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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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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통은 촉한의 군사이자, 유비의 익주 평정을 도운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용모와 언변이 부족했으나, 사마휘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명성을 얻었다. 유비 휘하에서 뇌양 현령을 지냈으나 파면되었고, 이후 제갈량의 추천으로 치중종사,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유비의 익주 공략에 참여하여 유비에게 익주를 빼앗을 것을 진언하고, 유비와 함께 익주에 들어가 활약했다. 낙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방통은 인물 평가에 뛰어나고 인재 육성에도 힘썼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과 함께 '복룡', '봉추'로 불리며 천하를 얻을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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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龐統
청나라 시대의 방통 초상화
이름방통
원어 이름龐統
로마자 표기Pang Tong
사원(士元)
별명봉추(鳳雛)
시호정후(靖侯)
출생과 사망
출생179년
출생지후베이성 샹양 시
사망214년 (35세)
사망지쓰촨성 광한 시
사인전사
묘소방통 사당과 무덤
가계
형제방린
숙부방덕공
사촌방산민
조카방환
자녀방홍
관직 및 경력
초기 관직 (손권 휘하)공조
이후 관직 (유비 휘하)종사
치중종사
군사중랑장
섬긴 군주손권유비
봉작관내후 (추증)
함께 섬긴 군사제갈량
기타
업적인물평의 대가, 서촉 공방전 참여

2. 생애

방통은 형주 상양군 출신으로, 젊어서는 수수하고 평범한 외모 때문에 방덕공을 제외하고는 তেমন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세경, 인재 발굴로 유명했던 사마휘를 방문하여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사마휘는 그를 "형주 최고의 선비"라 칭찬하며 "방덕공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다"라고 말했다. 이후 방통은 점차 명성을 얻어 제갈량사마휘처럼 "봉추"(어린 봉황)라는 별명을 얻었다.[2][3][4]

방통은 남군에서 공조로 일하며 사람을 평가할 때 능력보다 덕성을 중시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세상이 혼란스러워 선한 사람이 부족하니, 그들을 격려하여 좋은 평판을 얻게 하고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라고 답했다.[6]

209년, 손권의 장수 주유가 남군을 점령하고 태수가 되자, 방통은 그의 공조로 일했다. 210년 주유가 사망하자 그의 관을 강동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육적, 고소, 전종 등과 교류하며 그들을 평가했다. 그는 육적을 "강한 의지를 가진 말", 고소를 "멀리 짐을 질 수 있는 소"로 비유하며, 정치와 전략에 있어서는 자신이 더 낫다고 자평했다.[7][9]

210년 유비가 형주 자사가 된 후, 방통은 그의 신하가 되어 종사와 뇌양현령으로 일했지만, 업무 능력 부족으로 면직되었다. 노숙제갈량의 추천으로 유비는 방통을 치중종사로 기용하고,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하여 제갈량과 동등하게 대우했다.[11]

유비는 방통에게 주유가 자신을 억류하려 했다는 소문의 진위를 물었고, 방통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유비는 제갈량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주유의 계략에 빠질 뻔했던 경험을 회상했다.[12]

210년대 무렵, 방통은 유비에게 익주를 점령하여 조조와 천하를 다툴 것을 설득했다. 그는 "익주는 부유하고 백성이 강하며, 자원이 풍부하여 기반으로 삼기에 충분하다"라고 주장했다.[13] 유비는 신의를 잃을 것을 우려했지만, 방통은 "융통성을 발휘하고, 반란을 진압하고 충신을 옹호하며 공정하게 보상하면 의로움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설득하여 유비의 결심을 이끌어냈다.[15]

211년, 유비는 유장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익주로 군대를 이끌었고, 제갈량은 형주에 남았다. 방통은 유비에게 유장을 생포하고 익주를 차지할 기회를 제안했지만, 유비는 기반이 약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7]

이후, 유장의 군대와 뤄현(雒縣, 현재 광한 북쪽, 쓰촨)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으나 전투 중에 날아온 화살에 맞아 36세(세는나이)로 사망했다. 유비는 방통의 죽음에 깊이 슬퍼하며 그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흘렸다.[24] 방통은 관내후로 추증되었고,[24] 260년 10월 또는 11월, 유선은 방통에게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내렸다.[25]

유비는 뤄현 근처에 방통의 사당과 묘를 세웠다. 사당과 묘는 현재 백마관진(白馬關鎮), 낙강현, 쓰촨에 있으며, 2006년 5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다.[26]

낙강의 방통 사당과 묘

2. 1. 초기 생애와 명성

방통은 형주 상양군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수수하고 평범한 외모를 지녀 그의 삼촌인 방덕공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2] 18세가 되어 방덕공과 친밀했던 사마휘에게 평가를 받으러 갔다.[56] 사마휘는 영천군 사람으로, 맑고 사람을 보는 이 있었다.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을 따고 방통은 아래에 앉아 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높게 평가했고, "형주의 선비 중 으뜸"이라고 칭찬했다. 또한 "방덕공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정말 뛰어나다. 진실로 웅대한 도덕적 품성을 가진 소년이다."라고 말했다.[2] 그 후 방통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2] 제갈량과 사마휘가 각각 "와룡"과 "수경"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처럼, 방통은 그의 삼촌 방덕공으로부터 "봉추"(鳳雛, 어린 봉황)라는 별명을 얻었다.[3][4] 이로써 점차 이름이 알려져 남군에서 공조(功曹)로 일했다.

2. 2. 주유와의 만남과 동오에서의 활동

209년, 손권 휘하의 장수 주유가 강릉 전투 이후 남군을 점령하고 남군 태수(太守)로 임명되자, 방통은 그의 공조(功曹)로 근무했다.[7] 210년 주유가 사망하자 방통은 그의 관을 강동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렀다.[7] 방통은 강동에서 육적, 고소, 전종을 만나 친분을 맺고 그들을 평가했다.[7] 그는 육적을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강한 의지력을 가진 말", 고소를 "육체적으로 약하지만 멀리서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소"로 묘사했고,[7] 전종은 여남의 번자조(樊子昭)에 비유하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흠모하는 관대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8]

방통은 "말은 빨리 달릴 수 있지만, 한 사람의 무게밖에 견딜 수 없습니다. 소는 하루에 300 리를 갈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한 사람 이상의 무게를 견딜 수 있죠!"라고 말하며 육적과 고소를 비교했다.[9] 고소는 방통에게 "우리 둘 중에서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고, 방통은 "저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인성을 평가하는 면에서는 당신만 못합니다. 하지만 정치와 전략에 관해서는 제가 당신보다 하루 앞선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9] 고소는 이에 동의하며 방통과 더욱 가까워졌다.[9] 방통이 떠나기 전, 육적과 고소는 "천하가 평화로워지면, 유명한 사람들에 대해 당신과 좋은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친분을 다졌다.[10]

2. 3. 유비와의 만남과 익주 평정

211년(건안 16년) 유비가 익주목 유장의 요청으로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다며 으로 들어갔을 때, 방통은 유비를 수행했다. 유장이 광한군 부현(涪縣)으로 나와 유비를 환대했는데, 장송, 법정, 방통은 병력을 소모하지 말고 여기서 바로 유장을 잡자고 권했다. 그러나 유비는 타국에 와서 은혜와 신의를 아직 보이지 못했다며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50]

유장은 성도로 돌아가고, 유비는 가맹현(葭萌縣)으로 올라가 한중을 치려 했다. 이때 방통은 유장부터 무찔러야 한다며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18]

  • 상책: 정예병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 성도를 습격한다. 유장은 군사적 식견이 없고 대비도 없을 것이므로 한 번에 평정할 수 있다.
  • 중책: 양회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강력한 병사로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는데, 이들이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다 한다. 형주가 위급하여 구하러 간다고 알리고 돌아가는 척 꾸미면, 그들은 틀림없이 만나러 올 것이고, 그때 그들을 붙잡고 그 군대를 차지하여 성도로 향한다.
  • 하책: 백제성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대하여 서서히 일을 도모한다.


유비는 망설이면 큰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방통의 말을 듣고 중책을 추진하여 민심을 얻었다. 212년, 양회와 고패의 을 베고 성도로 남진하였다.[19]

부현에서 연회가 열렸을 때, 유비가 오늘의 즐거움을 이야기하자 방통은 타인의 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고 꾸짖었다. 술에 취한 유비는 주 무왕의 고사를 들며 방통에게 나가라고 소리쳤으나,[20] 곧 후회하고 방통을 불렀다. 방통은 아무 말 없이 평소처럼 행동했고, 유비가 누구의 잘못이냐 묻자 "두 사람 모두의 잘못입니다"라고 답했다. 유비는 웃었고 연회는 계속되었다.[21]

습착치는 유비가 힘으로 사업을 이루고 타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고 비판하며, 방통이 군주의 실수를 바로잡으면서도 진실하고 충실하게 행동했다고 평했다.[22] 배송지는 방통이 유비의 기쁨을 자제시킨 것은 죄책감 때문이며, 유비가 술에 취해 자신을 주 무왕에 비유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덧붙였다.[23]

2. 4. 낙성 전투와 죽음

유비유순, 유괴, 장임이 방어하는 낙현(雒縣)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214년[60] 유시(流矢)에 맞아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51] 유비는 몹시 애석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훗날 방통의 아버지는 의랑(議郞)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으며, 방통은 관내후에 추봉되고 260년(경요 3년)[61]에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받았다.[25]

방통은 유장의 군대와 뤄현(雒縣, 현재 광한 북쪽, 쓰촨)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 중에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유비는 방통의 죽음에 깊이 슬퍼하며 방통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흘렸다. 방통은 유비가 황제가 되어 221년촉한을 건국한 후 관내후(關內侯)로 추증되었다. 260년 10월 또는 11월, 유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은 방통에게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비는 뤄현 근처에 방통의 사당과 묘를 세웠다. 사당과 묘는 현재 백마관진(白馬關鎮), 낙강현, 쓰촨에 위치해 있다. 2006년 5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다.[26]

3. 특징

방통은 인물 평가를 잘하는 한편 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남군 공조 시절, 타인을 칭찬할 때 실제 능력보다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겼다. 그 이유를 묻자, "천하가 어지럽고 착한 사람은 적고 악한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풍속과 도리를 바로 세우려면 칭찬을 통해 명성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선행을 본받고, 열 명 중 다섯 명이라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일 수 있다"라고 답했다. 이러한 방통의 명성은 오나라에까지 퍼졌다.[62]

210년, 남군 태수 주유가 사망하자, 방통은 그의 시신을 동오로 운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군의 창문(昌門)에서 육적, 고소, 전종 등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았다. 방통은 육적을 '빠른 발을 가진 말', 고소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소'[63]에 비유하며, "말은 빠르지만 한 사람만 태울 뿐이고, 소는 하루에 300[64]를 가며 여러 사람의 무게를 나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65] 전종에 대해서는 '베풀기를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는 여남의 번자소와 유사하며, 비록 지력은 부족하지만 한 시대의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육적과 고소는 '천하가 태평해지면 방통과 함께 천하의 인재들을 논하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방통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삼국지》에서 방통은 법정과 함께 평가받는다. 진수는 "방통은 인물 비평을 좋아하고 경학과 책략에 뛰어나 형주와 초 지역 인사들에게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다", "위나라 신하에 비유하면 순욱의 형제와 같다"라고 평하며, 법정과 함께 조조의 측근 군사들에 필적한다고 평가했다. 동진의 원굉은 저서 "삼국명신서찬"(《문선》)에서 위나라 9명, 촉나라 4명, 오나라 7명을 명신으로 칭찬하며 방통의 이름을 언급했다.

4. 평가

방통은 어릴 적 순박하고 둔해 보였으나, 숙부 방덕공은 그를 중하게 여겼다. 18세에 방덕공과 친했던 사마휘에게 평가를 받으러 갔는데, 사마휘는 방통을 높게 평가했고, 이로 인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56] 방덕공은 방통을 봉추라 불렀으며, 사마휘는 방통과 대화 후 "방덕공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방통은 실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라고 감탄했다.[56] 유비가 사마휘에게 세상일에 대해 묻자, 사마휘는 복룡(제갈량)과 봉추(방통)를 언급하며 이들이야말로 시대를 이끌 인재라고 답했다.[66]

방통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 능했는데, 고소와의 비교에서 자신은 세속을 교화하고 인물을 평가하는 능력은 고소보다 못하지만,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위태로움과 편안함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자신이 더 낫다고 평가했다. 고소는 이 말에 만족하며 방통과 친하게 지냈다.[56]

노숙유비에게 보낸 글에서 방통을 "백 리나 다스릴[68] 자가 아니"라며, "치중이나 별가(別駕)를 맡겨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펼칠 수 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제갈량 또한 방통과 요립을 초 지방의 우수한 인재로, 제왕의 사업을 보좌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평가했다.[69]

장존은 방통이 전사한 후 유비가 그를 칭찬하자, "방통이 비록 충성을 다했으나 천하의 올바른 도리를 어겼다"고 비판했다.[70] 그러나 유비는 방통이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였다며 장존을 면직시켰다.[71]

양희는 방통을 ‘미덕과 맑고 고상한 기품이 빛났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내놓고 가슴에서부터 충정을 발현하였다. 의리와 도덕의 모범이 되어 자신을 희생해 은덕을 갚았다.’고 평하였다.[72]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방통을 순욱에 비견하며, ‘인물 평가와 경학(經學), 책모가 뛰어나 형주 사람들은 그를 고아하고 준수한 자[高俊]라 했다.’고 평가했다.[73]

부손은 방통을 "재지(才智, 재주와 지략)가 뛰어난 영웅(英雄,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지만 기량(器量, 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불완전(不完全)하다."라고 말했다.

배송지는 방통과 유비의 연회 일화를 언급하며, 유비가 술자리에서 보인 태도는 부적절했지만, 방통이 ‘군신이 모두 잘못했다’고 말한 것은 유비에게 향할 비난을 분담하려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74]

배잠론(裴潛論)에서 방통은 학식(學殖)도 뛰어나며 정세를 바라보는 혜안(慧眼) 또한 뛰어나 일찍이 제왕(諸王)을 모실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하였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책사(策士)라 평하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방통의 전기를 저술하면서, 방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방통은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잘했다. 그는 경전을 부지런히 연구했고, 이를 통해 그의 계획을 숙고했다. 당시 형주와 초 출신들은 그를 뛰어난 인재로 여겼다. 조위의 관리들과 비교하면, 방통은 순욱과 형제 같고, 법정은 정욱과 곽가와 같은 악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37]

양희는 촉한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을 칭찬하는 글 모음인 《계한보신찬》 (季漢輔臣贊; 241년 출판)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했다.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 방통)은 빛나고, 극도로 우아하고 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쳐 주군의 길을 열었고, 그의 감정에 충실했으며 항상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 모든 정의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덕에 대한 보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38]

방통은 인물 평가를 즐겨 했지만, 그럴 때는 언제나 그 인물을 과대 평가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방통은 "현재 천하는 혼란하고, 정도는 쇠퇴하며, 선인은 적고 악인은 많다. 칭찬을 지나치게 하는 평가를 하여 명예욕을 채워주지 않으면 선행을 하는 자는 늘지 않을 것이다. 뜻있는 자에게 희망을 주고 노력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방통은 강동으로 돌아갈 때, 오의 육적, 고소, 전종 등과는 친밀했으며, 방통은 육적을 "준마", 고소를 "발은 느리지만 힘이 있는 소", 전종을 여남군의 번자조에 비유하며 칭찬했다. 방통이 주유의 상을 치르러 갈 때, 그들이 배웅을 나왔으며, 육적과 고소로부터 작별의 자리에서 "천하가 태평해지면 다시 사해의 선비를 비평합시다"라는 말을 듣는 등, 깊은 교류가 있었다.

《삼국지》에서, 방통의 전은 법정의 전과 동시에 평가받고 있다. 진수의 평에 따르면 "방통은 항상 인물 비평을 좋아하고, 경학과 책략에 뛰어나 당시 형주와 초 지역의 인사들로부터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다" "위나라 신하에 비유하면 순욱의 형제"라고 하며, 법정과 함께 조조의 측근 군사들에 필적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동진의 원굉의 "삼국명신서찬"(《문선》소재)에서는 위나라 9명, 촉나라 4명, 오나라 7명이 명신으로 칭찬받고 있으며, 그 안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방통

사마휘제갈량과 함께 방통을 "숨은 용과 어린 봉황. 둘 중 하나라도 얻는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며 유비에게 추천하였다.[39] 방통은 적벽 대전 무렵 강동으로 피신해있다가 장간과 함께 조조를 돕는 척하며 위나라로 넘어간다. 조조의 수군은 익숙하지 않은 수상 생활로 인해 병사하는 병사가 많았으므로 방통은 들을 쇠사슬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라고 진언한다. 조조는 기뻐하는데, 실은 화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환계였다.[40] 이를 알아챈 서서에게는 한수마등에 대한 방비를 핑계로 빠져나오라고 조언해준다.

제갈량노숙의 추천장은 꺼내지 않은 채 유비와 대면한다. 짙은 눈썹, 들창코, 검은 얼굴, 짧은 구레나룻 등 괴상한 용모로 인해 중용받지 못하고 뇌양현령을 받는다. 부임한 지 100여 일이 지나도록 만 마시며 사무는 전혀 처리하지 않는다. 장비손건이 순시하러 왔는데도 숙취가 깨지 않아 일어나 나가지 않는다. 장비가 업무 태만에 대한 을 주려 하자 반나절도 되지 않아 모든 공무를 끝마친다. 그제야 유비가 반성하며 부군사중랑장(副軍師中郞將)으로 기용해 크게 쓴다.

유비의 입촉을 수행한다. 방통, 장송, 법정은 부성의 연회 자리에서 유장을 암살하라고 권하는데 유비가 듣지 않는다. 방통은 불복하여 위연에게 칼춤을 추면서 기회를 봐 유장을 죽이라 지시하고 다른 무사들도 배치시킨다. 하지만 장임이 칼춤의 상대가 되겠다며 나서고 유봉, 유괴, 냉포, 등현 등도 나오는 통에 유비와 유장이 춤을 중지시킨다. 시간이 흐른 후 양군이 충돌하게 되자 양회고패를 유인해 참하고 부수관(涪水關)을 무혈점령한다.

낙성으로 향하던 차에 마량 편으로 천문의 징조가 좋지 않다는 제갈량의 서신이 도착한다. 방통은 자신이 혼자 큰 공을 세울까 시기한 제갈량이 말을 지어낸 것이라며 가 널브러져 죽더라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간뇌도지, 肝腦塗地) 방통과 위연은 좁은 길로, 유비와 황충은 넓은 길로 나누어 진격하기로 한다. 각자 떨어져 출발하는데 타고 있던 말이 나아가지 않아 낙마한다. 유비가 자신의 백마와 바꿔준다. 마침 낙봉파(落鳳坡)에 매복하고 있던 장임 부대의 집중 사격을 맞고 전사한다.[41]

6. 가계

항목내용
삼촌방덕공 (백부인지 숙부인지는 알 수 없음)
동생방림
아들방굉(龐宏)[77] - 는 거사(巨師)로 강직하고 대범하며 비평을 잘하였다. 상서령 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릉태수(涪陵―) 재직 중에 죽었다.



방통이 죽은 후, 유비는 방통의 아버지(역사에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음)를 의랑(議郎)으로 임명하고, 나중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진시켰다. 제갈량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31]

방통의 동생 방림(龐林)은 형주의 치중종사(荊州治中從事)로 복무했다. 그의 아내는 희진의 누이였다. 208년, 조조형주를 침략하여 양양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헤어졌다. 이릉 전투 이후 재회했을 때, 십여 년이 넘는 분리 기간 동안 그녀는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며 딸을 홀로 키웠다. 위(魏) 황제 조비는 그녀의 덕을 칭찬하고 선물을 하사했다.[32] 221~222년 이릉 전투에 장군 황권과 함께 참여하여, 촉한의 경쟁국인 조위의 공격으로부터 북쪽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비가 손권의 장군 육손에게 이릉 전투에서 패한 후, 방림과 황권은 유비의 남은 군대와 헤어져 촉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위(魏)에 항복했다. 방림은 위(魏)에서 거록군의 태수(太守)로 복무했으며,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33] 비관

방통의 아들 방굉(龐宏)은 자가 거사(巨師)였다. 촉(蜀) 정부에서 일했던 방굉은 검소하고 정직하며 직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상서령(尚書令) 진지를 불쾌하게 했다. 진지는 방굉의 흠을 찾아 그를 승진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부릉군(涪陵郡)의 태수(太守)로 재직하다가 죽었다.[34]

방덕공(龐德公)은 양양 출신으로, 제갈량의 지인이었다. 제갈량은 그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깊이 절하는 것으로 그를 존경했다. 어느 날, 방덕공이 면수 건너편에 있는 조상의 묘에 참배하러 갔을 때, 사마휘가 그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에게 식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하며 "서서가 중요한 손님이 그와 방덕공을 만나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방덕공의 가족은 사마휘의 지시를 존경심을 가지고 따랐다. 방덕공이 돌아왔을 때, 그는 사마휘의 방문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마치 사마휘를 집안의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사마휘는 방덕공보다 10살 어렸지만, 방덕공을 형처럼 대하며 애정 어린 어조로 "방 공(龐公)"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 공(龐公)"이 방덕공의 자인 줄 알 정도였다.[35]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龐山民) 역시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제갈량의 누이 중 한 명과 결혼했다. 그는 나중에 황문리(黃門吏)로 복무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의 아들 방환(龐渙)은 자가 세문(世文)이었으며, 서진 시대인 280년에서 289년 사이에 장가군의 태수(太守)로 복무했다.[36]

7. 기타

방통은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 ''무쌍 오로치'', ''진·삼국무쌍 택틱스''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방통은 만화 ''화봉요원''에서 수경 선생의 여덟 명의 천재 제자 중 여섯 번째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7
[2] 서적 Sanguozhi vol. 37
[3]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4]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5] 서적 Sanguozhi vol. 37
[6] 서적 Sanguozhi vol. 37
[7] 서적 Sanguozhi vol. 37
[8] 서적 Sanguozhi vol. 37
[9]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0] 서적 Sanguozhi vol. 37
[11] 서적 Sanguozhi vol. 37
[12]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3] 서적 Jiuzhou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4] 서적 Jiuzhou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5] 서적 Jiuzhou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6] 서적 Sanguozhi vol. 37
[17] 서적 Sanguozhi vol. 37
[18] 서적 Sanguozhi vol. 37
[19] 서적 Sanguozhi vol. 37
[20] 서적 Sanguozhi vol. 37
[21] 서적 Sanguozhi vol. 37
[22] 서적 Xi Zuoc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23]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24] 서적 Sanguozhi vol. 37
[25] 서적 Sanguozhi vol. 33
[26] 웹사이트 庞统祠墓 [Pang Tong Shrine and Tomb] http://www.zhjmg.com[...] 2014-06-04
[27] 서적 Three Kingdoms Miscellaneous Cases
[28] 서적 Three Kingdoms Miscellaneous Cases
[29] 서적 Three Kingdoms Miscellaneous Cases
[30] 서적 Three Kingdoms Miscellaneous Cases
[31] 서적 Sanguozhi vol. 37
[32]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33] 서적 Sanguozhi vol. 37
[34] 서적 Sanguozhi vol. 37
[35]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36]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37] 서적 Sanguozhi vol. 37
[38] 서적 Sanguozhi vol. 45
[39] 서적 Sanguo Yanyi ch. 35
[40] 서적 Sanguo Yanyi ch. 47-50
[41] 서적 Sanguo Yanyi ch. 63
[42] 문서 The Sanguozhi stated that Pang Tong died at the age of 36 (by East Asian age reckoning) in 214 CE. By calculation, his birth year should be around 179.
[43]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44] 서적 三国志』魏志 劉表伝が注引く『傅子』
[45] 문서 『三国志』にはこの時点で南郡の功曹に関する記述はありません。
[46] 서적 『三国志』蜀志 龐統伝 が注引く『江表伝』
[47] 서적 『三国志』蜀志 龐統伝 が注引く『荊州県志』
[48] 문서 劉備は「君が周瑜の功曹だった頃、私は呉を訪れていたが、そのとき周瑜が孫権に、私を呉に留め置かせるよう密かに進言していたと聞く。そのようなことがまことにあったのか?」と言った。龐統は「ありました」と答えた。劉備は「あのとき私は危難を抱えていて、どうしても呉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かし周瑜の手に落ちる寸前であったようだ。智謀の士の考えることは皆おおむね同じであることよ。あの時、孔明は私が呉を訪ねるのを一人強く諌めてくれたが、この事態を恐れていたのだな。私は、北の曹操を防がねばならない孫権は私の支援を頼りにしていると考えていたので、彼の心を決して疑わなかったが、あの呉訪問はとても危うく万全の策ではなかったなあ」と嘆息して言った。
[49] 서적 『九州春秋』
[50] 서적 『三国志』「蜀書 巻二 先主伝」
[51] 서적 『世説新語』言語篇 の劉孝標注では享年38となっている。なお雒の攻囲戦は213年から214年と越年して行なわれているため、龐統の没年がどちらなのかは不明である。
[52] 문서 名臣20選には、荀彧、荀攸、袁渙、崔琰、徐邈、陳羣、夏侯玄、王経、陳泰(以上魏 (三国)|魏)、諸葛亮、'''龐統'''、蔣琬、黄権(以上蜀漢|蜀)、周瑜、張昭、魯粛、諸葛瑾、陸遜、顧雍、虞翻(以上呉 (三国)|呉)を選出している
[53] 문서 龐統は「士元弘長 雅性内融 崇善愛物 觀始知終 喪亂備矣 勝塗未隆 先生標之 振起清風 綢繆哲後 無妄惟時 夙夜匪懈 義在緝熙 三略既陳 覇業已基」と謳われている
[54] 문서 봉황의 새끼
[55] 문서 208년에 양양군 (중국)|양양군으로 분리되었다.
[56] 서적 습착치, 《양양기》 ; 배송지 주석, 《삼국지》37권 촉서 제7 방통에서 인용
[57] 서적 겸약공매(兼弱攻昧). 《서경 (책)|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오는 말
[58] 서적 역취순수(逆取順守). 육가(육고)가 한 말로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주 무왕|무왕의 행위를 이른다. 《사기 (역사서)|사기》97권 열전 제37 육가
[59] 서적 사마표, 《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37권 촉서 제7 방통에서 인용
[60] 서적 《자치통감》67권 한기 제59 헌제 건안 19년
[61] 서적 《삼국지》33권 촉서 제3 후주 유선 (공사)|유선
[62] 서적 《자치통감》66권 한기 제58 헌제 건안 15년
[63] 문서 부중치원(負重致遠). 이 발언에서 유래한 사자성어로 그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64] 문서 소의 속력으로는 갈 수 없는 거리이다. 오기인 듯하다. 원본(元本)에서는 30리, 《세설신어》 품조(品藻)편에서는 100리라 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지집해》
[65] 서적 장발(張勃), 《오록》(吳錄) ; 배송지 주석, 《삼국지》37권 촉서 제7 방통에서 인용
[66] 서적 《양양기》 ; 배송지 주석, 《삼국지》35권 촉서 제5 제갈량에서 인용
[67] 문서 길흉·화복·성패가 서로 인연이 되어 맞물려 도는 것. 《노자》(도덕경)의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사자로는 화복의복(禍福倚伏)이라 한다.
[68] 서적 백리지재(百里之才). 《삼국지》44권 촉서 제14 장완전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역시 사자성어로 쓰인다.
[69] 서적 《삼국지》40권 촉서 제10 요립
[70] 문서 統雖盡忠可惜, 然違大雅之義
[71] 서적 삼국지
[72] 논문 계한보신찬
[73] 서적 삼국지
[74] 서적 삼국지
[75] 서적 장자
[76] 서적 세설신어
[7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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