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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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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몬타누스파는 2세기 중반 프리기아에서 몬타누스가 창시한 기독교 분파이다. 몬타누스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자신과 두 여성 예언자 프리스카, 막시밀라를 통해 새로운 계시가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금욕적인 생활, 엑스터시 형태의 예배, 종말론적 신앙을 특징으로 하며,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고, 이혼과 재혼을 금지했다. 몬타누스파는 171년경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테르툴리아누스의 합류로 로마에서 번성하기도 했다. 8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성령 쇄신 운동과 재림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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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파

2. 역사

몬타누스파는 2세기 후반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역에서 시작된 기독교 운동이다. 몬타누스와 두 여성 예언자 프리스카(프실라)와 막시밀라를 중심으로, 성령의 특별한 계시, 금욕적인 생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몬타누스파에 대해 분열된 입장을 보였다. 원시 정통 교회를 중심으로 몬타누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려 했으나, 일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특히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과격한 행동은 기독교에 대한 외부의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몬타누스파는 북아프리카, 갈리아 등지로 확산되었고,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저명한 인물이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을 잃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대에는 페푸자의 몬타누스주의 신전이 파괴되었다. 8세기경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집단 자살 사건도 있었다.

2. 1. 기원과 초기 발전

몬타누스가 처음 예언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학자들마다 다르게 추정하는데, 대략 135년에서 177년 사이로 보고 있다.[10] 몬타누스는 미시아의 아르다바우라는 마을에서 총독 그라투스 재임 기간에 예언을 시작했다고 전해지지만, 같은 이름의 총독이나 마을은 확인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는 몬타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아폴론 또는 키벨레의 사제였다고도 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자이며, 보혜사가 자신을 통해 말한다고 믿었다.[3]

몬타누스는 서부-중앙 프리기아의 페푸자와 티미온 마을을 새 예루살렘의 위치로 선포하고, 더 큰 마을인 페푸자를 자신의 본부로 삼았다. 프리기아가 이 새로운 운동의 근원지로 선택된 것은 헬레니즘화가 늦게 진행되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점은 지중해 기독교 세계와 분리되어 이 분파가 설립되는 것을 도왔다.

몬타누스에게는 프리스카(프실라라고도 불림)와 막시밀라라는 두 명의 여성 동료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인기는 몬타누스 자신보다 더 컸다.[10] 이들은 황홀경 속에서 말하고, 추종자들에게 금식과 기도를 통해 이러한 계시를 공유하도록 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예언자 콰드라투스 (예언자)와 필라델피아의 암미아로부터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은 아가보스와 빌립보 복음 전도사의 딸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언적 계승의 일부라고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예언은 프리기아에서 아프리카와 갈리아를 거쳐 기독교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5]

새로운 예언에 대한 반응은 기독교 공동체를 분열시켰고, 원시 정통 성직자들은 대부분 이를 억누르려 했다. 반대자들은 악령이 프리기아 예언자들을 사로잡았다고 믿었으며, 막시밀라와 프실라는 축출 시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예언을 신성모독이라고 선언하고, 새로운 예언 추종자들을 파문했다. 177년경,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아폴리나리스 클라우디우스는 새로운 예언을 비난하는 시노드를 주재했다. 갈리아리옹과 비엔 교회 지도자들은 177년에 새로운 예언에 대해 반응했는데, 그들의 결정은 아시아의 교회들과 교황 엘레우테리우스에게 전달되었지만, "신중하고 매우 정통적"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은 이 운동을 다루는 데 절제를 촉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에서도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곳의 주교(엘레우테리우스 또는 교황 빅토르 1세)는 몬타누스주의를 지지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지만, 프락세아스의 설득으로 이를 철회했다.[11] 193년, 익명의 작가는 앙키라의 교회가 갈라티아에서 분열되었고, 그곳의 "거짓 예언"에 반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12]

몬타누스주의의 가르침은 여러 이유로 정통 대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기본적인 신념의 충돌 외에도, 몬타누스주의 추종자들의 과장된 공개적 행위는 초기 기독교에 원치 않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기독교 통치자들에게 몬타누스주의적 관행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반감을 부추겼다. 161~180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 하에서 황실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산발적으로 처형했는데, 이는 몬타누스주의의 확산과 일치한다.

몬타누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당시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 중 하나는 아폴리나리스의 익명의 동료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것이며, 막시밀라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13]

새로운 예언 추종자들에 대한 일관된 파문은 결코 없었고, 많은 곳에서 그들은 정통 공동체 내에서 지위를 유지했다. 카르타고의 경우, 긴장감은 있었지만 교회는 이 문제로 분열을 피했다. 카르타고에는 예언하는 여성들이 있었고, 예언은 진정한 은사로 여겨졌다. 모든 예언을 시험하고 진정한 계시를 판단하는 것은 장로 회의의 책임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운 예언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으며, 207년경 몬타누스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정통 교회를 떠나 분리된 몬타누스주의 종파에 합류했는지, 아니면 초기 원시 정통 기독교인으로 남았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4]

정통 기독교회가 몬타누스주의에 대해 승리했지만, 북부 프리기아의 템브리스 계곡에서 발견된 249년에서 279년 사이의 비문은 새로운 예언에 대한 충성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3세기에 퀸틸라라는 새로운 여성 예언자가 페푸자에 나타났다. 그녀의 추종자들인 퀸틸리안들은 5세기까지 중요한 몬타누스주의 종파로 여겨졌다.

150년대 소아시아 서부의 프리기아에서 Montanus de Phrygie|몬타누스프랑스어가 창시한 운동이 기원이다.

몬타누스는 초기의 기독교에서 볼 수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며, 그 몸에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함께 가진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주장했다.[35]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며, 그리스도가 새로운 예루살렘과 함께 프리기아에 강림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몬타누스 아래에 Prisca (prophet)|프리스카영어와 Maximilla|막시밀라영어라는 두 여성 예언자가 더해져 몬타누스파의 중심이 되었다.[36]

몬타누스는 사람들에게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 생활로의 회귀를 요구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독신을 숭상하고, 재혼을 금지했다. 몬타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단식을 강화하고, 고행을 적극적으로 했다. 또한 박해 시 도망을 금지했다.[37] 몬타누스의 외침에 동조한 자는 북아프리카, 갈리아 등에 많았다.

당초 그들은 이단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엄격파 그룹으로 여겨졌지만, 171년에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Apollinaris Claudius|아폴리나리우스영어가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과격함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독교 내에서 논의가 일어났다. 이레네우스도 저서 『이단 반박』에서 몬타누스파를 언급했다.

2세기 말에 소아시아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서 몬타누스와 그 동조자들이 기독교의 위계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점 등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몬타누스파는 로마에서도 번성했다. 몬타누스파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최초의 라틴 교부로 알려진 사상가 테르툴리아누스가 3세기 초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2. 2. 초기 교회의 반응과 이단 정죄

몬타누스파에 대한 초기 교회의 반응은 분열적이었다. 원시 정통 성직자들은 대부분 몬타누스파를 억누르려 했고, 그들의 예언을 신성모독이라 비난하며 추종자들을 파문했다.[10]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이러한 조치를 취했고, 177년경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아폴리나리스 클라우디우스는 몬타누스파를 비난하는 시노드를 주재했다.[11]

반면, 갈리아의 리옹과 비엔 교회 지도자들은 177년에 새로운 예언에 대해 "신중하고 매우 정통적"인 반응을 보이며, 절제를 촉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의 주교(엘레우테리우스 또는 교황 빅토르 1세)는 처음에는 몬타누스주의를 지지하는 편지를 썼지만, 프락세아스의 설득으로 철회했다.[12]

앙키라 교회는 갈라티아에서 "거짓 예언"에 반대하며 분열되었다.[13] 결국 몬타누스주의는 여러 이유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과장된 공개적 행위가 초기 기독교에 원치 않는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비기독교 통치자들의 탄압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4]

아폴리나리스의 익명의 동료는 몬타누스와 막시밀라가 스스로 목을 맸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15]

일관된 파문은 없었고, 많은 곳에서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정통 공동체 내에서 지위를 유지했다. 카르타고에서는 긴장감이 있었지만 분열은 피했고, 예언은 진정한 은사로 여겨졌다.[16]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주의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으며, 207년경 몬타누스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었다.[17]

제롬마르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18] 388년, 한 설교자가 로마에서 많은 개종자를 만들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의 승리 이후 도망쳐야 했다.[19]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시대에 테르툴리아누스주의 집단이 거의 사라졌고, 교회와 화해했다고 기록했다.[20]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몬타누스주의 성직자들을 추방하고, 페푸자의 몬타누스주의 신전을 파괴했다.[21] 레오 3세 황제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개종과 세례를 명령했지만, 그들은 거부하고 건물에 불을 질러 죽었다.[15]

2세기 말, 소아시아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서 몬타누스와 그 동조자들은 기독교의 위계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점 등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몬타누스파는 로마에서도 번성했다.

2. 3. 테르툴리아누스의 합류와 이후 역사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운 예언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으며, 서기 207년경 몬타누스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었다.[14] 그는 새로운 예언의 타당성을 믿었고, 이 운동의 규율과 금욕적인 기준을 존경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정통 교회를 결정적으로 떠나 분리된 몬타누스주의 종파에 합류했는지, 아니면 초기 원시 정통 기독교인으로 남았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4]

정통 기독교회가 몬타누스주의에 대해 몇 세대 안에 승리했지만, 북부 프리기아의 템브리스 계곡에서 발견된 서기 249년에서 279년 사이에 기록된 비문은 새로운 예언에 대한 충성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스페로스 브라이오니스는 이러한 비문이 기독교인들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관용 시대 이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종교적 소속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유일한 비문 세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15] 3세기에 퀸틸라라는 새로운 여성 예언자가 페푸자에 나타났다. 그녀의 추종자들인 퀸틸리안들은 5세기까지 중요한 몬타누스주의 종파로 여겨졌다.

385년에 쓰여진 제롬마르첼라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를 괴롭혔던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테르툴리아누스주의자" 집단은 카르타고에서 계속 활동했을 수 있다. 익명의 저자 ''Praedestinatus''는 한 설교자가 388년에 로마에 와서 많은 개종자를 만들고, 그가 속한 회중이 헌신했던 순교자들이 몬타누스주의자였다는 이유로 그들을 위해 교회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한다.[16]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승리 이후 도망쳐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는 자신의 시대에 테르툴리아누스주의 집단이 거의 사라졌고, 마침내 교회와 화해하여 그들의 바실리카를 넘겨주었다고 기록한다.[17] 이 테르툴리아누스주의자들이 모든 면에서 "몬타누스주의자"였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53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몬타누스주의 성직자들을 추방했다. 550년,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에페소스의 요한은 몬타누스, 프실라, 막시밀라의 무덤을 기반으로 한 몬타누스주의 신전을 파괴하기 위해 페푸자로 원정을 이끌었다.

갈라티아의 몬타누스주의 종파인 타스코드루기테스는 60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티모테와 9세기의 테오도르 스투디테스에 의해 증명되었다. "몬타누스주의자"라고 불리는 종파는 8세기에 존재했는데, 레오 3세 황제는 그 구성원들의 개종과 세례를 명령했다. 이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거부하고, 숭배하는 건물에 스스로를 가두고, 건물에 불을 질러 죽었다.[15]

3. 주요 신념과 특징

몬타누스파는 성령의 예언과 계시, 종말론적 신앙,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했으며, 여성의 역할을 폭넓게 인정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영적인 사람들"이라 칭하며 주류 기독교와 차별성을 두었다.[35]

몬타누스파의 주요 신념과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성령의 예언과 계시 강조: 몬타누스파는 요한 복음서에 근거하여, 몬타누스와 두 여성 예언자인 프리스카, 막시밀라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언한다고 믿었다.[36]
  • 종말론적 신앙: 요한 계시록을 중요시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예루살렘이 프리지아에 임박했다고 믿었다.[36]
  • 엄격한 금욕주의: 이혼 및 재혼 금지, 금식 강조 등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따랐다.[35]
  • 여성의 역할: 여성 주교와 장로를 인정했으며, 여성 예언자들이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35],[36]
  • 기타: 죄를 용서하는 권능, 십사일파 등의 믿음도 존재했다.


몬타누스파는 주류 기독교로부터 이단으로 배척받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저명한 인물도 몬타누스파에 합류하기도 했다.[37] 몬타누스파는 8세기경까지 존속했으며,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 쇄신 운동과 종말론적 주장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났다.

3. 1. 성령의 예언과 계시 강조

몬타누스파는 예언을 강조했으며, 특히 이 운동의 창시자들이 전한 예언은 현 시대에 대한 성령의 계시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18] 이들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보혜사 즉,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을 근거로,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다.[19]

몬타누스는 예언을 할 때 신탁처럼 1인칭으로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1]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를 몬타누스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 신의 대변자로서 말하며 신성한 영감을 주장하는 종교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35]

몬타누스는 초기 기독교에서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며, 그리스도가 새로운 예루살렘과 함께 프리기아에 강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6]

3. 2. 종말론적 신앙

몬타누스파는 요한 문서, 특히 요한 복음서와 요한 계시록의 영향을 받았다.[35]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는 보혜사 또는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몬타누스파의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이 성령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다.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천사에 의해 산꼭대기로 인도되어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는데, 몬타누스는 이 산이 프리지아의 페푸자 근처에 위치해 있다고 여겼다.[35]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며, 그리스도가 새로운 예루살렘과 함께 프리기아에 강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6]

몬타누스파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spiritales''라고 불렀으며, 반대자들을 "육적인, 본능적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psychici''라고 칭했다.[35]

3. 3. 엄격한 금욕주의

몬타누스파는 윤리적 엄격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조했다. 여기에는 이혼이나 배우자 사망 후 재혼 금지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또한 금식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했고 새로운 금식을 추가했다.[35] 몬타누스는 초기의 기독교에서 볼 수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독신을 숭상하고, 재혼을 금지했다. 게다가 몬타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단식을 강화하고, 고행을 적극적으로 했다. 또한 박해 시 도망가는 것을 금지했다.[37] 몬타누스는 자신의 교리를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제공했는데, 정통파 작가들은 이를 폭식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7]

3. 4. 여성의 역할

몬타누스파는 여성들을 주교와 장로로 인정했다.[35] 몬타누스 아래에 프리스카와 막시밀라라는 두 여성 예언자가 더해져 몬타누스파의 중심이 되었다.[36] 여성과 소녀는 장신구 착용이 금지되었고, 처녀는 베일을 착용해야 했다.[35]

3. 5. 이단 논쟁

몬타누스파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대부분 반(反) 몬타누스파 자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실제 믿음과 당시 주류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35] 신 예언 운동은 다양한 분파를 포함했고, 몬타누스파의 믿음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다.[36] 몬타누스파는 특히 요한 문서, 그중에서도 요한 복음서와 요한 계시록의 영향을 받았다.[37]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는 보혜사 (성령)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은 이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다.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천사에 의해 산꼭대기로 인도되어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는데, 몬타누스는 이 산이 프리기아의 페푸자 근처에 있다고 믿었다.[37] 신 예언 운동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spiritales''라고 불렀고, 반대자들을 "육적인, 본능적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psychici''라고 불렀다.[37]

몬타누스파의 다른 믿음과 관습(또는 주장된 믿음과 관습)은 다음과 같다.

  •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에서 성령이 새로운 예언을 통해 성경의 모호성을 명확히 했다고 기록했다. 새로운 예언은 새로운 교리적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지만,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했다. 주류 기독교 교회는 몬타누스파가 새로운 예언이 사도들이 선포한 교리를 대체하고 성취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 몬타누스파는 사도와 예언자에게 를 용서하는 권능이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추종자들은 또한 순교자와 신앙 고백자 역시 이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주류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교장로를 통해 (그리고 정당한 교회 권위에 의해 인정된 순교자들을 통해) 죄를 용서하신다고 믿었다.
  • 몬타누스파는 여성들을 주교와 장로로 인정했다.
  • 여성과 소녀는 장신구 착용이 금지되었고, 처녀는 베일을 착용해야 했다.
  • 삼위일체 몬타누스파와 군주신론 몬타누스파 사이에 분열이 있었으며, 두 믿음 모두 몬타누스파 내에 존재했다.
  • 윤리적 엄격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조했다. 여기에는 이혼이나 배우자 사망 후 재혼 금지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또한 금식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했고 새로운 금식을 추가했다.
  • 몬타누스는 자신의 교리를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제공했는데, 정통파 작가들은 이를 폭식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몬타누스파 중 일부는 "십사일파"(fourteeners)였으며, 요일에 관계없이 히브리력 14일 니산에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을 선호했다. 주류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을 14 니산 이후의 일요일에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몬타누스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이 문제에 대한 통일성은 아직 완전히 달성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폴리캅은 십사일파였고, 성 이레네우스는 당시 로마 주교였던 빅토르에게 부활절 날짜 문제를 분열의 원인으로 삼는 것을 자제하도록 설득했다. 나중에, 가톨릭 교회는 율리우스력(그리고 나중에는 그레고리력)에 따라 부활절을 계산하는 고정된 방법을 확립했다.
  • 몬타누스파는 천년설을 믿었다.
  • 라피는 교제 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
  • 엑스터시 형태의 예배.
  • 평신도성직자 사이의 제한된 구분.
  • 유아 세례 반대.


150년대 소아시아 서부 프리기아에서 몬타누스가 운동을 시작했다.

몬타누스는 초기 기독교에서 볼 수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며, 그 몸에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함께 가진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주장했다.[35]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며, 그리스도가 새로운 예루살렘과 함께 프리기아에 강림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몬타누스 아래에 프리스카와 막시밀라라는 두 여 예언자가 더해져 몬타누스파의 중심이 되었다.[36]

몬타누스는 사람들에게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 생활로의 회귀를 요구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독신을 숭상하고, 재혼을 금지했다. 몬타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단식을 강화하고, 고행을 적극적으로 했다. 또한 박해 시 도망을 금지했다.[37] 몬타누스의 외침에 동조한 자는 북아프리카, 갈리아 등에 많았다.

171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아폴리나리우스가 몬타누스주의자들의 과격함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독교 내에서 논의가 일어났다. 이레네우스도 저서 『이단 반박』 속에서 몬타누스파에 언급하고 있다.

2세기의 말에 소아시아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서 몬타누스와 그 동조자들이 기독교의 위계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점 등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몬타누스파는 로마에서도 번성했다. 몬타누스파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최초의 라틴 교부로 알려진 사상가 테르툴리아누스가 3세기의 초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몬타누스파는 8세기경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몬타누스파는 사라졌지만, 이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몬타누스가 주장한 바와 같은 성령에 의한 쇄신 운동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라는 주장을 하는 그룹은 형태를 바꾸면서 반복해서 나타나게 된다.

3. 6. 몬타누스파 내부의 분열

몬타누스파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으며, 지역과 시대에 따라 믿음이 달랐다.[1] 특히 요한 문서, 그중에서도 요한 복음서와 요한 계시록의 영향을 받았다.[2] 몬타누스파는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분파와 군주신론을 주장하는 분파로 나뉘기도 했다.[3]

참조

[1] 웹사이트 5 Things to Know About Montanism https://transformedb[...] 2014-01-07
[2] 웹사이트 Montanism https://www.catholic[...] 2020-09-15
[3] 웹사이트 Montanism https://www.theopedi[...] 2020-09-15
[4] 서적 The Decline of Medieval Hellenism in Asia Minor: And the Process of Islamization from the Eleventh Through the Fif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1971
[5] 학술지 Montanism: Heresy or Healthy Revival? https://earlychurch.[...]
[6] 서적 Tertullian, On Idolatry and Mishnah Avodah Zarah: Questioning the Parting of the Ways between Christians and Jews https://books.google[...] BRILL 2012-11-13
[7] 서적 The Pentecostal Experience https://archive.org/[...] Paulist Press
[8] 학술지 Montanism and Present Day 'Prophets'
[9] 웹사이트 Oneness Pentecostal Origins by Thomas Weisser https://www.apostoli[...] 1996-05-16
[10] 서적 La crise montaniste https://books.google[...] Leroux 1913
[11] Citation Adversus Praxean
[12] 문서 Quoted by Eusebius 5.16.4
[13] 서적 The History of the Church Penguin Classics
[14] 문서 Justo L. Gonzá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The [[Early Church]] to the Present Day,'' Prince Press, 1984, Vol. 1, pp. 159–161•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1, Vol. 1, pp. 181–199
[15] 문서 Vryonis, Decline of Medieval Hellenism, p. 57 and notes.
[16] Citation Praedestinatus http://www.tertullia[...]
[17] Citation De haeresibus http://www.tertullia[...]
[18] Citation The Decline of Ecstatic Prophecy in the Early Church 1976-06
[19] Citation Ecclesiastical History
[20] 문서 Epiphanius, [[Panarion|''Against Heresies'']], 48.3–4.
[21] 문서 [[Placher, William C.]] ''A History of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83, p. 50.
[22] 문서 Tertullian, ''On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63.9.
[23] 백과사전 Montanists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24] 문서 Epiphanius, [[Panarion|''Against Heresies'']], 49.2.5.
[25] 서적 Women Preachers and Prophets Through Two Millennia of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1998-04-30
[26] 백과사전 Montanism
[27] 문서 Eusebius of Caesarea, Ecclesiastical History, 5, 18
[28] 문서 Eusebius of Caesarea, Ecclesiastical History, 5, 23–25.
[29] 서적 Essays on Premillennialism: A Modern Reaffirmation of an Ancient Doctrine https://books.google[...] Moody Publishers 2007-02-01
[30] 서적 Rev. Joseph Pohle Collection [9 Books] https://books.google[...] Aeterna Press
[31] 서적 Triumph: The Power and the Glory of the Catholic Church Crown 2009-02-25
[32] 웹사이트 Hierarchy of the Early Church https://www.catholic[...] 2022-05-06
[33] 서적 The Ancient Church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2020-07-29
[34] 백과사전 Montanism
[35] 서적 金枝篇(一) 岩波文庫
[36] 서적 教義史綱要 久島千枝
[37] 서적 オックスフォードキリスト教辞典 教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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