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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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포대는 관동팔경 중 하나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경포호 북쪽 언덕에 위치한 누각이다. 1326년(고려 충숙왕 13)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 태조와 세조가 경포대의 경치를 칭찬했고, 숙종의 시와 율곡 이이의 '경포대부' 등 명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경포대는 2013년 대한민국의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으며, 1326년 창건 이후 이건과 중수를 거치며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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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강릉 경포대 (江陵 鏡浦臺) |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2046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경포로 365 (저동) |
시대 | 조선 시대 (1326년 이전 창건, 1571년 복원, 1628년, 1873년, 1897년 중수) |
참고 사항 | 구조 / 형식 / 수량 : 목조 / 정면5칸‧측면5칸, 팔작지붕, 이익공 / 1동 |
지정일 | 2019년 12월 30일 |
문화재청 ID | 12,20460000,32 |
이전 정보 | |
국가 | 강원특별자치도 |
유형 | 유형문화재 |
이름 | 강릉 경포대 (江陵 鏡浦臺) |
번호 | 6 |
지정일 | 1971년 12월 16일 |
해제일 | 2019년 12월 30일 |
문화재청 ID | 21,00060000,32 |
2. 역사
경포대는 고려 중기 김극기의 「경포대」라는 시와 「강릉팔영」, 고려 말 안축의 「관동팔경」, 조선 시대 정철의 「관동팔경」 등 지역 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자연 풍광을 감상하고 학문을 닦으며 마음을 수양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이처럼 경포대는 시대적 상황을 공간과 해당 부재가 흔적으로 지니고 있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한국 대표 조선 후기 정자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하다.[1]
2. 1. 건립과 이전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건립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하였다.[1] 조선 태조(재위 1392∼1398)와 조선 세조(재위 1455∼1468)는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경포대는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는데, 1899년 군수 정헌시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가설하고 득월헌(得月軒)과 후선함(候仙檻)이라 하였다.
「강릉 경포대」는 1326년(고려 충숙왕 13) 창건 이후 한차례 이건과 수차례 중수 기록이 대부분 자세히 남아있으며, 특히 창건 이전의 기록도 남아있어 경포대의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1]
2. 2. 중수와 변화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1] 조선 태조(재위 1392년~1398년)와 세조(재위 1455년~1468년)는 경포대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 칭찬하였다고 한다.1899년 군수 정헌시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경포대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설치하고 각각 득월헌(得月軒)과 후선함(候仙檻)이라 하였다.[1]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달라 '강산'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1]
경포대는 일반적인 누각과 달리 내부 공간의 의미를 살려 마루를 기능에 따라 3단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가장 높은 누마루는 머름대(창문 아래 높은 문지방인 머름 밑에 가로 지른 나무) 형식을 취했고, 아래의 누마루는 계자난간(위로 올라갈수록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난간으로 계자다리가 난간대를 받치고 있음)을 설치한 유례없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1]
이처럼 경포대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조선 후기 정자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하다.[1]
3. 건축
경포호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으로,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건립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1] 태조와 세조는 직접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 중기 김극기의 시 「경포대」와 「강릉팔영」, 고려 말 안축의 「관동팔경」, 조선시대 정철의 「관동팔경」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경포대를 찾아 자연 풍광을 음미하며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강릉 경포대」는 창건 이전의 기록도 남아있어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1] 경포대는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 후기 정자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
3. 1. 구조와 특징
경포대는 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마루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는데, 1899년 군수 정헌시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가설하고 득월헌(得月軒)과 후선함(候仙檻)이라 하였다.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1]일반 누각과 달리 내부 공간의 특성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 마루를 기능에 따라 3단으로 구성하였으며, 누마루를 2단으로 구성한 것은 유례가 없다. 특히 가장 높은 누마루는 머름대[1] 형식을 취했고, 아래의 누마루는 계자난간[1]을 가설한 형식 또한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구성이다.
- 머름대: 창문 아래 높은 문지방인 머름 밑에 가로 지른 나무
- 계자난간: 위로 올라갈수록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난간으로 계자다리(鷄子多里)가 난간대를 받치고 있음.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1]
3. 2. 현판
경포대에는 여러 현판이 걸려있다.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1]4. 문화적 가치
경포대는 관동팔경 중 하나로, 고려 중기 김극기의 시 「경포대」와 「강릉팔영」, 고려 말 안축의 「관동팔경」, 조선시대 정철의 「관동별곡」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경포대를 찾아 자연 풍광을 노래하고 마음을 수양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1]
1326년(고려 충숙왕 13) 창건된 경포대는 한차례 이건과 수차례 중수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으며, 창건 이전의 기록도 있어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가장 높은 누마루는 머름대 형식을, 아래의 누마루는 계자난간 형식을 취해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1]
경포대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조선 후기 정자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명승 제108호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江陵鏡浦臺와 鏡浦湖)로 지정되었다.
4. 1. 명승과 경관
경포대는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로, 경포호와 함께 동해안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명승지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며, 명사들의 시·서·화가 많이 남아있어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높다.[2]경포대에서는 경포팔경과 호해정을 중심으로 한 팔경, 김극기의 강릉팔영 등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장소이자, 풍부한 문학적 소재를 제공하는 문화적, 경관적 요소가 결합된 누정으로 장소적 가치가 매우 높다.[2]
정철(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칭송했다. 특히, 경포대는 저녁에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서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로 알려져 있다.[2]
경포대 정자 안에는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시,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시문 현판이 걸려 있어 인문학적 가치를 더한다.[2]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경포대에서 홍장과 강원감찰사 박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홍장(紅粧) 고사가 실려 있어 구전문학적 가치도 높다.[2]
영조 22년(1746년) 김상성(金尙星)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화원들에게 강원도의 절경을 그리게 하고, 친한 사람들에게 시를 짓게 하여 완성한 작품이 관동십경(關東十景)이다. 그 중 경포대 그림은 경포대와 경포호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그려졌다. 그림에는 경포호를 경계로 내호와 외호가 구분되어 있고, 호수에는 낚시하는 늙은 어부와 갈매기의 한가로운 모습이 담겨 있다. 또한 호수와 바다가 경계되는 곳에는 백사장과 함께 현재의 죽도봉이 그려져 있으며, 초당과 경포대 뒤쪽에는 소나무 사이로 꽃들이 만발하여 봄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멀리 강문 너머 동해 바다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일출 모습과 함께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돛단배가 그려져 있어, 경포호의 옛 자연환경 및 인문 환경을 엿볼 수 있어 가치가 높다.[2]
4. 2. 문학과 예술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1]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1] 태조와 세조는 친히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1]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1]4. 3. 설화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건립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하였다고 한다. 태조(재위 1392년~1398년)와 세조(재위 1455년~1468년)는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경포대는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는데, 1899년 군수 정헌시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가설하고 득월헌(得月軒)과 후선함(候仙檻)이라 하였다.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 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5. 보존과 관리
경포대는 오랜 역사 동안 보존 및 관리되어 왔다. 강릉 경포대는 1326년(고려 충숙왕 13)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관련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어 시대별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1]
또한,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다.[2]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경포대는 고려 말 창건된 누정 건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이다.
5. 1. 보물 지정
강릉 경포대는 1326년(고려 충숙왕 13) 창건 이후 한차례 이건과 수차례 중수 기록이 대부분 자세히 남아있으며, 특히 창건 이전의 기록도 남아있어 경포대의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대형 정자이다.[1]경포대는 일반 누정과 달리 내부 공간의 특성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 마루를 기능에 따라 3단으로 구성하였으며, 누마루를 2단으로 구성한 것은 유례가 없다. 특히 가장 높은 누마루의 형태가 머름대 형식을 취했고 아래의 누마루는 계자난간을 가설한 형식 또한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구성이다.[1]
이와 같이 시대적 상황을 공간과 해당 부재가 흔적으로 지니고 있는 경포대는 조선시대의 것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 후기의 정자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1]
5. 2. 명승 지정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는 2013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다.[2]강릉 경포대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고려 말 1326년 지중추부사 박숙정이 창건한 누정 건물이다. 안축의 《경포대신정기》(鏡浦臺新亭記)에 따르면, "옛날 영랑선인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바람이 치는 날 놀러 왔던 사람들이 곤욕스럽게 여겨 작은 정자를 지었다"라고 하여 창건 목적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이 높다.
창건 당시 이전 시대의 주춧돌과 장대석이 발견되어,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정자 형태의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과 관련된 임해정, 술랑선도(述朗仙徒)와 관련된 한송정 등 강릉 지역 누정 기록을 통해, 현존하는 경포대와 더불어 강릉 지역 누정 문화의 시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경포대(鏡浦臺)는 지형·지질적 가치가 뛰어난 자연 석호인 경포호와 함께 동해안의 빼어난 절경지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이다. 명사들의 수많은 시·서·화가 있어 역사 문화 경관적 가치가 높다.
경포대와 경포호의 자연 풍광을 관동팔경에 비유한 경포팔경과 호해정을 중심으로 한 팔경, 김극기의 강릉팔영 등이 전해져 오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조망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곳일 뿐 아니라 풍부한 문학적 소재를 제공하는 등 문화적, 경관적 요소가 결합된 누정으로 장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영조 22년(1746년) 김상성(1703~1755)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화원들에게 강원도 절경을 그리게 한 후, 친한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완성한 작품이 관동십경(關東十景)이다. 그중 경포대 그림은 경포대와 경호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것으로, 경호는 경포대를 경계로 내호와 외호로 구분하고 있다. 호수에는 낚시를 하는 늙은 어부와 갈매기의 한가로운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호수와 바다가 경계되는 곳에는 백사장과 함께 현재의 죽도봉이 그려져 있다. 초당과 경포대 뒤쪽에는 소나무 사이로 꽃들이 만발하여 봄날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으며, 멀리 강문 너머로 보이는 동해 바다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일출 모습과 함께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돛단배를 그리고 있어 경포호의 옛 자연환경 및 인문 환경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했으며, 경포대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등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이다.
경포대 정자 내에는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 어제시,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시문 현판이 있어 인문학적 가치가 높다.
강릉 경포대는 고려 말 1326년 지추부학사 박숙정이 방해정 뒷산의 인월사 터에 세웠던 것을 1508년에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 자리로 옮겼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약 680여 년의 역사성을 지닌 누정 건축물이며, 경포호와 더불어 탁월한 역사 문화적 경관성을 지닌 곳이다.
강릉 경포대는 16세기 이후 지방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주체가 되는 별당식 정자 형태로 전환되는 누정 건축 양상의 변화를 고찰할 수 있는 중간적 의미를 갖는 정자로서 건축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서거정(1420-1488)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설화 홍장(紅粧) 고사는 경포대에서의 홍장과 강원감찰사 박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구전 문학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6. 현대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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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9-176호(강릉 경포대 등 10건의 누·정 문화재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19-12-30
[2]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지정 및 지형도면 고시(강릉 경포대와 경포호)
http://gwanbo.mois.g[...]
문화재청
201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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