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
1. 개요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는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의 아들로, 영국 육군 원수를 역임했다. 그는 1764년 형 조지 3세로부터 공작위를 받았으며, 1766년 7살 연상의 마리아 월폴과 비밀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1772년 왕실 결혼법 발령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세 명의 적자와 한 명의 서자를 두었으며, 더블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윌리엄 헨리는 1805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윌리엄 프레데릭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이름 | 윌리엄 헨리 |
|---|---|
| 작위 | 초대 글로스터 공작 초대 에든버러 공작 초대 코노트 백작 |
| 출생일 | 1743년 11월 25일 |
| 출생지 | 영국, 런던, 레스터 하우스 |
| 사망일 | 1805년 8월 25일 (61세) |
| 사망지 | 영국, 런던, 글로스터 하우스 |
| 매장일 | 1805년 9월 4일 |
| 매장지 | 윈저, 성 조지 교회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가문 | 하노버 왕조 |
|---|---|
| 아버지 | 프레데릭 루이스, 그레이트브리튼 왕세자 |
| 어머니 | 오거스타 (삭스-고타 공녀) |
| 배우자 | 마리아 월폴 (1766년 결혼) |
|---|---|
| 자녀 | 소피아 공주 캐롤라인 공주 윌리엄 프레더릭 |
| 소속 국가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영국 |
|---|---|
| 군대 | 영국 육군 |
| 복무 기간 | 1766년–1805년 |
| 계급 | 육군 원수 |
| 지휘 | 북부 관구 사령관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자 -
조지 2세
조지 2세는 하노버 왕조의 두 번째 국왕이자 하노버 선제후로서 대브리튼과 아일랜드를 통치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을 겪었고, 헨델을 후원했으며, 그의 통치는 영국의 국제적 위상 강화와 입헌 군주제의 유지를 특징짓지만 평가가 다양하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하노버)
조지 3세의 아들이자 영국 왕족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하노버 국왕으로 즉위하여 보수적인 정책을 펼치며 논란을 일으켰지만, 하노버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영국 육군 원수 -
에든버러 공작 필립
1921년 그리스에서 태어난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으로, 해군 복무 후 왕실 배우자로서 70년 이상 공무를 수행하며 왕실 현대화에 기여하고 자선 활동을 펼쳤다. -
영국 육군 원수 -
버나드 몽고메리
버나드 몽고메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육군 원수로서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유럽 전역에서 연합군을 지휘한 인물이지만, 마켓 가든 작전 실패와 인종차별적 편견 등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1805년 사망 -
윌리엄 페일리
윌리엄 페일리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영국의 저명한 자연신학자이자 도덕철학자, 신학자로, '시계공 유추'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으며, 그의 저술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의되고 지적 설계 이론의 기초가 되었으나, 과학적 진화론에 대한 반박으로 악용되는 등 논쟁적인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
1805년 사망 -
클로드 샤프
클로드 샤프는 움직이는 팔을 이용한 광학 전신 시스템인 샤프 전신을 개발하여 프랑스 혁명 이후 정국 안정과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프랑스 우위에 기여한 프랑스 발명가이다.
2. 생애
웨일스 공 프레데릭 루이스와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의 셋째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육군 군인이 되었으며, 1762년 가터 훈장을 받았고, 1764년 형 조지 3세로부터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위를 받았다. 1766년 비밀리에 7살 연상의 마리아 월폴(로버트 월폴의 서손녀이자 당시 월드그레이브 백작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왕족과 왕족이 아닌 서자 출신의 여성(게다가 미망인)과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숨겼다. 이 행위는 조지 3세가 '왕족은 결혼 시 국왕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내용을 담은 1772년 왕실 결혼법을 발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윌리엄 헨리는 마리아와의 사이에 소피아(1773년-1844년), 캐롤라인(1774년-1775년, 천연두로 요절), 윌리엄 프레데릭(1776년-1834년,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등 3명의 자녀를 두었다. 또한 알메리아 카펜터와의 사이에 서자 루이자를 두었다.
1793년 원수가 되었고, 1771년부터 1805년까지 더블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1. 유년 시절
윌리엄 헨리 왕자는 웨스트민스터의 레스터 하우스에서 조지 2세와 안스바흐의 캐롤라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 웨일스 공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일 후에 레스터 하우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는 그의 백부 오렌지 공 윌리엄 4세(결혼으로 맺어진), 컴벌랜드 공 윌리엄 왕자, 그리고 그의 고모 영국 공주 아멜리아였다. 그는 태어날 때 영국 왕위 계승 순위에서 4번째였다.
그의 형 조지 3세는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데릭이 1751년에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1760년 10월 25일에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3세는 1764년 11월 19일에 윌리엄을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및 코노트 백작으로 임명했다. 그는 1762년 5월 27일에 가터 훈작단에 기사로 서임되었고, 그 해 9월 22일에 임명되었다. 1764년에 그는 마리아 월폴(로버트 월폴 경의 사생아 손녀이자 왈데그레이브의 과부 백작 부인)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2.2. 군 경력과 결혼
그는 처음에 군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건강과 지적 능력이 모두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신 그는 1766년 대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제13보병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런던 Pall Mall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마리아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 결혼은 1772년 왕실 결혼법이 통과된 후에야 국왕에게 알려졌다. 공작과 마리아는 윈저 근처 클루어의 세인트 레너드 힐에 살았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1767년,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제3보병근위대 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공작과 마리아는 세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출생 | 사망 |
|---|---|---|
| 소피아 마틸다 | 1773년 5월 29일 | 1844년 11월 29일 |
| 캐롤라인 오거스타 마리아 | 1774년 6월 24일 | 1775년 3월 14일 |
| 윌리엄 프레데릭 왕자 | 1776년 1월 15일 | 1834년 11월 30일 |
캐롤라인 공주는 천연두 예방 접종 후 불과 9개월 만에 사망했다.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공작은 야전 지휘를 희망했지만, 조지는 거부했다. 그는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1777–1779) 동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에서 복무할 것을 요청했지만 - 조지가 동의했지만 프리드리히 자신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나중에 제1보병근위대 연대로 전속되었으며, 1793년 10월 18일 야전 원수가 되었다. 그는 1796년에 북부 지구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1802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2.3. 자녀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와 마리아 월폴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었다.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
| 소피아 마틸다 | 1773년 5월 29일 | 1844년 11월 29일 | |
| 캐롤라인 오거스타 마리아 | 1774년 6월 24일 | 1775년 3월 14일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세습 공작 부인 (아버지의 고모)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세습 공작 (결혼을 통한 삼촌)이 대부모였다. 천연두 예방 접종 후 9개월 만에 사망. |
| 윌리엄 프레데릭 왕자 | 1776년 1월 15일 | 1834년 11월 30일 |
이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전하라는 칭호를 받았고, 조지 2세의 직계 남자 후손으로서 공작과 함께 영토 지칭을 사용했다.
2.4. 말년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는 군 복무를 희망했지만 건강과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1766년 대령으로 임명되어 제13보병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런던 Pall Mall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마리아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 결혼은 1772년 왕실 결혼법이 통과된 후에야 국왕에게 알려졌다. 공작 부부는 윈저 근처 클루어의 세인트 레너드 힐에서 살았으며 세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전하라는 칭호를 받았고, 조지 2세의 직계 남자 후손으로서 공작과 함께 영토 지칭을 사용했다.
1767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제3보병근위대 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윈저 숲의 관리인이 되었고, Cranbourne Lodge에서 공식 거주지를 얻었다. 1768년에는 유명한 바이올린 제작자 리처드 듀크를 공식 악기 제작자로 고용하여 올드 글로스터 스트리트에 개인 숙소를, 글로스터 플레이스에 작업장을 마련했다. 1771년 더블린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어 1805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공작과 마리아는 세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글로스터 공주 소피아 (소피아 마틸다) | 1773년 5월 29일 | 1844년 11월 29일 | |
| 글로스터 공주 캐롤라인 (캐롤라인 오거스타 마리아) | 1774년 6월 24일 | 1775년 3월 14일 | 천연두 예방 접종 후 9개월 만에 사망 |
| 윌리엄 프레데릭 왕자 | 1776년 1월 15일 | 1834년 11월 30일 |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공작은 야전 지휘를 희망했지만, 조지 3세는 이를 거부했다.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1777–1779) 동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에서 복무할 것을 요청했지만, 조지 3세가 동의했음에도 프리드리히 2세가 거절했다. 이후 제1보병근위대 연대로 전속되었으며, 1793년 10월 18일 야전 원수가 되었다. 1796년에 북부 지구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1802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780년 공작은 왕립 학회 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의료 및 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1797년에는 노리치 외과 의사 필립 메도스 마르티노를 조지 타운젠드 제1대 타운젠드 후작의 저택인 레인햄 홀에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의 사촌은 토머스 타운젠드 제1대 시드니 자작이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시드니가 명명되었다. 마르티노의 사촌인 데이비드 블랙번 중위 (1753–1795)는 제1함대의 선박인 HMS 서플라이의 선장으로서 시드니 만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키스와 마르티노는 모두 휘그당이었으며, 당시 노퍽의 국왕 대리였다. 1825년, 윌리엄 비치 경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마르티노와 공작의 초상화를 전시했다.
1782년, 공작에게는 사생아 루이자 마리아 라 코스트가 태어났다. 그녀는 나중에 고드프리 맥도날드 제3대 맥도날드 남작과 결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공작의 정부인 레이디 알메리아 카펜터였으며, 조지 카펜터 제1대 티르코넬 백작의 딸이었다.
공작은 1805년 런던의 글로스터 하우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윌리엄 프레데릭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에 묻혔다.
4. 작위, 칭호, 영예 및 문장
윌리엄 왕자는 1762년 가터 훈장을 받았고, 1764년에는 형 조지 3세로부터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작위를 받았다. 추밀원의 일원이었으며, 왕립 학회 회원이었다.
윌리엄은 왕국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은색의 다섯 잎 표식, 가운데에는 푸른 백합, 나머지 잎에는 붉은 십자가"로 구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