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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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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형남은 오대십국 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로, 907년 고계흥이 당나라 멸망 후 형남 절도사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고계흥은 형주, 귀주, 협주를 차지하여 독립했으며,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세력을 유지했다. 고종회는 주변국과의 균형 외교를 통해 형남의 번영을 이끌었으나, 고보욱의 실정과 송나라의 통일 과정에서 963년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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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남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형남 (남평)
통칭형남 (남평)
시대오대십국 시대
위치지도로 표시된 형남 (남평)
수도형주
공용어중국어
역사
성립924년
멸망송나라에 의해 멸망
주요 사건건국
멸망 사건송나라에 의한 종결
정치
정부 형태군주제
통치자고계흥
통치 기간909년–928년
통치자고종회
통치 기간928년–948년
통치자고보융
통치 기간948년–960년
통치자고보욱
통치 기간960년–962년
통치자고계충
통치 기간962년–963년
직함
이전
이전 국가후당
이후
이후 국가송나라
현재 국가
현재중국

2. 역사

907년 주전충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고계흥은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가 되었다. 고계흥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형남 지역의 부흥에 힘썼다. 주전충 사후, 형주(荊州, 현재 호북성 강릉), 귀주(歸州), 협주(峽州, 의창(宜昌))의 3주를 차지하여 독립했다.

이후 후량이 후당에게 멸망하자 후당에 신하를 자청해 925년 남평왕(南平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당이 전촉을 공격하려 할 때, 촉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고계흥은 후당과 관계를 끊고 의 신하를 자청했다.

926년 고계흥이 사망하고 장남 고종회(高從誨)가 형남절도사 지위를 계승했다. 고종회는 다시 후당에 복속하여 934년 남평왕이 되었다. 이후 , , 남한, 후촉 등 주변 모든 나라에 신하를 자청하며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형남의 형주는 중국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종회는 각국의 세력 완충 지대로서 형남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약소국임을 역이용하여 평화를 이루고 교역 중계 지점으로 번영시켰다.

948년 고종회 사후, 셋째 아들 고보융(高保融)이 뒤를 이었다. 당시 중원은 후진, 후한, 후주 순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신하를 자청하여 954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후주의 세종이 통일 사업을 시작하고 남당을 공격할 때 고보융도 군사를 보내 동조했다. 후주에서 송나라선양이 이루어지자, 송에도 신하를 자청했다.

960년 고보융 사후, 고보욱(高保勗)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이었다(왕위에 오르지 않아 국주라 불림). 고보욱은 토목 공사와 향락으로 민심을 잃었다.

962년 고보욱 사후, 고보융의 장남 고계충(高繼沖)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이었다. 송나라 태조가 통일 사업을 시작하자, 형남은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고계충은 송나라의 " 공격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굴복했으나, 송군은 형남에도 항복을 요구하여 963년 멸망했다. 고계충은 개봉으로 옮겨져 송나라 절도사로 973년 사망했다.[2]

2. 1. 건국 배경

고계흥(高季興)은 하남성 삼문협시 섬주구(陝州區) 섬주(陝州) 협석현(현재의 하남성 삼문협시 섬주구) 출신으로, 비주(汴州)의 상인 이칠랑(주유양(朱友譲))의 가신이었다가 주전충(朱全忠)의 군대에 합류하여 신임을 얻었다. 907년 주전충이 (唐)을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을 건국하자, 고계흥은 형남(荊南)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 지역의 부흥에 힘썼다. 그 후, 주전충이 죽자 형주(荊州)(강릉)·귀주(歸州)·협주(硤州)의 3주를 가지고 독립했다.[2]

이후, 후량이 후당(後唐)에 멸망당하자, 후당에 신하를 자청하여 925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당이 전촉(前蜀)을 공격하려 할 때, 자신의 촉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구상을 막아버리는 일이었기에 후당과 연을 끊고 동쪽의 (吳)의 신하를 자청했다.[2]

다음해 926년 고계흥이 죽었다.

2. 2. 고계흥의 통치

고계흥은 섬주 쇄석(지금의 하남성 섬현)사람으로 변주(현재의 카이펑) 상인의 집사였다가 주전충의 군에 투신하여 그의 신임을 얻어 부장으로서 주전충을 따라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고계흥은 형남절도사가 되었다. 부임한 고계흥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 땅의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주전충이 사망하자 형주(현재 호북성 강릉), 귀주, 협주의 3주를 차지하여 독립했다.

그 후 후량이 후당에게 멸망당하자 후당에게 신하를 자청해 925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당이 전촉을 공격하려 할 때 고계흥은 자신이 촉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구상을 막는 일이었기에 후당과 연을 끊고 동쪽의 의 신하를 자청했다.

926년 고계흥이 사망하였다.[2]

2. 3. 고종회의 외교술과 번영

고종회는 다시 후당에 신하를 자청하여 934년 남평왕이 되었다. 더 나아가 주변의 , , 남한, 후촉 모두에게 신하를 자청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형남이 차지한 형주는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종회는 교묘한 정략으로 각국의 세력 완충지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여러 나라에 인정받게 하여, 약소국임을 역이용하여 평화를 만들어내고 거대한 교역 중계지로서 형남을 번영하게 했다.[2]

고종회는 948년에 죽었다.

2. 4. 고보융의 시대

948년 고종회가 죽자, 그의 셋째 아들 고보융이 뒤를 이었다. 당시 중원은 후당이 멸망한 후 후진, 후한, 후주로 정권이 차례대로 바뀌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신하를 자청하여 954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그 후, 후주의 세종에 의한 통일 사업이 시작되어, 후주가 남당을 공격하려 할 때 고보융도 동조하여 병사를 보냈다. 그 다음 후주에서 송나라선양이 이루어지자, 송나라에도 신하를 자청했다.[2]

고보융은 960년에 죽었다.

2. 5. 고보욱의 실정과 멸망

고보욱은 무의미한 토목 공사를 벌이고 향락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962년 고보욱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이자 고보융의 장남인 고계충(高繼沖)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의 통일 사업이 시작되면서, 가장 약소하지만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던 형남이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고계충은 "남쪽의 초(楚)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송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통과를 허락했으나, 송군은 영내를 통과하는 도중 형남에 항복을 요구하여 963년 형남은 멸망했다. 고계충은 이후 개봉으로 옮겨져 송나라의 절도사로 천수를 누리다 973년 사망했다.

만사휴의는 고종회가 고보욱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주변 사람들이 한탄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이다 (출전: 송사 형남고씨세가).[2] [3] [4]

3. 역대 군주

오대십국 시대 형남의 통치자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
없음무신왕고계흥909년–928년
없음문헌왕고종회928년–948년
없음정의왕고보융948년–960년
없음정안왕고보숙960년–962년
없음덕인왕고계충962년–963년


3. 1. 통치자 가계도

형남 통치자 가계도
대수시호이름생몰년재위 기간
1무신왕고계흥이손(貽孫)858년 - 928년907년 - 928년
2문헌왕고종회준성(遵聖)891년 - 948년928년 - 948년
3정의왕고보융덕장(徳長)920년 - 960년948년 - 960년
4고보숙성궁(省躬)923년 - 962년960년 - 962년
5고계충성화(成和)943년 - 973년962년 - 963년


4. 외교

고계흥후량으로부터 형남절도사가 된 후, 형남은 주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후량후당에 멸망하자 후당에 신하를 자처하며 925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당의 전촉 공격에 대한 구상이 좌절되자 후당과 관계를 끊고 동쪽의 에 복속했다.[2]

고계흥 사후, 장남 고종회는 다시 후당에 복속하여 934년 남평왕이 되었다. 더 나아가 주변의 , , 남한, 후촉 모두에게 복속하며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형남은 중국의 배꼽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종회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거대한 교역 중계지로 번영시켰다.[2]

고종회 사후, 고보융후주에 복속하여 954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후주의 세종이 남당을 공격할 때 군대를 파견하여 동조하였고, 후주에서 송으로 선양이 이루어지자 송에도 복속했다.[2]

고보융 사후, 고보극을 거쳐 고계충이 형남절도사 지위를 계승했다. 송의 태조는 통일 사업을 시작하며 형남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고계충은 송의 요구에 굴복하여 영토 통과를 허락했지만, 결국 963년 형남은 송에 항복하며 멸망했다.[2]

5. 평가

고계흥(高季興)은 주전충(朱全忠)의 신임을 얻어 형남(荊南)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이 지역을 재건하고 독립했다. 고종회(高從誨)는 주변국들과의 교묘한 외교를 통해 형남을 번영시켰다. 형남은 중국의 배꼽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종회는 주변 세력들 간의 완충지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이용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교역 중계지로 번영하게 했다. 그러나 고보극(高保勗) 대에 이르러 무의미한 토목 공사와 향락으로 민심을 잃었다. 결국 송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야마자키 가쿠시(山崎覚士)는 형남이 받은 "남평왕"이라는 칭호는 평왕이라고 불리는 "중국(오대왕조)"이 변방을 지배하는 유력한 절도사에게 준 칭호이며, 형남은 자립성이 강했지만 영역 내의 자사(刺史) 임명권[2]이나 중앙 행정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 다른 9국처럼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오대왕조 영역의 일부였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3][4]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Chi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 문서 『資治通鑑考異』が引用する『明宗実録』によれば、荊南の刺史は朝廷(五代=後唐)が任命しており、後唐の天成2年(927年)2月に高季興が刺史任命権を朝廷に求めたところ拒絶されたという。
[3] 문서 山崎によれば、「十国」の概念が初めて登場したのは、欧陽脩の『五代史記([[新五代史]])』が最初であり、その少し前に書かれた路振の『[[九国志]]』には荊南が加えられておらず、欧陽脩と同時代にあたる孫の路倫が治平元年(1064年)に皇帝に献上する際に荊南の2巻を補われたが不十分であったため、改めて史館の張唐英が北楚(荊南)2巻を補ったという。
[4] 간행물 五代の〈中国〉と平王 汲古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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