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보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보융은 948년 고종회의 뒤를 이어 형남절도사와 남평왕 작위를 계승한 인물이다. 후당 멸망 이후 후진, 후한, 후주, 송나라로 이어지는 정권 교체기에 각 왕조에 신하를 자처하며 유연하게 대처했다. 954년 후주 세종의 남당 공격에 동조했고, 960년 사망 후 동생 고보욱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송나라의 형남절도사 - 고계충
고계충은 962년 형남 절도사 고보욱의 뒤를 이어 형남 절도사가 되었으며, 송나라에 항복했으나 963년 형남이 멸망한 후 송나라 절도사로 있다가 사망했다. - 송나라의 형남절도사 - 고보욱
고보욱은 오대십국시대 형남의 네 번째 군주로, 방탕한 생활과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어 '만사휴의' 고사를 남겼으며, 이는 형남 멸망의 예견으로 평가받는다. - 960년 사망 - 풍연사
풍연사는 오대 십국 시대 남당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두 황제의 신임을 받아 재상을 네 차례 역임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았으며, 시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 960년 사망 - 차슬라브
9세기 말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차슬라브는 927년 세르비아를 재건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국가를 확장했으나, 950년대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그의 공국은 비잔틴과 불가리아의 지배하에 놓였다.
고보융 | |
---|---|
기본 정보 | |
칭호 | 남평 정의왕 |
더 보기 | 중국 |
계승 순서 | 형남(남평)의 3대 통치자 |
재위 기간 | 948년–960년 |
이전 통치자 | 고종회, 남평 문헌왕 |
다음 통치자 | 고보욱 |
자치령 | "951–954: 발해군왕 (渤海郡王)" "954–960: 남평왕 (南平王)" |
시호 | 정의왕 (貞懿王) |
휘 | 고보융 (高保融) |
연호 | "후한 연호 사용:" "건우 (乾祐): 948–950" "후주 연호 사용:" "광순 (廣順): 951–953" "현덕 (顯德): 954–960" |
가문 | 고씨 |
왕조 | 형남 |
아버지 | 고종회 |
출생 연도 | 920년 |
사망 연도 | 960년 |
관직 | |
관직명 | 절도사 (荊南節度使) |
재임 기간 | 948년 – 960년 |
이전 | 고종회 |
이후 | 고보욱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자녀 | 고계충 |
2. 생애
948년 고종회가 죽자 그의 셋째 아들 고보융(高保融)이 뒤를 이었다. 당시 중원은 후당이 멸망한 후 후진, 후한, 후주 순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신하를 자처하였고, 954년 남평왕(南平王)에 봉해졌다.[1]
그 후 후주의 세종(시영)이 통일 사업을 시작하고, 후당이 남당을 공격하려 할 때 고보융도 동조하여 병사를 보냈다. 이후 후주에서 송나라로 선양이 이루어지자, 송나라에도 신하를 자청하였다.[1]
960년 고보융이 죽자, 고보욱(高保勗)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이었다.[1]
2. 1. 가계 및 즉위
948년, 고종회가 사망하자 남평왕의 작위를 계승하고, 후한의 은제로부터 형남절도사 동평장사 겸 시중에 봉해졌다. 951년에는 후주의 태조로부터 발해왕에, 954년에는 남평왕에 봉해졌다.사서에 따르면 고보융은 평범하고 용렬하여, 조정의 중요한 일은 모두 열 번째 동생인 고보욱에게 위임했다. 960년 조광윤이 송을 건국하자, 그 국세를 두려워하여 1년에 3번이나 조공 사자를 파견했다. 같은 해 41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태위와 정의왕의 시호를 받았다. 장남인 고계충과 차남 고계충이 어렸기 때문에 고보욱이 그 지위를 계승했다.
2. 2. 후주 및 북송과의 관계
948년 고종회가 죽자 그의 셋째 아들 고보융(高保融)이 뒤를 이었다. 당시 중원은 후당이 멸망한 후 후진, 후한, 후주의 순서로 정권이 교체되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대해 신하를 자청하였고, 954년 남평왕(南平王)에 봉해졌다.[1]그 후 후주의 세종(시영)에 의한 통일 사업이 시작되고, 후당이 남당을 공격하려고 할 때 고보융도 동조하여 병사를 보냈다. 이후 후주에서 송나라로 선양이 이루어지자, 송나라에도 신하를 자청했다.[1]
960년 고보융이 죽고, 고보욱(高保勗)이 형남절도사의 지위를 이었다.[1]
2. 3. 통치 스타일 및 평가
고보융은 평범하고 재능이 없어서, 조정의 중요한 일은 모두 열 번째 동생인 고보욱에게 위임했다. 960년 조광윤이 북송을 건국하자, 고보융은 그 국세를 두려워하여 1년에 3번이나 조공 사자를 파견했다.2. 4. 죽음과 계승
948년, 고종회가 죽자 그의 셋째 아들 고보융(高保融)이 뒤를 이었다. 당시 중원은 후당이 멸망한 후 후진, 후한, 후주 순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신하를 자처하였고, 954년 남평왕(南平王)에 봉해졌다.그 후 후주의 세종(시영)이 통일 사업을 시작하고, 후당이 남당을 공격하려 할 때 고보융도 동조하여 병사를 보냈다. 이후 후주에서 송나라로 선양이 이루어지자, 송나라에도 신하를 자청하였다.
고보융은 960년에 사망하였고, 고보욱(高保勗)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이었다.
사서에 따르면 고보융은 평범하고 용렬하여, 조정의 중요한 일은 모두 열 번째 동생인 고보욱에게 위임하였다. 조광윤이 송을 건국한 960년에는 그 국세를 두려워하여 1년에 3번이나 조공 사자를 파견하였다. 같은 해 41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태위와 정의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남 고계충과 차남 고계충이 어렸기 때문에 고보욱이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1]
3. 둘러보기
이 문서에는 고보융의 둘러보기 정보가 없으므로, 섹션에 내용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