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제피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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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제피리노는 199년경에 선출되어 217년까지 재위한 로마 출신의 교황이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신자들을 지원하고, 마르키온, 프락세아스, 발렌티누스, 몬타누스 등 이단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했다. 제피리노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순교자' 칭호를 받았으며, 12월 20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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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제피리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존칭 | 교황 성인 |
| 이름 | 제피리노 |
| 직함 | 로마 주교 |
| 교회 | 초대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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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임 기간 | |
| 시작 | 199년 |
| 종료 | 217년 12월 20일 |
| 선임자 | 빅토르 1세 |
| 후임자 | 갈리스토 1세 |
| 개인 정보 | |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일 | 217년 12월 20일 |
| 사망지 | 로마, 로마 제국 |
| 축일 | 12월 20일 |
2. 생애
로마 태생으로 하분디우스의 아들이다. 17년 동안 교황으로 재임하였다.[1] 재위기간 중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한 교회 박해가 심하게 일어났으며, 211년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1] 제피리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1]
또한, 마르키온, 프락세스, 발렌티누스, 몬타누스주의자 등 당시에 새로이 나타난 이단과 배교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하였다.[1] 에우세비오는 제피리노가 테오도투스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단자 두 명과 격렬하게 토론하였으며, 처음에는 제피리노를 경멸하였던 이단자들도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라고 칭송했다고 증언하였다.[1] 그는 비록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재위기간 중에 겪었던 영적 고통을 이유로 훗날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았다.[1]
2. 1. 교황 선출과 초기 활동
로마 태생으로 하분디우스의 아들이었으며, 17년 동안 교황으로 재임하였다.[1] 그의 재위기간 중에는 교회에 대한 심한 박해가 일어나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1] 박해는 로마보다는 주로 지방에서 심하게 일어났다.[1] 제피리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1] 또한, 그는 새로이 나타난 이단과 배교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하였는데, 마르키온, 프락세스, 발렌티누스, 몬타누스주의자 등이 그가 상대하였던 적수들이었다.[1] 성 옵타토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교황 제피리노에 의해 제압당하였다고 한다.[1] 에우세비오는 교황 제피리노가 테오도투스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단자 두 명과 격렬하게 토론하였으며, 처음에는 제피리노를 경멸하였던 이단자들도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증언하였다.[1] 비록 그는 신앙을 위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지지는 않지만, 재위기간 중에 겪었던 영적 고통을 이유로 훗날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1]2. 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년 ~ 211년) 치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화되었다. 202년 또는 203년, 세베루스 황제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9] 이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위반 시에는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박해는 로마보다는 주로 지방에서 더 심하게 일어났다. 교황 제피리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위로했다.[2]2. 3. 이단과의 투쟁
제피리노는 재위 기간 동안 마르키온, 프락세아스, 발렌티누스, 몬타누스주의 등 다양한 이단 사상과 맞서 싸웠다.[3] 특히, 테오도투스가 주장한 양자론(예수는 인간이었으나 세례 때 신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논박했다. 에우세비오는 제피리노가 테오도투스의 신성 모독에 강력하게 맞서 싸웠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들은 그를 경멸했지만,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훌륭하게 옹호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4]비잔티움의 테오도투스는 전임 교황 빅토르 1세에 의해 파문당했다.[6] 테오도투스의 추종자들은 로마에서 동명이인 환전상 테오도투스와 아셀레포도투스의 지도 아래 별도의 이단 종파를 형성했다. 나탈리우스는 박해자들 앞에서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문까지 견뎌냈던 인물이었으나, 아셀레포도투스에게 설득당해 매달 돈을 받는 조건으로 이단 종파의 주교가 되었다. 이후 나탈리우스는 이단적 사상을 포기하라는 경고성 환시를 체험하였으며, 마침내 한 천사에 의해 밤새도록 채찍질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 나탈리우스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삼베옷 차림을 한 채, 교황 제피리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였다.[6][1]
3. 사망과 공경
교황 제피리노는 신앙 때문에 육체적으로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재위 기간 동안 겪었던 정신적, 영적인 고통 때문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가톨릭에서는 제피리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성 제피리노 교황 순교자'로 불렀다.[10]
축일은 전통적으로 8월 26일이었으나,[10] 1970년 전례 개혁 이후 12월 20일로 변경되었다.[11] 12월 20일은 제피리노가 선종한 날짜이기도 하다.[11] 일부 전통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8월 26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다.[10] 13세기에 로마 일반 전례력에 축일이 추가되었으나, 1969년 개정에서 삭제되었다. 이는 그가 순교자가 아니었고 8월 26일이 그의 사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7] 현재 로마 순교록에는 그의 사망일인 12월 20일이 언급되어 있다.[8] 현재 로마 전례의 특별 양식과 마론 가톨릭 교회, 그리고 정교회에서는 12월 20일을 축일로 기념한다.[8]
3. 1. 사망
교황 제피리노는 로마에서 하분디우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7년 동안 교황으로 재임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교회에 대한 심한 박해가 있었는데, 이는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박해는 로마보다는 주로 지방에서 더 심하게 일어났다. 제피리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이단과 배교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하였다. 마르키온, 프락세스, 발렌티누스, 몬타누스주의자 등이 그가 상대했던 주요 이단자들이었다. 성 옵타토는 이들이 모두 교황 제피리노에 의해 제압당했다고 증언한다.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교황 제피리노는 테오도투스의 사상을 따르는 이단자 두 명과 격렬하게 토론했으며, 처음에는 제피리노를 경멸하던 이단자들도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한 인물로 칭송했다고 한다. 비록 그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재위 기간 동안 겪었던 영적 고통 때문에 훗날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았다.3. 2. 시성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피리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성 제피리노 교황 순교자'로 불렀다.[10] 전통적으로 축일은 8월 26일이었으나,[10] 1970년 전례 개혁 이후 12월 20일로 변경되었다.[11] 12월 20일은 성 제피리노 교황이 선종한 날짜이기도 하다.[11] 일부 전통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8월 26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다.[10]13세기에 로마 일반 전례력에 성 제피리노 교황 순교자의 축일이 추가되었으나, 1969년 개정에서 삭제되었다. 이는 그가 순교자가 아니었고 8월 26일이 그의 사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7] 그의 사망일은 12월 20일이며, 현재 로마 순교록에 그날이 언급되어 있다.[8] 현재 로마 전례의 특별 양식과 마론 가톨릭 교회, 그리고 정교회에서는 12월 20일을 축일로 기념한다.[8]
3. 3. 순교자 칭호 논란
제피리노는 신앙 때문에 육체적으로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재위 기간 동안 겪었던 정신적, 영적인 고통 때문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았다.[4] 에우세비오는 제피리노가 테오도투스의 신성 모독에 맞서 싸웠으며, 처음에는 그를 경멸하던 이단자들도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훌륭하게 옹호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4] 성 옵타투스에 따르면, 제피리노는 마르키온, 프락세아스, 발렌티누스와 몬타누스 등 새로운 이단과 배교에 맞서 싸웠다.[3] 그러나 이 칭호는 그가 사망한 지 132년 후에 철회되었다.[4]4. 평가 및 유산
제피리노는 박해와 이단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회를 이끌고 신앙을 수호한 목자로 평가받는다.[2] 앨번 버틀러는 "이 거룩한 목자는 고통받는 양 떼의 지지자이자 위안이었다"라고 말했다.[2] 그는 이단과 배교에 맞서 싸웠으며, 마르키온, 프락세아스, 발렌티누스와 몬타누스 등의 이단을 제압하였다.[3] 성 옵타투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교황 제피리노에 의해 제압당하였다고 한다.[3]
유세비우스는 제피리노가 테오도투스의 신성 모독에 강력하게 맞서 싸웠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들은 그를 경멸했지만,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훌륭하게 옹호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4] 그는 신앙 때문에 육체적으로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교황 재위 기간 동안 겪었던 정신적, 영적인 고통으로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이는 그가 사망한 지 132년 후에 철회되었다.[4]
한편, 그는 군주신론적 견해에 유혹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5]
참조
[1]
간행물
Pope St. Zephyrinus
[2]
서적
Lives of the Saints
[3]
문서
De Schismate
[4]
문서
Sæc 3. Diss
[5]
서적
Origins to Constanti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문서
Historia Ecclesiastica
[7]
간행물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8]
간행물
Martyrolog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9]
간행물
Pope St. Zephyrinus
Robert Appleton Company
[10]
간행물
로마 교회력
Libreria Editrice Vaticana
[11]
간행물
로마 순교록
Libreria Editrice Vat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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