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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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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패는 삼국 시대 유장의 장수로, 유비가 익주를 침공할 때 양회와 함께 유비의 남진을 막으려 했다. 유비는 고패와 양회를 처형하고 익주를 점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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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고패
원어 이름高沛
로마자 표기Gāo Pèi
직업장군
섬긴 군주유장
사망 시기213년

2. 생애

211년(건안 16년) 유비가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응해 한중의 장로를 토벌한다며 광한군 가맹현(葭萌縣)에 머물렀는데, 실은 익주를 탈취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패와 양회는 강병을 거느리고 백수관(白水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비를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유장에게 수차례 간언하였다. 212년, 장송과 유비 간의 모의가 누설되었다. 유장은 장송을 참수하고 관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유비에게로 향하는 문서를 단속하라고 명령하였다. 유비는 고패와 양회를 불러 참수하고는 남진을 시작하였다.[1][2]

고패에 대해서는 양회와 함께 백수관(白水關)을 지켜 장로의 공격에 대비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유비는 유장을 장로조조로부터 방어한다는 구실로 유장의 익주에 들어갔으나, 실은 익주를 점령할 의도를 품고 있었다. 유비는 참모 방통의 계책에 따라 먼저 북쪽의 유장 군대를 장악한 다음 성도를 점령하기로 했다. 고패와 양회가 방심한 틈을 타 백수관에 진입한 유비는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고패와 양회를 불경하다는 구실로 처형하고, 관의 수비대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킨 후 부현(涪縣; 현재의 충칭시, 푸링구)을 공격했다.[1][2]

고패는 유장의 부하로, 양회와 함께 유장의 명장이었으며, 강력한 군세를 거느리고 백수관을 지켰다. 또한 유장에게 문서를 보내 유비형주로 철수시키도록 간언했다. 한편으로는 유비의 영명에는 복종했다고 한다.

건안 17년(212년), 유비는 유장의 요청으로 장로 토벌을 위해 가맹에 주둔했는데, 장로를 토벌하기보다는 주민들의 인심을 수습하며 익주 평정을 위한 준비를 갖췄다. 방통은 유비에게 "(유비가) 형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고패는 양회와 함께 기뻐하며 스스로 찾아올 것이니, 그때 두 사람을 사로잡으면 된다"는 계책을 진언했다. 형주 귀환 소식을 들은 고패는 양회와 함께 배례를 위해 찾아왔으나,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그 군세는 빼앗겼다. 유비는 이를 기회로 성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4]

3. 평가

방통은 고패와 양회유장의 명장이라 하였다.[4] 고패는 양회와 함께 유장의 명장이었으며, 강력한 군세를 거느리고 백수관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유장에게 문서를 보내 유비형주로 철수시키도록 간언했다. 한편으로는 유비의 영명에 복종했다고 한다.[4]

건안 17년(212년), 유비는 주민들의 인심을 수습하며 익주 평정을 위한 준비를 갖췄다. 방통은 유비에게 "(유비가) 형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고패와 양회는 기뻐하며 스스로 찾아올 것이니, 그때 두 사람을 사로잡으면 된다"는 계책을 말했다. 형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고패는 양회와 함께 배례를 위해 찾아왔으나,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그 군세를 빼앗겼다.[4]

4. 삼국지연의

소설삼국지연의》에서 고패는 양회와 함께 부수관(涪水關)에서 유비를 감시한다. 유비는 형주로 돌아가는 척하며 고패와 양회에게 송별을 청한다. 양회와 고패는 그 자리에서 유비를 암살하고자 했지만, 실은 모든 게 방통함정이었다. 고패와 양회는 각각 유봉관평에게 붙잡히고 군막 앞으로 끌려나가 참수당한다.[3]

하지만, 사료에서는 고패 등이 유비 암살을 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5. 대중문화 속의 고패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고패는 양회와 함께 부수관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암살을 꾀하는 역할로, 형주로 돌아가는 유비를 전송할 때 암살을 실행하려 한다.[4] 그러나, 유봉관평에게 붙잡혀 방통의 명령에 의해 양회와 함께 참수된다.[4] 사료에서는 고패 등이 유비 암살을 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4]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2] 서적 Sanguozhi
[3] 서적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4] 서적 ただし蜀書先主伝は、以下のように記述している。劉璋は劉備に通じていた益州別駕従事[[張松]]を誅殺し、益州の関所を守る武将たちに文書を発して、二度と劉備と関わりを持ってはならないと通達した。これに激怒した劉備は楊懐を召し寄せ、その無礼を糾弾した上で斬った、としている。しかし、高沛の誅殺については言及されて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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