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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실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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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실베리오는 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던 인물로, 교황 호르미스다의 아들이자 차부제였다. 동고트 왕국의 테오다하드의 강요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여러 기록에서 실베리오 폐위 과정에 대한 상반된 묘사가 나타나며, 정치적 음모와 권력 다툼의 희생양으로 묘사된다. 그는 사후 시성되어 폰차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폰차 섬과 미국 브롱크스 지역에서 그의 축제가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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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실베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실베리오
교황 실베리오
존칭교황 성인
직함로마 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임기 시작536년 6월 8일
임기 종료537년 3월
선임자아가피토 1세
후임자비질리오
출생지이탈리아 캄파니아
부모교황 호르미스다스
사망일537년 12월 2일
사망지동고트 왕국 팔마롤라
축일6월 20일
수호 성인폰차
인물 정보
본명실베리우스 (Silverius)
국적불명
직책제58대 로마 교황
생애
사망 장소동고트 왕국, 팔마롤라

2. 생애

실베리오는 교황 호르미스다스의 아들로 라치오 주 프로시노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생아가 아닌 합법적인 아들이었다. 536년 6월 8일 차부제였던 실베리오는 교황 아가피토 1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동고트 왕국의 테오다하드 왕에게 강요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테오다하드가 고트 전쟁을 앞두고 고트족에 우호적인 인물을 교황좌에 앉히려 했기 때문에 성직 품급이 낮았던 그가 단번에 교황직에 오를 수 있었다.[2]

536년 12월 9일 벨리사리우스가 이끈 동로마 제국군이 교황 실베리오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입성하였다. 이에 테오다하드의 뒤를 이어 동고트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된 비티게스가 군사들을 모아 로마를 수개월 동안 포위하였다. 동고트 병사들은 수도를 끊어 버리고 카타콤바와 성벽 밖의 성당들을 파괴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로마 시민들은 파괴와 궁핍으로 고생하였다. 이후 상황 전개는 모든 교황 연대기가 한결같이 배신과 모략이 뒤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르타고의 리베라토는 비질리오를 “탐욕스러운 배신자로서 과거에는 단성설을 추종한 이단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임자를 사실상 축출하여 살해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반면에 《교황 연대표》에서는 비질리오에 대해 좀 더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비질리오의 행동에 대해 종교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은 모두 생략하였다. 반면에 실베리오에 대해서는 고트족 편에 서서 로마를 넘겨주려고 했다고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와 교황 실베리오'' (오라치오 사마키니, 1570-75년경)

2. 1. 출생과 배경

실베리오는 교황 호르미스다스의 아들로 라치오 주 프로시노네에서 태어났다. 실베리오가 태어난 것은 호르미스다스가 사제 서품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실베리오는 합법적인 아들이었다.[2] 실베리오는 536년 6월 8일에 성직에 입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그는 동고트 왕국의 왕 테오다하드가 그의 선출과 축성을 강요했을 때 차부제였다.

2. 2. 교황 즉위

실베리오는 교황 호르미스다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생아가 아닌 합법적인 아들이었다. 실베리오가 성직계에 입문한 시기는 536년 6월 8일로 추정된다. 교황 아가피토 1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동고트 왕국의 테오다하드 왕에게 강요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차부제로서 성직 품급이 낮았던 그가 단번에 교황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테오다하드가 고트 전쟁을 앞두고 고트족에 우호적인 인물을 교황좌에 앉히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다른 부제들과 사제들 전체를 믿지 못하고 무시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2]

3. 재임 기간과 고난

실베리오는 교황 호르미스다의 아들로, 536년 6월 8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동고트 왕국의 왕 테오다하드는 고트 전쟁을 앞두고 고트족에 우호적인 인물을 교황좌에 앉히려 했고, 실베리오는 이러한 배경에서 교황직에 올랐다.[2]

하지만 실베리오의 재임 기간은 순탄치 않았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실베리오는 고트족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황직에서 쫓겨나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팔마롤라 섬에서 굶어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은 이후 그가 성인으로 시성되는 배경이 된다.[3]

3. 1.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536년 12월 9일 교황 실베리오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입성하였다.[2] 이에 테오다하드의 뒤를 이어 동고트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된 비티게스는 군사들을 모아 로마를 수개월 동안 포위하였다. 동고트 병사들은 수도를 끊어 버리고 카타콤바와 성벽 밖의 성당들을 파괴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로마 시민들은 파괴와 궁핍으로 고생하였다.[2]

이후 상황은 모든 교황 연대기가 배신과 모략이 뒤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벨리사리우스가 실베리오를 교황좌에서 끌어내어 537년 3월에 유배를 보내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의 사절로 머물러 있던 비질리오가 로마로 와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2]

카르타고의 리베라토는 비질리오를 “탐욕스러운 배신자로서 과거에는 단성설을 추종한 이단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임자를 사실상 축출하여 살해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리베라토는 비질리오가 교황이 된 이유는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을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후 테오도라와 모종의 합의를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테오도라가 비질리오의 교황 선출을 도와주면, 비질리오는 테오도라가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다시 앉히는 것을 교황으로서 허락한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3]

벨리사리우스는 처음에는 실베리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므로 테오도라의 지시를 이행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라와 절친한 아내 안토니나의 권유로 지시를 이행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를 고트족에게 넘겨준다는 위조된 편지에 실베리오가 연루되어 있다는 누명을 씌웠다. 그리하여 실베리오는 벨리사리우스 앞에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베리오는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가 침상에 누워 있는 내실로 인도되었다. 그러자 안토니나는 실베리오가 자기들을 속이고 고트족과 내통한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고 있는 동안 실베리오는 강제로 교황복을 빼앗기고 수도복으로 바꿔 입었다. 그 후 실베리오가 퇴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537년 3월 새 교황 선거가 서둘러 이루어져 비질리오가 선출되었다.[3]

이렇듯 순식간에 로마에서 쫓겨나 리키아의 파타라에 유배된 실베리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자신을 위해 공정한 재판을 열어줄 것을 청원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파타라의 주교로부터 정확한 소식을 전해듣고는 실베리오를 로마로 귀환하게 하였다. 만일 실베리오가 반역적인 편지를 썼다면 제국 내의 어느 도시에서 주교로 자유롭게 지내게 할 수 있게 하고, 만일 그 편지가 위조된 것이라면 교황직에 복귀시키려고 했다. 모함을 받은 실베리오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재판을 여는 대신에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비질리오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비질리오는 실베리오를 당시 무인도였던 팔마롤라로 유배를 보냈다. 그곳에서 실베리오는 몇 개월 동안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3]

반면에 《교황 연대표》에서는 비질리오에 대해 좀 더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동기는 리베라토의 주장과 일치한다. 즉, 실베리오가 교황직에서 퇴위당한 이유가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황 연대표》는 비질리오는 원래 실베리오를 설득하여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시키는 것을 허용한다는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 것일 뿐, 처음부터 실베리오에게서 교황직을 찬탈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베리오가 테오도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비질리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가서 실베리오가 동로마 제국을 배신하고 동고트 왕국 편에 선다는 서신을 작성했다고 주장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믿지 않았으나, 비질리오는 잠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그 앞에 가서 허위 증언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속은 벨리사리우스는 실베리오를 즉시 소환하여 그가 입은 제의를 강제로 벗긴 다음에 비질리오에게 신변을 양도하였다. 그리고 비질리오는 실베리오를 유배 보냈다는 것이다.[4]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비질리오의 행동에 대해 종교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은 모두 생략하였다. 반면에 실베리오에 대해서는 고트족 편에 서서 로마를 넘겨주려고 했다고 비판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벨리사리우스가 이 사실을 알고 실베리오를 교황직에서 사임시키고 수도복을 강제로 입힌 다음에 그리스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하였다. 그와 동시에 몇몇 원로원 의원들도 로마에서 추방시켰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벨리사리우스가 후임 교황으로 비질리오가 선출되게 도와주었다고 기록하였다.[4]

3. 2. 폐위와 유배

벨리사리우스가 이끈 동로마 제국군이 536년 12월 9일 교황 실베리오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입성하였다.[2] 이후 실베리오는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537년 3월 교황직에서 물러나 유배를 당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사절로 있던 비질리오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3]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서로 엇갈린다. 카르타고의 리베라토는 비질리오가 테오도라 황후와 모종의 합의를 통해 교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테오도라가 비질리오의 교황 선출을 돕는 대가로, 비질리오는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시키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벨리사리우스는 처음에는 테오도라의 지시를 따를 마음이 없었으나, 테오도라와 절친한 아내 안토니나의 권유로 실베리오에게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씌워 교황직에서 끌어내렸다고 한다.[3]

반면 《교황 연대표》는 비질리오가 실베리오를 설득하여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시키는 것에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 것이며, 처음부터 교황직을 찬탈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베리오가 테오도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비질리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실베리오가 동고트 왕국 편에 선다는 거짓 증언을 하여 그를 속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비질리오의 행동에 대해 종교적 논란은 생략하고, 실베리오가 고트족 편에 서서 로마를 넘겨주려 했다고 비판하며 벨리사리우스가 그를 교황직에서 사임시키고 그리스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했다.[4]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실베리오 폐위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이탈리아 회복 계획에 따라, 친동방 교황이 필요했고, 비질리오가 그 적임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실베리오는 리키아의 파타라로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공정한 재판을 청원하여 로마로 귀환했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재판 대신 실베리오를 비질리오에게 넘겼다. 비질리오는 실베리오를 팔마롤라 섬으로 유배 보냈고, 실베리오는 그곳에서 굶어 죽었다.[3]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와 그에 따른 교황의 강제적인 폐위는 종교의 자유와 독립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3. 3. 죽음

카르타고의 리베라토는 비질리오를 "탐욕스러운 배신자로서 과거에는 단성설을 추종한 이단자였으며, 자신의 선임자를 사실상 축출하여 살해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3] 리베라토는 비질리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을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후 테오도라와 모종의 합의를 했기 때문에 교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테오도라가 비질리오의 교황 선출을 도와주면, 비질리오는 테오도라가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다시 앉히는 것을 교황으로서 허락한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3]

벨리사리우스는 처음에는 실베리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므로 테오도라의 지시를 이행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라와 절친한 아내 안토니나의 권유로 지시를 이행하게 되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로마를 고트족에게 넘겨준다는 위조된 편지에 실베리오가 연루되어 있다는 누명을 씌웠다.[3] 실베리오는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가 침상에 누워 있는 내실로 인도되었고, 안토니나는 실베리오가 자기들을 속이고 고트족과 내통한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실베리오는 강제로 교황복을 빼앗기고 수도복으로 바꿔 입었다. 그 후 실베리오가 퇴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537년 3월 새 교황 선거가 서둘러 이루어져 비질리오가 선출되었다.[3]

리키아의 파타라에 유배된 실베리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자신을 위해 공정한 재판을 열어줄 것을 청원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파타라의 주교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실베리오를 로마로 귀환하게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실베리오가 반역적인 편지를 썼다면 제국 내의 어느 도시에서 주교로 자유롭게 지내게 하고, 만일 그 편지가 위조된 것이라면 교황직에 복귀시키려고 했다.[3]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재판을 여는 대신에 실베리오를 비질리오에게 양도하였고, 비질리오는 실베리오를 팔마롤라로 유배를 보냈다. 그곳에서 실베리오는 몇 개월 동안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3]

교황 연대표》는 비질리오에 대해 좀 더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리베라토와 같은 의견이다. 다만, 비질리오는 실베리오를 설득하여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시키는 것에 동의를 얻기 위해 로마로 간 것이지, 처음부터 교황직을 찬탈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베리오가 테오도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비질리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실베리오가 동로마 제국을 배신하고 동고트 왕국 편에 선다는 서신을 작성했다고 주장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믿지 않았으나, 비질리오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허위 증언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속은 벨리사리우스는 실베리오를 소환하여 제의를 벗기고 비질리오에게 신변을 양도하였으며, 비질리오는 실베리오를 유배 보냈다.[4]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비질리오의 행동에 대해 종교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은 모두 생략하였다. 반면에 실베리오에 대해서는 고트족 편에 서서 로마를 넘겨주려고 했다고 비판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벨리사리우스가 이 사실을 알고 실베리오를 교황직에서 사임시키고 수도복을 입힌 후 그리스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후임 교황으로 비질리오가 선출되게 도왔다.[4]

결국, 실베리오는 팔마롤라 섬에서 굶어 죽었다.[4]

3. 4. 시성 배경

교황 실베리오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탈리아 폰차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성인으로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11세기 성인 목록이다.[1] 폰차에서 전해내려오는 한 전설에 따르면, 한 어부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그때 실베리오의 이름을 부르며 전구를 청하자 구제되었다고 한다. 이 기적으로 인해 그는 성인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폰차에서 성 실베리오 축일, 2008년 6월 20일


그는 또한 성 실베리오(San Silverio)라고도 불린다. 실베리오 교황은 6세기 동안 별다른 명성 없이, 그리고 거의 애도받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인근 폰차 섬의 사람들은 덕망 있는 성 실베리오를 기렸다. 이러한 유산은 섬에서 미국까지 이어졌고, 섬 출신의 많은 정착민들이 브롱크스의 모리사니아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 세기 동안 해왔듯이, 도움을 요청하며 151번가와 모리스 애비뉴에 있는 비탄의 성모 성당에서 산 실베리오 축제를 기념했다.[1]

3. 5. 폰차 섬과의 관계

이탈리아 폰차 섬의 수호성인인 성 실베리오는 폰차에서 매년 6월 20일 성 실베리오 축일에 기념된다. 폰차 제도 전설에 따르면, 어부들이 팔마롤라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성 실베리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가 나타나 팔마롤라로 인도하여 어부들을 살렸다고 한다. 이 기적으로 실베리오는 성인으로 숭배받게 되었다.[1]

실베리오 교황은 6세기 동안 큰 명성 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폰차 섬 사람들은 그를 기렸다. 이 유산은 미국까지 이어져, 섬 출신 정착민들이 브롱크스 모리사니아 지역에 정착하여 151번가와 모리스 애비뉴에 있는 비탄의 성모 성당에서 산 실베리오 축제를 기념했다.

1987년 모리스 파크 산 실베리오 위원회가 설립되어 폰체세 출신과 숭배자들이 축제를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연도와 6월 20일에 전통적인 축제를 열고, 신도들은 성 클레어 데 아시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이웃 전체를 행진한다.

산 실베리오 축제 외에도, 위원회는 성 안토니오와 무염시태를 연도, 미사 및 행렬로 기린다. 2017년 11월 비탄의 성모 성당 폐쇄 후, 산 실베리오 조각상은 뉴욕주 용커스 칼리지 플레이스 31번가에 있는 성 안나 성당에 안치되었다. 산 실베리오 축제는 매년 6월 20일 특별 미사와 조각상 행렬과 함께 기념되며, 조각상은 신자들의 숭배를 위해 영구 전시되어 있다.

3. 6. 현대적 의미

실베리오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탈리아 폰차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1] 성인으로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11세기 성인 목록이다. 폰차에서 전해내려오는 한 전설에 따르면, 한 어부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그 때 실베리오의 이름을 부르며 전구를 청하자 구제되었다고 한다. 폰차 제도 전설에 따르면 어부들이 팔마롤라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작은 배를 타고 가다가 성 실베리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성 실베리오의 현현이 그들을 팔마롤라로 불러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 때문에 그는 성인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성 실베리오(San Silverio)라고도 불린다.

실베리오 교황은 6세기 동안 별다른 명성 없이, 그리고 거의 애도받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인근 폰차 섬의 사람들은 덕망 있는 성 실베리오를 기렸다. 이러한 유산은 섬에서 미국까지 이어졌고, 섬 출신의 많은 정착민들이 브롱크스의 모리사니아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 세기 동안 해왔듯이, 도움을 요청하며 151번가와 모리스 애비뉴에 있는 비탄의 성모 성당에서 산 실베리오 축제를 기념했다. 1987년, 모리스 파크 산 실베리오 위원회가 설립되어 폰체세 출신과 산 실베리오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집 근처에서 축제를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연도와 6월 20일에 전통적인 축제를 제공하며, 신도들은 성 클레어 데 아시시 성당에 모여 미사를 드리고, 이웃 전체를 행진한다. 모리스 파크 산 실베리오 위원회는 수년 동안 성 클레어 성당의 교구에 재능을 기여하여, 크리스마스에는 약 9.14m 높이의 나폴리 구유를 디자인하고 건설했으며, 부활절 시즌에는 무덤을 세웠다.

산 실베리오 축제에 더하여, 위원회는 성 안토니오와 무염시태를 연도, 미사 및 행렬로 기린다. 이웃은 최근 몇 년 동안 변화를 겪었지만, 이탈리아 레스토랑과 식료품점이 여전히 많으며, 축제는 계속해서 지역 사회를 통합하고 있다. 2017년 11월 비탄의 성모 성당이 폐쇄된 후, 산 실베리오의 조각상은 뉴욕주 용커스, 칼리지 플레이스 31번가에 있는 성 안나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산 실베리오 축제는 매년 6월 20일에 특별 미사와 산 실베리오 조각상 행렬과 함께 기념된다. 조각상은 신자들이 숭배할 수 있도록 영구 전시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Four More Bronx Catholic Churches "Deconsecrated" Paving Way for Their Sale https://www.welcome2[...] 2017-12-07
[2] 서적 The Popes and the Papacy in the Early Middle Ages Routledge and Kegan Paul 1979
[3] 서적 Popes and the papacy
[4] 논문 De bello gothico Loeb Classical Library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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