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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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화 외성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안 방어를 위해 1233년에 축조된 성이다.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몽골군의 공격을 막는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다. 고려 시대에 축조되어 조선 시대에도 보수 및 개축을 거쳤으며, 특히 오두돈 주변에 남아있는 전축성은 수원 화성과 함께 전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강화 외성은 고려 후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 도성의 구조와 축성 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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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외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이름 | 강화 외성 |
한자 표기 | 江華 外城 |
지정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452 |
지정일 | 2003년 10월 25일 |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 (강화도 동해안 일대) |
시대 | 고려시대 |
면적 | 255, 544.9m² |
문화재청 ID | 13,04520000,23 |
이전 지정 내역 (강화전성) | |
지정 종류 (경기도) | 기념물 |
지정 번호 (경기도) | 20 |
지정일 (경기도) | 1972년 7월 3일 |
해제일 (경기도) | 1995년 3월 1일 |
문화재청 ID (경기도) | 23,00680000,31 |
지정 종류 (인천광역시, 1995년) | 기념물 |
지정 번호 (인천광역시, 1995년) | 20 |
지정일 (인천광역시, 1995년) | 1995년 3월 1일 |
해제일 (인천광역시, 1995년) | 1999년 3월 29일 |
문화재청 ID (인천광역시, 1995년) | 23,00200000,23 |
지정 종류 (인천광역시, 1999년)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인천광역시, 1999년) | 37 |
지정일 (인천광역시, 1999년) | 1999년 3월 29일 |
해제일 (인천광역시, 1999년) | 2003년 10월 21일 |
문화재청 ID (인천광역시, 1999년) | 23,00200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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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축성 배경 및 목적
고려 제23대 고종은 1232년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1][2]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해안 방어 시설이었다. 이에 따라 고종 20년(1233년)[1][2] 혹은 『고려사』 기록에 따라 고종 24년(1237년)에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약 23km에 걸쳐 외성을 축조하였다.[1][2]
강화 외성은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한 성곽이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종 20년(1233년) 또는 24년(1237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약 23km에 걸쳐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3. 축성 과정 및 구조
당시 강화의 방어 체계는 강화읍성인 내성, 그리고 중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 외성은 몽고 수군의 침입을 직접 막는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었다.
강화 외성은 고려 시대 이후 조선 시대에도 수도 외곽의 중요 방어 시설로 여겨져 지속적으로 관리되었다. 광해군 대에 보수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숙종 대에는 무너진 성벽을 돌로 다시 쌓고 돈대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영조 대에는 강화유수 김시혁의 건의로 흙이 유실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벽돌(전돌)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개축하기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강화 외성은 높이 20척, 폭 5척 규모였으며, 6개의 문루와 6개의 암문, 17개의 수문을 갖추고 있었다.
강화 외성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도성 구조와 축성 기술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영조 대에 벽돌로 개축된 구간은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함께 조선 시대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3. 1. 고려 시대의 축성
고려 제23대 고종은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고종 20년(1233년)부터 강화 외성 축조를 시작하였다. 『고려사』에는 고종 24년(1237년)에 강화 외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강화 외성은 적북돈대에서 시작하여 초지진까지 이어지는 약 23km 길이의 해안 성곽이다. 당시 강화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성은 현재의 강화읍성에 해당하는 약 1200m 둘레의 성곽이었으며, 외성은 동쪽 해안선을 따라 길게 축조되었다. 특히 외성은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3. 2. 조선 시대의 개보수
고려 시대에 축조된 강화 외성은 조선 시대에도 도성(都城)의 외곽 방어 시설로서 중요하게 여겨져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광해군 10년(1618년)에는 기존의 외성을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며 성벽의 일부가 허물어졌는데, 숙종 대에 이르러 무너진 부분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고, 해안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여러 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영조 대에는 강화 외성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당시 강화유수였던 김시혁(金始爀)은 비가 내릴 때마다 성벽의 흙이 유실되는 문제를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벽돌(전돌)을 사용하여 성을 개축할 것을 영조에게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영조 19년(1743년)부터 이듬해(1744년)까지 벽돌을 이용한 개축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가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을 조사한 결과, 당시 벽돌 성벽은 갯벌 층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머릿돌을 놓고 큰 돌로 중심 벽을 세운 뒤, 다시 머릿돌을 올리고 여러 단의 전돌을 쌓아 올린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3. 3. 구조적 특징
강화 외성은 높이 20척, 폭 5척 규모로 축조되었다. 성에는 6개의 문루, 6개의 암문, 그리고 17개의 수문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6개의 문루는 다음과 같다.
문루 이름 |
---|
조해루 |
복파루 |
진해루 |
참경루 |
공조루 |
안해루 |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화 외성은 해안가의 뻘층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머리돌을 놓고, 다시 대형 석재를 사용하여 성벽의 중심을 잡았다. 그 위에 다시 머리돌을 올린 후, 여러 단의 벽돌(전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연약 지반인 갯벌 위에 성을 쌓기 위한 당시의 발달된 토목 기술을 보여준다. 특히 오두돈 주변 남측에 남아있는 벽돌로 개축된 전축성(塼築城) 구간은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4. 역사적 의의 및 평가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는 수도 방어 체계와 성곽 축조 기술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1] 여러 시대를 거치며 개보수가 이루어져 시대별 축성 기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1][2] 특히 오두돈 남측 주변에 남아있는 전축성(塼築城) 구간은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함께 조선 시대 벽돌 축성 기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1]
4. 1. 고려-조선 시대 군사 요충지
고려 제23대 고종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강화외성을 축조하였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종 24년(1237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약 23km에 걸쳐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는 바다를 건너 공격해오는 몽골군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다.강화성은 내성(현재의 강화읍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성은 동쪽 해안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성의 높이는 20척, 폭은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 복파루, 진해루, 참경루, 공조루, 안해루)와 6개의 암문, 17개의 수문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강화외성은 국가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서 기능했다. 비상시 국왕의 피난처로 활용될 계획이었으며, 광해군 10년(1618년)에는 기존의 성곽을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년) 당시 큰 피해를 입어 성벽이 상당 부분 허물어졌고,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석재를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돈대를 추가로 설치하여 방어 체계를 강화했다. 시간이 흘러 영조 때에는 강화유수 김시혁이 비로 인해 성벽의 흙이 유실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조정에 건의하였고, 그 결과 영조 19년(1743년)부터 이듬해까지 벽돌(전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개축하였다. 2001년 오두돈 주변에서 실시된 지표조사에서는 뻘층 기초 위에 머리돌과 대형 석재를 놓고, 그 위에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아 올린 당시의 독특한 축성 기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부터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도성 구조와 축성 기술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오두돈 남측 주변에 남아있는 벽돌로 개축된 구간은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함께 조선 시대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4. 2. 축성 기술 발전의 증거
강화 외성은 여러 차례 보수와 개축을 거듭하며 축성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영조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은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라에 건의하였고, 174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기존의 성벽 일부를 벽돌(전돌, 塼石)을 사용하여 다시 쌓았다.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벽돌 성벽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당시의 축성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뻘층을 기초로 다진 후 머릿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돌로 벽의 중심을 삼고, 다시 머릿돌을 올린 후 그 위에 벽돌을 여러 단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성벽을 구축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흙이나 돌만 사용하던 기존 방식에서 발전하여 벽돌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례이다.
강화 외성에서 벽돌로 개축된 부분(전축성, 塼築城)은 오두돈 남측 주변에 일부 남아있다. 이 벽돌 성벽은 이후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한국의 벽돌 축성 기술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강화 외성의 벽돌 도입과 축성 방식은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의 시대적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강화 외성은 고려 후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의 도성 구조와 축성 기법 변화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참조
[1]
간행물
사적지정
문화재청
2003-10-25
[2]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4-38호(강화 외성 사적 추가지정 및 지형도면)
http://gwanbo.mois.g[...]
문화재청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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