선행하는 서단산 문화의 범위는 길림성 길림, 장춘, 사평 각 지역 및 요녕성 무순 지역으로 여겨진다. 경계로는 대략 북쪽은 랍림하, 동쪽은 함호령, 남쪽은 휘발하, 서쪽은 요하로 둘러싸인 범위이며, 북서쪽에서는 송눈평원에 닿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3. 3. 북부여


  • 삼국사기》에는 해부루 왕 때부터 부여의 역사가 등장하는데,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해부루가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백의 딸 유화에게서 주몽을 낳았다고 전한다.[118] 하지만 해모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인물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 중에 주몽은 하늘의 아들(천제지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만 할 뿐,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대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으로 볼 때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실존 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
  •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83][84]

3. 4. 동부여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고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이 북부여가 고구려 북쪽에 있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동부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동부여로 국호를 변경했다는 기록과 광개토왕이 410년에 동부여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두 기록에 나타난 동부여를 같은 국가로 보는지, 다른 국가로 보는지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또한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를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으로 보는 설도 있다.[119] 북부여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동부여를 각각 별개의 나라로 보는 견해[120]가 다수이나,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를 동일한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121]

《삼국사기》는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웠다고 전하지만,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으로 쇠약해졌다. 285년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으로 의려왕이 죽고 수도가 함락되자, 왕실과 백성들은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로 피난했다. 이듬해 의라왕이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았지만, 일부는 북옥저에 남아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면서 본국과 단절된 동부여는 자립하였으나, 410년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3. 5. 갈사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사(曷思) 또는 갈사국(曷思國)이라고도 한다. 서기 22년 건국되었고, 서기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이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갈사부여는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 병합되었다.[1]

3. 6. 졸본부여


  • 졸본부여(卒本夫餘)는 《삼국유사》에 동명성왕졸본에 세운 고구려의 별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졸본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전승(傳承)이 기록되어 있어서, 졸본부여가 고구려의 전신 국가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졸본부여가 이미 있었다는 전승은 이 지역에 선주(先住)하고 있었던 집단에 대해서 다른 기록이 이를 '졸본부여'라고 칭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122]

많은 고대 역사 기록은 초기 고구려 또는 그 수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졸본부여"(졸본부여|卒本夫餘한국어)를 나타낸다.[33] 기원전 37년, 주몽은 고구려의 초대 왕이 되었다. 주몽은 옥저, 동예, 해인을 정복하고 부여와 고조선의 옛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33]

3. 7. 남부여

백제는 성왕 시기에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로 변경했다.[124] 백제는 538년에 공식적으로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남부여한국어)로 변경했는데,[39] 이 국호와 부여(扶餘)씨[123]국성(國姓)이었던 점,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가 부여 계승 의식이 강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3. 8. 두막루

두막루는 부여의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로,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를 자처했다.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 달말루(達末婁)라고도 불렸다. 두막루는 서기 410년경에 건국되어 약 300년간 존재하다가 726년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다.[1] 두막루의 영토는 발해흑수말갈로 양분되었다가 결국 발해로 흡수되었다.[1]

부여는 북위 시대까지 존재했으며, 태화 18년 (494년)에 물길에게 멸망했다.[2]

부여족의 후예(북부여)는 두막루국이라 칭하며 대까지 존속했다.[3]

4. 정치

부여는 임금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125]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126]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군주를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군주에게 묻기도 하였다.[127] 3세기 부여왕은 권력적이면서도 원초적이라는 상반된 양면성을 가지면서 귀족연합제에 의해 공립(共立)되는 성격이 강하였다.[129][130] 그러나 군주가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채,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131]

4. 1. 지배층

부여 사회의 중심 지배 계급은 '~가(加)'라는 칭호를 가진 부족장들이었다. 이 칭호는 씨족장이나 부족장을 의미하며, 고구려에서도 사용되었다. 부족장 중 가장 유력한 자는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을 붙여 불렀으며, 이들은 각기 사출도(四出道)의 하나씩을 주관하였다.[132]

대가(大加)는 왕과 마찬가지로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직속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이들은 왕과 동질적인 성격을 가지며 왕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여러 가(加)는 각자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비록 국내에서는 흰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나,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에는 비단옷과 중국인이 부러워하는 값비싼 털옷을 입고, 모자는 금·은으로 장식하는 등 사치스러운 옷차림을 하였다. 또한 조두(俎頭)라는 고급 밥그릇을 사용하였고, 죽으면 많은 사람을 함께 순장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권력자이자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다.[132]

국가에는 통일적인 군주가 있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서는 날씨가 좋지 않아 오곡의 생육이 순조롭지 못하면 그 책임을 왕에게 돌려 왕을 교체하거나 죽여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관직명은 모두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여러 가(加)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사출도(四出道)를 지켰으며, 세력이 큰 자는 수천 가(家), 세력이 작은 자는 수백 가(家)를 지배했다.

여러 가(加) 아래에는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의 관직이 있었다. 읍락(邑落)에는 호민(豪民)이라 불리는 노예를 가진 부유한 농민, 하호(下戶)라 불리는 예속 농민이나 노예, 노복(奴僕)이라 불리는 노예가 있었다.

4. 2. 행정 구획

부여의 행정 구획은 사출도라 불렀다. 이는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네 갈래의 길을 의미한다. 중앙에는 왕이 있고,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의 4가(加)가 사출도에 있어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를 지배하였다.[1] 관직명은 모두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불렀다.[1] 여러 가(加)는 각각 사출도를 지키며, 세력이 큰 자는 수천 가(家), 세력이 작은 자는 수백 가(家)를 지배했다.[1]

여러 가(加) 아래에는 대사(大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다. 읍락(邑落)에는 호민(豪民)이라고 불리는 노예를 가진 호농(豪農), 하호(下戶)라고 불리는 예속 농민이나 노예, 노복(奴僕)이라고 불리는 노예가 있었다.[1]

4. 3. 역대 국왕

'''부여 국왕'''
왕호이름재위기간
동명왕(東明王)? ~ ?
해모수왕(解慕漱王)해모수(解慕漱)? ~ ?
해부루왕(解夫婁王)해부루(解夫婁)? ~ 기원전 60년 경
금와왕(金蛙王)해금와(金蛙)기원전 60년 경 ~ 기원전 24년 경
대소왕(帶素王)해대소(帶素)기원전 24년 경 ~ 서기 22년
갈사왕(曷思王)해씨(解氏)22년 ~ ?
? ~ ?
도두왕(都頭王)해도두(都頭)? ~ 68년
부태왕(夫台王)부태(夫台)?, 2세기
위구태왕(尉仇台王)위구태(尉仇台)?, 2세기
간위거왕(簡位居王)간위거(簡位居)?, 2세기 ~ 3세기
마여왕(麻余王)마여(麻余)?, 3세기
의려왕(依慮王)의려(依慮)? ~ 285년
의라왕(依羅王)의라(依羅)286년 ~ ?
현왕(玄王)부여현(扶餘玄)? ~ 346년
잔왕(孱王)해씨(解氏)? ~ 494년


5. 경제

부여는 주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도 대량의 철제 농기구가 발견되는 등 농업 기술과 기구는 동시대 동이 중에서 가장 발달했다.[62] 토지는 오곡을 기르기에 적합했지만, 오과는 재배할 수 없었다.

금과 은을 풍부하게 산출하는 땅이었으며, 금속을 실 모양으로 가공하여 장식하는 등 금은 가공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고 여겨진다.[62] 방적 기술 또한 발달하여 양잠을 통해 비단과 수(繡)·채(綵) 등 다양한 종류의 비단 직물을 만들었으며, 마직물과 모직물도 생산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발달했다.[62]

또한 희생용 소를 많이 길렀으며, 명마와 적옥(赤玉)·담비·유(狖)·미주(美珠)를 산출했고, 구슬의 큰 것은 산조(山棗, 야마나츠메) 정도 크기였다.[62] 명산물로는 , 적옥, 미주 등과 모피가 있었다.[133] 『위략(魏略)』에는 나라가 번성하고 부유하다고 묘사되어 있으며, 이 시기가 최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62]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길림성 제2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단산 문화에 이어지는 포자연 유형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포자연 유형에 선행하는 서단산 문화의 범위는 길림성 길림, 장춘, 사평 각 지역 및 요녕성 무순 지역으로 여겨진다.

6. 사회와 문화

부여는 왕과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일반 백성인 하호(下戶)와 노비 등으로 구성된 사회였다. '가'는 '칸'과 기원이 유사한 칭호로 추정되며, 고구려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채택되었다.[34]

부여의 법은 엄격하여 살인, 간음, 투기 등을 저지르면 사형에 처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를 배상하는 일책십이법(一策十二法)이 있었는데,[139] 이는 고조선의 8조법과 비슷하게 개인의 생명, 재산,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형사취수제도 있었다.

전쟁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우제점법을 행했다.[141] 이는 은의 갑골점법과 유사하다.

부여는 농경 사회였으나 수렵 사회의 전통도 남아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주기도 하였다.[134] 사람들은 흰 옷을 즐겨 입었고,[35] 음악을 좋아해 길을 갈 때도 노래를 불렀다.[137] 이러한 풍습은 흰옷을 입는 한국 관습으로 이어졌다.[35]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 사람들이 체격이 크고 용감하며 신중하고 친절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62] 부여어고구려, 동예와 언어가 유사하고, 옥저와는 약간 다르다고 언급되어 있다.[36]

6. 1. 하호

하호(下戶)는 부여에서 대부분의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일반 백성이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이었지만, 노복(奴僕)처럼 사역을 받는 무력한 예민(隸民)이었다.[138] 또한 전쟁이 있을 때는 무기를 들고 싸우지 못하고 군량(軍糧)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씨족 공동체의 유제(遺制) 속에서 제가(諸加)들의 강력한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列傳)에 따르면 부여는 만주 (중국 북동부)의 만리장성 너머 북동쪽 땅을 점유한 농경 민족이었다. 왕의 신하인 귀족 통치자들은 '가(加)'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개가(狗加)나 마가(馬加)와 같이 동물 이름으로 서로를 구별했다. 부여에는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등 네 개의 가(加)가 있었으며, '가'는 '칸'이라는 칭호와 기원이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가(加) 시스템은 고구려에서도 채택되었다.[34]

6. 2. 법률

부여의 법률은 초기 정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엄격했다. 형법은 매우 엄격하여 살인, 간음, 부녀의 투기 등에 대하여 극형에 처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는 일책십이법(一策十二法)이 있었다.[139]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자는 사형에 처했다.[139] 특히 간음과 투기를 한 여자는 그 시체를 산에 갖다 버려 썩게 만들 정도로 혐오했다.[140] 단,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했다.[140]

이러한 조항들은 고조선의 8조법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개인의 생명과 사유 재산 및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의 옹호를 위한 것이라는 근본정신은 동일하다. 부여는 특히 가족 제도를 중요시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제 풍습이 있었다. 투기죄(妬忌罪)에 대한 가혹한 규정은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권력층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에는 절도범이 훔친 물건의 12배에 해당하는 가격을 배상하게 하는 법이 있었으며, 법률 적용에 있어 동해보복의 원칙을 따랐다.[37]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배상하게 했다. 남녀가 사통하거나, 부인이 질투하면 모두 사형에 처했다. 질투로 인한 죄를 가장 미워하여, 그 죄로 사형에 처해지면 시체를 나라 남쪽 산 위에 내다 버려 썩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시체가 썩은 뒤에 그 부인의 집안사람이 시체를 거두어가기를 원하여 소나 말을 끌고 오면 시체를 내주었다.[62]

6. 3. 우제점법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도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이 벌어지면 흉(凶), 합쳐지면 길(吉)한 것으로 생각했다.[141] 이러한 우제점법은 은의 갑골점법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62] 전쟁을 시작할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을 보고 전쟁의 길흉을 점쳤다.[62]

7. 대외 관계

부여는 주변 여러 나라 및 부족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 '''한나라''': 120년 부여왕의 태자 위구태가 후한에 사신으로 가 안제로부터 인수와 금태를 받고 돌아갔다.[47] 122년 고구려, 마한, 예맥 군사가 현도군을 공격하자, 부여는 왕자를 보내 구원했다.[24] 167년 부여 부태왕후한 현도군을 공격했으나, 현도태수 공손역에게 격퇴되어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배했다.[24] 2세기 후반, 한나라 군벌 공손탁은 부여 왕 위구태에게 종녀(조카딸)를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50][51]


후한 시대에 부여는 현도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23] 49년에는 실질적인 동맹국이 되었는데, 이는 선비족고구려의 위협을 억제할 수 있었기에 한나라에게 유리했다.

건무 25년(49년) 10월,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자, 광무제는 이를 후하게 대접했다.[46] 안제 영초 5년(111년) 3월, 부여왕은 현도군을 침략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했으나, 곧 다시 복귀했다.[47] 영녕 원년(120년), 부여왕은 위구태를 보내 조공했고, 안제는 위구태에게 인수를 수여했다. 121년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은 위구태에게 군사를 주어 원군으로 보내 고구려군을 격파했다. 122년 고구려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자, 군사를 파견하여 격파했다.[47]

순제 영화 원년(136년), 부여왕은 낙양에 조공을 왔다.[48] 환제 연희 4년(161년), 부여 사신이 조하를 바쳤다. 영강 원년(167년), 부여왕 부대가 현도군을 침략했으나, 현도태수 공손욱에게 격파당해 1천여 명이 참수되었다.[49] 령제 희평 3년(174년), 부여는 다시 책봉국으로서 공물을 바쳤다.[49]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속해 있었으나, 헌제(재위: 189년 - 220년) 시대에 부여왕 위구태가 요동군에 속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현도군과 요동군 모두 공손씨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공손도는 부여와 동맹을 맺고 공손씨의 종녀를 위구태의 비로 삼았다.[50][51]

  • '''고구려''': 기원전 22년 고구려대무신왕이 부여를 침공하여 대소왕이 전사했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갈사국을 건국했다.[23] 같은 해, 부여 대소왕의 종제는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 대무신왕은 그에게 락씨 성을 내리고 부여왕으로 책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에 거주하게 하였다.[23]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 때 부여의 잔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32]


동부여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부인을 얻어 주몽을 낳았다. 기원전 37년경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 초기 고구려 또는 그 수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졸본부여"가 기록되어 있다.[33] 주몽은 옥저, 동예, 해인을 정복하고 부여와 고조선의 옛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33]

3세기 초, 공손도는 요동반도의 중국 군벌로, 선비족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부여를 지원했다. 사마의의 요동 정벌로 공손씨가 멸망한 후, 북중국의 조위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위 전쟁을 일으켰다. 현도군의 태수 왕기가 이끄는 원정군은 옥저를 거쳐 동쪽으로 고구려 조정을 추격하여 예맥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귀환하는 길에 부여 땅을 지나면서 환영받았다.[25] 정시 연간(240년 - 249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토벌하고, 현도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다.

7. 1. 고리국

부여의 뿌리는 만주 북쪽 지역에 있었던 고리국이다. 《논형》과 《위략》 등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탁리국(橐離國, 또는 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이 엄호수를 건너와 건국한 나라이다. 이러한 부여 건국 설화는 이후 고구려 동명성왕의 건국 설화로 그대로 차용되었다.

7. 2. 한나라

120년, 부여왕의 태자인 위구태가 후한에 사신으로 가서, 후한 안제로부터 인수(印綬)와 금태(金綵)를 받고 돌아갔다.[47]

122년, 고구려·마한·예맥의 군사가 현도군에 쳐들어 오자, 부여에서 왕자를 보내 구원하였다.[24]

167년, 부여 부태왕은 2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한 현도군을 공격하였으나, 현도태수 공손역(公孫琙)에게 격퇴되어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배하였다.[24]

2세기 후반, 한나라 군벌 공손탁은 부여 왕 위구태에게 종녀(宗女, 조카딸)를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50][51]

후한 시대(기원전 202년 ~ 서기 9년)에 부여는 후한서 권85 동이전에 따르면 현도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23] 형식적인 조공국이었지만, 49년에는 실질적인 동맹국이 되었다. 이는 동북쪽 동맹국이 서만주와 몽골 동부 선비족과 요동 지역 및 한반도 북부 고구려의 위협을 억제할 수 있었기에 한나라에게 유리했다.

중국 동북 지역 혼란기 동안, 부여는 111년에 후한 영토 일부를 공격했지만, 120년에 관계가 회복되어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2년 후, 부여는 현도군의 군사 원조 요청에 응하여 고구려의 현도군 공격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24] 167년, 부여는 현도군을 공격했지만 패배했다.[24] 헌제(189년 ~ 220년) 때, 부여는 한나라 요동군의 조공국으로 재분류되었다.[23]

건무 연간(25년 - 56년), 동이 여러 나라가 후한에 조공을 왔고, 중국에 토산물을 헌상하게 되었다. 건무 25년(49년) 10월,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자, 광무제는 이를 후하게 대접했다.[46]

안제 영초 5년(111년) 3월, 부여왕은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했으나, 곧 다시 귀부했다.[47]

영녕 원년(120년), 부여왕은 적자 '''위구태'''를 보내 인(印)과 궐(闕)을 바치게 하였고, 안제는 위구태에게 인수를 수여했다. 다음 해 121년(건광 원년), 고구려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은 위구태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게 하여 원군으로 보내 고구려군을 궤멸시켰다. 122년(연광 원년), 고구려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자, 군사를 파견하여 격파하고 구원했다.[47]

순제 영화 원년(136년), 부여왕은 경사(낙양)에 조공을 왔다.[48]

환제 연희 4년(161년), 부여 사신이 조하(朝賀)를 바쳤다. 영강 원년(167년), 부여왕 부대(夫台)는 2만여 명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략했으나, 현도태수 공손욱에게 격파당해 1천여 명이 참수되었다.[49]

령제 희평 3년(174년), 부여는 다시 책봉국으로서 공물을 바쳤다.[49]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속해 있었으나, 헌제(재위: 189년 - 220년) 시대에 부여왕 위구태가 요동군에 속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현도군이든 요동군이든 공손씨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동이 여러 나라는 공손씨에게 부속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으므로, 공손도는 그 두 오랑캐 사이에 있는 부여와 동맹을 맺고, 공손씨의 종녀(공손도의 딸이라고도 하고 여동생이라고도 한다)를 위구태의 비로 삼았다.[50][51]

7. 3. 선비족

285년 선비족 모용외가 부여를 습격하여 의려왕이 자살하고, 백성 1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26] 286년 의라왕서진(西晉)에 구원을 요청,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의 도움으로 부여를 재탈환하였다.[55]

346년에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으로 현왕이 포로로 잡히고 백성 5만 명이 끌려가 사실상 부여가 멸망했다.[29] 모용황(慕容皝)은 부여 유민을 회유하기 위해 현왕을 사위로 삼았다.

7. 4. 고구려


  • 기원전 22년 고구려대무신왕이 부여를 침공하여 대소왕이 전사했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피난하여 갈사국을 건국했다.[23]
  • 같은 해, 부여 대소왕의 종제(사촌동생)는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대무신왕은 대소왕의 종제에게 락씨(絡氏)라는 성을 내리고 부여왕으로 책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掾那部)에 거주하게 하였다.[23]
  •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 때 부여의 잔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32]
  • 동부여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부인을 얻어 주몽을 낳았다. 기원전 37년경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
  • 초기 고구려 또는 그 수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졸본부여"(졸본부여|卒本夫餘한국어)가 기록되어 있다.[33] 기원전 37년, 주몽은 고구려의 초대 왕이 되었다. 주몽은 옥저, 동예, 해인을 정복하고 부여와 고조선의 옛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33]
  • 3세기 초, 공손도는 요동반도의 중국 군벌로, 북쪽의 선비족과 동쪽의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부여를 지원했다. 사마의의 요동 정벌로 공손씨가 멸망한 후, 북중국의 조위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위 전쟁을 일으켰다. 현도군의 태수 왕기(王頎)가 이끄는 원정군의 일부는 옥저를 거쳐 동쪽으로 고구려 조정을 추격하여 예맥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귀환하는 길에 부여 땅을 지나면서 환영받았다. 이를 통해 부여 왕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중국에 전해졌다.[25]
  • 정시 연간(240년 - 249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토벌하고, 현도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다.

8. 부여사 연구

부여사 연구는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권30)에 실린 부여전(夫餘傳)은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해 최초로 다룬 열전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142] 부여전에는 부여의 위치, 영역, 관제, 의식주, 의례, 풍속, 생산물 등 생활 습속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현도군, 후한, 공손씨 등 중국 세력과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따르면 부여전 기사의 3분의 1 정도는 《위략(魏略)》 기사와 관련되어 있다. 진수가 참고한 《위략》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 《위략》과는 다른 판본이지만, 원위략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142] 《위략》이 사라진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143]

부여의 유적군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길림 주변에서 발견된 독특한 철기 시대 유적(포자연유형)들을 통해 부여의 세력 범위를 추정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길림성 제2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단산 문화를 잇는 포자연 유형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포자연 유형에 앞서는 서단산 문화는 길림성 길림, 장춘, 사평 지역 및 요녕성 무순 지역으로, 대략 북쪽은 랍림하, 동쪽은 함호령, 남쪽은 휘발하, 서쪽은 요하로 둘러싸인 범위이며, 북서쪽으로는 송눈평원에 닿지 않는다고 여겨진다.[1]

8. 1. 유적과 유물

부여의 유적군은 확인되지 않으나, 길림 주변에 독특한 철기 시대의 유적(포자연유형)들이 발굴되어 이로부터 세력의 범위를 추정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길림성 제2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단산 문화에 이어지는 포자연 유형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포자연 유형에 선행하는 서단산 문화의 범위는 길림성 길림, 장춘, 사평 각 지역 및 요녕성 무순 지역으로 여겨진다. 경계로는 대략 북쪽은 랍림하, 동쪽은 함호령, 남쪽은 휘발하, 서쪽은 요하로 둘러싸인 범위이며, 북서쪽에서는 송눈평원에 닿지 않는다고 여겨진다.[1]

8. 2. 부여전(夫餘傳)

삼국지》 위서의 〈오환선비동이전〉(권30) 중, 부여 관련 기사인 부여전(夫餘傳)은 총 930자이며,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한 최초의 열전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衣食)·의례(儀禮)·풍속·산물(産物) 등 부여의 생활 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 기술과 현도군·후한(後漢)·공손씨(公孫氏) 등 중국의 제(諸) 세력과의 관계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142]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 《위략(魏略)》 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진수가 참고한 《위략(魏略)》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 《위략(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위략(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魏略)》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142] 이러한 점에서 부여전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두찬(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략(魏略)》이 멸실된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 《위략(魏略)》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143]

9. 일본과의 관계

부여 계통의 기마 민족이 변한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와 야마토 왕조의 전신이 되었다는 가설에가미 나미오가 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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