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무
1. 개요
감무는 초나라 출신으로, 혜문왕과 무왕을 섬기며 진나라의 장수로 활약했다. 그는 사거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장의와 저리자의 추천으로 진나라에 등용되어 한중을 점령하고 촉나라 반란을 진압했다. 무왕 시대에는 좌승상에 임명되어 중원 진출을 모색하며 의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소양왕 시대에는 한나라를 구원했으나, 참언으로 인해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에서 초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위나라에서 사망했으며, 손자 감라가 여불위 휘하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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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재상 -
상앙
상앙은 위나라 출신의 법가 사상가이자 진나라의 개혁가로, 효공의 신임을 얻어 법률 제도를 개혁하여 능력주의를 강조하고 중앙집권화 및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으나, 혜문왕에 의해 처형당했다. -
진나라의 재상 -
여불위
여불위는 전국 시대 말기 위나라 출신 상인이자 진나라의 정치가로서, 자초를 왕위에 옹립하고 승상이 되었으며 《여씨춘추》 편찬과 '일자천금' 고사로 명성을 얻었으나, 몰락하여 자살했고 진시황의 친부 논란 등 복잡한 면모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해석된다. -
춘추 전국 시대의 장군 -
오기
오기는 중국 전국 시대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초나라 재상으로 법가 개혁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며, 《오자병법》을 저술했다. -
춘추 전국 시대의 장군 -
몽오
몽오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수로 소양왕, 장양왕, 진 시황제를 섬기며 한, 조, 위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고 그의 아들 몽무와 손자 몽염, 몽의 또한 진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진나라의 장군 -
여불위
여불위는 전국 시대 말기 위나라 출신 상인이자 진나라의 정치가로서, 자초를 왕위에 옹립하고 승상이 되었으며 《여씨춘추》 편찬과 '일자천금' 고사로 명성을 얻었으나, 몰락하여 자살했고 진시황의 친부 논란 등 복잡한 면모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해석된다. -
진나라의 장군 -
항우
항우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서초 패왕이 되었으나, 유방과의 초한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한 인물이다.
2. 생애
감무는 초나라 하채(下蔡) 출신으로, 하채의 사거선생(史擧先生)을 섬기며 백가지술(百家之術)을 배웠다. 장의와 추리자의 추천으로 진 혜문왕을 섬기게 되었고, 기원전 312년에는 위장을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중을 빼앗았다.
기원전 310년, 진나라가 촉나라를 정복한 후 촉나라 재상 진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감무가 이를 토벌하였다. 기원전 309년, 진 무왕은 승상(丞相)의 관직을 설치하고 감무와 저리자를 각기 좌승상 · 우승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308년, 진 무왕은 감무에게 중원 진출의 뜻을 내비쳤고, 감무는 한나라의 의양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감무는 위나라와 동맹을 맺고 의양 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참소를 우려하여 진 무왕에게 맹세를 받았다. 기원전 307년, 감무는 의양 전투에서 6만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고, 황하를 넘어 한나라의 무수(武遂)를 빼앗고 성을 쌓았다.
진 소양왕 시대에 초나라가 한나라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감무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초나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감무는 한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무수를 한나라에 돌려주었으나, 향수와 공손석의 참소를 받아 망명길에 올랐다.
기원전 306년, 감무는 제나라로 망명했고, 진 소양왕은 복귀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제 민왕은 감무를 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으나, 초 회왕은 감무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하려다 신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감무는 위나라에서 사망했다.
2.1. 어린 시절
감무는 초나라 하채(下蔡) 출신으로, 하채의 사거선생(史擧先生)을 섬기며 백가지술(百家之術)을 배웠다. 사거는 본래 하채의 문지기였는데, 왕을 섬기지도 않고 집안을 돌보지도 않아 세간에 악명만을 날렸다. 그럼에도 감무는 그를 섬기며 따랐다.
2.3. 진 무왕 시대
기원전 310년, 진나라가 촉나라를 정복한 후 촉나라 재상 진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감무가 이를 토벌하였다. 기원전 309년, 진 무왕은 승상(丞相)의 관직을 설치하고 감무와 저리자를 각기 좌승상 · 우승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308년, 진 무왕은 감무에게 "과인이 수레를 타고 삼천을 지나 주나라의 형세를 살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오."라 말하며 중원 진출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감무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인 한나라의 의양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감무는 이를 위해 향수와 함께 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동맹을 맺고, 먼저 향수를 돌려보내 진 무왕에게 의양 공격을 잠시 멈출 것을 청했다.
진 무왕은 식양(息壤)에서 위나라에서 돌아오던 감무를 맞이하였다. 무왕은 감무에게 위나라와 동맹을 맺었는데 어째서 의양을 공격해선 안되는지 물었다. 감무는 증삼의 어머니도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을 세 번 듣고는 결국 속아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의양을 공격하는 동안 참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또한 위나라 장군 악양이 3년 동안 중산국을 정복할 때 위 문후가 참소문을 상자에 봉해두고 악양을 신뢰하여 이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 무왕은 참소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맹서하였다.
진 무왕의 맹세를 받은 감무는 그해 가을 한나라의 의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양은 넓은 땅에 식량이 충분하고 지키는 군사도 10만에 달하였다. 한나라의 공중치와 초나라의 경취가 군사를 거느리고 의양을 구원하려 하였다. 다섯 달 동안 감무는 의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저리자 · 공손석 등이 감무를 참소하자, 진 무왕은 군대를 철수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감무는 "(맹서하였던) 식양 땅이 사라지기라도 했습니까?"라 말하며 반대하였고, 결국 진 무왕은 감무로 하여금 싸움을 계속하게 하였다.
기원전 307년, 감무는 한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6만 명의 목을 베고 의양을 함락시켰다. 진나라 군대는 황하를 넘어 한나라의 무수(武遂)를 빼앗고 성을 쌓았다.
2.4. 진 소양왕 시대
초나라가 한나라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한나라는 진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진 소양왕의 어머니인 선태후가 초나라 출신이었기에 진나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감무는 진 소양왕에게, 만일 진나라가 한나라를 돕지 않으면 초나라가 한나라를 합치고 위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위협할 것이므로 한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양왕은 감무의 말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한나라를 지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철수하였다.
이후 감무는 한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소양왕을 설득하여 과거에 빼앗았던 무수를 한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향수와 공손석은 이에 불만을 품고 감무를 참소하였다. 감무는 위협을 느껴 망명길에 올랐다.
2.5. 망명과 말년
기원전 306년, 감무는 위협을 느껴 위나라 공격을 중단하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진나라 소양왕은 감무의 재능을 높이 사 상경과 재상 직위를 제안하며 복귀를 요청했으나, 감무는 거절했다.
제 민왕은 감무를 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초 회왕은 감무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초나라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신하 범연(范蜎)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감무는 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위나라에서 사망했다. 그의 손자 감라는 진나라 재상 여불위 휘하에서 명성을 떨쳤다.
3. 평가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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