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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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차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1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의 항일 투쟁과 가족들의 독립운동 참여의 영향을 받아 학생운동에 투신했으며, 근우회 활동과 광주학생운동 지원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의열단에 가담하여 김원봉과 결혼하고,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활동, 난징 조선부녀회 조직, 조선 의용대 부인 복무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39년 관룬관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이후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충칭에서 사망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시 〈개구리 소래〉, 소설 〈철야〉, 수필 〈가을 아침〉 등의 작품을 남겼다.

박차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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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이름박차정
한자 이름朴次貞
로마자 표기Bak Cha-jeong
별칭임철애, 임철산
출생일1910년 5월 7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사망일1944년 5월 27일
사망지중화민국 쓰촨성 충칭
사망 원인병사 (총상 후유증, 관절염, 등의 합병증)
국적-
직업작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군인
종교-
배우자김원봉
자녀없음
친척박문희(오빠), 박문호(오빠), 김두봉(외당숙), 김약수(외당숙)
모교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활동
관련 활동독립운동
소속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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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초반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부산(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박용한은 대한제국의 관료였으나, 1910년 한일 병합에 항거하여 자결했다. 어머니 김맹련은 독립운동가 김두전, 김두봉과 친척이었고, 숙부 박일형(朴日馨) 역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다.

1929년 한국 최초의 호주 선교사 학교인 J.B. 하퍼 기념 학교(the J.B. Harper Memorial School)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동맹 휴업을 주도하고, 서울에서 항의 활동을 하다 검거되기도 하였다.

2.1. 출생과 가계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이던 현 부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박용한은 대한제국의 관료였으나, 1910년 한일 병합에 항거하여 자결했다. 어머니 김맹련은 독립운동가 김두전(金枓全), 김두봉(金枓鳳)과 친척이었고, 숙부 박일형(朴日馨) 역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박차정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녀의 가계는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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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아버지박용한(朴容翰)1910년 한일 병합에 항거, 자결
어머니김맹련(金孟蓮)
오빠박문희(朴文熺)1901년 ~ ?,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실종,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
오빠박문호(朴文昊)1907년 ~ 1934년
언니박수정(朴首貞)
아우박문하(朴文夏)1918년 ~ 1975년
남편김원봉(金元鳳)호는 약산(若山), 1898년 - 1958년 11월
외당숙김두봉(金枓奉)1889년 - 1961년?, 독립운동가 겸 한글학자
외재종숙김약수(金若水)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독립운동가
친척박일형(朴日亨)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정확한 혈연관계는 알 수 없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글 학자인 김두봉은 5촌 당숙(어머니의 사촌)이다.

2.2. 학창 시절

박차정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료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버지는 1910년 한일 병합에 항거하여 자결했다. 1929년 한국 최초의 호주 선교사 학교인 J.B. 하퍼 기념 학교(the J.B. Harper Memorial School)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동맹 휴업을 주도하고, 서울에서의 항의 활동을 실시하여 검거되기도 하였다. 항일민족의식과 남녀평등사상을 더욱 고취시키며 일신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교지 『일신』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3. 독립운동

박차정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료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버지는 1910년 한일 병합에 항거하여 자결했다. 1929년 J.B. 하퍼 기념 학교를 졸업한 박차정은 재학 중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동맹 휴업을 주도하고, 서울에서의 항의 활동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석방 후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썼으며, 1931년 김원봉과 결혼했다. 1935년 의열단 등이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난징 조선부녀회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 운동과 병행하여 여성 해방 운동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 의용대의 부인 복무단장에 취임했지만, 1939년 광시성관룬관에서 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글 학자인 김두봉은 박차정의 5촌 당숙(어머니의 사촌)이다.

3.1. 근우회 활동과 중국 망명

1925년 근우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와 노동자 파업 주동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자, 둘째 오빠 박문호가 있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0년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로부터 연락을 받고 배편으로 중국으로 갔다. 망명 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 공로가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과 의열단 간부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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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다가 안광천의 소개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1931년 결혼했고, 김원봉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였다. 김원봉은 본래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했으나 본처와 헤어지고 나중에 새 장가를 든다. 정화암은 그가 박차정을 만나기 전에 본처가 있었으며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과의 결혼은 새장가라고 증언하였다.

박차정은 1936년에 설립된 남경 조선 부녀 동맹의 선언문에 다음과 같이 기여했다.

> 전통적인 억압은 우리 조선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으며, 다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우리의 생존권이 빼앗겼다. 우리는 전통적인 억압에 의해 가정의 노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약탈 시장의 생산물로서 임금 노동의 노예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일본 제국을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여성들은 봉건 제도의 제약과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 타도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여성은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할 것이다.

3.2. 의열단 활동과 김원봉과의 결혼

1930년 봄, 박차정은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배편으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망명 후, 국내에서의 항일 투쟁 공로가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과 의열단 간부로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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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다가 안광천의 소개로 1931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했다. 김원봉과 결혼하면서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김원봉은 본래 평안도 출신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했지만, 본처와 헤어지고 새 장가를 들었다. 훗날 정화암은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나기 전에 본처가 있었으며,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과의 결혼은 재혼이었다고 증언하였다.

3.3. 군사 활동 및 여성 독립운동

이후 난징으로 거주지를 옮겨 남편 김원봉이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일했다. 당시 그는 ‘임철애, 임철산’ 등 가명을 사용하며 교관과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의 남경조선부녀회를 조직했고,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기고 및 방송 활동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규탄하고 조선 부녀자들의 일치 단결과 투쟁을 촉구하는 등 독립 운동에 매진했다. 박차정은 1936년에 설립된 남경 조선 부녀 동맹의 선언문에 다음과 같이 기여했다.

전통적인 억압은 우리 조선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으며, 다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우리의 생존권이 빼앗겼다. 우리는 전통적인 억압에 의해 가정의 노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약탈 시장의 생산물로서 임금 노동의 노예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일본 제국을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여성들은 봉건 제도의 제약과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 타도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여성은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할 것이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 의용대의 부인 복무단장에 취임했지만, 1939년 광시성관룬관에서 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4. 사망

1939년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향년 34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 송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으로는 시 〈개구리 소래〉, 소설 〈철야〉, 일본어로 쓴 수필 〈가을 아침〉 등이 있다.

4.1. 전투 중 부상과 투병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한중 연합 전선 무장 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구성하자 여군 부대인 부녀복무단을 설치하여 단장을 맡았다. 1939년 2월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었고, 이 후유증과 관절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향년 34세로 병사하였다.

4.2. 충칭에서의 죽음과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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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얻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지병인 관절염으로도 오래 고생하였다. 1939년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과 관절염 등의 후유증을 앓았다.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향년 34세로 병사했다.

유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의 송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으로는 시 〈개구리 소래〉, 소설 〈철야〉, 일본어로 쓴 수필 〈가을 아침〉 등이 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하여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공적에 비해 뒤늦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 동래구 (동래고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되고, 부산 금정구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5. 사상과 신념

박차정은 1936년에 설립된 남경 조선 부녀 동맹의 선언문에 다음과 같이 기여했다.

> 전통적인 억압은 우리 조선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으며, 다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우리의 생존권이 빼앗겼다. 우리는 전통적인 억압에 의해 가정의 노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약탈 시장의 생산물로서 임금 노동의 노예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일본 제국을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여성들은 봉건 제도의 제약과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 타도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여성은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할 것이다.

6. 저작

* 시 〈개구리 소래〉
* 소설 〈철야 (소설)〉
* 수필 〈가을 아침〉

7. 가계

* 아버지: 박용한
* 어머니: 김맹련
* 오빠: 박문희 (1901년~?), 6·25전쟁 발발 직후 실종
* 오빠: 박문호 (1907년~1934년)
* 언니: 박수정
* 아우: 박문하 (1918년~1975년)
* 남편: 김원봉 (1898년~1958년)
* 외당숙: 김두봉 (1889년~1961년?, 독립운동가한글학자)
* 외재종숙: 김약수 (본명 김두전, 독립운동가)
* 친척: 박일형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정확한 혈연관계는 알 수 없음

8. 상훈

1995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산 금정구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