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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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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극장은 1907년 대한제국 한성부에 연극 극장 수좌로 개관하여, 일제강점기에는 경성극장으로, 해방 이후에는 세기극장,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변경하며 운영된 대한민국의 극장이다. 수좌 시절에는 일본인을 위한 연예 및 가부키 공연이 주로 상연되었으며, 경성극장으로 개칭 후에는 연극 중계 방송,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1958년 국회의원 국쾌남이 인수하여 세기극장으로 개칭,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와 로보트태권V를 상영하며 흥행을 기록했다. 1978년 서울극장으로 재개관, 1997년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경되는 등 한국 영화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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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극장
기본 정보
회사명서울극장
영문 회사명Seoul Cinema
서울극장 로고
신문 광고에 사용된 로고
종류사업장
국적대한민국
본사 우편번호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59번지 7호
설립1907년 (壽座 개관), 1964년 (현재 경영 회사 창립)
업종서비스업
사업 내용영화의 흥행
대표자고은아
주요 주주합동영화
외부 링크seoulcinema.com
연혁
1907년壽座 개관
1916년경성극장으로 재개관
1940년영화관화
1946년경서울극장으로 개칭
1958년세기극장으로 개칭
1977년서울극장으로 재개칭
관련 인물

2. 연혁


  • 1907년 - '''수좌'''로 개관[3]
  • 1916년 - '''경성극장'''으로 재개관[2]
  • 1929년 2월 13일 - 화재로 소실[8]
  • 1930년 - 재건[9]
  • 1940년 - 영화관으로 전환, 대영이 인수[4][5]
  • 1946년경 - '''서울극장'''으로 개칭[10]
  • 1958년 - 국쾌남이 인수, '''세기극장'''으로 개칭, 경영 회사 세기상사 설립[6]
  • 1977년 - 영화 감독 곽정환이 인수, '''서울극장'''으로 재개칭[7]

2. 1. 대한제국 시기 (1907-1910)

1907년(메이지 40년), 대한제국 말기, 한성부 수동(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3가 94번지)에 '''수좌'''라는 이름의 연극 극장이 문을 열었다.[3]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었으며, 1910년(메이지 43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극장이 문을 열 당시부터 이미 이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좌에서는 일본인들을 위한 연예나 가부키 등의 연극이 주로 상연되었다.[3]

2. 2. 일제강점기 (1910-1945)

1910년(메이지 43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극장 주변 지역은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변화하였다.[3] 1916년(다이쇼 5년)에는 건물을 개수하여 '''경성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분시마 슈지로우가 경영했다.[2] 분시마는 이후 경성부 황금정 1정목(현재의 을지로1가)에 600명을 수용하는 영화관 "라쿠텐치"를 경영한 인물이기도 하다.[11]

경성극장은 목조 3층의 일본식 건물이었으며, 1922년(다이쇼 11년)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다. 1927년(쇼와 2년) 2월 16일, 조선방송협회 경성중앙방송국(JODK, 현재의 한국방송공사)이 본방송을 시작한 지 한 달 뒤인 3월 18일부터 경성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을 중계 방송했다.[12]

1929년(쇼와 4년) 2월 13일 새벽, 화재로 극장이 완전히 불타버렸다.[8] 이 화재로 15만(당시)의 손해액이 발생했으며, 소방관 2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보도되었다.[8] 이후 복구에는 약 1년의 휴관 기간이 필요했으며, 이듬해 1930년(쇼와 5년) 3월 1일 자 동아일보는 작은 기사로 경성극장의 재건 예정 소식을 보도했다.[9] 재건 예산은 10.2만(당시)이었다.[9] 같은 해, 목조 2층 벽돌 건물이 완공되었다. 마술사 쇼큐사이 텐쇼와 쇼큐사이 텐카도가 이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1]

1940년(쇼와 15년) 전후, 경성극장은 영화관으로 업태를 변경했다.[2] 1942년(쇼와 17년)에 발행된 『영화 연감 쇼와 17년판』에 따르면, 당시 극장 경영자는 가와무라 마사시였고, 지배인도 겸임했으며, 관객 정원은 750명이었다.[4]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전시 통제가 실시되면서, 일본 내 모든 영화는 사단법인 영화 배급사의 배급을 받게 되었고, 모든 영화관은 홍계·백계의 2계통으로 편성되었지만, 해당 자료에는 경성극장의 흥행 계통에 대한 기술은 없다.[4] 1943년(쇼와 18년)에 발행된 『영화 연감 쇼와 18년판』에 따르면, 경성극장은 전년 1월 27일에 발족한 다이닛폰 영화 제작(대영)의 직영관이 되었다.[5] 당시 극장 경영은 아사쿠라 후사키치가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 3. 해방 이후 (1945-현재)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같은 해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 재조선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종전 직후, 浪花館(후의 명동극장), 명치좌 (경성부)(현재의 명동예술극장) 등 전 지역의 영화관에서 '해방 뉴스'(해방뉴쓰 특보한국어)라는 조선 자체 제작 단편 영화 시리즈 제1편(9분[13])이 상영되었다.[14] 이때 극장 이름은 '경성극장'이었으며, 대부분 일제강점기 시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14] 1946년에 발행된,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후 처음 발간된 연감인 《조선 연감》에는 '''서울극장'''으로 해당 극장이 기재되어 있으며, 소재지는 충무로3가였다.[10] 같은 해부터 1948년까지, 해당 극장에서는 한국인에 의한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다.[10]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충무로3가에서 종로3가 지역인 관수동으로 이전했다.

1958년 국쾌남이 극장을 인수하고 '''세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경영 회사 세기상사를 설립했다.[6] 국쾌남은 대한극장한국어도 설립하여, 해당 극장과 동시 개봉으로 많은 영화를 상영했다.[6] 세기상사는 1968년 흥행계에서 처음으로 주식을 상장했으며, 국쾌남은 한국 영화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6] 1976년에는 한국 최초의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 《로보트 태권V》(로보트 태권V한국어, 감독 김청기)가 세기극장과 대한극장에서 동시 개봉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19]

1977년, 영화 감독 곽정환이 극장을 인수하고 '''서울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7] 1978년, 철근 콘크리트조 4층 건물로 개축하여 재개관했다.[7][23] 1982년, 야간 통행 금지 해제와 함께 심야 상영을 시작, 《애마부인한국어》(애마부인한국어, 감독 정인엽한국어)을 개봉하여 4개월 동안 31만 5,738명을 동원하는 큰 흥행을 기록했다.[25]

1997년에는 7개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바뀌었다.[7] 2013년, 곽정환 회장이 별세하고, 배우이자 곽정환의 부인인 고은아 (1946년)한국어가 극장 경영을 이어받았다.[7]

3. 주요 시설 및 특징

경성극장은 초기 목조 3층 건물(일본식 가옥)에서 시작하여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쳤다. 1930년 목조 벽돌 2층 건물로 재건되었고,[1] 197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4층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1] 1997년에는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모하여 7개의 스크린을 갖추게 되었다.[7]

처음에는 대한제국 한성부 수동 3정목에 위치했다가[2][4][5]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본정 3정목 94번지(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3가 94번지)로 이전했다.

3. 1. 구조 및 디자인

경성극장은 목조 3층 건물(일본식 가옥)에서 목조 벽돌 2층 건물[1]을 거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변화했다.

3. 1. 1. 일제강점기

경성극장, 1922년.


화재로 잿더미가 된 경성극장(동아일보, 1929년 2월 14일자). 이듬해에 복구되었다.


대한제국한성부 수동 3정목에 처음 위치했으며, 이후 조선 경성부 본정 3정목 94번지[2][4][5](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3가 94번지)로 이전했다. 초기에는 목조 3층 건물(일본식 가옥)이었으나 1930년 재건되면서 목조 벽돌 2층 건물[1]이 되었다. 1942년[4]과 1943년[5] 기록에 따르면 관객 정원은 750명이었다.

3. 1. 2.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경성극장은 여러 차례 소유주와 구조가 변경되었다. 1978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4층 건물로 재개관하였고,[1] 1997년에는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경되어 7개의 스크린을 갖추게 되었다.[7]

경영 주체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국쾌남이 대표로 있던 세기상사[6], 곽정환이 대표로 있던 합동영화[7] 등이 경성극장을 운영하였다.

3. 2. 경영 주체


  • 분도주차랑
  • 가와무라 마사시[4]
  • 대영 (아사쿠라 후사키치)[5]
  • 마쓰오 구니조
  • 세기상사 (대표 국쾌남)[6]
  • 합동영화 (대표 곽정환)[7]
  • 고은아 (1946년)|고은아한국어[7]

3. 3. 위치 정보

경성극장은 처음에는 대한제국 한성부 수동 3정목(수좌 시대)에 위치했다.[2][4][5]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경성부 본정 3정목 94번지로 위치가 변경되었으며, 현재 주소로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59번지 7호에 해당한다.

4. 한국 영화사에서 갖는 의의

경성극장은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했다. 1945년 해방 직후, '해방 뉴스'(해방뉴쓰 특보한국어)라는 조선 자체 제작 단편 영화 시리즈 제1편(9분)이 경성극장을 비롯한 전 지역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13][14] 1946년 발행된 《조선 연감》에는 '서울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충무로3가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0]

이후 극장은 종로3가 관수동으로 이전했다. 정확한 이전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4. 1. 한국 영화 산업 발전의 중심지

1976년 한국 최초의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 영화 《로보트 태권V》가 김청기 감독에 의해 제작되어, 이 극장과 대한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다.[19] 1977년 곽정환이 이 극장을 인수하여, 1978년 서울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하였다.[7][23] 곽정환은 1964년 합동영화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과 감독을 하였으나, 극장 경영을 통해 흥행업으로 크게 전환하였다.[7]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야간 통행 금지를 해제하자, 이 극장은 심야 상영을 시작했고, 그 첫 작품으로 안소영 주연의 《애마부인》을 상영하여 4개월간 31만 5,738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25] 이는 한국 관능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4. 2. 시대별 대표작 상영

1958년, 국쾌남은 극장을 매수하여 '''세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기상사를 설립했다.[6] 그는 대한극장도 설립하여, 두 극장에서 많은 영화를 동시 개봉했다.[6] 같은 해 7월 16일에는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생명|이강천한국어 감독)이 세기극장과 수도극장(후의 스카라극장)에서 동시 개봉되었다.[15][16] 1968년, 세기상사는 주식을 상장하여 한국 영화계 발전에 기여했다.[6] 같은 해 7월 12일, 명동의 코리아 극장과 세기극장에서 《심판》(심판|고영남한국어 감독)이 동시 개봉되었다.[17][18] 1976년 7월 24일, 한국 최초의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로보트태권V|김청기한국어 감독)가 세기극장과 대한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다.[19]

1977년, 곽정환은 세기극장을 매수하고,[7][22] 이듬해 '''서울극장'''으로 재개관했다.[7][23] 개관작은 《마지막 겨울》(마지막 겨울|정소영한국어 감독)이었다.[23][24] 1982년, 야간 통행 금지 해제 후, 서울극장은 심야 상영을 시작, 《애마부인》(애마부인|정인엽한국어 감독, 안소영 주연)을 개봉하여 4개월간 3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25]

4. 3. 멀티플렉스 도입 등 변화

1997년, 서울극장은 한국 영화계의 흐름에 발맞춰 7개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신했다.[7] 이는 단순한 시설 확장을 넘어, 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 선택의 폭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 한국 영화 산업 전반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중요한 변화였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야간 통행 금지를 해제하자, 서울극장은 심야 상영을 시작하며 애마부인을 개봉하여 4개월간 3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25]

참조

[1] 서적 2002
[2] 서적 2008
[3] 서적 2010
[4] 간행물 年鑑 1942
[5] 간행물 年鑑 1943
[6] 뉴스 대한극장 국쾌남 명예회장 별세 외 http://www.chosun.co[...] 朝鮮日報 2007-11-17
[7] 뉴스 충무로 대부'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 별세 http://www.yonhapnew[...] 聯合ニュース 2013-11-08
[8] 뉴스 「昨曉京城劇場灰燼 被害十五萬圓」 東亜日報 1929-02-13
[9] 뉴스 「불탄녯자리에 京城劇場再建 拾萬貳千圓豫算」 東亜日報 1930-03-01
[10] 서적 2008
[11] 간행물 総覧 1930
[12] 서적 2004
[13] 웹사이트 해방뉴쓰 특보 No1 http://www.kmdb.or.k[...] 2013-12-05
[14] 웹사이트 새롭게 보는 한국보도영상사5 해방 조선의 영사가들 http://www.tvnews.or[...] 2012-07-24
[15] 서적 1999
[16] 웹사이트 생명 http://www.kmdb.or.k[...] 2013-12-05
[17] 웹사이트 심판 http://www.kmdb.or.k[...] 2013-12-05
[18] 웹사이트 審判 http://www.oldcinere[...] 2013-12-05
[19] 웹사이트 로보트 태권 V http://www.kmdb.or.k[...] 2013-12-05
[20] 웹사이트 독수리전선 http://www.kmdb.or.k[...] 2013-12-05
[21] 웹사이트 독수리전선 http://postfiles13.n[...] 2013-12-05
[22] 웹사이트 Jeong-hwan Kwak https://www.imdb.com[...] 2013-12-04
[23] 웹사이트 마지막겨울 서울극장 旧・세기극장 http://postfiles14.n[...] 2013-12-05
[24] 웹사이트 마지막 겨울 http://www.kmdb.or.k[...] 2013-12-05
[25] 웹사이트 애마부인 http://www.kmdb.or.k[...] 2013-12-05
[26] 논문 활동사진시기 조선영화산업 연구 한양대 대학원 2010-02
[27] 뉴스 火神(화신)의 猛威(맹위)와 朝鮮人(조선인)의 傳說(전설) 『해타가자리옮기자 京城(경성)에 火災頻發(화재빈발)』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2011-06-11
[28] 뉴스 불탄녯자리에 京城劇場再建(경성극장재건)拾萬貳千禐豫算(십만이천원예산)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2011-06-11
[29] 논문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 대학원 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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