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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송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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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방송협회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4월 경성방송국이 법인으로 전환되면서 변경된 명칭으로,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의 운영을 담당했다.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여 뉴스, 음악, 드라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송했으며, 이후 전국으로 방송국이 확대되었다. 1932년 조선방송협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1933년 한국어 방송을 시작하여 라디오 보급과 함께 청취자가 증가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전시 체제 하에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언론 탄압이 심화되었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방송협회로 개칭, 현재의 한국방송공사(KBS)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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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송협회 - [TV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방송국 명칭조선방송협회
운영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설립1932년 3월 8일
소재 국가(1932년~1948년)
소재지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정동정 1-10
연주소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정동정 1-10
개국일1927년 2월 16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개국)
개칭일1932년 3월 8일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개칭)
폐국일1948년 대(大)한방송협회로 개칭 (현: 한국방송공사)
채널 정보
방송 매체라디오
호출 부호JODK
방송 채널 번호1
주파수AM 817kHz
방송 언어일본어 (제1방송)
한국어 (제2방송)
추가 정보
외부 링크조선방송협회

2. 역사

일제강점기 라디오 방송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1926년 '경성방송국창립준비위원회'가 방송 허가를 신청했고, 같은 해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이 인가되었다. 경성방송국의 호출 부호는 'JODK'로, '일본에서 4번째로 허가된 방송국'이라는 의미였다.

1927년 시험 방송을 거쳐 본방송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일본어와 조선어 방송 비율이 5:5였으나, 청취 계약 수가 적어 경영난을 겪었다. 1933년 조선어 전용 제2방송이 시작되면서 일본어와 조선어 방송이 분리되었지만, 주로 일본인 세대의 청취 계약 수가 증가했다. 당시 라디오 청취료는 월 1원(1938년 75전으로 인하)으로, 빈곤층 조선인 세대에는 보급이 쉽지 않았다.

일중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방송은 전시 색채가 강해졌고, 인기 있던 가요 프로그램도 전쟁 의지를 고취하는 노래들로 채워졌다. 1942년 방송 전파관제로 제2방송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1943년 재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국 라디오 방송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해방 직후 혼란 속에서도 방송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다.[1] 1942년 단파 방송 밀청 사건으로 경성방송국 관계자 등이 옥고를 치렀다.[1] 1945년 8월 13일 청진방송국이 일본제국 육군에 의해 폭파되었다.[1] 해방 이후 '한국방송공사'로 개칭되었고, 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했으나 미군정청이 접수했다.[1]

2. 1.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에 라디오가 들어온 것은 1920년대 중반이다. 1926년 2월, '경성방송국창립준비위원회'가 사단법인 설립과 방송용 사설 무선전화 시설 허가를 신청했고, 같은 해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12월에는 방송용 사설 무선전화 시설이 허가되었다. 경성방송국의 호출 부호는 'JODK'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4번째로 허가된 방송국'이라는 의미였다. 당시 내무성(逓信省)은 'JO××' 호출 부호를 일본 본토(内地)용으로, 외지에는 조선에 'JB××', 대만(日本統治時代の台湾)에 'JF××', 관동주(関東州)에 'JQ××'를 할당하려 했기에, 경성방송국에 'JODK'를 부여하려는 조선총독부와 내무성이 대립했으나, 결국 무선국 허가(許認可) 권한을 가진 조선총독부 내무국(逓信局)의 판단에 따라 'JODK' 할당이 결정되었다.

경성방송국은 1927년 1월 시험 방송을 시작, 같은 해 2월 16일 본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대상 지역은 조선 전역, 파장 345m(주파수 870kc), 출력 1kW였으며, 방송 편성은 일본어 5, 조선어 5 비율의 교차 방송이었다. 그러나 출력이 작아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았고, 청취료가 월 2원으로 비싸 청취 계약 수는 적었다. 1927년 7월, 방송 편성 비율을 일본어 6, 조선어 4로 변경하고, 10월에는 청취료를 월 1원으로 인하했다. 1929년 3월에는 일본 본토로부터의 프로그램 중계를 늘리고, 방송 편성 비율을 일본어 7, 조선어 3으로 변경했으나, 개국 후 4년이 지나도 청취 계약 수는 약 1만 1천 건에 불과했다.

경영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1931년 2월, 경성방송국은 조선어 전용 제2방송 실시 계획을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와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의 지원을 받아 1932년 4월, 경영 주체를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개편하고(경성방송국은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 제1방송(일본어) 증력과 제2방송 신설을 완료했다. 제2방송은 1933년 4월에 시작되었고, 일본어와 조선어를 분리한 방송은 호평을 받았으나, 주로 일본인 세대의 청취 계약 수가 증가했다. 당시 라디오 방송 청취에는 월 1원(1938년 4월 75전으로 인하)의 청취료가 필요해 빈곤층이 많은 조선인 세대에는 보급이 쉽지 않았다.

일중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방송도 전시 색채가 강해졌고, 제2방송에서 인기 있던 가요 프로그램도 전쟁 의지를 고취하는 노래들로 채워졌다. 1942년 4월, 방송 전파관제로 경성중앙방송국의 제2방송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지방국에도 제2방송 설비를 신설하여 1943년 11월에 재개되었다.

2. 1. 1. 경성방송국 개국 (1927년)

1924년 12월 17일조선일보》는 조선인이 주관하는 첫 라디오 시험방송을 보도했는데, 우미관에서 열린 시연회에는 3천 명의 인파가 몰려 전차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1] 1925년 여름,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라디오 시험방송을 시작했고, 이후 1년 6개월 동안 경성방송국 설립 준비가 진행되었다. 방송국 부지는 해발 84m의 정동 1번지로 결정되었으며, 당시 경성방송국 사옥은 대지 190평, 지하 1층-지상 2층에 방송용 첨탑을 갖춘 건물이었다.[1]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경성방송국은 JODK라는 콜 사인으로 첫 전파를 송출했다. JODK는 도쿄방송국의 JOAK, 오사카방송국의 JOBK, 나고야방송국의 JOCK 다음에 개국했다는 의미로 'D'가 배정되었다. 첫 방송은 일본인 방송주임 미쓰나가가 일본어로 진행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방송인이자 아나운서였던 이옥경이 한국어로 동시 통역했다.[1]

초기 경성방송국의 편성은 뉴스, 기악연주, 단가, 만담, 강연, 소설 낭독, 외국어 강좌, 라디오극, 국악 등으로 구성되었다. 개국 당시 뉴스는 오후 3시 50분과 오후 7시, 두 차례 방송되었는데, 이는 방송국에 직속 기자가 없어 통신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공공기관의 공지를 주요 뉴스로 전했기 때문에 휴일에는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라는 내용을 방송하기도 했다.[2]

경성방송국 설립 및 개국과 관련된 주요 날짜는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1926년 2월 15일경성방송국 창립 준비 위원회, 방송용 사설 무선전화 시설 설치 신청
1926년 6월 7일건물 건설 공사 착공
1926년 11월 30일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인가, 초대 이사장은 모리 고이치(森悟一)
1926년 12월 6일건물 준공
1926년 12월 9일조선총독부, 경성방송국에 방송용 사설 무선전화 시설 인가(호출 부호: JODK)
1926년 12월 9일경성방송국, 청취 규약 제정(청취료를 월액 2원으로 결정)
1926년 12월 21일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등기
1927년 1월 20일경성방송국, 시험 방송 개시
1927년 2월 16일경성방송국, 본방송 개시(출력 1kW, 방송 편성 비율은 일본어 5, 조선어 5)


2. 1. 2. 방송 발전과 전국 확대

1932년 4월 7일, 경성방송국은 법인명을 조선방송협회로 변경하였고, 1935년에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33년 4월 26일부터는 일본어로 방송하는 경성제1방송(900kHz)과 한국어로 방송하는 경성제2방송(610Khz)을 분리하여 송출하기 시작했다. 방송 기술과 장비가 발전하고 뉴스, 드라마 등 방송 내용도 인기를 얻으면서, 스피커 내장형 휴대용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어 라디오 전성시대가 열렸다. 1937년에는 한국에 보급된 라디오 수가 10만 대에 달했다. 전국 방송을 위해 연희동에 10kW급 연희 송신소를 건설하였고, 이후 50kW로 출력을 증강하였다.

같은 해 부산에서 부산방송국(JBAK)이 개국하였으며, 이후 지방 방송국은 다음과 같이 설립되었다.

방송국명개국 연도비고
부산방송국(JBAK)1935년
평양방송국(JBBK)1936년
청진방송국(JBCK)1937년
이리방송국(JBFK)1938년
함흥방송국(JBDK)1938년
대구방송국(JBGK)1940년
광주방송국(JBHK)1942년
대전방송국(JBIK)1943년
원산방송국(JBJK)1943년
해주방송국(JBKK)1943년
신의주방송국(JBLK)1943년
춘천방송국(JBMK)1944년
목포방송국(JBNK)1942년
마산방송국(JBOK)1943년1944년 1월, 방송국으로 승격
성진방송국(JBPK)1943년
청주방송국(JBQK)1945년
강릉방송국(JBRK)1941년1943년 11월, 방송국으로 승격


2. 1. 3. 전시 체제와 탄압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제국은 라디오 방송을 선전 도구로 이용하였다.[1] 1942년부터 한국어 방송을 중단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을 금지했다.[1]

같은 해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발생하여 경성방송국 관계자 등이 옥고를 치렀다.[1] 이 사건은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VOA) 조선어 방송을 청취하다 적발된 것으로, 1943년 11월 관련자 10명이 실형 판결을 받았다.[2]

1945년 8월 13일, 소련군 진주를 앞두고 일본제국 육군이 청진방송국을 폭파했다.[1] 이는 일제 패망 직전의 만행을 보여준다.

2. 2. 광복과 대한민국 방송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국 라디오 방송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방송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2. 1. 미군정 시기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전시하 정책에 따라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다.[1] 1942년 말에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 경성방송국 관계자와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1] 1945년 8월 13일에는 청진방송국이 소련의 진주에 방송장악을 우려한 일본제국 육군에 의해 폭파되어 사라지기도 했다.[1] 해방 이후 9월 9일부터는 '한국방송공사'라고 개칭되었으며, 9월 15일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하였으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경성중앙방송국을 접수하였다.[1] 이후 조선방송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1]

3. 일제강점기 방송국 목록 (1945년 8월 기준)

호출 부호방송국명소재지주파수(제1방송)주파수(제2방송)개국일(제1방송)개국일(제2방송)비고
JODK경성중앙방송국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정동정 1-10710kc970kc1927년 2월 16일1933년 4월 26일
JBAK부산방송국경상남도 부산부 대청정 일정 7650kc1030kc1935년 9월 21일1941년 8월
JBBK평양방송국평안남도 평양부 오야리 130820kc1090kc1936년 11월 15일1936년 11월 15일
JBCK청진방송국함경북도 청진부 목가정 8-3850kc1100kc1937년 6월 5일1941년 8월
JBDK함흥방송국함경남도 함흥부 산정정 일정 79780kc1050kc1938년 10월 30일1939년 4월
JBFK이리방송국전라북도 익산군 이리읍 남중정 86570kc1100kc1938년 10월 1일1942년 4월
JBGK대구방송국경상북도 대구부 원대동 1169800kc1070kc1940년 10월 30일1941년 4월 19일
JBHK광주방송국전라남도 광주부 사정 117-2780kc1040kc1942년 3월 21일1942년 3월 21일
JBIK대전방송국충청남도 대전부 북정 15650kc880kc1943년 7월 15일1944년 11월 10일
JBJK원산방송국함경남도 원산부 영정 15650kc900kc1943년 7월 15일1943년 11월 10일
JBKK해주방송국황해도 해주부 광석정800kc1080kc1943년 8월1943년 11월 10일
JBLK신의주방송국평안북도 신의주부 상반정 구정 10600kc1943년 8월
JBMK춘천방송국강원도 춘천군 춘천읍 대화정 106600kc1944년 12월 20일
JBNK목포방송국전라남도 목포부 양동 86-11280kc1942년 11월 1일
JBOK마산방송국경상남도 마산부 상남정 74-2600kc1943년 4월 30일1944년 1월, 방송국으로 승격[1]
JBPK성진방송국함경북도 성진부 욱정 460600kc1943년 11월
JBQK청주방송국충청북도 청주군 청주읍 석교정600kc1945년 6월 16일
JBRK강릉방송국강원도 강릉군 강릉읍 교동리600kc1941년 12월 6일1943년 11월, 방송국으로 승격[2]
개성보조방송소경기도 개성부 지정 59600kc1942년 10월
장전보조방송소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장전리 258600kc1944년 3월
서산보조방송소충청남도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103600kc1945년 3월
진남포보조방송소평안남도 진남포부600kc(예정)미개소,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 종결로 건설 중단


4. 수신료 제도

라디오 수신을 위해서는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하는 것 외에 2원씩 수신료를 내고 허가증을 문앞에 부착해야 했다. 이러한 수신료 징수 제도는 영국의 BBC가 처음 시작한 방식인데, 일본의 일본방송협회가 이를 참고했고, 조선방송협회는 이를 다시 참고했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은 본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대상 지역은 조선 전역이었고, 초기에는 일본어와 조선어 방송 비율이 5:5였다. 그러나 출력이 작아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았고, 청취료가 월 2원으로 비싸 청취 계약 수가 많지 않았다. 1927년 7월에는 방송 편성 비율을 일본어 6, 조선어 4로 변경하고, 10월에는 청취료를 월 1원으로 인하했다. 1929년 3월에는 일본 본토 프로그램 중계를 늘리고 방송 편성 비율을 일본어 7, 조선어 3으로 변경했으나, 개국 후 4년이 지나도 청취 계약 수는 약 1만 1천 건에 머물렀다.

4. 1. 라디오 등록 대수 변화

연도총 등록 대수한국인일본인
1927년 12월 31일5,260대949대4,161대
1930년 12월 31일10,226대
1931년 12월 31일14,733대
1933년 12월 31일32,058대
1934년 12월 31일40,671대
1936년 12월 31일73,247대
1939년 12월 31일112,032대
1940년 12월 31일227,573대
1941년 12월 31일272,000대
1943년 7월 30일285,000대
1944년 12월 31일300,050대



1936년 1월 11일에는 라디오 등록 총 5만 대 돌파를 축하하는 방송이 있었다.

참조

[1] 서적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황소자리 2017-09-23
[2] 서적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황소자리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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