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평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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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평황후는 신나라의 황족으로, 왕망의 딸이다. 기원전 4년에 태어나 기원후 3년에 황후로 책봉되었고, 4년에 평제의 황후가 되었다. 평제가 사망한 후에는 정안공태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왕망의 찬탈에 반대하며 불만을 품었다. 23년, 왕망이 유현에게 살해당하고 미앙궁이 불타자, 효평황후는 한나라 황실을 잃은 슬픔에 스스로 불길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유향의 열녀전에 기록될 정도로 절개를 지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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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평황후 | |
|---|---|
| 기본 정보 | |
![]() | |
| 휘 | 알 수 없음 |
| 별칭 | 정안태후 황황실주 |
| 생애 | |
| 출생 | 기원전 9년 |
| 사망 | 23년 10월 5일 (향년 32세) |
| 사망 장소 | 위양궁, 장안 |
| 매장 장소 | 알 수 없음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왕망 |
| 어머니 | 왕씨 (의춘후 왕함의 딸) |
| 배우자 | 평제 |
| 형제 | 왕우 왕획 왕안 왕림 왕흥 왕광 |
| 자매 | 왕엽 왕첩 |
| 통치 | |
| 칭호 | 전한의 황후 |
| 재위 기간 | 4년 3월 16일 - 5년 3월 29일 |
2. 생애
기원전 4년, 왕망과 그의 부인 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시 3년(3년), 아버지 왕망의 정치적 계획에 따라 평제의 황후로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4년 봄에 입궁하였으며, 이때 아버지 왕망은 재형(宰衡)으로 격상되었고 어머니 왕씨는 공현군(功顯君), 오빠 왕안은 포신후(褒新侯), 남동생 왕림은 상도후(賞都侯)에 봉해졌다.
황후가 된 지 약 1년 만인 원시 5년(5년) 11월 16일, 남편 평제가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후 왕망은 선제의 현손인 어린 유영을 황제의 후계자(유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기원후 8년, 왕망은 결국 전한의 제위를 찬탈하고 신(新)을 건국하였으며, 유영을 정안공(定安公)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따라 효평황후는 정안공태후(定安公太后)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찬탈 행위에 강한 불만을 품고 병을 핑계 삼아 궁궐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전한 황실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 하였다. 왕망은 딸을 회유하고 다른 이와 결혼시키기 위해 황황실주(黃皇室主)라는 새로운 칭호를 내렸지만, 그녀는 끝내 재혼을 거부했다.
23년, 유현이 이끄는 한나라 부흥군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미앙궁에 큰 불이 났다. 불길 속에서 효평황후는 "내가 어찌 한나라 황실을 다시 볼 면목이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져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효평황후는 기원전 8년에 왕망과 그의 아내 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왕씨는 의춘후 왕함(王咸)의 딸이었다.효평황후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왕망은 한나라의 성제와 그의 뒤를 이은 조카 애제를 섬기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무력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상태였다. 왕망은 애제의 할머니인 부태후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1년에 애제가 사망하자 상황이 변했다. 왕망의 고모인 태황태후 왕씨가 애제의 측근이었던 동현으로부터 권력을 되찾고 왕망을 다시 불러들였다. 왕망은 어린 평제를 보좌하는 섭정이 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2. 2. 평제의 황후
원연 4년(기원전 9년), 왕망과 왕씨(의춘후 왕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원수 2년(기원전 1년) 9세의 평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 왕정군이 정무를 보고 왕망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서기 2년, 왕망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딸을 평제와 혼인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고대의 관습을 내세워 평제가 황후 1명과 후궁 11명을 두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귀족 가문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발 절차를 시작했다. 왕망은 태황태후 왕정군에게 자신의 딸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위선적으로 청원한 뒤, 뒤로는 백성들이 자신의 딸을 황후로 간택해달라고 청원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청원자들이 궁궐로 몰려들자, 왕정군은 마지못해 왕망의 딸을 황후로 삼도록 명했다.
원시 3년(3년), 왕망은 과거 곽광의 선례를 명분으로 자신의 딸[10]을 평제의 황후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먼저 태황태후 왕정군을 통해 딸을 후궁으로 입궁시키려 했으나[11],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며 사양하는 태도를 보였다[12]. 왕정군 역시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3]. 그러나 매일 천 명이 넘는 관리와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 왕망의 딸을 황후로 삼을 것을 청원하자[14], 왕정군은 결국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왕망은 황후 후보 중에서 폭넓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하들은 왕망의 딸 외에는 황후가 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대사도와 대사공이 점을 친 결과 역시 '길조(대길)'로 나왔다[15].
여러 신하들이 왕망에게 봉지를 더 늘려줄 것을 청했으나, 왕망은 "내 딸은 황후의 자리에 부족하며, 현재 영토로도 충분하다"며 사양했다[16]. 또한 황후에게는 관례에 따라 황금 2만 근과 동전 2억 전을 빙물로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왕망은 이 역시 사양하고 4천만 전만 받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받은 금액 중 3천 3백만 전을 평제의 다른 후궁 11명의 집에 나누어 주었다[17]. 이에 신하들이 "황후가 받은 빙물이 다른 후궁들보다 많지 않다"고 다시 상주하자, 왕망은 마지못해 2천 3백만 전을 추가로 받아 총 3천만 전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중 1천만 전을 가난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18].
원시 4년(4년) 2월, 조서가 내려져 왕망의 딸이 황후로 정식 책봉되었다.[6] 납채 의식이 거행되었고, 대사도 마궁, 대사공 견풍, 좌장군 손건, 우장군 견한, 광록대부 유흠 등이 왕망의 저택을 방문하여 황후를 미앙궁으로 맞이했다[19]. 왕황후는 황후의 인장과 끈을 수여받고 황제의 수레를 타고 입궁했으며, 대사면령이 내려졌다. 황후의 아버지인 왕망에게는 백 리가 넘는 봉지가 추가되었고[19], 의식에 참여한 관리들과 궁궐 및 왕망 저택의 관련자들에게는 녹봉 인상과 함께 금과 비단이 하사되었다[20].
황후가 된 지 3개월 후, 왕황후는 한고조 유방의 종묘에 참배했다. 같은 해 4월, 아버지 왕망은 제후왕보다 높은 지위인 '재형'에 올랐고, 왕망의 어머니는 '공현군(功顯君)'이라는 칭호와 함께 식읍을 받았다. 왕황후의 오빠 왕안은 포신후(褒新侯)에, 남동생 왕림은 상도후(賞都侯)에 봉해졌다.
원시 5년(5년) 가을, 왕망은 왕황후에게 초경이 있었다는 것을 '자손 번성의 상서로운 징조'라 내세우며, 두릉에서 종남산을 거쳐 한중에 이르는 대규모 토목 공사인 '자오도(子午道)' 건설을 명했다. 같은 해 12월(음력 11월 16일), 남편 평제가 미앙궁에서 14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왕황후의 황후로서의 생활은 막을 내렸다.
2. 3. 과부 시절과 황태후
원시 5년(5년) 겨울, 남편 평제가 미앙궁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평제의 나이는 14세였고, 효평황후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평제는 3년에 자신의 외삼촌들이 살해당하고 어머니의 장안 방문이 불허된 것에 대해 아버지 왕망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왕망이 평제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짙다. 왕망은 당시 악귀를 쫓는다고 여겨진 후추 술에 독을 타 평제에게 먹였고, 평제가 고통스러워하자 자신의 목숨으로 평제를 대신하겠다는 내용의 기도문을 써서 숨겨두었다. 이는 독살이 실패했을 경우 책임을 회피하고, 후세에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된다. 평제가 사망하자 왕망은 스스로를 '섭황제(攝皇帝)'[24] 또는 '가황제(假皇帝)'라 칭하며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기 시작했다.6년 4월, 왕망은 한 선제의 현손이자 평제의 재종손인 당시 1세의 유영을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유자(孺子)'라고 칭했다. 그러나 유영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황태자의 지위에만 두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실권을 계속 장악했다. 이때 효평황후는 황태후로 격상되었다.
시건국 원년(9년) 정월 15일[7], 왕망은 결국 유자 영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넘겨받는 형식(선양)을 취해 신(新)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유자 영은 '정안공(定安公)'으로 강등되었고, 이에 따라 왕씨는 '정안공태후(定安公太后)'로 칭호가 바뀌었다[24]. 그녀는 한나라 시절의 궁궐이었던 명광궁을 '정안관'으로 개칭하고 그곳에서 거처하게 되었다[25].
효평황후는 아버지 왕망의 황위 찬탈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병을 핑계로 신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자신의 거처인 정안관에 머물렀다. 왕망은 딸을 회유하고 개가시키기 위해 '황황실주(黃皇室主)'라는 존칭을 내렸으나, 효평황후는 끝까지 재혼을 거부하며 한나라 황후로서의 절개를 지켰다고 평가받는다.
23년, 유현이 이끄는 한나라 부흥군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을 살해했다. 미앙궁을 비롯한 궁궐이 불타는 혼란 속에서 효평황후는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 사람들을 다시 보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향년 27세였다.
2. 4. 신나라 건국과 저항
원시 5년(기원후 5년) 11월 16일, 평제가 사망하자[8] 왕망은 선제의 현손인 유영을 황태자(孺子)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8] 시건국 원년(기원후 9년) 정월, 왕망은 유영으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제위를 찬탈하여 신(新) 왕조를 세웠다.[24] 유영은 정안공(定安公)으로 강등되었고, 효평황후는 정안공태후(定安公太后)로 칭호가 바뀌었다.[24] 이후 그녀는 한나라 시대의 궁궐이었던 명광궁(明光宮)을 개칭한 정안관(定安館)에 거처하게 되었다.[25]효평황후는 왕망의 찬탈에 강한 불만을 품고[8] 병을 핑계로 신나라 조정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며 전한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평가받는다.[25][8] 건시 2년(기원후 10년) 11월[25], 왕망은 손건(孫建)의 건의에 따라 한나라 역대 황제의 종묘를 폐지하고 유씨(劉氏)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25], 딸의 칭호를 황황실주(黃皇室主)로 바꾸어 전한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시켰다.[8][25] 왕망은 그녀를 다른 사람과 결혼시켜 위로하고자 자신의 심복 중 하나였던 손건의 아들과 혼담을 추진했으나, 황황실주는 크게 분노하여 사자를 돌려보냈다.[8]
같은 해(기원후 10년) 12월[25], 왕망의 측근이었던 견풍(甄豊)의 아들 견심(甄尋)[27]은 "황황실주가 견심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부명(符命, 예언)을 만들어 퍼뜨렸다.[25] 견풍은 왕망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강등된 상태였고[26][25], 아들 견심은 이 부명을 통해 황황실주와의 결혼과 더 큰 권력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8] 왕망은 "황황실주는 천하의 어머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라며 격노했고[28], 이를 계기로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예언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다.[8] 이 사건으로 견풍은 자살했고, 견심은 도망쳤으나 결국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며, 관련된 많은 인물이 처형되었다.[25][8]
이후에도 왕망은 딸을 다른 이에게 시집보내려 사자를 보냈으나, 황황실주는 격노하여 사자의 종자를 채찍질하고 돌려보냈다.[8] 그녀는 계속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고, 왕망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8] 기원후 23년, 경시제 유현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이 살해되자, 미앙궁은 불길에 휩싸였다.[8] 황황실주는 불타는 궁궐을 보며 "내가 어찌 다시 한나라 황실을 볼 면목이 있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8] 당시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8]
2. 5. 최후
기원후 8년, 아버지 왕망이 전한의 제위를 찬탈하고 신(新)을 세우자, 유영은 정안공으로 강등되었고 효평황후는 정안공태후(定安公太后)가 되었다. 효평황후는 아버지의 찬탈에 불만을 품고 병을 핑계로 궁궐에 칩거하며 외부 활동을 삼갔다.10년 (건시 2년), 왕망은 한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는 의도로 그녀의 칭호를 황황실주(黃皇室主)로 변경했다.[25] 이는 한 고조 유방을 비롯한 한나라 황제들의 종묘를 폐지하고 옛 한나라 황족인 유씨들을 차별하는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25] 왕망은 딸을 다른 이에게 시집보내려 사자를 보냈으나, 황황실주는 격노하여 사자를 채찍으로 때리고 돌려보내며 재혼을 강하게 거부했다. 이후 병을 이유로 더욱 두문불출했고, 왕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23년 (지황 4년) 10월, 녹림군을 비롯한 각지의 반란군이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면서 왕망 정권은 몰락하였다.[29] 한나라 황실의 후예인 유현이 이끄는 군대가 장안에 입성하고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봉기하는 혼란 속에서 황궁인 미앙궁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이 황황실주가 머무는 곳까지 번지자, 그녀는 "내가 어찌 한나라 황실을 다시 볼 면목이 있겠는가!"[28]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불길 속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29] 이때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아버지 왕망 역시 이 혼란 속에서 곧 살해되었다.
3. 평가
(내용 없음)
3. 1. 긍정적 평가
효평황후의 전기는 유향이 처음 시작한 열녀전에 추가되었다. 그녀의 전기는 續列女傳|속열녀전중국어 권8, 제16편에 실려 있는데, 이는 그녀가 후대에 모범적인 여성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3. 2. 부정적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4. 기타
5. 가계
왕씨 부인
왕만
취
의춘후 왕함
(미상)
양평후 왕진
이친
왕공
왕하
왕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