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
1. 개요
강화산성은 고려 시대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1232년 최우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1234년에 왕궁과 성곽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었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강화 조약에 따라 헐렸다가 조선 시대에 축소되어 다시 지어졌다. 병자호란 때 파괴된 후 숙종 때 석성으로 보수되었으며, 안파루, 진송루, 첨화루, 망한루 등 성문과 암문, 수문 등의 시설이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등 외세 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 북문(진송루), 남문(안파루), 서문(첨화루) 등이 남아 있으며, 강화산성은 외세 침략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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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강화산성 (江華山城) |
|---|---|
| 로마자 표기 | Ganghwasanseong Fortress |
| 유형 | 사적 |
| 지정 번호 | 132 |
| 지정일 | 1964년 6월 10일 |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
| 면적 | 문화재구역 534필지, 791,738m2 |
| 문화재청 ID | 13,01320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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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이다.
2.1. 고려 시대
최우는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2.2. 조선 시대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맺은 강화조약의 조건에 따라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3. 구조 및 시설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고려시대 산성이다. 흙으로 쌓았으며,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현재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고,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축조되었다.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고려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강화 조약 조건에 따라 성이 모두 헐렸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고,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숙종 3년(1677년)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강화산성에는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3.1. 성문
강화산성에는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각 성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3.1.1. 북문 (진송루)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1232년)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던 문으로,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개경으로 환도할 때 헐렸고, 조선 초에 다시 쌓았다.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된 것을 숙종 37년(1700년)에 돌로 쌓아 완성하였다. 이때까지는 문루가 없었다. 정조 7년(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이름 지었으며, 197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및 단장되었다.
북문 앞에는 진송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벽이 없는 문루는 방어용이라기보다는 관망용으로 지어진 듯하다. 현재의 북문은 1976년에 복원된 건물이며, 강화산성 서문과 같이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워졌다. 초익공으로 공포는 공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좁은 칸에 비해 넓은 칸의 폭이 매우 넓고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지붕은 유일하게 우진각 지붕 형태를 보인다.
북문의 출입구는 2.9m x 2.5m이고, 문 전체 크기는 11m이다. 문에서 북장대 방향으로 42m, 서문 방향으로 50m의 성벽이 복원되었다.
3.1.2. 남문 (안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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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 하나이다. 조선 숙종 47년(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폭우로 허물어져 1975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는 육축부 위에 지어졌으며, 창호는 모두 판문으로 되어 있어 방어용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측면에는 '江華南門(강화남문)'이라는 편액이, 북측에는 '晏波樓(안파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1975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쓴 것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하고 시원스러운 누각이다.
남문의 출입구는 4m x 4.5m x 7.5m이며, 성문 전체 크기는 길이 20m, 높이 5m, 여장 높이 1m이다. 남문에서 산 방향으로는 여장이 복원되지 않고 석벽만 복원되었는데, 그 길이는 24m, 높이 3.4m, 폭 1m이다. 문에서 도로 방향으로는 36m 길이의 석벽이 복원되었다. 0.9mx1m 크기의 여장이 복원되었으며, 사용된 개석은 38cmx91cmx14cm이고, 총안은 28cmx31cm이다.
남문은 강화시내를 관통하는 48번 국도를 따라가다 우측 강화우체국 도로 맞은편, 강화베다교회 맞은편에 있다. 현재 남문 앞뒤는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