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강화산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강화산성은 고려 시대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1232년 최우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1234년에 왕궁과 성곽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었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강화 조약에 따라 헐렸다가 조선 시대에 축소되어 다시 지어졌다. 병자호란 때 파괴된 후 숙종 때 석성으로 보수되었으며, 안파루, 진송루, 첨화루, 망한루 등 성문과 암문, 수문 등의 시설이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등 외세 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 북문(진송루), 남문(안파루), 서문(첨화루) 등이 남아 있으며, 강화산성은 외세 침략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강화군의 건축물 - SSG 퓨처스필드
  • 강화군의 건축물 -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한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은 과거 시외버스 노선을 운행했으나 현재는 김포시, 인천광역시 방면 시내버스 노선 위주로 운행되며, 터미널 내 매표소는 운영하지 않고 승차권 자동발매기로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
  • 인천광역시의 사적 - 답동성당
    답동성당은 1897년 건립되어 1937년 증축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로, 벽돌조 고딕 양식이며 프랑스 선교사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시작되어 P. 시잘레 신부에 의해 증축되었고, 지역사회 기여로 1980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 인천광역시의 사적 - 강화 곤릉
    강화 곤릉은 고려 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 추정되며, 묘제적 가치는 낮으나 역사성이 인정되어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 인천광역시의 성 - 계양산성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군사적 중요성을 지닌 산성으로, 문헌 기록이 남아있고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훼손이 심하여 계양산성 박물관이 개관하여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 인천광역시의 성 -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은 조선 시대 강화 해협 방어를 위해 건설된 요새로, 중요한 수비 역할을 수행했으나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으로 파괴된 후 복원되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강화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강화산성 동문
강화산성 동문
이름강화산성 (江華山城)
로마자 표기Ganghwasanseong Fortress
유형사적
지정 번호132
지정일1964년 6월 10일
주소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면적문화재구역 534필지, 791,738m2
문화재청 ID13,01320000,23

2. 역사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이다.


2. 1. 고려 시대

최우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1]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1]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1]

2. 2. 조선 시대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맺은 강화조약의 조건에 따라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1]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1] 1637년 병자호란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1]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1]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1]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1]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1]

3. 구조 및 시설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고려시대 산성이다. 흙으로 쌓았으며,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현재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고,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축조되었다.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고려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다.[1]

고려 원종 11년(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강화 조약 조건에 따라 성이 모두 헐렸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고,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숙종 3년(1677년)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1]

강화산성에는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1]

3. 1. 성문

강화산성에는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1]

각 성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3. 1. 1. 북문 (진송루)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1232년)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던 문으로,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개경으로 환도할 때 헐렸고, 조선 초에 다시 쌓았다.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된 것을 숙종 37년(1700년)에 돌로 쌓아 완성하였다. 이때까지는 문루가 없었다. 정조 7년(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이름 지었으며, 197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및 단장되었다.[1]

북문 앞에는 진송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벽이 없는 문루는 방어용이라기보다는 관망용으로 지어진 듯하다. 현재의 북문은 1976년에 복원된 건물이며, 강화산성 서문과 같이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워졌다. 초익공으로 공포는 공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좁은 칸에 비해 넓은 칸의 폭이 매우 넓고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지붕은 유일하게 우진각 지붕 형태를 보인다.[1]

북문의 출입구는 2.9m x 2.5m이고, 문 전체 크기는 11m이다. 문에서 북장대 방향으로 42m, 서문 방향으로 50m의 성벽이 복원되었다.[1]

3. 1. 2. 남문 (안파루)

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 하나이다. 조선 숙종 47년(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폭우로 허물어져 1975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1]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는 육축부 위에 지어졌으며, 창호는 모두 판문으로 되어 있어 방어용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1]

남측면에는 '江華南門(강화남문)'이라는 편액이, 북측에는 '晏波樓(안파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1975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쓴 것이다.[1]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하고 시원스러운 누각이다.

남문의 출입구는 4m x 4.5m x 7.5m이며, 성문 전체 크기는 길이 20m, 높이 5m, 여장 높이 1m이다.[1] 남문에서 산 방향으로는 여장이 복원되지 않고 석벽만 복원되었는데, 그 길이는 24m, 높이 3.4m, 폭 1m이다.[1] 문에서 도로 방향으로는 36m 길이의 석벽이 복원되었다. 0.9mx1m 크기의 여장이 복원되었으며, 사용된 개석은 38cmx91cmx14cm이고, 총안은 28cmx31cm이다.[1]

남문은 강화시내를 관통하는 48번 국도를 따라가다 우측 강화우체국 도로 맞은편, 강화베다교회 맞은편에 있다. 현재 남문 앞뒤는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1]

3. 1. 3. 동문 (망한루)

동문은 망한루라고 불린다.[1]

3. 2. 기타 시설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1]

4. 관련 사건

고려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1234년부터 왕궁과 성, 관아 시설을 건설하면서 강화산성이 축조되었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강화조약 조건에 따라 성이 헐렸다.[1]

조선시대에 들어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고, 1637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1]

조선 후기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었고, 일본의 침략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는 등 외세 침략의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