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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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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불위는 위나라 출신으로, 진 장양왕(자초)을 후원하여 진나라 승상과 문신후에 봉해진 상인이다. 그는 조나라에서 인질로 있던 이인을 보고 왕으로 만들 가치가 있다고 판단, 뇌물과 책략으로 그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다. 이후 진 시황제의 섭정을 맡았으나, 태후와의 불륜, 노애의 반란 연루 혐의로 인해 자결했다. 여불위는 《여씨춘추》를 편찬하고, 진 시황제의 친부 논란 등 다양한 평가를 받으며, 여러 작품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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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여불위 (呂不韋)
출생기원전 291년
사망기원전 235년 (향년 55–56세)
직업상인, 정치인
관직
관직명상국 (Chancellor of Qin)
임기 시작기원전 251년
임기 종료기원전 235년
후임이사
통치자
군주진 장양왕
영정
가문 정보
성씨 (呂)
기타 정보
문신후 (文信侯)Lǚ Bùwéi

2. 생애

여불위는 위(衛) 복양[21]이라는 설과 양적(陽翟)[22]이라는 설이 있는 상인 출신이다. 여러 곳을 오가며 장사를 하여 이인(훗날 자초)을 만나기 전에 이미 천금을 모은 재력가였다.[23]

(趙) 한단에서 장사를 하던 중,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 왕족 이인을 보고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만하다(此奇貨可居)"라고 중얼거렸다.[24] 전국책의 기록에 따르면, 여불위는 아버지를 찾아가 '왕을 세우는 일은 그 이익이 대대로 남는 일이다'라고 설득했다.[25]

이인은 진 소양왕의 태자 안국군(훗날의 효문왕)의 아들이었지만, 생모가 안국군의 총애를 잃었고, 스무 명이 넘는 형제들 사이에서 변변찮은 대우를 받으며 왕이 될 가능성이 낮았다. 더욱이 진과 조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이인의 처우는 극악해져 생활비도 제대로 조달하지 못했다.

여불위에 대한 주요 정보는 기원전 1세기의 자료들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세 문헌은 여불위와 진나라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어, 일부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2]

사기 여불위 전에는 그가 위나라 출신이며, "금 수천 섬"을 버는 성공한 상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전국책에는 여불위가 사업에서 정계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정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4]

여불위는 뇌물과 책략을 이용하여 자초가 진나라로 돌아오도록 주선했고, 화양부인이 자초를 자신의 아들로 삼도록 설득하여 자초를 안국군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2. 1. 상인 시절

여불위는 상인 출신으로, 출생지는 위(衛) 복양[21]이라는 설과 양적(陽翟)[22]이라는 설이 있다. 여러 곳을 오가며 장사를 하여 이인(훗날 자초)을 만나기 전에 이미 천금을 모은 재력가였다.[23]

(趙) 한단에서 장사를 하던 중,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 왕족 이인을 보고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만하다(此奇貨可居)"라고 중얼거렸다.[24] 전국책의 기록에 따르면, 여불위는 아버지를 찾아가 '왕을 세우는 일은 그 이익이 대대로 남는 일이다'라고 설득했다.[25]

이인은 진 소양왕의 태자 안국군(훗날의 효문왕)의 아들이었지만, 생모가 안국군의 총애를 잃었고, 스무 명이 넘는 형제들 사이에서 변변찮은 대우를 받으며 왕이 될 가능성이 낮았다. 더욱이 진과 조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이인의 처우는 극악해져 생활비도 제대로 조달하지 못했다.

여불위에 대한 주요 정보는 기원전 1세기의 자료들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세 문헌은 여불위와 진나라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어, 일부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2]

사기 여불위 전에는 그가 위나라 출신이며, "금 수천 섬"을 버는 성공한 상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전국책에는 여불위가 사업에서 정계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정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4]

여불위는 뇌물과 책략을 이용하여 자초가 진나라로 돌아오도록 주선했고, 화양부인이 자초를 자신의 아들로 삼도록 설득하여 자초를 안국군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2. 2. 이인의 세자 옹립과 권력 장악

여불위는 자신의 돈으로 이인(훗날의 자초)이 조나라의 실력자들과 교류하도록 돕고, 자신은 진나라로 들어가 안국군의 총비였던 화양부인을 만났다.[2] 여불위는 화양부인에게 이인이 현명하며 화양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사모한다고 전했다. 또한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 재물을 주며 포섭하여, 이인을 화양부인의 양자이자 안국군의 세자로 삼게 할 것을 설득하였다.[8] 화양부인은 안국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자식이 없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고, 여불위의 제안을 따랐다. 안국군도 이를 승낙하여 이인을 세자로 삼았다.[8]

조나라로 돌아온 여불위는 이인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이인은 여불위를 후견인으로 삼았다. 이인은 양어머니 화양부인의 출신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었다.[8] 한편, 사마천의 《사기》에는 여불위가 자신의 애첩이었던 조희를 자초에게 바쳤는데,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 아이가 훗날 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9]

기원전 251년에 소양왕이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면서 자초는 진나라 태자가 되었다. 효문왕이 얼마 안 되어 죽고 자초가 즉위하였다(장양왕).[2] 여불위는 자초를 지원한 공으로 진나라 승상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으며,[2] 기원전 246년에 장양왕이 죽고 이 13세로 왕위에 오르자 상방(相邦)이 되어, 왕의 아버지에 버금가는 지위라는 뜻의 중부(仲父)로 불리며 왕을 도왔다.[2]

진왕 정 6년(기원전 241년), 초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연나라의 5국 연합군이 진나라를 공격해왔으나, 진나라 군대는 함곡관에서 맞서 격퇴시켰다(함곡관 전투).[15]

여불위

2. 3. 식객과 《여씨춘추》 편찬

기원전 239년 여불위는 자신의 식객으로 있던 석학들을 모아 《여씨춘추》라는 이름의 저작을 편찬하였다.[14] 이 책은 당시 제자백가의 책과는 다른 사상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불위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해 놓고, "이 책에 적힌 글 가운데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훗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14]

당시 맹상군이나 신릉군 등 전국 시대의 사군자라 불리는 각국의 유력자들이 식객을 모아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가운데, 여불위 또한 자신의 집에 3천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고, 여불위 집안의 소사가 1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16] 그 식객 가운데는 훗날 진의 승상이 되는 이사도 있었는데, 그 재능을 눈여겨보게 된 진왕 정이 그를 발탁해 재상으로 삼았다. 여불위가 실각한 후 조나라에서 임시 재상이 된 사공마도 여불위의 식객이었다.[16]

2. 4. 몰락

권세가 누구와도 비길 데 없었던 여불위는 진왕 정의 생모인 태후와 밀통하고 있었다.[2] 원래 색을 밝혔던 태후는 장양왕 사후에 여불위를 계속해 유혹했고, 여불위로서도 원래 자신의 애인이었던 태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2] 그러나 진왕 정이 자라면서 국모(国母)가 된 태후와의 불륜을 지속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불위는 조아이(嫪毐)라는 거근(巨根) 사나이를 태후에게 소개시키고, 그를 환관으로 꾸며 후궁에 들였다.[2] 태후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기까지 했다.[2]

그 뒤 노애는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장신후(長信侯)로 봉해져 권세를 얻었고,[2] 태후와의 밀통이 발각되자 진왕 정에 대한 모반을 꾀하다 진압당했다. 노애는 거열형에 처해지고 노애의 두 아들도 처형당했다.[2] 이 사건 이후 여불위도 승상직을 잃고 칩거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공을 감안한 감형이었다.[2]

그러나 칩거하게 된 뒤로도 여불위를 찾는 객은 끊이지 않았고, 여러 나라에 이름도 높았다.[2] 기원전 236년, 여불위는 자신을 찾는 객들과 여러 다른 나라와 모의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2] 진왕 정은 여불위에게 "나라를 위해 한 일도 많지 않으면서 무슨 염치로 이제껏 중부로 불리며 호사를 누립니까?"라고 힐문하며[2] 촉지(蜀地)로 갈 것을 명했다.[2]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여불위는 절망한 나머지 이듬해, 스스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2][18]

3. 평가

여불위에 관한 주요 정보는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전과 유향의 《전국》 그리고 《설원》(說苑)이 있다. 사마천은 여불위를 두고 《논어》 안연편 20장을 인용해 '명성 있는 자'(聞, 즉 실속은 없으면서 소문만 번드르하게 난 인간)라는 것은 여불위를 두고 한 말이라고 평했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부라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으며, 진시황이 살아있던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 여불위열전에도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동시대의 초 재상 춘신군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 점,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진시황본기에는 언급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그것을 부정하는 역사가도 있으며, 진시황을 중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진실을 알고 있던 것은 여불위와 태후뿐이었으며, 정설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

3. 1. 진 시황제와의 관계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부라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으며, 진시황이 살아있던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 여불위열전에도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동시대의 초 재상 춘신군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 점,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진시황본기에는 언급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그것을 부정하는 역사가도 있으며, 진시황을 중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진실을 알고 있던 것은 여불위와 태후뿐이었으며, 정설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

4. 대중문화 속 여불위

여불위는 1999년 중국 영화 진시황(秦始皇)에 의한 중국 통일 직전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 《황제와 암살자(The Emperor and the Assassin)》에서 주요 인물이다. 황제와 여불위 사이의 실제 관계의 본질은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이다.

여불위는 황이(黃易)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2001년 홍콩 텔레비전 시리즈 《시간 속으로(A Step into the Past)》에서 국붕(郭峰)이 연기했다.

여불위는 조제 프레슈(José Frèches)의 역사 소설 시리즈 《옥판(The Jade Disk)》의 주요 인물이다.

여불위의 이야기는 《우주의 만화 역사(The Cartoon History of the Universe)》 제2권에서 로맨스 만화로 부분적으로 구성된 그래픽 형태로 다시 소개된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그의 저서 《유리알 유희(The Glass Bead Game)》에서 음악의 질은 사람이 갖고 있는 삶의 감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언급하는 인물로 여불위를 언급한다.

여불위는 일본 만화 《킹덤(Kingdom)》의 주요 인물이자 주요 적대자 중 한 명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여불위의 고전적인 역사적 묘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를 전처인 조태후(太后)와 손을 잡고 영정(嬴政)을 돕는다는 구실 아래 진나라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악의적인 책략가로 묘사한다.

여불위는 중국 드라마 《왕의 여자(The King's Woman)》에 영정(嬴政)의 친아버지로 등장한다.

여불위는 《랑야방(The Legend of Haolan)》(2019)에서 니위안(聂远)이 연기했다.

여불위는 《촉한(秦 Dynasty Epic)》(2020)에서 두안이홍(段奕宏)이 연기했다.

미야기야니 마사미츠 「기화거구(奇貨居くべし)」 중공문고 2020년

일본고사 「바시레이우스(バシレウス)」 일본방송출판협회 2019년 (ISBN 978-4140057032)

5. 여불위의 후손

항우의 아내 여치(여후)는 여불위의 일족이었다는 것을 중국사 연구자인 곽말약·사다케 야스히코·난산 슈사쿠 등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19] 삼국 시대에 여불위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영창군 불위현 출신으로 촉한에 섬긴 호족 여개는 여불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삼국지』촉지 여개전[20]).

참조

[1] 서적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of Master Lu Harper Collins
[2] 서적 The Annals of Lü Buwei: A Complete Translation and Study Stanford University Press
[3] 문서 85.2506
[4] 문서 109, 7.272
[5] 문서
[6] 문서 9.280
[7] 서적
[8] 위키소스 史記/卷085
[9] 웹사이트 和訳史記列伝 第二十五 呂不韋列伝 https://dl.ndl.go.jp[...]
[10] 위키소스 史記/卷085
[11] 웹사이트 和訳史記列伝 第二十五 呂不韋列伝 https://dl.ndl.go.jp[...]
[12] 위키소스 戰國策黃丕烈札記/秦/五#濮陽人呂不韋賈於邯鄲
[13] 웹사이트 戦国策 孝文王の項 https://dl.ndl.go.jp[...]
[14] 위키소스 史記/卷085
[15] 서적 史記
[16] 위키소스 戰國策黃丕烈札記/秦/五#文信侯出走
[17] 문서 呂不韋列傳
[18] 서적 春秋戦国 洋泉社
[19] 웹사이트 呂公についての一考察 https://www.i-reposi[...]
[20] 위키소스 三國志/卷43#呂凱
[21] 서적 전국책
[22] 문서 원래 한국식 발음은 양책이나 사기 색은에 따라 양적으로 읽는다
[23] 서적 사기
[24] 서적 사기
[25] 서적 전국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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