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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피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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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스피치 전투는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8월 29일부터 9월 22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이 고스피치 시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990년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브계의 반란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크로아트인 민간인에 대한 민족 청소를 시작하면서 격화되었다. 고스피치 전투는 초기 포격전과 크로아티아군의 반격으로 진행되었으며, 크로아티아군은 유고 인민군 막사를 점령하며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고스피치 학살과 시로카쿨라 학살과 같은 전쟁 범죄로 이어졌고, 이후 전범 재판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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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피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날짜1991년 8월 29일 – 1991년 9월 22일 ()
장소크로아티아 고스피치
결과크로아티아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유고슬라비아
SAO 크라이나
교전국 2크로아티아
지휘관
지휘관 1렐랴 토미치
조르제 보조비치
지휘관 2미르코 노라츠
이반 다소비치
부대
부대 1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유고슬라비아 육군
제35파르티잔사단
제1여단
제236차량화여단
세르비아 방위군
부대 2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제118보병여단
크로아티아의 경찰
크로아티아 국방군
병력 규모
병력 1400명
병력 2427명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사망자 미상
포로 300명
사상자 2사망자 미상
민간인 학살 사망자140~161명 이상
기타 정보
시각 자료
고스피치의 세르비아 포격의 모습
교전 이후 총격을 받아 외벽에 구멍이 난 건물의 모습

2. 배경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세르브계 주민들은 크로아티아의 독립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40]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고, 1991년 6월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했다.[43]

2. 1.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브계가 주로 거주하는 크닌을 중심으로 달마티아 내륙 지역[39]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일부, 세르브계 인구가 절대다수인 슬라보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40] 이 지역은 새롭게 SAO 크라이나(세르브인 자치주)가 되었다. SAO 크라이나가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반란 행위로 선포했다.[41]

1991년 3월 이 분쟁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었고,[42] 같은 해 6월 유고슬라비아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포했다.[43] 이 선언은 3개월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44] 10월 8일 정식으로 선포되었다.[45] 12월 19일, SAO 크라이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크로아트인 민간인을 향한 민족 청소 작전을 시작했다.[46]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SAO 크라이나를 향한 지원을 점점 늘리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크로아티아의 경찰만으로는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수립했다.[47] 그러나 9월부터 시작된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군병력으로 발전하려는 국가방위군의 무장력 강화는 차질을 빚었고,[48] 역으로 크로아티아 내 군사 분쟁이 점점 격화되며 8월 26일에는 부코바르 전투가 시작되었다.[49]

2. 2. 통나무 혁명과 SAO 크라이나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브계가 주로 거주하는 크닌을 중심으로 한 달마티아 내륙 지역[39]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일부, 세르브계 인구가 절대다수인 슬라보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40] 이 지역은 새롭게 SAO 크라이나(세르브인 자치주)가 되었다. SAO 크라이나가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반란 행위로 선포했다.[41]

2. 3. 유고 인민군(JNA)의 개입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SAO 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시작했다.[9] JNA의 지원 증가는 크로아티아 경찰이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했지만,[9] 9월부터 시작된 UN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군사력 강화에 차질을 빚었다.[10] 반면 크로아티아 내 군사 분쟁은 점점 격화되어, 8월 26일에는 부코바르 전투가 시작되었다.[11]

3. 전투 전 상황

1991년 3월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 리카 지역의 긴장 상태는 이미 고조되었다. 6월에 크로아티아 의회가 주권 선언을 통해 주권국임을 재확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고 인민군(JNA)은 고스피치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이들은 조르제 보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방위군 준군사조직의 지원을 받았다. 고스피치의 유고 인민군 주둔군은 공식적으로 페타르 차바르 대령이 지휘했으나, 실질적인 지휘권은 참모장인 방첩부 소속 렐랴 토미치 소령이 가지고 있었다.

1991년 9월 초, 고스피치에 주둔한 크로아티아군은 427명으로, 대부분 경찰, 자원병,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병력이었다. 고스피치에 있는 유일한 국가방위군 부대는 제118보병여단이었으며, 미르코 노라츠 중령이 지휘했다. 고스피치 주둔 크로아티아 경찰 지휘관은 이반 다소비치였다.

3. 1. 리카 지역의 긴장 고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첫 사망자가 발생한 1991년 3월 31일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이후, 리카 지역의 긴장 상태는 이미 고조되어 있었다.[50] 6월에 크로아티아 의회가 주권 선언을 통해 주권국임을 재확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폭력 사건 증가, 무단 검문소 설치, 간헐적인 소화기 발포 사건 증가로 이어졌다. 6월 22일에는 고스피치와 SAO 크라이나가 장악한 그라차크를 잇는 도로에서 경찰관 3명이 납치되었으며, 6월 27~28일 사이에는 고스피치를 포함한 리카 여러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경찰을 향한 공격이 연이어 발생했다.[51]

1991년 7월 들어서 유고 인민군은 리카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경찰과 국가방위군에 공개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7월 1일에는 플리트비체 경찰서가 유고 인민군에게 포위되었고, 7월 6일에는 고스피치 인근에서 유고 인민군의 매복공격으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7월 28~29일에는 고스피치-코레니차 도로의 류보보 고개에서 유고 인민군과 크라이나군이 교전을 통해 국가방위군 병력을 밀어냈다.[52]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이 8월 5일 리카 남부의 로비나츠에서 크로아트인 민간인 5명을 납치해 살해하고[53] 주타로크바의 경찰 검문소가 공격받는 등 인종적 폭력사태가 계속 확대되었다.[54] 8월 초에는 유고 인민군이 제236프롤레타리아 차량화여단(이름만 여단으로 제236여단은 실제로는 중대 규모)과 이전에 류보보 고개에 배치되었던 제4기갑여단의 일부 차량화 대대를 고스피치 주둔지 지원군으로 이동시켰다. 8월 30일에는 SAO 크라이나군이 플리트비체 경찰서를 공격하고 점령했다.[64]

플리트비체 점령이 임박하고 8월 31일에는 고스피치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리치키오시크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철수하자, SAO 크라이나군과 유고 인민군은 이제 작전 목표를 리카 지역에서 전체 인구 12,000명 중 세르브인이 38.4%가 거주하고 있는 고스피치[62] 도시 그 자체로 옮겼다.[64]

3. 2. 유고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의 증강

1991년 7월, 유고 인민군(JNA)은 리카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경찰 및 국가방위군에 공개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7월 1일 플리트비체 경찰서가 유고 인민군에게 포위되었고, 7월 6일 고스피치 인근에서 유고 인민군의 매복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7월 28~29일에는 고스피치-코레니차 도로의 류보보 고개에서 유고 인민군과 크라이나군이 교전하여 국가방위군 병력을 밀어냈다.[52]

8월 초, 유고 인민군은 제236프롤레타리아 차량화여단(실제로는 중대 규모)과 제4기갑여단의 일부 차량화 대대를 고스피치 주둔지 지원군으로 이동시켰다. 8월 30일에는 SAO 크라이나군이 플리트비체 경찰서를 공격하고 점령했다.[64]

고스피치의 유고 인민군 주둔군은 장교 70명과 병사 4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55] 스탄코옵세니차 막사와 고스피치의 소규모 군사시설 4곳에 주둔했다.[56] 이들은 조르제 보조비치 지휘 하의 세르비아 방위군 준군사조직 128명의 지원을 받았다.[58] 1991년 조직 개편 이후 고스피치에 주둔한 유고 인민군은 리예카 군단 휘하의 제236차량화여단, 제35파르티잔사단 제1여단이었다. 그 전에는 B급 부대인 제10프롤레타리아보병연대가 고스피치에 주둔했으나 제9프롤레타리아보병연대와 합병되어 제236차량화여단으로 바뀌었다.[59] 고스피치의 유고 인민군 주둔군은 공식적으로 페타르 차바르 대령이 지휘했으나, 실질적인 지휘권은 참모장인 유고슬라비아 방첩국 소속 렐랴 토미치 소령이 가지고 있었다.[62]

3. 3. 크로아티아군의 대응

1991년 9월 초, 고스피치에 주둔한 크로아티아군은 427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스피치, 리예카, 자보크 출신의 경찰과 고스피치, 자그레브, 출신의 자원병 및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병력이었다.[60] 고스피치에 주둔한 유일한 국가방위군 부대는 8월 14일 제58독립대대를 중심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제118보병여단이었지만, 10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편성되었다. 9월 중순, 제118보병여단은 2개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1개 대대는 4개 중대, 다른 1개 대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제118보병여단은 미르코 노라츠 중령이 지휘했으며,[61] 고스피치 주둔 크로아티아 경찰 지휘관은 이반 다소비치였다.[60]

4. 전투 경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은 1991년 8월 말부터 9월 말까지 고스피치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디보셀로 마을과 야시코바츠 막사에 주둔한 포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9월 중순으로 갈수록 포격 강도가 거세져 도시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56]

전투 초기에는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이 우세하여 크로아티아군을 고스피치 동부에서 밀어냈다.[60] 9월 5일, 크로아티아군이 유고 인민군 소장 트라이체 크르스테브스키를 생포하고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군 지휘관은 장갑차 반환을 거부하여 중앙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62]

9월 중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은 유고 인민군 시설에 대한 봉쇄 작전을 개시했다. 고스피치에서는 9월 13일 유고 인민군 보급고를 점령하여 다량의 무기를 확보함으로써 전력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64] 이후 페루시치, 카니자, 스탄코옵세니차 막사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유고 인민군을 압박했다.[55][62]

9월 16일, 디보셀로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크로아티아군이 격퇴했다.[65] 이후 크로아티아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야시코바츠 막사를 점령하고, 포위되었던 리브니크빌라이 마을을 구출했다.[65] 9월 22일까지 고스피치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 잔당을 격퇴하면서 전투는 사실상 크로아티아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68]

4. 1. 포격전과 초기 공세

1991년 10~12월 사이 크로아티아 전쟁의 전선 지도. 고스피치 전투로 고스피치 남쪽에 두터운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은 1991년 8월 29일 디보셀로 마을과 야시코바츠 막사에 주둔한 포병을 가지고 고스피치를 공격했다. 포격의 강도는 9월 중순으로 갈수록 크게 증가해 고스피치에 큰 피해를 입혔다. SAO 크라이나의 보고서에서는 포격으로 도시 구조물의 50%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고 추산했다.[56]

전투 초반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은 크로아티아군을 고스피치 동부에서 밀어냈다.[60] 9월 5일 크로아티아군은 고립된 유고 인민군 막사에 접근하려던 유고 인민군 소장 트라이체 크르스테브스키와 병사 32명을 태운 병력수송장갑차를 포위해 생포했으나,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다음 날 석방했다. 하지만 고스피치의 크로아티아군 지휘관은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 정부 지시와는 달리 장갑차 반환 요청을 거부했다. 크르스테브스키 점령 이후 유고 인민군의 포격은 매우 심해져 하루 평균 1,100발의 포격이 쏟아졌다. 격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전투 둘째 주에는 큰 전선 변화 없이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62]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은 9월 14일 크로아티아 정부 통제 지역 내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의 전력, 수도, 통신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63] 고스피치에서는 국가방위군이 유고 인민군 보급고를 점령한 9월 13일로 앞당겨졌다.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소총 14,000정과 상당한 양의 대전차 무기를 확보했으며,[62] 이는 크로아티아군이 마을에서 유고 인민군과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64] 다음 날 페루시치와 카니자 막사가 점령되었다. 3일간의 전투 끝에 스탄코옵세니차 막사가 함락되면서[55] 고스피치 주둔 유고 인민군 대부분은 9월 18일 항복했다.[62] 9월 16일 디보셀로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 지원을 위한 보병 공격이 이뤄졌으나 크로아티아군이 격퇴했고,[65] 이 전투에서 보조비치가 전사했다.[62] 도심이 비교적 안정되자 크로아티아군은 공세를 확대해 야시코바츠 막사를 점령하고, 9월 20일에는 포위되었던 리브니크와 빌라이 마을의 포위를 풀었다.[65] 유고 인민군 항복 후 세르비아군은 고스피치 동부에서 메다크 앞 8km 선까지 후퇴했고,[64] 크로아티아군은 9월 22일까지 고스피치 지역 잔당을 격퇴했다.[68]

4. 2. 크로아티아군의 반격과 막사 전투

유고 인민군(JNA)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은 1991년 8월 29일 디보셀로 마을과 유고 인민군 야시코바츠 막사에 주둔한 포병을 가지고 고스피치를 공격했다. 9월 중순으로 갈수록 포격 강도가 크게 증가해 고스피치 마을에 큰 피해를 입혔다. SAO 크라이나의 보고서에서는 포격으로 도시 내 구조물의 50%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고 추산했다.[56]

전투 초반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은 크로아티아군을 고스피치 동부에서 밀어냈다.[60] 9월 5일 크로아티아군은 마을 중앙에 고립된 유고 인민군 막사에 접근하려던 유고 인민군 소장 트라이체 크르스테브스키와 병사 32명을 태운 병력수송장갑차를 포위해 생포했으나,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다음 날 이들을 석방했다. 하지만 고스피치의 크로아티아군 지휘관은 자그레브에 있는 크로아티아 정부의 지시와는 달리 장갑차도 같이 돌려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크르스테브스키 점령 이후 유고 인민군의 포격은 매우 심해져 하루 평균 1,100발에 달하는 포격이 쏟아졌다. 격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전투 둘째 주에는 큰 전선 변화 없이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62]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은 9월 14일 크로아티아 정부가 통제하는 모든 지역 내에 있는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의 전력, 수도, 통신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63] 고스피치에서는 국가방위군이 유고 인민군 보급고를 점령한 9월 13일 이 조치가 앞당겨졌다.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소총 14,000정과 상당한 양의 대전차 무기를 확보했으며,[62] 이는 크로아티아군이 마을에서 유고 인민군과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64] 다음 날 고스피치에 있는 유고 인민군의 페루시치와 카니자 막사가 점령되었다. 3일간의 전투 끝에 스탄코옵세니차 막사가 크로아티아군에게 함락되면서[55] 9월 18일 고스피치 주둔 유고 인민군 대부분이 항복했다.[62] 9월 16일 디보셀로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 주둔군을 지원하기 위한 보병 공격이 이뤄졌으나 크로아티아군이 이를 격퇴했고,[65] 이 전투에서 보조비치가 전사했다.[62] 도심이 비교적 안정되자 크로아티아군은 공세를 확대해 야시코바츠 막사를 점령하고 9월 20일에는 크로아티아군이 포위되었던 리브니크와 빌라이 마을의 포위를 풀었다.[65] 유고 인민군이 항복하면서 세르비아군은 고스피치 동부에서 메다크 앞 8km 선까지 후퇴했고,[64] 크로아티아군은 9월 22일까지 고스피치 지역의 잔당을 격퇴했다.[68]

4. 3. 전선 교착과 전투 지속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은 1991년 8월 29일부터 디보셀로 마을과 야시코바츠 막사에 주둔한 포병을 이용하여 고스피치를 공격했다. 포격 강도는 9월 중순으로 갈수록 심해져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다. SAO 크라이나의 보고서에서는 포격으로 도시 구조물의 50%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고 추산했다.[56]

전투 초반,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은 크로아티아군을 고스피치 동부에서 밀어냈다.[60] 9월 5일, 크로아티아군은 유고 인민군 소장 트라이체 크르스테브스키 지휘 하의 병사 32명을 태운 병력수송장갑차를 포위하여 생포했으나, 다음 날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석방했다. 그러나 고스피치의 크로아티아군 지휘관은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 정부 지시와 달리 장갑차 반환 요청을 거부했다. 크르스테브스키 생포 이후 유고 인민군의 포격은 매우 심해져 하루 평균 1,100발의 포탄이 쏟아졌다. 격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전투 둘째 주에는 큰 전선 변화 없이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62]

9월 14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은 크로아티아 정부 통제 지역 내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의 전력, 수도, 통신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63] 고스피치에서는 9월 13일 국가방위군이 유고 인민군 보급고를 점령하면서 이 조치가 앞당겨졌다.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소총 14,000정과 상당량의 대전차 무기를 확보하여[62] 유고 인민군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64] 다음 날, 페루시치와 카니자 막사가 점령되었다. 3일간의 전투 끝에 스탄코옵세니차 막사가 함락되면서[55] 고스피치 주둔 유고 인민군 대부분은 9월 18일 항복했다.[62] 9월 16일 디보셀로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 주둔군을 지원하기 위한 보병 공격이 있었으나 크로아티아군이 격퇴했고,[65] 이 전투에서 보조비치가 전사했다.[62] 도심이 비교적 안정되자 크로아티아군은 공세를 확대하여 야시코바츠 막사를 점령하고, 9월 20일에는 포위되었던 리브니크빌라이 마을을 구출했다.[65] 유고 인민군 항복 후 세르비아군은 고스피치 동부에서 메다크 앞 8km 지점까지 후퇴했고,[64] 크로아티아군은 9월 22일까지 고스피치 지역의 잔당을 격퇴했다.[68]

5. 전투 이후

2021년에도 고스피치 전투 당시 총탄 흔적이 건물에 남아 있다.


고스피치 전투 이후, 크로아티아는 유고 인민군 포로를 부코바르 전투 등에서 잡힌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교환했다. 전투는 1992년 1월 사라예보 협정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93년 9월 메다크 포위 작전으로 재개되었다.

전투는 군사적 충돌뿐 아니라 민족 간 폭력도 격화시켰다. 1991년 10월, 리치키오시크 인근에서 고스피치 군 당국과 SAO 크라이나 군에 의해 민간인 대상 전쟁범죄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고스피치 학살과 시로카쿨라 학살 등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5. 1. 포로 교환과 전리품

크로아티아군은 유고 인민군(JNA) 장교와 병사 약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은 생포 후 리예카로 이송되었다.[62] 이들은 나중에 부코바르 전투 및 크로아티아 내 다른 곳에서 유고 인민군이 붙잡은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교환되었다.[55] 또한 대량의 소화기와 탄약 외에도 전차 7대와 120mm 박격포 12문도 노획했다.[66]

5. 2. 지속적인 포격과 교전

크로아티아군은 유고 인민군(JNA) 장교와 병사 약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은 생포 후 리예카로 이송되었다.[62] 이들은 나중에 부코바르 전투 및 크로아티아 내 다른 곳에서 유고 인민군이 붙잡은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교환되었다.[55] 대량의 소화기와 탄약 외에도 전차 7대와 120mm 박격포 12문도 노획했다.[66] 전투 이후에도 고스피치에서 남쪽으로 약 5km에서 8km 떨어진 디보셀로와 리치키치틀루크의 포 진지에서 고스피치를 향한 포격이 계속 이어졌다.[67] 리카 지역의 교전은 1992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특히 고스피치와 오토차츠 주변에서 양 측이 좋은 전선 위치로 이동하기 위한 교전이 이어졌다.[68] 9월 23일에는 크로아티아군의 남부 진격이 스테비로크 마을 인근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방어하던 보병대대와 크라이나 익스프레스 장갑열차로 구성된 유고 인민군 및 SAO 크라이나군에게 저지되었다.[69] 유고 인민군은 무기고를 확보하고 9월 26일 로비나츠를 점령했다. 9월 말까지 오토차츠 주변의 크로아티아군 진지가 강화되면서 주로 드레노브클라나츠 주변의 가벼운 기습만 이어졌다.[70] 10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고스피치 인근 디보셀로에서 전투가 격화되었으나 전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71] 고스피치를 향한 포격은 1991년 11월 1일 3,500발의 포탄이 마을을 강타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65] 12월에는 유고 인민군 크닌 군단이 참모부에 그라차츠에서 고스피치와 오토차츠를 향한 진격 작전을 제안했으나 1992년 1월 2일 사라예보 협정이 체결되면서 더 이상의 교전은 중단되었으며,[72] 1993년 9월 메다크 포위 작전 이후에나 교전이 재개된다.[73]

고스피치 지역의 군사 교전은 인종간 폭력 또한 늘어나게 만들었으며, 1991년 10월 리치키오시크 인근에서 고스피치 군사령부와 SAO 크라이나군이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르며 이 폭력은 극에 달했다. 고스피치 마을 안에서도 약 100여 명의 세르브인 민간인이 마을에서 끌려나와 인근의 들판에서 학살당했다. 훗날 고스피치 학살로 알려진 이 학살의 책임자 중 일부는 크로아티아 사법부에 기소당했다. 재판 결과 2003년 노라츠 및 기타 2명의 피고인에 12년형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4] 리치키오시크 인근에서는 시로카쿨라 학살로 알려진 집단살해로 민간인 40명이 학살당했는데, 대부분은 크로아트인이었으나 크로아트인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은 몇몇 세르브인도 같이 살해당했다.[75] 2011년에는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법원이 전 SAO 크라이나 민병대원 4명에게 시로카쿨라에서 세르브인 4명과 크로아트인 1명을 학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76]

1993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마르첼 두스페르, 토모 차치치, 요보 쿠프레샤닌, 보그단 오다노비치, 렐랴 토미치, 두슈코 바이치, 다네 드라쿨라, 미초 바시치, 고체 코네스키, 슬로보단 도틀리치, 드라골류브 라자레비치, 라도반 라덴코비치, 브라티슬라브 밀로이코비치, 스테보 밀로셰비치, 밀로시 보그다노비치 등 전 유고 인민군 장교 15명을 1991년 고스피치 주둔지에서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했다. 드라쿨라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은 궐석재판 형태로 재판이 이루어졌다. 드라쿨라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두스페르, 토미치, 바이치는 유죄를 선고받아 각각 징역 20년형을, 나머지 피고인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1994년 크로아티아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도틀리치는 2013년 10월 18일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는 부모를 보기 위해 크로아티아에 입국했다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 도틀리치는 새 재판을 열기를 요구했고, 체포 후 혐의도 무장 반란죄로 변경되었으나, 요구는 나중에 일반사면법에 따라 기각되었다.

5. 3. 인종 청소와 전쟁 범죄

고스피치 지역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민족 간 폭력의 증가로 이어졌으며, 1991년 10월에는 고스피치 군 당국과 리치키오시크 인근의 SAO 크라이나 군이 민간인을 상대로 전쟁 범죄를 저지르면서 폭력이 극에 달했다. 고스피치 마을 안에서는 고스피치 학살로 알려진 사건으로 약 100여 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마을에서 끌려나와 인근 들판에서 살해되었고, 리치키오시크 인근에서는 시로카쿨라 학살로 알려진 집단 학살로 민간인 40명이 학살되었는데, 희생자 대부분은 크로아티아인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인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은 일부 세르비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74][75]

1993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1년 고스피치 주둔지에 배치되었던 마르셀 두스페르, 토모 차치치, 요보 쿠프레샤닌, 보그단 오다노비치, 렐랴 토미치, 두슈코 바이치, 다네 드라쿨라, 미초 바시치, 고체 코네스키, 슬로보단 도틀리치, 드라골류브 라자레비치, 라도반 라덴코비치, 브라티슬라브 밀로이코비치, 스테보 밀로셰비치, 밀로시 보그다노비치 등 전 유고 인민군 장교 15명을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드라쿨라를 제외한 전원은 궐석재판 형태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드라쿨라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두스페르, 토미치, 바이치는 각각 징역 20년형을, 나머지 피고인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1994년 크로아티아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도틀리치는 2013년 10월 18일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는 부모를 보기 위해 크로아티아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었다. 체포 전 도틀리치는 새 재판을 요구했고, 체포 후 혐의도 무장 반란죄로 변경되었으나, 일반사면법에 따라 기각되었다.

5. 3. 1. 고스피치 학살

1991년 10월, 고스피치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과 함께 민족 간 폭력 사태가 증가했다. 고스피치 군 당국과 리치키오시크 인근의 SAO 크라이나 군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고스피치에서는 약 100여 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끌려 나와 인근 들판에서 살해되었는데, 이를 고스피치 학살이라고 부른다.[36]

이 학살 책임자 중 일부는 크로아티아 사법부에 의해 기소되었다. 2003년, 노라츠와 다른 두 명의 피고인은 12년 형을 선고받았다.[36]

5. 3. 2. 시로카쿨라 학살

고스피치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면서 민족 간 폭력 사태도 증가하였다. 특히 1991년 10월, 리치키오시크(Lički Osik) 인근에서 고스피치 군 당국과 SAO 크라이나 군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 과정에서 시로카쿨라 학살로 알려진 집단 학살이 발생하여 크로아티아인을 지지한다고 의심받는 일부 세르비아인을 포함, 민간인 40명이 희생되었다.[75] 2011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법원은 시로카쿨라에서 세르비아인 4명과 크로아티아인 1명을 살해한 혐의로 전 SAO 크라이나 민병대원 4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76]

5. 4. 전범 재판

크로아티아는 유고 인민군(JNA) 장교와 병사 약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은 리예카로 이송된 후 부코바르 전투 등에서 유고 인민군이 붙잡은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교환되었다.[62][55]

고스피치 지역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인종 간 폭력을 심화시켰다. 1991년 10월, 고스피치 군사령부와 SAO 크라이나군은 리치키오시크 인근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고스피치에서는 약 100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의 책임자 일부는 크로아티아 사법부에 기소되어 2003년 미르코 노라츠 등 2명에게 12년형이 선고되었다.[74] 리치키오시크 인근에서는 시로카쿨라 학살로 알려진 사건으로 민간인 40명이 학살되었는데, 대부분 크로아티아인이었으나 크로아티아인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은 일부 세르비아인도 포함되었다.[75] 2011년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법원은 전 SAO 크라이나 민병대원 4명에게 시로카쿨라에서 세르비아인 4명과 크로아티아인 1명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76]

1993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1년 고스피치 주둔지에서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전 유고 인민군 장교 15명을 기소했다. 드라쿨라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은 궐석재판으로 진행되었다. 드라쿨라는 무죄, 두스페르, 토미치, 바이치는 각각 징역 20년형, 나머지 피고인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1994년 크로아티아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도틀리치는 2013년 크로아티아에서 체포되었으나, 일반사면법에 따라 기각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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