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제2차 만세 운동
1. 개요
경성 제2차 만세 운동은 1930년 1월 허정숙의 지도 하에, 각 학교 학생대표회의 계획에 따라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려던 운동이다. 이화여고보 등 13개교에서 여학생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34명이 구속되고 55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구속된 허정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운동은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 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
1930년 1월 -
런던 해군 군축 회담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은 1930년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잠수함 무장 제한 및 함선 건조 제한을 주요 내용으로 체결한 조약이며, 일본의 탈퇴로 군축 시대가 종식되었다. -
1930년 한국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년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차별에 저항하여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5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3·1 운동과 동등한 수준의 민족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
1930년 한국 -
1930년 전국동계체육대회
1930년 전국동계체육대회는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으로 열렸으며, 박응근, 함명순, 최재은, 이혜석 등이 우승하고 남자 및 여자 경기에서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
일본 제국의 학생 운동 -
2·8 독립 선언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 선언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며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
일본 제국의 학생 운동 -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 동아일보사 주도로 시작되어 1938년 중단된 농촌 계몽 운동으로, 김성수, 송진우 등이 주도하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촌에서 문맹 퇴치, 학술 강연, 위생 개선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 해방 후 농활로 이어졌다.
2. 배경
1929년 12월 중순경, 허정숙은 최복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에는 신간회의 민중대회 계획이 누설되어 20명이 체포된 민중대회사건(허헌 사건)이 발생했고, 허헌도 수감되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허정숙은 굴하지 않고, 1930년 1월 여성 주도의 항일 투쟁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 근우회 서무부장이었던 허정숙은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 전개했다.
3. 계획과 전개 과정
허정숙이 고문으로 지도했던 이 만세시위 운동은 각 학교 학생대표회가 학생 시위 계획을 사전에 수립, 1월 15일 제3학기가 시작되는 아침에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시가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잡히더라도 일체 이름을 밝히지 말 것과 유치될 경우에는 단식을 행하자는 3개 항의 결의를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16일 자 기사에 따르면 허정숙은 허정자로 표기되기도 했으며, 학생대표 준비모임에는 남학생 대표도 다수 참가하였다.
4. 여학생 만세운동
1930년 1월, 허정숙은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함께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제2차 학생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정칠성, 박차정 등도 함께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허정숙은 다시 연락망을 구성하여 1월 중순 만세운동 거사 날짜를 확정하고 유인물과 태극기를 등사하여 살포하였다. 이화여고보를 비롯한 시내 공사립 여자고등보통학교와 그밖에 중등학교 등 13개교가 일제히 만세를 부른 여학생 만세운동 결과, 구속자 34명, 불구속자 55명이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이들 모두 여학생이었다는 점이 당시 사회의 큰 관심거리로 주목받았다.
5. 구속 및 재판
1929년 12월 중순, 허정숙은 최복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30년 1월, 근우회가 주도한 제2차 학생 시위는 허정숙이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 전개한 것이다. 정칠성, 박차정 등도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허정숙은 다시 연락망을 구성하여 1월 중순 만세운동 거사 날짜를 잡고 유인물과 태극기를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이화여고보를 비롯한 시내 공사립 여자고등보통학교와 중등학교 등 13개교가 일제히 만세를 부른 여학생 만세운동 결과, 구속자 34명, 불구속자 55명이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이들 모두 여학생이었다는 점이 당시 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허정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산고로 일시 형집행정지를 받았다가, 다시 부친 허헌과 함께 복역, 1932년 3월 18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구속된 인원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20일, 3월 19일, 23, 24, 26일 자에 재판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최복순 외 7명은 징역 7~8개월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여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비교적 가볍게 처벌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