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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펠라지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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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펠라지오 1세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교황 아가피토 1세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교황 사절로 활동하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황 비질리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간 동안 로마를 지켰으며, 고트족의 침략 속에서 로마 시민을 보호하고 황제와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비질리오 사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황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서방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재건, 빈민 구제에 힘썼으며,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 건설을 주도했다. 5년 재위 후 56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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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펠라지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펠라지오 1세
직함로마 교황
재임 시작556년 4월 16일
재임 종료561년 3월 3일
선임 교황비질리오
후임 교황요한 3세
출생기원후 500년경
출생지로마, 동고트 왕국
사망일561년 3월 3일
사망지로마, 동로마 제국
이름펠라지오
교회 정보
소속 교단칼케돈 기독교

2. 생애 초기

펠라지오는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한은 이탈리아가 분할되어 있던 두 개의 행정 구역 중 하나의 교구를 맡았던 사람으로 보인다.[1]

펠라지오는 교황 아가피토 1세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으며, 그곳에서 ''사절''로 임명되었다. 이 자격으로 펠라지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543년에 로마로 돌아왔다.[1] 545년, 교황 비질리우스가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을 때, 펠라지오는 교황의 대리인으로 로마에 남았다. 고트족의 왕 토틸라가 도시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펠라지오는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었고, 왕에게 휴전을 요청하려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는 이후 토틸라가 546년 12월 로마를 점령했을 때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도록 설득했다. 토틸라는 펠라지오를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지만, 황제는 그를 다시 돌려보내 이탈리아를 지휘하는 사람은 그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라고 말했다.[1]

3. 로마 교회의 외교관

펠라지오 1세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요한은 이탈리아 행정 구역의 교구를 맡았던 인물이었다.[1] 펠라지오는 부제로 서품되어 교황 아가피토 1세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으며, 그곳에서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

537년 3월, 펠라지오는 로마로 돌아왔고, 교황 비질리오가 황제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을 때 교황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고트족의 왕 토틸라가 로마를 봉쇄하자, 펠라지오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기근에 시달리는 시민들을 돕고 토틸라와 담판을 지어 공격을 멈추려 노력했다. 비록 협상은 실패했지만, 546년 12월 토틸라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기여했다.[1]

토틸라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평화 협상을 위해 펠라지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지만, 황제는 토틸라의 제안을 거부하고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이탈리아 재정복을 명령했다. 이후 펠라지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비질리오를 보좌했다.[1]

3. 1.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 건립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의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은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린 동로마 제국의 장군 나르세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펠라지오 1세가 세워 축성했다고 한다.

4. 교황 선출

555년 12월 23일 비질리오로마로 돌아가던 길에 시라쿠사에서 선종했다는 소식을 접한 펠라지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지를 받아 로마로 돌아가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부재기간 동안 로마 교회를 돌보던 사제 마레아스가 갑작스럽게 선종하자 나르세스가 서둘러서 펠라지오를 교황좌에 오르게 하였으나, 로마의 귀족들과 사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2] 펠라기우스는 황제의 후보였는데, 서방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지명이었다.[2]

교황이 되기 전 펠라지오는 교회 안의 여러 가지 분파를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삼장서를 비난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책에 반대하였지만, 나중에는 그의 정책을 수용하였다. 동로마 제국에 의존한 펠라지오 1세의 정책은 후임 교황들에게도 문제가 되어 향후 50년 간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동로마 황제의 인준을 받아야만 교황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할 수가 있었다. 이는 북이탈리아와 갈리아 그리고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교황의 권위와 위신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

5. 교황 재위

555년 12월 23일 비질리오가 로마로 돌아가던 길에 시라쿠사에서 선종했다는 소식을 접한 펠라지오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지를 받아 로마로 돌아가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의 부재기간 동안 로마 교회를 돌보던 사제 마레아스가 갑작스럽게 선종하자 나르세스가 서둘러서 펠라지오 1세를 교황좌에 오르게 하였으나, 로마의 귀족들과 사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교회 안의 여러 가지 분파를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삼장서를 비난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책에 반대하였지만, 나중에는 그의 정책을 수용하였다. 동로마 제국에 의존한 펠라지오 1세의 정책은 후임 교황들에게도 문제가 되어 향후 50년 간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동로마 황제의 인준을 받아야만 교황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할 수가 있었다. 이는 북이탈리아와 갈리아 그리고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교황의 권위와 위신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

한편, 펠라지오 1세는 재위 중 파괴된 로마를 재건하고, 조세법을 개정하여 빈민 구제에 힘썼다.

펠라지오 1세는 5년간 재위했으며, 561년 3월 3일에 사망하여 구(舊) 성 베드로 대성전에 묻혔다.[2]

5. 1. 업적

비질리오가 555년 6월 7일에 사망한 후, 펠라지오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펠라지오 1세는 황제의 후보였는데, 서방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지명이었다.[2] 서품 전에는 교회의 신학적 분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세 개의 장"을 단죄하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노력에 반대했지만, 이후 펠라지오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입장을 따랐다.

펠라지오 1세는 교황 재위 기간동안 비질리오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소문과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굴복하여 단성설을 지지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로마의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성직자들의 남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기근과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치비타베키아 주둔 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펠라지오 1세는 그 도시의 로렌스 주교에게 군대를 위한 군종 신부를 제공하도록 지시했다.[3] 그는 나르세스가 동고트족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로마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의 건설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참조

[1] 간행물 Pope Pelagius I Catholic Encyclopedia
[2] 서적 Popes Through the Ages http://www.spiritual[...] Neff-Kane 1980
[3] 서적 Religion and the Conduct of War, C. 300-1215 https://books.google[...] Boydell Press 2003
[4] 웹사이트 Santi XII Apostoli https://www.pnac.org[...] Pontifical North American College
[5] 웹사이트 Pope Pelagius I https://en.wikisourc[...] Catholic Encyclopedia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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