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숙황귀비 (동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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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숙황귀비는 동치제의 후궁으로, 함풍 7년(1857년)에 태어났다. 동치 11년(1872년)에 순빈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순비, 순귀비로 진봉되었다. 광서제가 죽은 후 선통제에 의해 순황귀비로 봉해졌으며, 중화민국 시대에는 황고장화황귀비로 존봉되었다. 1921년에 사망했으며, 공숙황귀비로 추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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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황귀비 (동치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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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함풍 7년 8월 3일 (1857년 9월 20일) |
사망일 | 1921년 4월 14일 |
사망 장소 | 자금성 |
묻힌 곳 | 동릉 혜릉 비원침 |
씨족 | 아루트 (阿魯特; 출생 시) |
가문 | 아이신 교로 (결혼 후) |
아버지 | 사이샹가 |
배우자 | |
배우자 | 동치제 |
결혼 | 1872년 ~ 1875년 (사망) |
품계 | |
초수 | 순빈 |
진봉 | 순비 |
진봉 | 순귀비 |
존봉 | 황고순황귀비 |
존봉 | 장화황귀태비 |
추증 | 공숙황귀비 |
시호 및 존호 | |
시호 | 공숙황귀비 (恭肅皇貴妃) |
중국어 정보 | |
중국어 간체 | 恭肃皇贵妃 |
중국어 정체 | 恭肅皇貴妃 |
병음 | Gōngsù Huángguìfēi |
기타 작위 | |
쉰 귀비 | 珣貴妃 |
2. 생애
함풍 7년 8월 3일 (1857년 9월 20일)에 태어났다. 동치제의 효철황후의 아버지 충기는 사이상아의 셋째 아들이자, 공숙황귀비의 오빠이다. 따라서 공숙황귀비는 효철황후의 고모이지만, 황후보다 세 살 어렸다.
동치제의 대혼례를 위한 외팔기 수녀선발은 동치 7년 ~ 11년 동안 치러졌다. 동치 7년에 다섯 명의 수녀를 기명했는데, 그 중에는 효철의황후, 공숙황귀비 등이 있었다. 동치 11년(1872년) 2월 3일, 아로특씨는 순빈으로 책봉되고, 그녀의 조카딸은 황후로 지목되었다. 같은 해 8월 13일, 공친왕은 자안황태후와 자희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후궁 혼수에 침향조주 한 접시를 추가했다. 9월 13일 묘각(오전 5시~7시)에 순빈은 신무문을 통해 입궁하여 경인궁 채정에서 단폐악을 모시고 유빈과 함께 경인궁에 머물렀으며, 10월 19일에 책봉례를 거행했다.
동치 12년(1873년) 3월, 동치제는 양궁 황태후를 모시고 정릉에 가서 청명침토례와 융은전 대향례에 참여하였고, 황후와 내정주위를 거느리고 정릉으로 향했다.
동치 13년(1874년) 11월 15일, 광서제는 순빈을 순비로 진봉했다. 내무부 문서에 따르면 "순(珣)"자의 만문은 "온유하다"라는 뜻이다.
광서 20년(1894년) 1월, 순비에서 순귀비로 진봉되었다. 광서 26년(1900년) 7월 20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자, 21일, 자희황태후는 광서제, 황후, 근비 등과 함께 경성을 빠져나갔다. 이때 수강궁 1구역에는 동치제의 돈의영경황귀비 부찰씨, 순귀비 등이 살았으나, 자희황태후는 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광서제가 붕어하고 4일 후, 선통제는 그녀를 황고순황귀비로 봉하고, 효철황후가 머물렀던 저수궁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민국 2년 2월 5일, 푸이는 그녀를 황고장화황귀비로 봉했다.
1921년 4월 14일 (음력 3월 7일) 정오에 저수궁에서 64세의 나이로 훙거하였다. 경사방 수령이 태묘의 수령인 태감을 인솔하고 공청장화황귀비의 금관을 길상교 안으로 안치한 후, 저수궁의 계상문을 나와 자상문부터 자녕궁까지 들어가고, 3월 17일, "공의 시호를 공숙황귀비라 한다"는 유지를 받들었으며, 4월 11일 자녕궁이 금관을 봉납하여 원침향전에 이르러 잠시 안치하였다가, 12월 7일 유지를 받들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함풍 7년 8월 3일 (1857년 9월 20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이상아(賽尚阿/赛尚阿|싸이상아중국어)이며, 어머니는 부차씨(富察氏)이다. 사이상아는 1841년부터 1845년까지 공부상서를 역임했다. 4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그 중 셋째 형은 충기(崇綺/崇绮|충치중국어)로 효철의황후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공숙황귀비는 효철황후의 고모가 된다.그녀의 가문은 원래 몽골의 정람기(正藍旗) 출신이었다. 공숙황귀비의 본명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가계'''
관계 | 성씨 | 이름 | 비고 |
---|---|---|---|
조부 | 경휘(景辉) | ||
조모 | 장씨(張氏) | ||
아버지 | 사이상아(賽尚阿/赛尚阿|싸이상아중국어) | 1794–1875 | 1841년부터 1845년까지 공부상서를 역임 |
어머니 | 부차씨(富察氏) | ||
외조부 | 흥복(兴福) | ||
오빠(3남) | 충기(崇綺/崇绮|충치중국어) | 1829–1900 | 효철의황후의 아버지 |
2. 2. 동치제 시대
동치 11년(1872년) 2월 3일, 아로특씨는 순빈(珣嬪)으로 책봉되었다. 그해 8월 13일, 공친왕은 자안황태후와 자희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후궁 혼수에 침향조주 한 접시를 추가했다. 9월 13일 묘각(오전 5시~7시)에 순빈은 신무문을 통해 입궁하여 경인궁 채정에서 단폐악을 모시고 유빈과 함께 경인궁에 머물렀으며, 10월 19일에 책봉례를 거행했다.동치 13년(1874년) 11월 15일, 광서제는 순빈을 순비(珣妃)로 진봉했다. 내무부 문서에 따르면 "순(珣)"자의 만문은 "온유하다"라는 뜻이다.
2. 3. 광서제 시대
광서 20년(1895년) 1월, 순비에서 순귀비(珣貴妃)로 진봉되었다. 광서 26년(1900년) 7월 20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자, 자희황태후는 광서제, 황후, 근비 등과 함께 경성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수강궁 1구역에 살고 있던 동치제의 돈의영경황귀비 부찰씨, 순귀비 등은 자희황태후가 데리고 가지 않았다.2. 4. 선통제 시대
광서제가 붕어하고 선통제가 즉위하자, 1908년 11월 18일 황고순황귀비(皇考珣皇貴妃)로 존봉되었고, 효철의황후가 머물렀던 저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2. 5. 민국 시대
1913년 2월 5일, 푸이는 공숙황귀비를 황고장화황귀비(皇考莊和皇貴妃)로 봉했다. 1921년 4월 14일(음력 3월 7일) 정오에 저수궁에서 질병으로 인해 64세의 나이로 훙거하였다. 사후 "공숙황귀비(恭肅皇貴妃)"로 추존되었으며, 청 동릉의 혜릉(惠陵)에 안장되었다.[1]3. 시호와 존봉
함풍 7년 8월 3일 (1857년 9월 20일)에 태어난 알루트씨는, 동치제 시기 순빈(珣嬪)으로 처음 봉해졌다.[1] 동치 13년 11월 15일, 광서제는 순빈을 순비(珣妃)로 봉했다. 내무부 문서에 따르면 "순(珣)"자의 만주어는 "온유하다"라는 뜻이다.[2]
광서 20년 1월, 순비에서 순귀비(珣貴妃)로 진봉되었다.[3] 광서제가 죽은 지 4일 후, 선통제는 그녀를 황고순황귀비(珣皇貴妃)로 봉했다.[4] 민국 2년 (1913년) 2월 5일, 푸이는 그녀를 황고장화황귀비로 봉했다.
서기 1921년 4월 14일 (음력 3월 7일),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3월 17일, "공의 시호를 공숙황귀비라 한다"는 유지를 받들었다.
공숙황귀비가 받은 시호와 존봉은 다음과 같다.
시기 | 봉호 | 비고 |
---|---|---|
함풍제 시기 | 알루트씨 (阿魯特氏) | |
동치제 시기 | 순빈(珣嬪) → 순비(珣妃) | |
광서제 시기 | 순귀비(珣貴妃) | |
선통제 시기 | 순황귀비(珣皇貴妃) | |
중화민국 시기 | 장화황귀비(莊和皇貴妃) → 공숙황귀비(恭肅皇貴妃) | 사후 추시 |
4. 가족 관계
wikitext
공숙황귀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그녀의 가문은 원래 몽골 정람기(正藍旗) 출신이었다.
참조
[1]
문서
同治十一年 十月
[2]
문서
同治十三年 十一月 十五日
[3]
문서
光緒二十一年 五月 六日
[4]
문서
光緒三十四年 十月 二十五日
[5]
서적
八旗満洲氏族通譜
https://iiif.dl.itc.[...]
東京大学アジア研究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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