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경록
1. 개요
금경록은 고려 시대에 편찬 및 증수된 역사서로,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려는 동아시아 역사관을 반영한다. 충선왕 시기 처음 등장하여, 충렬왕 대에 증수되었으며, 원 간섭기에는 내용이 개편되었다. 공민왕 대에도 증수가 이루어져 정도전의 《고려국사》 편찬에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제현의 《해동금경록》 존재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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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학 -
한국사의 시대 구분
한국사의 시대 구분은 역사적 흐름과 사회 변화에 따라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으로 나뉘지만, 시대 구분 기준과 명칭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와 논쟁이 존재한다. -
한국의 책 -
주영편
《주영편》은 정동유가 저술한 책으로, 지리, 건축, 역사, 훈민정음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사례 분석 등을 담고, 조선의 기술 수준과 사회 문제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
한국의 책 -
딱지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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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책 -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역사, 신화, 설화, 불교 관련 기록 등을 담고 있으며,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단군 신화, 향가, 불교 설화 등이 기록되어 국어 국문학 및 불교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고려 후기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하려는 일연의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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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 김부식이 1145년에 완성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 삼국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 중심적인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2. 금경록의 등장 배경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감계(鑑戒), 즉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중국 고대 이래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역사관이었다. 이러한 역사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이 북송 시대의 《자치통감》이다. '금경록'이라는 명칭은 중국 당 현종 때 장구령이 현종의 천추절을 맞아 지어 바쳤다는 《천추금경록》(천추금감록이라고도 함)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금경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충선왕 복위년(1308년) 원에 하정사로 들어가는 평리(評理) 조련(趙璉)에게 충선왕이 왕명으로 《세대편년절요》와 《금경록》을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이다. 《고려사》에는 정가신이 《금경록》(천추금경록)을 썼고, 충렬왕이 민지에게 이 책을 증수하게 하였으나, 당시 나라에 변고가 많아 완성하지 못했다가 후에 권보와 함께 교열, 찬술하여 《세대편년절요》(전7권)로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가신이 저술한 《금경록》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경록》 증수, 개찬의 표면적 이유는 빠진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었지만, 고려가 원을 의식해서 혹은 원의 압력에 의해 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내용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당시 원은 고려에 역대 국왕들의 사적 및 중국 왕조에 조공한 기간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바치도록 요구했고, 충렬왕은 오양우에게 원에 바칠 《국사》(國史) 편찬을 명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역대 고려 왕실의 실록 185책을 원에 보내기도 했다(이 실록은 충선왕 4년(1312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고종 및 원종의 실록도 원에서 보낸 시호에 맞춰 《충헌왕실록》과 《충경왕실록》으로 개찬되었는데, 이 역시 원의 간섭에 의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금경록》을 《세대편찬절요》로 개찬한 것은 원의 압력보다는 고려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공민왕 20년(1371년)에는 왕명으로 이인복, 이색 등에게 《본조금경록》을 증수하게 하였는데, 이 책은 정도전이 《고려국사》를 저술하는데 직접적인 기본 자료로 쓰였다.
정총의 '고려국사서'에는 이색, 이인복이 증수한 《금경록》(본조금경록)은 태조에서 정왕까지를 다루었으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정가신과 민지의 《금경록》 편찬 및 증수에 대해 왕이 증수를 명한 것은 후세에 본받을 만한 일이라 호평하며, 그 책들이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은 문헌을 숭상하지 않은 탓이라며 탄식했다.
2.1. 동아시아 역사관과 《자치통감》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중국 고대 이래 동아시아 전체에 널리 퍼진 역사관이다. 이러한 의식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이 바로 북송 시대의 《자치통감》이다. 《금경록》이라는 책 제목은 이미 중국 당 현종 때 장구령이 현종의 천추절을 맞아 《천추금경록》(천추금감록이라고도 함) 10권을 지어 바쳤다고 전해지는 데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2. 《천추금경록》의 영향
당 현종 때 장구령이 현종의 천추절을 맞아 《천추금경록》(천추금감록이라고도 함) 10권을 지어 바쳤다고 전해지는데, 《금경록》 제목은 해당 책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3. 금경록의 편찬과 증수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거울'에 비유하는 역사관은 중국 고대 이래 동아시아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이 북송 시대의 《자치통감》이다. 《금경록》이라는 책 제목은 당 현종 때 장구령이 지은 《천추금경록》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1371년(공민왕 20년) 왕명으로 이인복, 이색 등이 《본조금경록》을 증수하였는데, 이 책은 정도전이 《고려국사》를 저술하는데 직접적인 기본 자료로 쓰였다. 정총의 '고려국사서'에는 이색, 이인복이 증수한 《금경록》(본조금경록)은 태조에서 정왕까지를 다루었으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정가신과 민지의 《금경록》 편찬 및 증수에 대해, 비록 개인이 사적으로 지은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왕이 증수를 명한 것은 후세에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호평하였다. 또한, 그 책들이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문헌을 숭상하지 않은 결과라고 탄식하였다.
3.1. 초기 금경록
《금경록》이라는 책 제목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충선왕 복위년(1308년) 원에 하정사로 들어가는 평리(評理) 조련에게 충선왕이 왕명으로 《세대편년절요》와 《금경록》을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이다.
《고려사》 정가신열전과 민지열전에는 정가신이 《금경록》(천추금경록)을 편찬하였고, 충렬왕이 이 《천추금경록》을 민지에게 명하여 증수하게 하였는데, 당시 나라에 변고가 많았던 까닭에 그것을 완성할 겨를이 없었다가 후에 권보와 함께 교열을 보고 찬술하여 《세대편년절요》(전7권)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정가신이 저술한 《금경록》(천추금경록)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2. 충렬왕 대의 증수
충렬왕은 민지에게 《천추금경록》 증수를 명했으나, 당시 잦은 변고로 인해 완성하지 못했다. 훗날 민지는 권보와 함께 교열 및 찬술하여 《세대편년절요》(전7권)로 완성하였다. 정가신이 저술한 《천추금경록》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경록》 증수 및 개찬의 표면적 이유는 빠진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었지만, 고려가 원을 의식했거나 원의 압력으로 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내용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충렬왕 4년(1278년) 원의 중서성(中書省)은 고려에 역대 국왕들의 사적 및 중국 왕조에 조공한 기간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바치도록 요구했고, 충렬왕은 재위 12년(1286년) 오양우에게 원에 바칠 《국사》(國史) 편찬을 명하기도 했다. 또한 충렬왕 33년(1307년)에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역대 왕실 실록 185책을 원에 보냈는데, 이 실록들은 충선왕 4년(1312년)에 고려로 반환되었다.
3.3. 원 간섭기의 개찬
충선왕 복위년(1308년) 원에 하정사로 들어가는 평리(評理) 조련(趙璉)에게 충선왕이 왕명으로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금경록》(金鏡錄)을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는 데에서 《금경록》이라는 책 제목이 처음 등장한다. 《금경록》의 증수, 개찬에 대해 표면적인 이유는 빠진 것을 보충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노우에 히데오나 김상현은 고려가 원을 의식해서 혹은 원의 압력에 의해 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내용을 보정 및 개편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충렬왕 4년(1278년) 원의 중서성(中書省)은 국사원(國史院)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역대 고려 국왕들의 사적 및 중국 왕조에 조공한 기간, 사신의 명목, 국왕의 친조 연월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바치도록 고려에 요구했고, 충렬왕 12년(1286년) 직사관(直史館) 오양우(吳良遇)에게 원에 바칠 《국사》(國史)의 편찬을 명하는가 하면, 33년(1307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역대 고려 왕실의 실록 185책을 원에 보내기까지 했다(이 선대실록 185책은 충선왕 4년(1312년)에 다시 고려로 송환되었다). 고종 및 원종의 실록도 원에서 보낸 시호에 맞춰 《충헌왕실록》과 《충경왕실록》으로 개찬되었는데, 이는 원의 간섭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금경록》을 《세대편년절요》로 개찬한 것은 원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려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3.4. 공민왕 대의 증수
1371년(공민왕 20년) 왕명으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지춘추관사(知春秋舘事) 이색 등이 《본조금경록》을 증수하였는데, 이 책은 정도전이 《고려국사》를 저술하는데 직접적인 기본 자료로 쓰였다.
정총의 '고려국사서'에는 이색, 이인복이 증수한 《금경록》(본조금경록)은 태조에서 정왕까지를 다루었으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4. 《금경록》에 대한 평가
조선 후기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정가신과 민지의 《금경록》 편찬 및 증수에 대해, 개인이 사적으로 지은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왕이 그 책을 증수할 것을 명한 것은 후세에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호평했다. 또한 그 책들이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문헌을 숭상하지 않은 소치라며 탄식했다.
이색, 이인복이 증수한 《금경록》(본조금경록)에 대해 정총은 '고려국사서'에서 태조에서 정왕(靖王)까지를 다루었으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였다고 평했다.
5. 이제현의 해동금경록
조선 중기 이수광의 《지봉유설》 및 김노응의 《익재선생연보》에 따르면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제현도 《금경록》(해동금경록)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이마니시 류는 이인복과 이색 등이 증수한 것을 착각하였다고 부정하였고, 한국의 사학자 변태섭도 이수광의 지적에 대해 정말 이제현의 저술인지 아니면 이제현이 지었다는 사략(史略)을 가리킨 것인지, 이마니시의 지적처럼 《본조금경록》을 착각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등 이제현의 저술 《해동금경록》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국사관논총》 제55집 '高麗後期 性理學 受容에 關한 硏究' Ⅳ. 性理學의 受容 2. 李齊賢의 歷史認識(이원명 집필) 및 같은 책 제71집 高麗時代의 書籍刊行 〈附錄〉高麗의 逸書目錄(허흥식 집필)에서는 이제현의 저술로 《금경록》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