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저수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영락 18년(1420년)에 수창궁으로 처음 건립되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여러 황후와 후궁들이 거처했다. 명나라 가정제 때 저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청나라 광서 10년(1884년) 서태후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졌다. 서태후는 이곳에서 동치제를 낳았으며, 말년에는 저수궁에서 생활했다. 현재 저수궁은 당시 궁중생활을 보여주는 형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요 건축물로는 저수궁, 여경헌, 체화전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6궁 - 태극전
태극전은 자금성 내에 위치한 건물로, 명나라 때 미앙궁으로 지어져 황후와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서태후가 경극 관람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 서6궁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 자금성 - 태극전
태극전은 자금성 내에 위치한 건물로, 명나라 때 미앙궁으로 지어져 황후와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서태후가 경극 관람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 자금성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 저수궁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유형 | 전각 |
| 지정 번호 | 보물 제816호 |
| 지정일 | 1985년 8월 5일 |
| 소장 | 덕성여자대학교 |
| 상세 정보 | |
| 시대 | 조선 |
| 창건주 | 세조 |
| 창건 시기 | 1463년 |
| 위치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쌍문동) |
| 설명 | |
| 개요 | 저수궁은 세조가 정릉동에 있던 정현왕후의 원찰인 정릉을 옮겨 짓고 이름을 고친 것이다. |
| 형태 |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구조가 특이하며, 전체적으로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
2. 저수궁의 역사
저수궁은 자금성 내정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청나라 후궁들이 살았다. 명나라 영락 18년 (1420년)에 '수창궁(壽昌宮)'으로 창건되었으며, 가정 14년 (1535년)에 '저수궁(儲秀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궁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며 여러 차례 보수하였는데, 광서 10년(1884년) 서태후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은 63만 냥을 들여 대규모로 저수궁을 꾸몄다. 현재 저수궁은 광서 10년에 중수된 건물이다.
서태후는 입궁 후 저수궁 후전에 머물면서 동치제를 낳았다. 함풍제 승하 후 아들 동치제가 즉위하자, 황후와 함께 황태후 신분으로 장춘궁에 들어갔다. 광서 10년 (1884년) 서태후의 50번째 생일에 저수궁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저수궁 후전은 '여경헌(麗景軒)'이라 불렸으며, 여경헌 내서면에는 실내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무대는 푸이가 대혼례를 할 때 레스토랑을 개설하면서 철거되었다.
저수궁 정전 앞 처마 밑에는 '저수궁'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 (1741년), 건륭제는 영수궁 현판을 보고 11면 현판을 직접 써서 동6궁, 서6궁(영수궁 제외)의 정전에 각각 걸게 하였다. 건륭제는 "이후 수만 년 동안 옮길 수 없으며, 후궁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도 안 된다"라고 명하였다.
현재 저수궁은 당시 궁중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완복전은 '황가전화국'으로 바뀌었고, 여경헌·봉광실·의란관은 '푸이생활전'으로 개방되어 여경헌이 원형으로 공개되어 있다. 봉광실과 의란관에는 푸이의 생활용품 및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 1. 명나라 시기
'''수창궁(壽昌宮)'''2. 2. 청나라 시기
청나라는 명나라의 궁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다. 광서 10년(1884년), 서태후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은 63만 냥을 들여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저수궁의 모습은 이때 완성된 것이다.서태후는 젊은 시절 저수궁에서 생활하며 동치제를 낳았고, 황태후가 된 후 장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50세 생일에 다시 저수궁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그녀가 저수궁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선통제 시기, 효각민황후(완룽)는 저수궁을 서양식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 저수궁 정전인 서난각은 서태후의 침실이었다가 욕실로 바꾸었다.
- 체화전은 원래 자희태후의 진상처였으나, 서재 겸 거실로 고쳤다.
- 저수궁 후전인 여경헌에 서양식 식기, 식탁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고쳤다.
3. 저수궁 내 건물
저수궁은 원래 이진원(二進院) 구조였으나, 청나라 말기에 익곤궁과 연결되면서 사진원(四進院) 구조로 바뀌었다. 저수궁 앞마루, 동서 배전 앞마루, 체화전 뒤편 툇마루는 모퉁이로 이어져 회랑을 이룬다. 회랑 벽면에는 중신들이 자희태후의 생신을 축하하려고 쓴 유리구이 《만수무강부(萬壽無江府)》가 붙어있다.
3. 1. 주요 건축물
저수궁의 주요 건축물로는 저수궁, 여경헌, 체화전이 있다. 저수궁과 여경헌은 서태후가 거처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익곤궁의 후전이었던 체화전이 저수궁과 연결되었다.
3. 1. 1. 저수궁(儲秀宮)
저수궁의 정전으로, 저수궁이 있는 정원은 조용하고 널찍하다.두 그루의 고백나무가 우뚝 솟아 있는 가운데, 전대 기하의 동쪽과 서쪽 양쪽에는 광서 10년(1884년) 서태후 50세 생일에 주조한 희주동룡 한 쌍과 동매화사슴 한 쌍이 있다. 저수궁은 홑처마로 산꼭대기에 면적이 5칸이나 되고, 복도를 나선다.
처마 밑에는 공포가, 양방에는 소련식 채화가 그려져 있다. 문은 남나무로 만자 금색 바탕에 박쥐 문양과, 만복과 만수를 누리라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창은 만자 뭉치 수문보금지 적창이다. 처마의 인테리어가 화려하고 정교하다.
앞쪽 복도 아래 '저수궁'이라고 쓰여 있는 가파른 현판, 양쪽 대련에는 '온갖 복이 병개하고, 구천에 서리가 맺히다; 오운경려, 만만입춘대'라고 쓰여 있다. 명간 외처마 한가운데에는 '인흡도풍(仁禧道豊)'이라는 현판(서태후가 제작)이 걸려 있다.
양쪽 기둥에는 '서집요도(瑞集要圖)'라고 쓰여 있다. 앞쪽 복도 동쪽 끝의 작은 문 위에는 '규천거지(規天矩地)'라고 쓰여져 있다. 낭서단소문 위에는 '건곤경위(乾坤經緯)'라는 석판이 새겨져 있다.
3. 1. 2. 여경헌(麗景軒)
여경헌은 저수궁의 후전(後殿)이다. 면적이 5칸이고 홑처마가 단단한 경산 정산 양식이다. 앞처마 밑에는 '여경헌'이라는 가로 현판(서태후 제작)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는 '화기충동서진강락, 요광휘자극경엽승항(和氣充同瑞臻康樂, 瑤光輝詄極慶葉升恒)'이라는 세로 현판이 걸려있다.현재 여경헌 안에는 중화민국 시기 푸이와 완룽이 생활할 때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명간은 관광객이 참관할 수 있도록 하고, 서초간과 서차간 사이의 화대(花臺)는 남북으로 1개씩, 양문 중앙에는 큰 유리창이 있다. 서차간에는 서양식 식기, 책상 옆에는 서양식 식기, 탁자 옆에는 2개, 북쪽에는 벽, 서쪽에는 나무궤가 있으며, 동쪽에는 찻상을 중앙에 1개, 테이블 옆에는 2개, 북쪽에는 벽, 동쪽 끝과 동쪽 사이에는 피아노 벽이 있다. 동쪽 끝과 동쪽 사이에는 벽이 있다. 려경헌은 동쪽과 서쪽 양쪽에 각각 이실(耳室)이 있다.
완룽은 민국 11년(1922년) 푸이와 혼례를 올린 후 저수궁에 들어갔다. 처음 입궁했을 때 서태후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어 수리를 명했다. 이때 여경헌에 서양식 식기, 식탁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고쳤다.
3. 1. 3. 체화전(體和殿)
원래 익곤궁의 후전이었으나, 청나라 말기 저수궁과 연결되면서 체화전으로 개칭되었다. 자희태후의 생신을 축하하려고 중신들이 쓴 유리구이 《만수무강부(萬壽無江府)》가 회랑 벽면에 붙어있다.3. 2. 기타
저수궁과 익곤궁 사이에는 회랑이 연결되어 있으며, 회랑 벽면에는 중신들이 자희태후의 생신을 축하하려고 쓴 《만수무강부(萬壽無江府)》가 새겨져 있다.4. 저수궁에 기거했던 후궁
저수궁은 자금성 내정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여러 황후와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명나라 영락 18년(1420년)에 처음 지어졌을 때는 '수창궁(壽昌宮)'이라고 불렸으나, 가정 14년(1535년)에 '저수궁(儲秀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태후는 입궁 후 저수궁 후전에 머물면서 동치제를 낳았다. 함풍제 사후 아들 동치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어 장춘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광서 10년(1884년) 50세 생일을 맞아 다시 저수궁으로 돌아왔다.
저수궁에 기거했던 주요 후궁들은 다음과 같다.
| 왕조 | 후궁 | 비고 |
|---|---|---|
| 청나라 | 효현순황후 부찰씨 | 건륭제의 황후. 황후 책봉 전 2년간 거주. |
| 혜현황귀비 고씨 | 건륭제의 후궁. | |
| 효의순황후 위가씨 | 건륭제의 후궁. | |
| 효숙예황후 희타랍씨 | 가경제의 황후. 도광제의 생모. | |
| 효화예황후 뉴호록씨 | 가경제의 황후. 황후 책봉 전 경인궁 거주, 책봉 후 저수궁 거주. | |
| 난귀인 | 함풍제의 후궁. 동치제의 생모. |
건륭제는 저수궁을 포함한 동6궁, 서6궁의 정전에 자신이 직접 쓴 현판을 걸어두고, 후궁들이 다른 궁으로 옮기더라도 현판은 옮기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4. 1. 청나라
저수궁은 명나라 때 처음 지어져 '수창궁'으로 불리다가 가정 때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궁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특히 광서 10년(1884년)에는 자희태후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63만위안을 들여 대규모로 저수궁을 꾸몄는데, 현재 남아있는 저수궁의 모습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서태후는 입궁 후 저수궁 후전에 머물며 동치제를 낳았다. 함풍제 사후 아들 동치제가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어 장춘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광서 10년(1884년) 50세 생일을 맞아 다시 저수궁으로 돌아왔다. 푸이가 결혼할 때 여경헌 내서면에 있던 실내 무대는 철거되었다.
저수궁 정전 앞 처마 밑에는 '저수궁' 현판이 걸려있는데, 건륭제가 직접 써서 하사한 것이다. 건륭제는 이 현판을 영원히 옮기지 말라고 명하였다.
현재 저수궁은 궁중 생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완복전은 '황가전화국'으로, 여경헌·봉광실·의란관은 '푸이생활전'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봉광실과 의란관에는 푸이의 생활용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4. 1. 1. 건륭제
저수궁에는 건륭제의 후궁들이 잠시 거주하였다.4. 1. 2. 가경제
효숙예황후 희타랍씨는 가경제가 황자 시절에 맞이한 정실부인(적복진)이었다. 가경제가 즉위하면서 황후로 책봉되었고, 저수궁은 희타랍씨의 침전이 되었다. 도광제의 생모였으나, 가경 2년(1797년) 2월 7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저수궁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녀가 낳은 아들 면녕(훗날 도광제)은 계비인 효화예황후가 키웠다.효화예황후 뉴호록씨는 가경제의 측실부인(측복진)이었다. 가경제 즉위 후 귀비를 거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효숙예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건륭제의 명에 따라 가경제의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되기 전에는 경인궁에 머물며 어린 면녕을 돌보았고, 황후가 된 후 저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면녕이 즉위하면서 공자황태후로 진봉되었고, 이후 황태후가 되어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4. 1. 3. 함풍제
난귀인은 훗날 서태후로, 입궁 후 줄곧 저수궁에 머물다가 아들인 동치제를 낳았다. 함풍제가 승하하고 아들 동치제가 즉위한 후에는 황태후로 장춘궁에 머물렀다. 광서 10년, 저수궁에 다시 돌아가 개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함풍제의 후궁 중에는 영빈이 함풍 3년에서 4년 사이에, 려귀인이 함풍 3년에, 부귀인이 함풍 5년에, 숙귀인이 함풍 6년에, 옥귀인이 함풍 9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옥귀인은 후에 옥빈으로 진봉되었다.
4. 1. 4. 선통제
저수궁은 자금성 내정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청나라 후궁들이 살았다. 명나라 영락 18년(1420년)에 창건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수창궁(寿昌宫)'이었다. 명나라 가정 14년(1535년)에 '저수궁(儲秀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궁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며 여러 차례 보수하였는데, 광서 10년(1884년) 자희태후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은 63만위안을 들여 대규모로 꾸몄다. 현재 저수궁은 광서 10년에 중수된 건물이다.
푸이의 대혼례 때 레스토랑을 개설하면서 여경헌 내서면에 설치되었던 실내 무대는 철거되었다.
저수궁 정전(正殿) 앞 처마 밑에는 '저수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1741년), 건륭제는 영수궁의 현판을 보고 11면 현판을 만들어 직접 쓴 것으로, 동6궁, 서6궁은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正殿)에 각각 걸었다. 건륭제는 "이후 수만 년 동안 옮길 수 없다. 후궁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도 안 된다"라고 명하였다.
현재 저수궁은 당시의 궁중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완복전은 '황가전화국'으로 바뀌었다. 여경헌·봉광실·의란관은 '푸이생활전'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여경헌은 원형으로 개방되어 있다. 봉광실과 의란관은 푸이의 생활용품 및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효각민황후: 민국 11년(1922년), 푸이와 혼례를 올린 후 저수궁에 들어갔다. 처음 입궁했을 때, 서태후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어 수리를 명하였다.
- * 저수궁 정전인 서난각은 서태후의 침실이었다가 욕실로 바꾸었다.
- * 체화전은 원래 자희태후의 진상처였으나, 서재 겸 거실로 고쳤다.
- * 저수궁 후전인 여경헌에 서양식 식기, 식탁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고쳤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