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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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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우스는 4세기 초 로마 제국에서 활동한 기독교 사상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제시하여 아리우스주의라는 신학 사상을 창시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당시 기독교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이후에도 로마 제국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으며, 아리우스의 사상은 서고트족 등 게르만족에게 전파되어 수 세기 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우스의 저작은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반대자들의 기록과 몇몇 단편적인 저작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2. 생애 초기 및 성격

아리우스의 저작 대부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령으로 불태워졌고, 살아남은 저작들도 반대파에 의해 소실되어 그의 정확한 생애와 주장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현존하는 정보는 대부분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비난한 기독교 성직자들의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다.[45]

아리우스는 뛰어난 언변과 헌신적이고 금욕적인 태도로 이집트에서 오리엔트 지역 전역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2. 1. 초기 생애

아리우스의 아버지 이름은 암모니오스였다.[46] 아리우스는 로마 제국 키레나이카에서 태어나 안티오케이아에 있는 성직자 학교에서 루키아노스(Lucian of Antioch|루키아노스영어)에게 성경을 배웠고,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성직에 종사했다.[40]

아리우스는 다정한 태도와 엄격한 금욕주의, 순수한 정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 에피파니오스는 아리우스를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고, 여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금욕적인 외모에 감동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감명을 받았다"라고 묘사했다.[47]

2. 2. 신앙 입문

아리우스는 로마 제국 키레나이카에서 태어나 안티오케이아에 있는 성직자 학교에서 루키아노스에게 성경을 배웠다.[46]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후, 리코폴리스의 멜레티오스의 편을 들어 로마 제국의 고문을 두려워하여 배교했던 사람들의 재입교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했다. 311년에 멜레티오스의 지원을 받아 보제가 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주교에 의해 파문당했다.[46]

하지만 페트로스 대주교가 순교한 뒤, 후임자인 아킬라스 대주교는 아리우스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다시 입교시키고 사제품을 주었다. 이듬해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바우칼리스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46]

기록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다정한 태도, 엄격한 금욕주의, 순수한 정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에피파니오스는 아리우스를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고, 여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금욕적인 외모에 감동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감명을 받았다"라고 묘사했다.[47]

2. 3. 성격

아리우스는 금욕적인 면모와 순수한 도덕성,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47] 비록 그의 반대자들은 아리우스의 인격을 심하게 공격했지만, 그는 다정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적인 태도와 순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다.[47]

에피파니오스는 아리우스를 "키가 크고 군살이 없으며 준수한 외모와 공손한 말투를 가진 인물로, 여성들은 그의 정중함과 금욕적인 모습에, 남성들은 그의 지적인 탁월함에 감명을 받았다"라고 묘사했다.[47]

아리우스는 헌신적인 신학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47]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이교와 지나치게 자유롭게 혼합되는 것을 우려했다고 본다.[47]

3. 아리우스의 교리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알렉산드로스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리우스의 교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알렉산드로스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부였던 것이 아니라 성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성자)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성자는 창조물이며, 하느님의 본질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40] 아리우스는 저서 《향연''Thalia''》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인 신과 동질일 수 없다는('''헤테로우시오스''', 아버지와 아들은 이질) 엄격한 유일신교를 설파했다. 이에 맞서 알렉산드로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등 니케아파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여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가 동질임을 확인했다.

3. 1. 아리우스주의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알렉산드로스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리우스의 교리를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부였던 것이 아니라, 성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성자)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성자는 창조물이며, 하느님의 본질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3] 아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향연''Thalia''》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다.[3]

303년부터 313년까지 이어진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이후,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311년)과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콘스탄티누스 칙령(313년)으로 기독교가 합법화되었다. 아리우스 논쟁은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회를 담당하던 아리우스가 그의 주교 알렉산더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3]

삼위일체설을 지지하는 역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아리우스가 그의 이름을 딴 논쟁을 촉발했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주교가 아들이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설교를 했을 때, 아리우스는 이를 사벨리우스주의의 부활로 해석하여 비난했다. 그는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면, 낳아진 자는 존재의 시작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이 분명하다."라고 주장했다.[4]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의 장로이자 순교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40] 그는 뛰어난 언변과 헌신적인 태도로 인기를 얻어, 이집트에서 오리엔트 지역 전역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드로스와 갈등을 빚었고, 321년 주교 회의에서 파문당하고 일리리쿰으로 추방되었다.[40]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인 신과 동질일 수 없다는('''헤테로우시오스''', 아버지와 아들은 이질) 엄격한 유일신교를 설파했다. 이에 맞서 주교 알렉산드로스, 아타나시우스 등 니케아파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아리우스 및 그의 동조자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아리우스파는 많았고, 그 사후에도 여러 파로 분열되면서도 세력을 유지했다. 니케아파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 379-395) 즉위 후, 381년 제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포함한 여러 이설파가 금지되었다.[42]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도 다시 이단으로 확인되었다.

3. 2. 로고스 (Logos)

아리우스는 로고스(말씀, 예수를 지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교리를 지지했다.

  • 말씀(''로고스'')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ousia|우시아grc)이 아니었다.[40]
  • 아들은 창조된 존재(ktisma|크티스마grc 또는 poiema|포이에마grc)였다.[40]
  • 세상은 그를 통해 창조되었으므로 그는 세상보다 먼저, 그리고 모든 시간보다 먼저 존재했음에 틀림없다.[40]
  • 그러나 아버지를 통해 낳아지기 전,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한때"가 있었다. [아리우스는 chronos|크로노스grc 또는 aion|아이온grc과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40]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우스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비판했다.

  •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부가 아니었고, 성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다.
  •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에서 만들어졌다.
  • 영원히 존재하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았던 성자를 무에서 만들었다. 따라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성자는 창조물이다.
  • 성자는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도 아니며, 하느님이 만든 하나의 창조물이다.
  • 말씀은 하느님의 본질과는 다르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보이지 않으며, 말씀은 아버지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볼 수도 없다.
  • 아들은 자신의 본질을 알 수 없다.
  •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기 위해 성자를 도구로 사용하였고, 우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향연''Thalia''》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다.[28]

가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아리우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29]

  •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가 아니었고,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 아들은 다른 것들과 같은 피조물이며, 본질적으로 가변적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모든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들처럼 참여에 의해 신성하다.
  • 그는 아버지의 실질적인 말씀도 아니고, 그가 모든 것을 만든 그의 적절한 지혜도 아니다.
  • 그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본질과 이질적이다.
  • 우리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졌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보이지 않고 아들은 그를 완벽하게 알 수 없으며, 자신의 본질도 알 수 없다.

4. 아리우스 논쟁

아리우스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의 장로(사제)이자 순교자가 된 신학자에게 배웠다.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성직에 종사하면서,[40] 뛰어난 언변과 금욕적인 태도로 인기를 얻어 이집트에서 오리엔트 지역 전역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아리우스 논쟁은 318-319년경에 시작되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존재라면 아버지인 신과 동질일 수 없다('''헤테로우시오스''', 아버지와 아들은 이질)고 주장하며 유대교와 같은 엄격한 유일신교를 설파했다. 이에 맞서 알렉산드로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등 니케아파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인간의 그것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삼위일체론을 설파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드로스의 분노를 샀고, 아리우스는 321년 주교 회의에서 파문당하고 일리리쿰으로 추방되었다.[40]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아리우스 및 그의 동조자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반 니케아파의 지도자 (생년 미상-342년)의 중재 등으로 복귀가 허용되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36년에 사망했다.[40]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주의가 "신의 유일 지배의 지상에서의 상으로서의 제국 독재 정치 이념에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아리우스를 지원했다.[41]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니케아 신조를 통해 신인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는 동질임이 확인되었다.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지만,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아리우스파는 많았고, 그 사후에도 '''아노모이오스'''(비유사)파, '''호모이오스'''(유사)파,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파의 세 파로 분열되면서도 세력을 유지했다. 아리우스파와 니케아 신조를 옹호하는 니케아파의 항쟁에 궁정을 둘러싼 정쟁이 얽히면서 복잡다기한 종교 정치적 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42]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 379-395)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반 아리우스파라고도 불린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파와 니케아파가 화해, 연합하여 381년 제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여러 이설파를 금지하게 되었다.[42] 또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도 다시 이단으로 확인되었다.

4. 1. 논쟁의 시작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킬레스 대주교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사제와 보제 등 여러 성직자들 앞에서 '성 삼위일체의 단일성'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이때 사제 아리우스는 대주교가 정죄된 사벨리우스의 교리를 교묘히 가르친다고 생각했고, 그의 설교를 비난한 다음 "만일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다면, 성자는 태어났으므로 존재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자가 없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본질이 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필연적인 귀결입니다."[48][49]라고 말했다. 이처럼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다르며, 성자가 태어났으므로, 성자는 시작이 있고, 그 시작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주교에게 직접 자신의 신앙을 역설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삼위일체설(삼위일체론)을 지지하는 역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아리우스가 그의 이름을 딴 논쟁을 촉발했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교황이 알렉산드리아의 아킬라스 교황을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후, 아들이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설교를 했을 때,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의 연설을 사벨리우스주의의 부활로 해석하여 비난했으며,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면, 낳아진 자는 존재의 시작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 무에서 그의 실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른다."라고 주장했다.[4] 이 인용문은 아리우스 교리의 본질을 설명한다.

아리우스 논쟁은 318-9년경에 일어났다. 아리우스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존재라면 아버지인 신과 동질일 수 없다('''헤테로우시오스''', 아버지와 아들은 이질)고 하는 유대교와 같은 엄격한 유일신교를 설파했다. 이에 맞서 주교 알렉산드로스, 아타나시우스 등 니케아파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인간의 그것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삼위일체론을 설파했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우스가 그의 사상에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의 가르침, 즉 유명한 기독교 교사이자 순교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알렉산데르 총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리우스의 주교인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교황은 아리우스가 루키아노스로부터 신학을 얻었다고 썼다. 이 편지의 명확한 목적은 아리우스가 퍼뜨리고 있는 교리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었지만, 아리우스에 대한 이단 혐의는 모호하며 다른 권위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더욱이, 알렉산더의 언어는 당시 대부분의 논쟁가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격렬하고 비난적이다. 게다가, 알렉산더조차 루키아노스가 아리우스주의를 가르쳤다고 비난한 적이 없다.

303년에서 313년까지 이어진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대박해)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이 박해는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311년)과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인이 된 후인 콘스탄티누스 칙령(313년)으로 기독교가 합법화되면서 종식되었다. 아리우스 논쟁은 불과 5년 뒤인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회를 담당하던 아리우스가 그의 주교 알렉산더를 향해 "영원한 생성에 대한 강조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모호하게 한 부주의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3]

4. 2. 지지 세력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제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는데, 이 주장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여러 인물과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40]

아리우스의 주장을 지지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있다. 그는 아리우스와 동문이었으며, 황제에게도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56]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아리우스주의를 변호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지했다.[56] 그는 32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동방 교회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으며,[56] 로마 제국 국경 너머로 기독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56]

또 다른 지지자로는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가 있었다. 그는 당대 가장 박식한 주교로 널리 알려졌으며,[56] 4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 중 한 명이었다.[56]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초기 지지자였다.[56]

일반적으로 아리우스가 로마 제국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에는 그의 지지 세력이 주로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주의가 "신의 유일 지배의 지상에서의 상으로서의 제국 독재 정치 이념에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원했다.[41]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 이후 아리우스파는 여러 파로 분열되었지만,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며 니케아파와 오랫동안 종교적, 정치적 분쟁을 이어갔다.[42]

4. 3. 오리게네스와 아리우스

다른 3세기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 역시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다.[51] 아리우스와 오리게네스는 모두 성자가 성부에 어느 정도 종속된 존재로 보는 종속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로고스가 시간 이전부터 존재한 영원한 존재였다고 본 반면, 아리우스는 로고스는 존재의 시점이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52] 아리우스는 성부의 우월성과 유일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성부만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므로 성부의 신성이 성자의 신성보다 더 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리게네스 역시 성자의 권능이 성부에 비해 제한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성자의 영원성을 주장했기에 아리우스와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53][54]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리게네스의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로고스가 아버지로부터 산출된 존재라는 부분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에 동질감을 느꼈다. 오리게네스는 신학적 논점을 제시할 뿐, 해당 논점에 대해 완결된 주장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리우스뿐 아니라 동일본질론자들 역시 오리게네스의 저작을 인용하며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55]

4. 4. 신성 (Divine)

아리우스는 성부 하느님의 최상성과 유일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오직 성부만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따라서 성부의 신성이 성자의 신성보다 더 커야 한다는 의미였다.[7][8]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의 영원함이나 진정한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성부의 허락과 능력에 의해서만 "하느님"이 되었다고 주장했다.[7][8]

4세기에는 '하느님'(''theos, deus'')이라는 단어가 20세기의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이라는 의미와는 달리, 다양한 신성의 정도에 적용될 수 있었다.

4. 5. 초기 반응

교회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킬레스 대주교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사제와 보제 등 여러 성직자들 앞에서 '성 삼위일체의 단일성'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이때 사제 아리우스는 대주교가 정죄된 사벨리우스의 교리를 교묘히 가르친다고 생각했고, 그의 설교를 비난한 다음 "만일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다면, 성자는 태어났으므로 존재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자가 없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본질이 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필연적인 귀결입니다."라고 말했다.[48][49]

성자의 신성을 훼손하며 대주교의 권위에 공공연하게 도전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주교가 소집한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주교사제들에게 심문을 받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파문당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지역 사제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추방했다. 이에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세례한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많은 주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지지했다.[56]

5. 니케아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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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아리우스의 교리는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논쟁과 혼란을 야기했다.[57][58]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기독교 내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문제를 조사하고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57][58]

브리타니아를 제외한 모든 교구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했으며, 대부분은 동방에서 왔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고령으로 인해 두 명의 사제를 대신 보냈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우스,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참석했고, 훗날 삼위일체론의 옹호자가 된 아타나시우스는 보제 신분으로 참석했다.

공의회는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여름 별궁에서 열렸으며, 약 318명의 주교가 참석했다.[60] 황제는 공의회를 직접 주재하고 논의에 참여하며 주도했다.[61]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포함한 22명의 주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글을 읽자,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를 불경스럽고 신성모독적이라고 여겨 에우세비우스는 단상에서 끌려 내려왔다.[62]

아리우스의 반대편인 알렉산드로스 대주교는 성부와 성자가 같은 본질이며, 성자는 창세 이전에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히 생성되었다고 주장했다.[65] 아리우스는 성부의 배타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성자는 피조물이지만 첫째 피조물이기에 성부에게 가장 사랑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한의 복음서 14장 28절[14]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5절[15]을 인용하며 성경적 근거를 제시했다.

두 달 동안의 공의회에서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신앙고백문 초안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를 첨가하고 서명을 권고했다. 대다수 주교들이 니케아 신경에 동의하며 서명했고,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서명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 니케아의 테오그니스, 칼케돈의 마리스는 태도를 바꾸어 서명했고, 서명하지 않은 두 주교 테오나스와 세쿤두스는 아리우스와 함께 일리리아로 추방되었다.

성 니콜라오스에게 뺨을 얻어맞는 아리우스.


뮈라의 니콜라오스의 성인전에는 공의회 논쟁이 격렬해져 니콜라오스가 아리우스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6][67]

5. 1. 공의회 소집



아리우스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넘어 기독교 전체의 문제로 번졌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아리우스의 교리는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논쟁과 혼란을 야기했다.[57][58]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316년 도나투스 논쟁 등 교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기독교 세계 안의 논쟁을 끝내길 원했다. 황제는 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문제를 조사하고 해결하려 했다. 호시우스는 황제의 공개 서한을 통해 화해를 권고했지만, 논쟁이 지속되자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57][58]

5. 2. 공의회 진행

콘스탄티누스 대제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아리우스 논쟁을 조사하고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325년 공의회를 소집했다.[57][58] 브리타니아를 제외한 모든 교구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했으며, 대부분은 동방에서 왔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고령으로 인해 두 명의 사제를 대신 보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참석했고,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도 참석했다. 훗날 삼위일체론의 옹호자가 된 아타나시우스는 보제 신분으로 참석했다. 호시우스는 공의회 전에 니코메디아에서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만났다.[59]

공의회는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여름 별궁에서 열렸으며, 약 318명의 주교가 참석했다.[60] 황제는 공의회를 직접 주재하고 논의에 참여하며 주도했다.[61]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포함한 22명의 주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글을 읽자,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를 불경스럽고 신성모독적이라고 여겨 에우세비우스는 단상에서 끌려 내려왔다.[62]

아리우스의 반대편인 알렉산드로스 대주교는 성부와 성자가 같은 본질이며, 성자는 창세 이전에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히 생성되었다고 주장했다.[65] 아타나시우스는 보제 신분으로 발언권은 없었지만, 니케아 신경 수립에 도움을 주었다.[63][64] 아리우스는 성부의 배타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성자는 피조물이지만 첫째 피조물이기에 성부에게 가장 사랑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한의 복음서 14장 28절[14]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5절[15]을 인용하며 성경적 근거를 제시했다.

두 달 동안의 공의회에서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신앙고백문 초안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를 첨가하고 서명을 권고했다. 대다수 주교들이 니케아 신경에 동의하며 서명했고,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서명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 니케아의 테오그니스, 칼케돈의 마리스는 태도를 바꾸어 서명했고, 서명하지 않은 두 주교 테오나스와 세쿤두스는 아리우스와 함께 일리리아로 추방되었다.

뮈라의 니콜라오스의 성인전에는 공의회 논쟁이 격렬해져 니콜라오스가 아리우스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6][67]

33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리우스의 저작을 소각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68][69]

5. 3. 공의회 이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아리우스는 파문당하여 일리리아로 추방되었다.[40] 공의회가 끝난 뒤인 33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리우스의 모든 작품을 소각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였다.[68][69]

뮈라의 니콜라오스 성인전 중 일부에 따르면, 공의회에서의 논쟁이 너무 격렬해져서, 어느 순간 니콜라오스가 아리우스의 얼굴을 때렸다고 전한다.[66][67]

이후, 반 니케아파의 지도자 에우세비우스 (생년 미상-342년)의 중재 등으로 복귀가 허용되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36년에 사망했다.[40]

아리우스 사후에도 아리우스주의는 '''아노모이오스'''(비유사)파, '''호모이오스'''(유사)파,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파의 세 파로 분열되면서도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니케아파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가 즉위하면서 사태는 일변했다. 반 아리우스파라고도 불린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파와 니케아파가 화해, 연합하여 381년의 제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에우노미오스파(아노모이오스파), 아리우스파(에우독시우스파), 프네우마토마코이파(마케도니우스파), 사벨리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그 외의 이설파를 금지하게 되었다.[42] 또한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에서도 다시 이단으로 확인되었다.

6. 추방, 복귀, 그리고 죽음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가 퍼뜨린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아리우스 및 그의 동조자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40]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호모우시안(동일본질) 측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리우스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논쟁은 즉시 재개되었다.[9]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나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론자 간의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에서 추방된 사람들에게 점차 관대해졌다.[9] 황제는 아리우스가 자신의 기독론을 재구성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타나시우스는 335년 티레 공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고, 이듬해 예루살렘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성찬에 복귀시켰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의 알렉산데르에게 아리우스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지만, 알렉산데르 주교는 이에 반대했다.[19]

현대 학자들은 아리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반대자들의 독살의 결과였을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아리우스의 일부 동시대인들은 그의 죽음의 상황이 아리우스의 이단적인 견해의 기적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아리우스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리우스의 죽음은 아리우스 논쟁을 끝내지 못했고, 이 논쟁은 기독교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해결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파 서적을 불태우는 모습, 825년경의 교회법 책 삽화

6. 1. 아리우스의 복권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는 황제의 신임과 주교직을 회복하였고,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아리우스의 사면을 탄원하였다. 327년, 아리우스도 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냈으며, 황제는 아리우스의 신앙을 검증하기 위해 소환하였다. 아리우스는 니케아의 모든 결의를 받아드리겠다고 약속하는 신앙고백문을 제출했다.[70]

335년 9월 17일, 유세비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가 주도하고 황제가 참석한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아타나시오스는 추방되었고, 아리우스는 교회와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는 명백하고 화해가 담긴 신앙고백서를 제출하여, 교회로부터 신앙을 공식 승인받고 복권되었다.[71]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에서 아리우스를 위로하고, 그의 신앙을 다시 검증하였으며, 아리우스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신앙고백문에 서명하였다.[72]

6. 2. 아리우스의 죽음

336년, 아리우스는 다음 날 교회에서 자신의 복귀를 알릴 예정이었으나, 그 전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72]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후대의 학자들은 아리우스의 죽음이 그의 반대자들에 의한 독살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73] 반면, 아리우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일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그가 주장한 이단적인 견해에 대한 신의 징벌이며 기적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5세기의 역사가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후자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죽음은 그가 일으킨 교리 논쟁을 종결시키지 못했다.[75]

6. 3. 아리우스의 죽음 이후

336년 아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그가 일으킨 교리적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75] 아리우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학자들은 독살 가능성을 제기했다.[73] 반면, 아리우스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죽음이 이단적 견해에 대한 기적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5세기 역사가 소크라테스는 아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 광장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공포와 함께 심한 출혈과 내장이 쏟아져 즉사했다고 기록했다.[72][74]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 세례를 받았다.[9][21]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제국은 세 아들, 즉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에게 삼분되었는데, 동방을 통치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여 아리우스파가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다.[76] 353년부터 361년까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 제국을 통일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시르미움의 3차 회의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세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교리를 신조화하기까지 하였다.[76] 제7차 아리우스 신조(제2차 시르미움 신조)는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와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 교리에 대해 둘 다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아버지가 아들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정통파 교부들의 노력과 호모우시우스를 고수하던 중도파들이 점차 호모우시우스를 받아드리게 되면서,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를 다시 정죄했다. 그 결과 아리우스파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로마 제국에서 서서히 쇠멸하였다.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이교 부활 시도가 실패한 후, 아리우스파였던 황제 발렌스는 니케아파 주교들을 박해했지만, 발렌스의 후계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칙령, 박해,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집을 통해 동로마 제국 엘리트들 사이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7. 아리우스주의의 역사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의 장로(사제)이자 순교자인 Lucian of Antioch|루키아노스영어에게 배웠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성직에 종사하며 뛰어난 언변과 금욕적인 태도로 인기를 얻어, 이집트에서 오리엔트 지역 전역으로 종속주의적인 가르침을 퍼뜨렸다.[40] 이로 인해 321년 주교 회의에서 파문당하고 일리리쿰으로 추방되었다.[40]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을 결정했다. 그러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의 중재로 복귀가 허용되었으나, 33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40]

아리우스 논쟁은 318-9년경에 시작되었다. 아리우스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존재라면 아버지인 신과 동질일 수 없다('''헤테로우시오스''', 아버지와 아들은 이질)는 유대교와 같은 엄격한 유일신교를 주장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등 니케아파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삼위일체론을 내세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주의가 "신의 유일 지배의 지상에서의 상으로서의 제국 독재 정치 이념에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41]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니케아 신조'는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가 동질임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리우스파는 많았고, 사후에도 '''아노모이오스'''(비유사)파, '''호모이오스'''(유사)파,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파로 분열되어 세력을 유지했다. 이들과 니케아파의 항쟁은 복잡한 종교 정치적 분쟁으로 오랫동안 이어졌다.[42]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 379-395) 즉위 후,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파와 니케아파가 연합하여 381년 제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여러 이설파를 금지했다.[42]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도 아리우스주의는 다시 이단으로 확인되었다.

7. 1. 아리우스주의의 확장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임종 직전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 세례를 받았다.[76]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거한 후, 제국은 그의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삼분되었는데, 동방을 통치한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여 아리우스파가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다.[76] 353년부터 361년까지 콘스탄티우스가 로마 제국을 통일하여 다스리면서 아리우스파는 시르미움의 3차 회의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세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교리를 신조화하기까지 하였다.[76]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성직에 종사하며 뛰어난 언변과 헌신적이고 금욕적인 태도로 인기를 얻어, 이집트에서 오리엔트 지역 전역으로 종속주의적인 가르침을 퍼뜨렸다.[40]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주의가 "신의 유일 지배의 지상에서의 상으로서의 제국 독재 정치 이념에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아리우스를 지원했다.[41]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아리우스파는 많았고, 아리우스 사후에도 여러 파로 분열되면서도 세력을 유지했다.[42] 그러나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면서 아리우스파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로마 제국에서 서서히 쇠멸하였다.[76]

7. 2.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아리우스주의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임종 직전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 세례를 받았다.[9][21]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거한 후, 제국은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에게 삼분되었는데, 동방을 통치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여 아리우스파가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다.[76] 353년부터 361년까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 제국을 통일하여 다스리면서 아리우스파는 시르미움의 3차 회의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세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교리를 신조화하기까지 했다.[76]

357년 제3차 시르미움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는 절정에 달했다. 제7차 아리우스 신조(제2차 시르미움 신조)는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와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 교리에 대해 둘 다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아버지가 아들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중에 시르미움 신성 모독으로 불렸다.[22]

그러나 정통파 교부들의 노력과 호모우시우스를 고수하며 호모이우시우스를 주장하던 중도파들이 점차 호모우시우스를 받아드리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76]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이교 부활 시도가 실패한 후, 아리우스파였던 황제 발렌스는 니케아파 주교들에 대한 박해를 재개했지만, 발렌스의 후계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황제의 칙령, 박해, 그리고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집을 통해 동로마 제국 엘리트들 사이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를 다시 정죄했다. 그 결과 아리우스파는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로마 제국에서 서서히 쇠멸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비게르만 민족 사이에서 아리우스주의의 영향을 종식시켰다.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에서도 아리우스주의는 다시 이단으로 확인되었다.

7. 3. 서방에서의 아리우스주의

500년경 이탈리아 라벤나에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세운 아리우스 세례당


콘스탄티우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아리우스주의를 믿는 고트족 울필라스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어 고트족에게 선교하도록 보내졌다. 울필라스의 성공으로 고트족과 반달족 사이에서 아리우스주의는 8세기 초까지 살아남았는데, 이들 왕국은 인접한 니케아파에게 굴복하거나 니케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23] 아리우스파는 6세기와 7세기 동안 북아프리카, 스페인,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 계속 존재했다.[23]

8. 현대의 아리우스주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LDS 교회) 신자들은 때때로 아리우스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한다.[26] 그러나 후기 성도들의 기독론은 아리우스 신학과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다르다.[27]

여호와의 증인은 아들이 창조된 존재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독생자라고 가르친다.

유니테리언 유니버설리스트 운동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아리우스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현대 유니테리언 유니버설리스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독특한 도덕적 인물로 보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거나 영원하지 않다고 여기는 아리우스주의 또는 소치니주의 기독론을 따르거나, 오리게네스의 보편적 구원의 논리를 따라 삼위일체를 긍정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환생을 믿는 영매주의 종교에 따르면, 지구상에 육화한 가장 고차원의 영인 예수는 그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과는 구별된다. 예수는 니케아 기독교에서처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지만, 인류의 사랑, 지성, 용서의 궁극적인 모범이며, 종종 지구의 통치자로 언급된다.

9. 현존하는 저작물

아리우스의 저작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의 저작으로는 세 통의 편지와 몇 개의 단편만이 전해진다.[2] 이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에게 제출한 신앙 고백
  • 그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편지[31]
  •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제출한 신앙 고백[32]


아리우스의 유일하게 알려진 신학 저작은 《탈리아》이지만, 완전한 텍스트는 전해지지 않는다.[2] 아리우스의 적,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쓴 글에서 발췌된 내용만 남아있다.[2]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가 살아있을 때 그의 저작물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R.P.C. 한슨은 아리우스의 저작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의 시대 사람들은, 그에게 동의하든 안 하든, 그를 특별히 중요한 작가로 여기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아리우스의 저작은 그를 이단으로 비난한 교회 지도자들의 저작에서 인용되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2] 리처드 P.C. 한슨 주교는 "아리우스의 격렬한 반대자인 아타나시우스는... 그가 말한 것을 '왜곡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는 아타나시우스가 "논쟁과 투쟁에서 무자비한 전술"을 사용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아리우스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세 편의 생존 편지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에게 보낸 편지,[30]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편지,[31] 콘스탄티누스에게 보낸 고백이다.[32]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아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반대자들의 저술에 포함된 짧은 인용문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문들은 짧고 맥락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아, 정확성과 진정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9. 1. 탈리아 (Thalia)

Thaliagrc는 아리우스의 대표작으로, 그의 로고스에 대한 견해를 담은 대중적인 작품이다. Thaliagrc는 '축제' 또는 '연회'를 의미한다.[33] 이 작품은 산문과 운문을 결합한 형태로, 아리우스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

Thaliagrc의 원본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아리우스의 반대파인 아타나시우스가 쓴 글에 인용된 단편들만 전해진다.[2]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2] 인용된 단편들은 아리우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저서 "아리우스파 반박" 1:5-6에는 Thaliagrc의 내용이 일부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섞여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의 "아르미눔과 셀레우키아 공의회에 관하여"(De Synodisla) 15페이지에 인용된 Thaliagrc의 단편은 비교적 객관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단편은 불규칙한 운율로 되어 있으며, 아리우스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4]

De Synodisla에 인용된 Thaliagrc의 단편은 현존하는 가장 긴 부분으로, 아리우스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단편의 번역은 여러 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35][36][37] 그중 한스-게오르크 오피츠의 판본과 아론 J. 웨스트의 번역본이 대표적이다.[37]

Thaliagrc에서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분이며,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거나 같은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존재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지혜를 통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시간 속에서 존재하게 된 존재라고 말한다.

Thaliagrc의 내용은 삼위일체에 대한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초기 기독교 신학 논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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