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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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계월은 1910년 함경북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여성해방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경성여자상업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공감하여 현모양처 교육에 반대하고,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잡지 기자로 활동하며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자유 연애를 주장했다. 최정희와의 여성 해방과 계급 해방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며, 2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2. 생애
2. 1. 젊은 시절
송계월은 1910년 함경북도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에서 태어났다. 1911년생 설, 1913년생 설 등도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 기록은 전하는 바가 없다. 1925년 보수적인 가정 환경에 반발하여 가출, 고향에서 도망치듯 경성으로 와 YMCA 학당을 거쳐 1926년 개교한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 상점 점원 등으로 노동을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1]
경성여자상업학교에서 식민지 여성교육방침이었던 현모양처 교육은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찬’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대신 사회과학과 문학 책을 읽으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1] 그는 경성 종로방 가회동 48번지의 하숙집에서 생활하였다.[1]
2. 2. 여성해방운동과 독립운동
송계월은 경성여상 재학 중 근우회와 신간회의 간부이던 허정숙을 만나면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경도되고, 재학 중 현모양처는 유교사상이 여자들에게 강제로 세뇌한 역할이라며 현모양처론에 반발하였다.[1] 이어 기독교식 여학교들에서도 현모양처 교육을 하는 것에 반발, 1927년 현모양처 교육에 반기를 든 동맹휴학을 주도하기도 한다.
동맹휴학을 이끌면서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여러 번이었고, 1930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일어난 서울여학생 시위운동을 주도하며 ‘제국주의 타도 만세’, ‘계급혁명 만세’ 등을 외치다가 검거된다.[1] 1928년 5월에는 경성여상 교내 동맹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폭행과 업무방해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기도 했다.
1930년 1월에는 광주에서의 일본인의 조선인 여학생 성추행에 반발하여 항의 집회를 하였으며, 1월 14일 저녁 경성여상, 이화여고보 등 서울시내 각 여학교와 휘문고보 학생 대표자들이 모여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제2차 서울 학생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어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일어난 경성여학생 시위운동을 허정숙 등과 함께 주도하다 종로경찰서에 검거·투옥되었으나,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가 최종선고로 집행유예를 받고 그해 3월에 풀려난다. 그러나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을 무렵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되었다. 그 뒤 경성여자상업고등학교에 복학하였다.
2. 3. 언론 활동과 사회 활동
1931년 개벽사가 발간한 <신여성> 잡지의 기자로 재직하면서 “진정한 여성해방은 계급해방에 있다”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의 시선으로 글과 칼럼을 발표하고 조선사회 여성이 처한 조건에 대한 기사와 칼럼을 발표하였다.[1] 그해 잡지 제일선의 기자도 겸하였다. 또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송계월은 사생아를 낳은 여성을 변호하거나, 여학생의 행실을 꾸짖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적 사회가 손가락질하는 여성의 경험을 좀 다른 방식으로 길러낸다.[1] 그는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거나 즐기면서 여자는 여러 남자와 즐기는 것을 타락함과 음란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이중잣대라며 비판하였다.
송계월은 여성작가로서보다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미모의 인텔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간의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3] 송계월에 대한 이러한 저널리즘적 관심은 이무영의 '여류작가 개평'(신여성, 1934)에서도 드러난다. 이 글에서 이무영은 송계월이 '가두연락의 첫날' 이외에는 뚜렷한 작품이 없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너무나 커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작품을 평한다고 말하고 있다.[3]
1931년 6월에는 신여성지에서 주최한 여자교육 개선안에 대한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였다. 김자혜, 모윤숙, 이응숙 변호사 등과의 토론에서 그는 현실에 필요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여성 교육의 확산도 좋으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을 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한편 여가활동 중에는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그가 주로 어울리는 인물은 근처 수송동 하숙집에 살던 이효석, 최정희 등이었다. 그는 최정희, 이효석 등 여성 작가들과 젊은 기자들, 연극인, 영화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5]
2. 4. 여성 해방과 계급 해방 논쟁
1932년 1월초 최정희와 계급성과 여성성의 연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6] 최정희는 남성 본위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여인문예가클럽' 결성을 제안했고,[6] 송계월은 이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논쟁으로 이어졌다.[6]
송계월은 진보적 의의가 성적 관계가 아닌 계급적 관계에 있다고 반박하며, 최정희의 견해를 "반동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비판했다.[7] 그는 여성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일반 대중운동과 분리하는 것은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최정희의 주장에 예술운동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무산부인운동의 실천적 의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7]
송계월은 여성 문제 이전에 경제적 불평등 해소가 우선이며, 여성은 특혜가 아닌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활동해야 권리가 향상된다고 역설했다.[7] 이 논쟁 이후 둘은 화해하지 못하고 송계월이 사망했다.[7]
2. 5. 병마와 최후
송계월은 학비와 생계를 동시에 조달해야 했던 탓에 천식 등의 질환을 앓았지만 치료시기를 놓쳤다.[8] 결국 결핵 등의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함경북도 북청군 신창면 고향으로 내려갔다.[8] 1933년 5월 30일 함경북도 북청군 신창면의 집에서 폐결핵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한다.[8] 임종 전 그는 동생 송정덕에게 '정덕아 나는 꼭 사라야겠다. 엇전 일인지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업다. 할 일은 만치, 나는 젊지.'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다.[8] 그의 나이 향년 23세였다.[8]
3. 사상과 신념
3. 1. 여성 해방과 계급론
허정숙, 정칠성, 김일엽 등의 영향을 받아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경제적 자립이라고 보았다.[1] 그는 여성이 해방되려면 계급 해방이 우선이며, 경제력을 갖출 때 해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송계월은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여성도 취직하여 사회활동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에게 여성문제는 어디까지나 계급관계에 있는 것이었다.[1] 일상에서 “남자들의 어리석은 심리와 주책없는 행동”을 보고 듣고 겪고, “제 딴에는 지도니, 진정한 동무니 하면서도 여자를 대하면 또 여자로 대하는” 남성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결론은 늘 “진정한 여성해방은 계급해방에 있다”는 것이었다.[1]
여성도 경제력을 얻고 자기 몫의 직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해야 남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보고 여성도 구직활동에 종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조건을 견뎌내야 된다고 하였다.
3. 2. 자유 연애론
송계월은 허정숙, 김일엽, 박인덕, 김명순, 나혜석 등의 자유 연애론에 공감하여, 여자도 자유롭게 연애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1] 여고 시절에는 수려한 외모와 달변으로 많은 남학생들의 관심을 받았고 여러 남자친구와 연애하였다.[11] 그러나 미혼인 상태로 임신하였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11] 미혼모라는 편견은 그의 활동을 방해하였다.[1] 기자로써 취재하러 갔을 때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취재 협조를 거부당하기도 했다.[1]
3. 3. 작가와 여류작가 구분 반대
1930년대에 들어 일부 여성 작가들은 작가와 여성 작가의 구분 문제를 제기하였다. 송계월은 여성 작가의 구분 문제와 여성 작가의 독자적 단체 구성을 반대, 비판하였다.
최정희는 동광 신년호를 통해 여성작가 그룹 결성을 선언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송계월은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문제는 남성: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주아:프로의 문제라는 것, 여성으로서의 특수성(여성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정당한 대중운동의 밀접한 조직 체계와 관련지을 때라야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 문인 그룹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카프라는 단체의 하부조직인 여인부에 소속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작가와 여성 작가를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여자 작가도 한사람의 작가로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4. 모성애에 대한 비판
송계월은 모성애가 여성에게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13] 나혜석, 허정숙 등과 같이 그는 모성애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송계월은 부자와 빈자의 계급성과 여성성, 그리고 여성성과 모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13]
4. 평가와 비판
송계월은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해온 함경도 여성의 기질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열정적'이었다.[1] 그러나 그의 작품은 작품성보다는 외모나 사생활, 특히 연애 사건을 중심으로 평가받았다.[14] 김명순, 김일엽의 뒤를 이어 작품 외적인 요소로 평가받은 것이다.[14]
송계월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시각과, 요절로 인해 작품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시각이 공존한다. 한편, 송계월이 최정희에 대해 한 논박이 여성운동을 자율성을 가진 운동이 아닌 부문운동으로만 보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15]
5. 가족 관계
- 여동생 : 송정덕(宋貞德)
참조
[1]
뉴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 눈뜬 송계월
http://legacy.www.ha[...]
[2]
서적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3]
서적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4]
서적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5]
서적
분화와 심화 어둠 속의 풍경들
민음사
[6]
서적
일제 말기의 미디어와 문화정치
깊은샘
[7]
서적
일제 말기의 미디어와 문화정치
깊은샘
[8]
서적
사회적 상상력과 한국시
소명출판
[9]
서적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10]
서적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11]
문서
일설에는 그가 임신했다는 소문 때문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12]
서적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반성과 새로운 모색
새미
[13]
서적
일제 말기의 미디어와 문화정치
깊은샘
[14]
서적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15]
서적
한민족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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