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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방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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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가 방위 운동은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이다. 당시 그리스는 발칸 전쟁 승리로 영토를 확장했지만, 국제 정세 불안과 국왕과 총리의 노선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삼국 협상 참전을 지지했으나,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을 옹호했다.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친(親) 삼국 협상파가 "국가 방위 혁명 위원회"를 결성했고, 베니젤로스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연합국 참전을 추진했다. 이후 그리스는 내전을 겪고, 국왕이 퇴위하면서 통일되었지만, 베니젤리즘과 왕당파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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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방위 운동
기본 정보
일반 명칭테살로니키 국가
시대제1차 세계 대전국민 분열
정부 형태임시 정부, 베니젤로스주의 국가
지위베니젤로스주의 우세 정부 (삼국 협상에 의해 1916년 12월 합법적인 그리스 정부로 인정됨)
시작 사건국가 방위 쿠데타
시작 년도1916년
시작 날짜8월 17일
종료 사건콘스탄티노스 1세의 퇴위
종료 년도1917년
종료 날짜5월 29일
이전 국가그리스 왕국
이전 국가 깃발Hellenic Kingdom Flag 1935.svg
이후 국가그리스 왕국
이후 국가 깃발Hellenic Kingdom Flag 1935.svg
공용어그리스어
종교그리스 정교
수도테살로니키
대표 직함총리
대표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대표 년도1916-17년
부대표 직함국가 방위 삼두정치
부대표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부대표 년도1916-17년
통화그리스 드라크마 (₯)
프랑스 프랑

2. 배경: 1914-1916년 그리스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는 승리하여 영토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났지만,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스가 점령한 동부 에게해 섬의 지위는 결정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은 계속해서 이를 주장하여 해군 군비 경쟁과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계 민족의 대량 추방으로 이어졌다. 북쪽에서는 불가리아 왕국제2차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그리스와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복수 계획을 품고 있었다.

베니젤로스, 미틸리니 도착, 1916년 6월


베니젤로스 정부 선포, 테살로니키, 1916년 9월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삼국 협상 측의 참전을 지지한 반면,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을 옹호하여 그리스 지도부 내에서 분열이 발생했다.

1915년 초, 영국은 그리스에 소아시아의 영토적 양보를 제안하며 갈리폴리 전투 참여를 요청했고, 베니젤로스는 이를 지지했으나 국왕과 군사 고문들의 반대로 사임했다. 이후 1915년 5월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불가리아의 동원령에 대응하여 그리스의 반동원을 명령하고 연합군에 테살로니키 주둔을 요청한 후, 국왕에 의해 해산되었다. 자유당은 1915년 12월 그리스 총선을 보이콧했고, 프랑스는 베니젤로스의 허가를 받아 코르푸를 점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국가 방위 혁명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16년 5월, 아테네 정부가 루펠 요새를 독일과 불가리아 동맹국에 항복하도록 명령하자, 친 삼국 협상파인 베니젤리스트들은 계엄령을 발동하여 북부 그리스 전체에서 왕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폐지했다. 스트루마 작전의 불가리아 침공이 시작되었으나, 아테네 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제4군단 병사들이 독일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 1. 발칸 전쟁 이후 그리스의 상황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는 승리하여 영토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났지만,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스가 점령한 동부 에게해 섬의 지위는 결정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은 계속해서 이를 주장하여 해군 군비 경쟁과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계 민족의 대량 추방으로 이어졌다. 북쪽에서는 불가리아 왕국제2차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그리스와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복수 계획을 품고 있었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삼국 협상 측의 참전을 지지한 반면,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을 옹호하여 그리스 지도부 내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1915년 초, 영국은 그리스에 소아시아의 영토적 양보를 제안하며 갈리폴리 전투 참여를 요청했고, 베니젤로스는 이를 지지했으나 국왕과 군사 고문들의 반대로 사임했다. 이후 1915년 5월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불가리아의 동원령에 대응하여 그리스의 반동원을 명령하고 연합군에 테살로니키 주둔을 요청한 후, 국왕에 의해 해산되었다. 자유당은 1915년 12월 그리스 총선을 보이콧했고, 프랑스는 베니젤로스의 허가를 받아 코르푸를 점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국가 방위 혁명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16년 5월, 아테네 정부가 루펠 요새를 독일과 불가리아 동맹국에 항복하도록 명령하자, 친 삼국 협상파인 베니젤리스트들은 계엄령을 발동하여 북부 그리스 전체에서 왕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폐지했다. 스트루마 작전의 불가리아 침공이 시작되었으나, 아테네 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제4군단 병사들이 독일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그리스의 중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했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에게해 섬 영유권 분쟁, 불가리아 왕국의 복수 위협 등 어려운 국제 정세에 놓여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는 초기 중립을 유지했으나,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삼국 협상 측 참전을 지지한 반면,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을 옹호하여 지도부 내 분열이 발생했다. 1915년 영국은 갈리폴리 전투 참전을 조건으로 그리스에 소아시아 영토 양보를 제안했지만, 국왕과 군부 반대로 베니젤로스는 사임했다. 이후 1915년 5월 그리스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여 베니젤로스가 재집권했으나, 불가리아의 동원령에 대응하여 그리스군 반동원령을 내리고 연합군에 테살로니키 주둔을 요청하면서 국왕과 다시 갈등을 빚었다.

결국 국왕은 베니젤로스와 의회를 해산하고, 자유당은 1915년 12월 그리스 총선을 보이콧했다. 같은 달 프랑스는 코르푸를 점령하여 세르비아군 잔여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국가 방위 혁명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16년, 그리스 정부는 중립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독일 제국 압력에 굴복하여 루펠 요새를 독일-불가리아 동맹군에게 항복했다. 이에 베니젤로스파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북부 그리스에서 왕의 주권을 폐지했다. 스트루마 작전으로 불가리아군이 동부 마케도니아를 침공하고, 제4군단 병력이 독일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어렵게 얻은 영토를 쉽게 내준 것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가 커졌다.

2. 3. 베니젤로스와 국왕의 갈등

그리스는 1912-1913년의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났지만,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스가 점령한 동부 에게해 섬의 지위는 결정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은 계속해서 이를 주장하여 해군 군비 경쟁과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계 민족의 대량 추방으로 이어졌다. 북쪽에서는 불가리아 왕국제2차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그리스와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복수 계획을 품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그리스 지도부 내에서는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삼국 협상 측의 참전을 지지한 반면, 독일 제국에서 교육을 받고,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며,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깊이 존경했던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독일의 승리를 예상하고 중립을 옹호했다.

1915년 초, 영국은 그리스가 갈리폴리 전투에 참여한다면 "소아시아의 영토적 양보"를 제안했고, 베니젤로스는 이를 지지했지만 국왕과 군사 고문들의 반대로 1915년 3월 6일에 사임을 제출했다.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가 이끄는 친왕당파 정부가 그를 대신했다. 이후 자유당 (그리스)이 1915년 5월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하고 베니젤로스는 다시 수상이 되었다. 1915년 9월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동원되자,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반동원을 명령하고,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앵글로-프랑스에게 테살로니키에 주둔할 것을 요청했다. 연합군은 1915년 9월 22일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참호를 구축했다. 국왕은 헌법에 위배되게 베니젤로스와 의회를 해산시켰고, 자유당은 1915년 12월 그리스 총선을 보이콧했다.

3. 테살로니키 봉기

여러 굴욕과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진격에 격분한 여러 그리스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몰려와 병력을 모아 연합군에 합류하겠다고 자원했다. 현지 연합군 총사령관 모리스 사라이유는 그들의 계획을 환영했지만, 그리스 정부의 반대로 인해 진전이 거의 없었다.[2] 8월 16/29일, 콘스탄티노스 마자라키스-아이니안 중령은 제11보병사단 산악 포병대대를 장악하여 전선으로 이끌려고 했다. 이는 제3군단 참모장이자 군단장 대리인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대령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트리쿠피스 대령은 미크로 카라부르누에 있는 포병 병영에 두 개 중대를 보내 마자라키스가 시도를 포기하고 병영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2]

베니젤로스와 국가 방위 정권을 지지하는 테살로니키의 레스토랑 "베르됭", 1916년.


이 사건은 다음 날인 8월 17/30일, 도시의 친 베니젤로스 장교들에 의해 더 광범위한 봉기의 불을 지폈다. 에파메이논다스 짐브라카키스 중령의 지휘하에, 크레타 헌병대 소속 약 600명의 병력과 네오코스모스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 3개 자원 중대 및 다른 30명의 장교들이 제3군단 본부를 봉쇄했다. 바기아스 대령 휘하의 중대가 봉쇄를 뚫으려 하자 총격전이 벌어져 헌병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크레타 헌병대는 반격하여 군인 3~4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프랑스 장교들의 개입으로 교전이 중단되었다. 사라이유는 곧 현장에 도착하여 새로 결성된 "국가 방위 위원회"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모든 그리스 장교들을 남부 그리스로 수송하라고 명령했다. 충성파 병력은 무장 해제되어 억류되었지만 봉기에 참여하기를 바랐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거부하여 남부 그리스로 보내져야 했다.[2]

북부 그리스 전역의 개별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9월 2/15일에 "국가 방위"는 항복을 거부하고 대신 카발라와 사모트라케를 거쳐 철수한 제4군단의 잔여 병력과 함께 니콜라오스 크리스토둘루 대령이 도시에 도착하면서 첫 번째 실질적인 지원을 받았다.[2] 이미 9월 8/21일에,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의 자원병들은 "국가 방위군"의 제1대대를 형성하여 스트리몬 강을 따라 전선으로 떠났다.[3]

3. 1. 봉기의 발단

여러 굴욕과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진격에 격분한 여러 그리스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집결하여 연합군 합류를 자원했다. 그러나 현지 연합군 총사령관 모리스 사라이유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정부의 반대로 진전은 거의 없었다.[2] 8월 16/29일, 콘스탄티노스 마자라키스-아이니안 중령은 제11보병사단 산악 포병대대를 장악하여 전선으로 이끌려고 시도했으나, 제3군단 참모장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대령의 반대에 부딪혔다. 트리쿠피스 대령은 미크로 카라부르누의 포병 병영에 두 개 중대를 보내 마자라키스가 병영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2]

이 사건은 다음 날인 도시의 친 베니젤로스 장교들에 의해 더 광범위한 봉기를 촉발시켰다. 에파메이논다스 짐브라카키스 중령 지휘 하의 크레타 헌병대 소속 약 600명의 병력과 네오코스모스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 3개 자원 중대 및 30명의 장교들이 제3군단 본부를 봉쇄했다. 바기아스 대령 휘하 중대가 봉쇄를 뚫으려다 총격전이 벌어져 헌병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크레타 헌병대의 반격으로 군인 3~4명이 사상당했다. 프랑스 장교들의 개입으로 교전은 중단되었고, 사라이유는 현장에 도착하여 새로 결성된 "국가 방위 위원회"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그리스 장교들을 남부 그리스로 수송하라고 명령했다. 충성파 병력은 무장 해제되어 억류되었지만 봉기에 참여하기를 바랐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거부하여 남부 그리스로 보내졌다.[2]

북부 그리스 전역의 개별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에 "국가 방위"는 니콜라오스 크리스토둘루 대령이 도시에 도착하면서 첫 번째 실질적인 지원을 받았다. 카발라와 사모트라케를 거쳐 철수한 제4군단의 잔여 병력이 그와 함께 했다.[2] 이미 에,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의 자원병들은 "국가 방위군"의 제1대대를 형성하여 스트리몬 강을 따라 전선으로 떠났다.[3]

3. 2. 봉기의 전개



여러 굴욕과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진격에 격분한 여러 그리스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몰려와 병력을 모아 연합군에 합류하겠다고 자원했다. 현지 연합군 총사령관 모리스 사라이유는 그들의 계획을 환영했지만, 그리스 정부의 반대로 인해 진전이 거의 없었다.[2] 8월 16/29일, 콘스탄티노스 마자라키스-아이니안 중령은 제11보병사단 산악 포병대대를 장악하여 전선으로 이끌려고 했다. 이는 제3군단 참모장이자 군단장 대리인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대령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트리쿠피스 대령은 미크로 카라부르누에 있는 포병 병영에 두 개 중대를 보내 마자라키스가 시도를 포기하고 병영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2]

이 사건은 다음 날인 8월 17/30일, 도시의 친 베니젤로스 장교들에 의해 더 광범위한 봉기의 불을 지폈다. 에파메이논다스 짐브라카키스 중령의 지휘하에, 크레타 헌병대 소속 약 600명의 병력과 네오코스모스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 3개 자원 중대 및 다른 30명의 장교들이 제3군단 본부를 봉쇄했다. 바기아스 대령 휘하의 중대가 봉쇄를 뚫으려 하자 총격전이 벌어져 헌병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크레타 헌병대는 반격하여 군인 3~4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프랑스 장교들의 개입으로 교전이 중단되었다. 사라이유는 곧 현장에 도착하여 새로 결성된 "국가 방위 위원회"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모든 그리스 장교들을 남부 그리스로 수송하라고 명령했다. 충성파 병력은 무장 해제되어 억류되었지만 봉기에 참여하기를 바랐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거부하여 남부 그리스로 보내져야 했다.[2]

북부 그리스 전역의 개별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9월 2/15일에 "국가 방위"는 항복을 거부하고 대신 카발라와 사모트라케를 거쳐 철수한 제4군단의 잔여 병력과 함께 니콜라오스 크리스토둘루 대령이 도시에 도착하면서 첫 번째 실질적인 지원을 받았다.[2] 이미 9월 8/21일에,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의 자원병들은 "국가 방위군"의 제1대대를 형성하여 스트리몬 강을 따라 전선으로 떠났다.[3]

3. 3. "국가 방위 위원회" 결성

테살로니키에서 여러 그리스 장교들이 모여 "국가 방위 위원회"를 결성했다.[2] 이들은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진격과 그리스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격분하여 연합군에 합류하고자 했다.[2]

1916년 8월 16/29일, 콘스탄티노스 마자라키스-아이니안 중령이 제11보병사단 산하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가려 했으나, 제3군단 참모장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대령의 반대에 부딪혀 철수했다.[2]

다음 날인 8월 17/30일, 에파메이논다스 짐브라카키스 중령 지휘 하의 크레타 헌병대와 네오코스모스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 3개 자원 중대 등 친(親) 베니젤로스 장교들이 봉기하여 제3군단 본부를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프랑스 장교들의 개입으로 교전이 중단되었다.[2] 모리스 사라이유는 현장에 도착하여 "국가 방위 위원회" 봉기에 참여하지 않는 장교들을 남부 그리스로 수송하라고 명령했다.[2]

이후 북부 그리스 전역의 장교들이 테살로니키로 합류했으며, 9월 2/15일에는 니콜라오스 크리스토둘루 대령이 카발라와 사모트라케를 거쳐 철수한 제4군단 잔여 병력과 함께 도시에 도착하여 "국가 방위"에 힘을 실었다.[2] 9월 8/21일, 그리고리아디스 소령 휘하의 자원병들은 "국가 방위군"의 제1대대를 편성하여 스트리몬 강 전선으로 떠났다.[3]

4. 국가 방위 임시 정부 수립

베니젤로스와 그의 측근들은 1916년 9월 12일/25일에 아테네를 출발, 크레타를 거쳐 키오스, 레스보스를 경유하여 9월 24일/10월 7일에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3] 4일 후인 9월 28일/10월 11일, 베니젤로스는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제독과 함께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임시 정부("국가 방위 삼두정치", Τριανδρία της Εθνικής Αμύνης)를 수립했다.[3]

장교 지므브라카키스와 크리스토둘루가 병사를 사열하고 있다.


국가 방위군 제1대대가 전선으로 향하며 백탑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항구에 정박한 그리스 어뢰정


thumb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1916년 9월 29일/10월 12일, 엠마누일 지므브라카키스 소장이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었고(12월 6일 콘스탄티노스 밀리오티스-콤니노스 소장으로 교체), 10월 3일에는 니콜라오스 폴리티스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0월 6일에는 "총국"으로 불리는 다른 부서들이 설립되었다.[3]

  •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내무 장관
  • Miltiadis Negrepontis/Μιλτιάδης Νεγρεπόντηςel, 재무 장관
  • 탈리스 쿠투피스, 국가 경제 장관
  • Dimitrios Dingas/Δημήτριος Δίγκαςel, 법무 장관
  •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 교육 장관
  • Alexandros Kassavetis/Αλέξανδρος Κασσαβέτηςel, 교통 장관
  • Leonidas Embeirikos/Λεωνίδας Ανδρ. Εμπειρίκοςel, 공급 및 식량 분배 장관
  • Spyridon Simos/Σπύρος Σίμοςel, 난민 장관
  • 안드레아스 미할라코풀로스, 공공 재산 및 재정착 장관


임시 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참전하기 위해 "국가 방위군"을 창설하고, 그리스 영토 내 통치를 강화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1916년 11월 24일, 임시 정부는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전선에 투입할 사단을 신속하게 모집했다.[3] 베니젤로스는 군주제 폐지 및 공화국 선포를 주장하는 일부 장교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고 선언하며 온건한 노선을 택했다.

국가 방위군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크레타, 북부 에게해 섬에서 통제권을 확립했다. 아테네에서 발생한 베니젤리스트에 대한 ''노엠브리아나'' 폭동은 두 그리스 국가 간의 화해가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1917년 초, 베니젤리스트 국가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왕립군과의 충돌 이후 테살리아를 장악했다.

9개월 간의 국가 분열 끝에, 1917년 6월 15일 연합국의 최후 통첩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하고 스위스로 망명했다. 베니젤로스는 통일된 그리스의 수장으로 아테네로 돌아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이후 소아시아 전역에 휘말렸다. "국가 방위"의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이 혁명은 베니젤리즘과 왕당파/반베니젤리스트 간의 균열을 심화시켜 국가 분열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1970년대까지 그리스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4. 1. 베니젤로스의 테살로니키 도착

베니젤로스와 그의 측근들은 9월 12일/25일에 아테네를 출발하여 고향 크레타로 향했다.[3] 이후 키오스와 레스보스를 거쳐 9월 24일/10월 7일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3] 베니젤로스는 9월 28일/10월 11일에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제독과 함께 삼두정치를 구성하여 임시 정부("국가 방위 삼두정치", Τριανδρία της Εθνικής Αμύνης)를 수립했다.[3]

9월 29일/10월 12일, 엠마누일 지므브라카키스 소장이 육군 장관에 임명되었고(12월 6일 콘스탄티노스 밀리오티스-콤니노스 소장으로 교체), 10월 3일에는 니콜라오스 폴리티스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10월 6일에는 다른 부서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총국"으로 불렸다.[3] 새 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참전할 국가 방위군을 창설하고, 그리스 영토 내 통치를 강화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임시 정부는 1916년 11월 24일에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전선을 위한 사단을 신속하게 모집했다.[3] 베니젤로스는 일부 장교들의 군주제 폐지 및 공화국 선포 촉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며 온건한 노선을 택했다.[3]

thumb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4. 2. 국가 방위 삼두정치 구성

베니젤로스는 1916년 9월 24일/10월 7일 테살로니키에서 자신,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제독으로 구성된 삼두정치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정부("국가 방위 삼두정치", Τριανδρία της Εθνικής Αμύνης)를 구성했다.[3] 9월 28일/10월 11일에는 엠마누일 지므브라카키스 소장이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었고(12월 6일 콘스탄티노스 밀리오티스-콤니노스 소장으로 교체), 10월 3일 니콜라오스 폴리티스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10월 6일에는 "총국"이라고 완곡하게 불리는 다른 부서가 설립되었다.[3]

새 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연합국과 함께 싸울 "국가 방위군"을 창설하고, 가능한 한 그리스 영토 내에서 통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3] 임시 정부는 1916년 11월 24일에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전선을 위한 사단을 모집하기 시작했다.[3] 일부 장교들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할 것을 촉구했지만, 베니젤로스는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고 선언하며 더 온건한 길을 선택했다.[3]

4. 3. 임시 정부의 조직과 활동



thumb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그의 측근들은 1916년 9월 12일/25일에 아테네를 출발, 크레타를 거쳐 키오스, 레스보스를 경유하여 9월 24일/10월 7일에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3] 4일 후인 9월 28일/10월 11일, 베니젤로스는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제독과 함께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임시 정부("국가 방위 삼두정치", Τριανδρία της Εθνικής Αμύνης)를 수립했다.[3]

1916년 9월 29일/10월 12일, 엠마누일 지므브라카키스 소장이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었고(12월 6일 콘스탄티노스 밀리오티스-콤니노스 소장으로 교체), 10월 3일에는 니콜라오스 폴리티스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0월 6일에는 "총국"으로 불리는 다른 부서들이 설립되었다.[3]

  •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내무 장관
  • Miltiadis Negrepontis/Μιλτιάδης Νεγρεπόντηςel, 재무 장관
  • 탈리스 쿠투피스, 국가 경제 장관
  • Dimitrios Dingas/Δημήτριος Δίγκαςel, 법무 장관
  •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 교육 장관
  • Alexandros Kassavetis/Αλέξανδρος Κασσαβέτηςel, 교통 장관
  • Leonidas Embeirikos/Λεωνίδας Ανδρ. Εμπειρίκοςel, 공급 및 식량 분배 장관
  • Spyridon Simos/Σπύρος Σίμοςel, 난민 장관
  • 안드레아스 미할라코풀로스, 공공 재산 및 재정착 장관


임시 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참전하기 위해 "국가 방위군"을 창설하고, 그리스 영토 내 통치를 강화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1916년 11월 24일, 임시 정부는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전선에 투입할 사단을 신속하게 모집했다.[3] 베니젤로스는 군주제 폐지 및 공화국 선포를 주장하는 일부 장교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고 선언하며 온건한 노선을 택했다.

국가 방위군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크레타, 북부 에게해 섬에서 통제권을 확립했다. 아테네에서 발생한 베니젤리스트에 대한 ''노엠브리아나'' 폭동은 두 그리스 국가 간의 화해가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1917년 초, 베니젤리스트 국가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왕립군과의 충돌 이후 테살리아를 장악했다.

9개월 간의 국가 분열 끝에, 1917년 6월 15일 연합국의 최후 통첩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하고 스위스로 망명했다. 베니젤로스는 통일된 그리스의 수장으로 아테네로 돌아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이후 소아시아 전역에 휘말렸다. "국가 방위"의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이 혁명은 베니젤리즘과 왕당파/반베니젤리스트 간의 균열을 심화시켜 국가 분열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1970년대까지 그리스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5. 국가 분열과 내전



thumb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1916년 11월 24일, 임시 정부는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했다.[3] 국가 방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케도니아 전선을 위한 사단을 모집하기 위해 신속하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병력을 징집했다.[3] 일부 장교들은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선포를 요구했지만, 베니젤로스는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며 온건 노선을 택했다.

아테네에서 발생한 베니젤로스파에 대한 ''노엠브리아나'' 폭동으로 양측의 화해는 불가능해졌다. 1917년 초, 베니젤로스파는 콘스탄티누스 왕의 왕립군과의 충돌 이후 테살리아를 장악했다.

9개월 간의 국가 분열 끝에, 1917년 6월 15일 연합국의 최후통첩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하고,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다. 베니젤로스는 통일된 그리스의 수장으로 아테네로 복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과 함께 승리했지만, 이후 소아시아 전역에 휘말렸다. 이로써 "국가 방위"의 목표는 달성되었으나, 혁명은 준공화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베니젤리즘과 보수적인 왕당파/반베니젤리스트 사이의 균열을 심화시켰고, 이는 1970년대까지 그리스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3]

5. 1. 두 정부의 대립

지므브라카키스와 크리스토둘루가 병사를 사열하고 있다.[3]

베니젤로스는 1916년 9월 12일/25일 측근들과 함께 아테네를 떠나 크레타를 거쳐 9월 24일/10월 7일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3] 9월 28일/10월 11일,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제독과 함께 삼두정치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정부(Τριανδρία της Εθνικής Αμύνης)를 구성했다.[3] 9월 29일/10월 12일 엠마누일 지므브라카키스 소장이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0월 3일 니콜라오스 폴리티스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10월 6일에는 "총국"이라고 완곡하게 불리는 다른 부서가 설립되었다.

임시 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싸울 "국가 방위군"을 창설하고, 그리스 영토 내에서 통치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3] 1916년 11월 24일에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전선을 위한 사단을 모집했다.[3] 베니젤로스는 군주제 폐지 및 공화국 선포를 주장하는 일부 장교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고 선언하며 온건한 길을 선택했다.[3]

국가 방위군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크레타, 북부 에게해 섬에서 통제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베니젤리스트에 대한 ''노엠브리아나'' 폭동으로 두 그리스 국가의 공존은 불가능해졌다.[3] 1917년 초, 베니젤리스트 국가는 콘스탄티누스 왕의 왕립군과의 충돌 이후 테살리아도 장악했다.[3]

이러한 국가 분열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1917년 6월 15일, 연합국의 최후 통첩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하고 스위스로 떠났다.[3] 베니젤로스는 통일된 그리스의 수장으로 아테네로 돌아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과 함께 승리했지만, 이후 소아시아 전역에 휘말렸다. "국가 방위"의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혁명은 베니젤리즘과 왕당파/반베니젤리스트 사이의 균열을 야기했으며, 이는 국가 분열의 시작을 알리며 1970년대까지 지속되는 골치 아픈 유산을 남겼다.[3]

베니젤로스가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thumb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5. 2. 노엠브리아나 사건

아테네에서 발생한 베니젤로스파 탄압 사건(''노엠브리아나'')은 두 그리스 국가의 불안정한 공존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며, 1917년 초 베니젤로스파는 테살리아를 장악하게 된다. 국가 방위군은 발칸 전쟁을 통해 확보한 그리스 마케도니아, 크레타, 북부 에게해 섬에서 통제권을 확립했다.

이러한 국가의 분열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1917년 6월 연합국의 최후 통첩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했으며,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베니젤로스는 통일된 그리스의 수장으로 아테네에 돌아왔다.

5. 3. 내전의 종식과 연합국 참전



thumb에서 그리스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해군 제독 쿤투리오티스와 사라이 장군이 동행했다.]]

1916년 11월 24일, 임시 정부는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했다.[3] 국가 방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케도니아 전선을 위한 사단을 모집하기 위해 신속하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병력을 징집했다.[3] 일부 장교들은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선포를 요구했지만, 베니젤로스는 "우리는 왕이 아니라 불가리아를 반대한다"라며 온건 노선을 택했다.

아테네에서 발생한 베니젤로스파에 대한 ''노엠브리아나'' 폭동으로 양측의 화해는 불가능해졌다. 1917년 초, 베니젤로스파는 콘스탄티누스 왕의 왕립군과의 충돌 이후 테살리아를 장악했다.

9개월 간의 국가 분열 끝에, 1917년 6월 15일 연합국의 최후통첩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하고,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다. 베니젤로스는 통일된 그리스의 수장으로 아테네로 복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과 함께 승리했지만, 이후 소아시아 전역에 휘말렸다. 이로써 "국가 방위"의 목표는 달성되었으나, 혁명은 준공화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베니젤리즘과 보수적인 왕당파/반베니젤리스트 사이의 균열을 심화시켰고, 이는 1970년대까지 그리스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3]

6. 결과 및 영향

6. 1. 그리스 정치의 분열 심화

6. 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의 상황

7. 대중문화 속의 국가 방위 운동

국가 방위 운동을 기념하는 당시의 인기 있는 노래는 스미르나의 음악 단체 에스투디안티나가 연주한 ''Tis aminis ta pedià''(방위대의 청년들) 또는 ''마케도니아''라는 곡이었다. 이 곡은 스타브로스 자르차코스의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코스타스 페리스의 영화 ''레베티코''에서도 연주되었다.

참조

[1] 문서 Note: Greece officially adopted the Gregorian calendar on 16 February 1923 (which became 1 March). All dates prior to that, unless specifically denoted, are Old Style.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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