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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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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도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1342년에 태어나 영주에서 성장했으며, 이색에게 학문을 배우고 정몽주와 교류하며 개혁 사상을 키웠다. 고려 말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조선 건국에 기여했으며, 조선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 저술을 통해 국가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왕권 중심의 정치를 견제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으나,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으며, 재평가를 통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이색, 정몽주 등 많은 친구들에게 반감을 샀으며, 일각에서는 그가 저술한 책이 표절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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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도전 동상
충청북도 단양군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
한글정도전
한자鄭道傳
히라가나てい どうでん
가타카나チョン・ドジョン
로마자 표기Chong Do-jon
별칭삼봉(호)
종지(자)
문헌(시호)
봉화백(작위)
해동장량(별칭)
출생과 사망
출생일1342년 10월 6일
출생지고려 양광도 단양 (現 대한민국 충청북도 단양군)
사망일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향년 56세)
사망지조선 한성부 의성군 남은 사가
정치 경력
국가조선
직책판삼사사
군주조선 태조 이단
섭정문하정승 조준(前)
임기1393년 9월 26일 ~ 1398년 8월 26일
국가2고려
직책2전교시주부
군주2고려 공민왕 왕기
섭정2고려 덕흥군 왕혜(前)
임기21363년 5월 11일 ~ 1364년 8월 11일
학력
학력1360년 진사시 합격
1362년 문과 급제
기타 정보
직업문관, 유학자, 사상가, 정치인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경숙택주 경주 최씨(최습의 딸)
자녀슬하 3남
장남정진
차남정영
삼남정유
부모정운경(부)
영주 우씨 부인(모)
친인척정균(할아버지)
우연(외조부)
황유정(매제)
최습(장인)
형제정도존(아우)
정도복(아우)
정당무소속

2. 생애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태어났으며, 1347년부터 1348년까지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의 딸이다.

고려 시대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이성계,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서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일부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졌다.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이다. 조선 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배격되었고, 태종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으나 고종 때 복권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여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1]

'''본가 봉화 정씨(奉化 鄭氏)'''

관계이름
고조부봉화도장 호부령 정공미(奉华道政呼符令 鄭公美) 봉화 정씨 시조
고조모안동 최씨(安東 崔氏)
증조부비서랑 동정 정영찬(秘書郞同正 鄭英粲)
증조모경주 이씨(慶州 李氏)
조부검교 군기감 정균(檢校軍器監 鄭均)
조모진양 하씨(晋陽 河氏)
아버지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년 ~ 1366년)
외조부영주우씨 산원(散員) 우연(禹淵)
어머니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여동생봉화 정씨
매부황유정(黃有定, 1343년 ~ 1421년)
동생정도존(鄭道存, ? ~ 1398)
동생정도복(鄭道復, 1351년 ~ 1435년)
처부찬성(贊城) 최습(崔濕)
부인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
장남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刑曹判書 贈 右贊成 僖節公 鄭津, 1361년 ~ 1427년)
손자정래(鄭來)
손자정속(鄭束)
차남정영(鄭泳 ? ~ 1398년)
아들정유(鄭游 ? ~ 1398년)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충숙왕 치세에 관직에 임명된 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한 관료였으며, 1359년 형부상서에 임명되었다.[1] 정도전의 고향인 단산에는 그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정운경은 점쟁이로부터 10년 후에 결혼하면 태어날 아이가 재상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정운경은 그 예언을 믿고 10년간 금강산에서 수양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비를 만나 도담삼봉의 초가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씨 소녀를 만나 결혼했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도전이라고 한다.[1]

2. 2. 수학과 청년기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독서를 즐겼다. 영주와 양주 삼각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 관직으로 옮기면서 개경으로 이주했다.

정운경은 이곡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도전은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 대사성 이색을 만나 성리학을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11]
포은 정몽주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학문적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조선 건국에 대한 의견 차이로 정적이 되었다.


유년기에 정도전은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에게서 기초 학문을 배웠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360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며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했지만, 부패한 사회 현실을 보면서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때 정도전과 함께 공부한 동료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의중, 설장수, 박상충, 이숭인, 하륜,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뛰어났다.

이색이제현, 백이정, 권보, 안향의 학통을 이었으며, 그의 학문은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 대표적 성리학자들에게 이어졌다.[12]

당시 정도전은 권문세족의 전횡뿐만 아니라 불교가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았다.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백성들이 불교에 귀의함으로 인한 조세 수입 감소와 부역 징발 부재는 국가 경영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는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사후세계를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공자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대성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정몽주에게서 유교 경전과 성리학, 시를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13] 또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이야기했고, 정몽주는 이에 깊이 공감하며 협력하였다.[14][15]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이자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훗날 조선 개국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적이 되었다.

2. 3.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360년 (공민왕 9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고,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았다. 1365년 공민왕신돈을 기용하자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366년 1월과 12월에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우 씨가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70년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성균관 경내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고 그해 목은 이색대사성이 되자, 1370년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 등용되었다.[16]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11] 이때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1375년 권신 이인임 등의 친원반명 정책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 중 맹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77년 유배 생활이 끝나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 종사했으며, 1383년 이성계(후의 태조)의 막료가 되었다. 이때 동북면(현재의 함경도)의 이성계를 찾아 그의 군세를 보고 "훌륭한 군세입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놀란 이성계가 "그 무엇이란?"이라고 묻자, 정도전은 모르는 척하며 "동남쪽의 왜구를 격퇴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위화도 회군을 거쳐 1389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으로 봉해졌으나, 1391년 다시 유배되었다. 1392년 석방되었으나, 그해 4월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부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배후 세력인 이성계가 요양 중인 틈을 타 정몽주 등이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확실하지 않다"(정도전의 어머니는 노비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라고 탄핵하여, 세 번째 유배되었다. 이방원(후의 태종)이 정몽주를 암살하자 석방되어, 같은 해 7월 17일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2. 4. 조선 건국과 개혁 정치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이성계,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19] 1392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일부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1391년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19]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우현보 등을 신우와 신창(우왕과 창왕)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그들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20]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상소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4월 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6월 10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거쳐 1389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으로 봉해졌으나, 1391년 다시 유배되었다. 1392년 석방되었으나, 같은 해 4월 이성계가 유렵 중에 낙마하여 부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배후 세력인 이성계가 요양 중인 틈을 타 정몽주 등이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확실하지 않다"라고 탄핵하여 세 번째 유배되었다. 이방원 (후의 태종)이 정몽주를 암살하자 석방되어, 같은 해 7월 17일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조선 건국 직후, 모든 권한은 정도전에게 집중되었다. 그 권력은 국왕인 태조를 능가한다고까지 말해질 정도였다. 그는 개국 일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문하 시랑 찬성사, 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 판상서사사, 보문각 태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판의흥삼군부사 등, 거의 모든 요직을 겸직하거나 역임했다. 한성 천도 이후, 궁궐과 종묘의 위치와 칭호, 문의 칭호를 정하고,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법제 등의 기초를 만들었다.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군사적으로는 "의흥삼군부"의 사령관으로서 군제를 개혁하고, 고려 후기에 거의 사병화된 군대를 단계적으로 혁파하여 귀속시켰다. 또한 진법을 새로 만들어, 군사들에게 엄격하게 철저히 숙지하도록 했다. 이러한 군사 정책은 건국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단기적으로는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유사시에 명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2. 5. 정변과 최후

1392년 건국 직후부터 정도전은 요동 정벌(1392)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 정벌을 위해 각 지역의 왕실 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없애고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키려던 이방원은 고려 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노렸다. 이방원은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시켜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1396년(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96년 7월 27일 봉화백에 봉해졌다. 1397년(태조 6년)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는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정도전을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 지적하고, 조선 조정에 정도전을 해임하고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위해 왕족들과 지배층으로부터 몰수한 사병을 신설된 의흥삼군부에 병합하고 진도(陳圖)에 따라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과 요동 정벌 준비는 조준 등의 반발을 일으켜 그와 결별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4월 요동정벌 계획을 명나라에 누설한 설장수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정도전은 확보한 병력으로 남은(南誾)과 함께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軍官)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같은 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 초 정도전은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이방원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사병을 이끌고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한다.[27]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이방원과 대립했다.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정도전이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씌워 정도전을 살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의 입장에서 조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봉집》에는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겼다.

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 조카 정담(鄭澹)은 부친과 숙부를 구하러 달려가다 살해되고, 조카 정기(鄭淇)는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맏아들 정진은 당시 태조의 안변군 석왕사 삼성재(三聖齋)발원을 위한 밀접 수행 중이었으므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3. 사상과 신념

정도전은 유년기에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에게서 기초 학문을, 개경의 이제현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 이색과 교류하며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화했다.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주목했으나, 부패한 사회를 보며 성선설에는 회의를 품었다.

권문세족의 전횡과 더불어 불교가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한다고 보았다. 사원경제 팽창과 타락, 백성들의 불교 귀의로 인한 조세 수입 감소와 부역 징발 부재 등 국가 경영 위기를 그 이유로 들었다. 개인의 삶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사후세계를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공자의 의견에 동조, 불교 비판을 《불씨잡변》으로 집대성했다.

동문인 정몽주에게서 성리학과 유교 경전, 시를 배우며 영향을 받았고,[13],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 해방을 주장하여 정몽주의 공감을 얻었다.[14][15] 조선 개국을 계기로 정적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건설이라는 사상적 동지였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 기자가 주 무왕에게서 조선 제후로 봉해졌다고 칭송하며, 주나라를 모델로 한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그는 주 왕조를 뛰어넘는 유교 정치와 제도를 구축하고자 했다.[6]

3. 1. 경세론

정도전의 경세론은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 《경제문감별집》 등에 나타나 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책으로, 여러 나라와 시대의 법령 및 규정을 참고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주례》에서는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 과거 제도, 병농일치적 군사 제도의 정신을 가져왔고, 한(漢)과 당(唐)의 제도에서는 부병제, 군현제(수령제), 부세제, 서리제의 장점을 수용했다.[26] 명나라의 《대명률》도 참고했다.

정도전은 고려 말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던 현실을 극복하고자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등 분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를 위해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 재분배,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 확립, 그리고 공업, 상업, 소금, 광물, 산림, 수리 시설 등을 국가가 경영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6]

정도전의 경세론은 자작농을 광범위하게 육성하고 산업을 국가가 운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능력에 기반을 둔 사(士) 중심의 관료 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 법제화되었지만, 모든 계획이 실현되지는 못했다.[26]

3. 2. 정치론과 인재 채용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했다. 이는 현대의 영국식 입헌 군주제와 유사한 형태이다. 또한 감찰(사헌부)의 탄핵권을 강조하고 간관(뒷날 사간원)의 권리를 국왕과 대등하게 설정했다. 고려 정치 제도에서 어사대(사헌부)는 독립된 기구였지만 낭사(사간원)는 중서문하성 산하 기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간쟁 기구를 왕과 대등한 위치에 놓은 정도전의 사상은 조선 정치 체제의 중요한 특징인 전제 왕권 통제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26]

또한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26] 그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의 사례를 제시한 후, 패도 정치를 하는 군주는 역성혁명이나 기타 수단에 의해 폐위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존재를 역설하여 군왕은 군자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수행해나가야 된다고 보았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26] 그의 재상 중심, 신권 중심의 정치이론은 후일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부활된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라 한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26]

3. 3. 불교 배척과 비판

정도전은 고려의 불교 세력이 귀족과 결탁하여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의 불교를 비판하고 불교 세력의 억제를 꾀했다. 불씨잡변에서는 윤회전생 등 불교의 교리를 미신으로 단정하고 논파했으며, 소연 등 불교에 빠져 멸망한 중국의 왕조와 황제의 고사를 인용하며 정치가가 종교에 몰두해서는 안 되며,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이러한 숭유억불 정책은 불교도였던 이성계가 아닌, 태종 이방원의 손으로 실현되었고, 조선에서 승려는 천한 신분으로 여겨져 한양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많은 사찰이 사라졌다.

그러나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지어 신랄한 불교 비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를 짓거나 승려들과 교류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三峯集중국어 제 2권 遊山寺중국어 와 三峯集중국어 제2권 寄贈柏庭禪중국어, 訪古軒和尙途中중국어, 三峯集중국어 제3권 序중국어 送華嚴宗師友雲詩序중국어 글들이 좋은 예이다.

4. 평가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한 인물이기도 하다. 태종은 정몽주를 의도적으로 띄워 정도전을 폄하했고, 그 결과 오랫동안 변절자나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여겨졌다.[28] 신숙주는 정도전 사후 그의 죽음은 운명이지만, 건국 공로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정도전을 비판했고, 이러한 인식은 그대로 굳어졌다.

정도전은 성격이 급하고 부드러움이 부족하여 뛰어난 재능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 관련 도망자의 이름을 알 수 없자, 관청에서는 일부러 그 도망자의 이름을 삼봉이라 지어 조롱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허균은 정도전의 시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역모로 몰려 처형당했다. 서인 성리학자 송시열은 정도전을 언급할 때마다 반드시 '간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30]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큰 적대감을 보인 인물은 송시열이었다.[31]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여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4. 1. 긍정적 평가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졌다.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 이름을 직접 짓기도 했다.[26] 그는 성리학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고 국교화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이 정치의 실권을 가지고 위로는 임금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을 다스리는 "재상의 나라"를 꿈꿨다. 이는 현대의 영국식 입헌 군주제와 유사한 개념이다. 또한, 감찰(사헌부)의 탄핵권과 간관(사간원)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 견제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경세론은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 등에 나타나 있다. 《조선경국전》은 《주례》, 한당(漢唐)의 제도, 명나라의 《대명률》 등을 참고하여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했다.[26] 그는 농업 생산력 증대와 토지 균분에 관심을 가지고, 토지 재분배, 공전제, 10분의 1세 확립, 산업의 국가 경영 등을 주장했다.[26]

정도전은 어리석은 임금이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재상 정치)를 꿈꿨으나,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묘는 실전되었으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가묘가 있다.

정적들에 의해 변절자나 모사가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신숙주는 건국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 관련자를 삼봉이라 조롱하기도 했고, 광해군 때 허균은 그의 시문을 애호했다는 이유로 역모로 몰리기도 했다. 정조 때 《삼봉집》 재간행을 계기로 복권 여론이 나타났고, 서인 송시열은 '간신'이라 칭했다.[30][31]

1865년 고종 때 공신 칭호를 회복하고 경복궁 중건 공로를 인정받아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불천지위에 추대되었고, 1872년 위패가 봉안되었다.[33] 1873년 남인 인사들이 복권 상소를 올렸고, 최익현, 김평묵의 반대에도 고종이 복권을 강행했다.

1960년박정희 정부에서 정몽주를 추상하며 폄하되기도 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2003년2007년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34]

정도전의 신권정치는 독일식 총리제, 영국식 수상제 등과 유사하며, 그의 정전제조봉암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5][36][37]

1791년 정조가 『삼봉집』을 재간행했고, 1865년 흥선대원군경복궁 중건을 계기로 훈작을 회복시키고, 1870년 시호를 내렸다. 정적들도 그의 업적을 인정했으며, 아들 정진은 『삼봉집』을 묶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조선의 설계자라고 칭하며,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

4. 2. 부정적 평가

정도전은 임금이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은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재상 정치)를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에게 눈엣가시로 찍혔다.[27]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승자인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2]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고, 정도전은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28]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 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2]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 가담자 중 도피자 이름을 알 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역모로 몰려 사형당했다. 서인 성리학자 송시열은 정도전을 언급할 때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30]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31]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가혹한 면이 있어, 유교 가르침에 거스르는 자나 이단으로 간주한 인물은 용서하지 않고 처단했다. 그의 개혁은 스승인 이색이나 사제인 이숭인 등 많은 친구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정도전은 이들조차 용서없이 숙청했고, 이숭인은 정도전에게 살해당했으며, 이색도 뜻밖의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한때 은사였던 이색에 대한 처우는 끔찍했는데, 조정에서 이색을 섬으로 유배 보내는 안건이 나오자, 정도전은 이색의 유배지를 어떤 무인도로 하려 했다. 관리가 "그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라며 난색을 표하자, 정도전은 "그러니까 그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곧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다"라고 끔찍한 말을 했지만, 이색의 유배지가 다른 곳으로 결정되어 정도전의 계획은 좌절되었다.[2] 또한, 한 번 미워하게 된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정도전의 어머니 우씨의 어머니는 노예와 승려의 밀통으로 태어난 비천한 신분이었다. 사대부 우현보는 그 우씨의 일족이었고,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자신의 출생을 아는 우현보가 이를 소문냈다고 여겨 그를 원망하여, 우현보의 아들 셋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곡필이 많은 태종실록의 기록이며, 우현보는 정도전의 정적인 정몽주나 이방원 측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므로 섣불리 믿을 수 없다. 어쨌든 그의 성격이 가혹했다는 것은 사실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함께 죽은 동지 남은조차도 "도전은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서 죽은 것이다"라고 말했다.[2]

죽기 직전,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땅을 기어 다니면서 추하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깨끗했던 그의 사세(辭世)와 "단검을 숨기고 있었다"는 동 기록의 내용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아, [2]

겉모습을 꾸미지 않는 대충하는 면도 있었는데, 어느 날은 한쪽 발은 흰 신발을, 다른 쪽 발은 검은 신발을 신고 그대로 말을 타고 궁궐로 향했다. 그런 차림새의 그를 관리가 막고 살짝 알리자, 정도전은 웃으며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보이고,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보일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7]

4. 3. 논란과 의혹

정도전은 여러 논란과 의혹의 대상이었다.

  • 《경제문감》 표절 의혹: 그의 저서 《경제문감(經濟文鑑)》(1395)이 남송 시대의 저작인 《주례정의(周禮訂義)》, 《산당고색(山堂考索)》, 《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상당 부분 베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8] 송재혁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원은 정도전이 《경제문감》뿐만 아니라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별집》도 중국 송나라, 원나라 시대의 많은 자료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포함시켰음을 밝혀냈다.

  • 무고한 고려 측 인물 탄압: 스승인 이색을 비롯한 수많은 무고한 고려 측 인물들을 죄인으로 몰아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이방원과의 갈등 및 최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이방원과 대립했으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이방원 측에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2]삼봉집》에는 죽기 직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 가혹한 성격: 타협을 용납하지 않고 유교에 어긋나거나 이단으로 간주한 인물은 용서하지 않았다. 스승 이색이나 사제 이숭인 등 많은 친구들을 숙청했다.[2] 특히 이색에 대한 처우는 끔찍했는데, 이색을 무인도로 유배 보내려 했으나 다른 곳으로 결정되어 좌절되었다.[2]

  • 출신 관련 의혹: 어머니 우씨의 어머니가 노예와 승려의 밀통으로 태어난 비천한 신분이었기에, 정도전은 자신의 출생을 아는 우현보를 원망하여 그의 아들 셋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태종실록의 기록이며, 우현보는 정몽주나 이방원 측 인물이므로 섣불리 믿을 수 없다.[2]

  • 정몽주와의 관계: 정몽주와는 학창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으나, 고려 왕조를 두고 대립하는 정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출신을 이유로 숙청하려 했지만, 이방원에게 암살당했다.[8]

  • 신권정치 옹호: 정도전의 신권정치(재상 중심의 정치)는 조봉암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판 토지 뉴딜(New Deal)정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5][36][37]

  • 조선 왕조의 평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역적으로 처리되었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그러나 정몽주와 달리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은 대부분 남아있고, 동문선에 그의 글이 수록되는 등 조선 시대에도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태종은 정도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9]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고조부봉화도장 호부령 정공미(奉华道政呼符令 鄭公美)
고조모안동 최씨(安東 崔氏)
증조부비서랑 동정 정영찬(秘書郞同正 鄭英粲)
증조모경주 이씨(慶州 李氏)
조부검교 군기감 정균(檢校軍器監 鄭均)
조모진양 하씨(晋陽 河氏)
아버지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년 ~ 1366년)
외조부영주우씨 산원(散員) 우연(禹淵)
어머니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여동생봉화 정씨
매부황유정(黃有定, 1343년 ~ 1421년)
동생정도존(鄭道存, ? ~ 1398)
동생정도복(鄭道復, 1351년 ~ 1435년)
처부찬성(贊城) 최습(崔濕)
부인경숙택주 경주 최씨(慶州 崔氏)
장남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刑曹判書 贈 右贊成 僖節公 鄭津, 1361년 ~ 1427년)
손자정래(鄭來)
손자정속(鄭束)
차남정영(鄭泳, ? ~ 1398년)
아들정유(鄭游, ? ~ 1398년)


6. 저서


  • 삼봉집》(三峯集)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경제문감》(經濟文鑑)
  • 《경제의론》(經濟議論)
  • 불씨잡변》(佛氏雜辨)
  • 《심문천답》(心問天答)
  • 《심기리》(心氣理)
  •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 《진맥도결》(診脈圖結)
  •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
  • 《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
  • 《진법》(陣法)
  • 《고려국사》 (공저)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7. 작품


  •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
  •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
  • 《강무도》(講武圖)
  • 〈궁수분곡〉(窮獸奮曲)
  • 〈납씨가〉(納氏歌)
  • 〈정동방곡〉(靖東方曲)
  • 〈문덕곡〉(文德曲)
  • 신도가〉(新都歌) 등

8. 관련 인물

이름관계비고
정몽주동료, 정적이색의 문하 동문이자 학문적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조선 왕조 개국에 대한 의견 차이로 정적이 됨.
공민왕, 우왕, 창왕고려 국왕
김속명, 이인임, 염흥방
이색스승이제현,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
이제현스승의 스승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
안향스승의 스승의 스승
이성계조선 국왕, 역성혁명 동지
정종, 이방원조선 국왕이방원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을 살해.
의안대군, 무안대군, 회안대군왕자
김종서, 신숙주
영조, 정조조선 국왕
배극렴, 염제신, 정희계, 조준, 남은, 남재동료
무학대사
길재, 권근, 심효생, 이화, 이거이, 조영무, 차원부, 하륜, 함부림, 황유정



정도전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가혹한 면이 있었다.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이단으로 간주한 인물은 용서하지 않고 처단했다. 그의 개혁은 스승인 이색이나 사제인 이숭인 등 많은 친구들에게 반감을 샀다. 정도전은 이들조차 용서없이 숙청했고, 이숭인은 정도전에게 살해당했으며, 이색도 뜻밖의 죽음을 맞이했다.[2]

8. 1. 고려 인물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독서를 즐겼다. 유년기는 영주와 양주 삼각산에서 보냈고,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 관직으로 옮기면서 개경으로 이주했다.

정운경은 이곡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도전은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 대사성이자 성균박사였던 이색을 만나 성리학을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게 되었다.[11]

이색


유년기에 정도전은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학문을 배우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으나, 부패한 사회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의중, 설장수, 박상충, 이숭인(5년 연하), 하륜(5년 연하), 권근(10년 연하)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 이색이제현,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다. 이제현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12]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12]

당시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가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았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백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 인한 조세 수입 궁핍과 부역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 경영 존립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여,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였다.

정도전은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정몽주에게서 유교 경전들과 성리학, 시들을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13] 또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이야기했고, 정몽주는 이에 깊이 공감하였다.[14][15]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서, 청소년기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사상을 품고 협력하였으나, 조선 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8. 2. 조선 인물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다. 고려 말 성균관 등에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역성혁명론자가 되었고, 1392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일부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졌다.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과 제2차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사병 혁파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조선 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배격되었고,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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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서 『太祖実録』巻14
[3] 문서 『[[朝鮮経国典]]』賦典、経理
[4] 문서 『三峰集』田夫に答える、錦南野人
[5] 문서 『仏氏雑弁』
[6] 서적 政治家宋時烈の研究 東北大学 2014-03-26
[7] 문서 『筆苑雑記』
[8] 문서 『三峰集』
[9] 문서 奉化伯
[10] 문서 정도전의 출생 연도가 1337년이라는 설과 1342년이라는 설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에 따라 1342년으로 보는게 정설이다. 또는 [[1337년]]
[11] 뉴스 '숭례문 예언' 정도전은 누구인가? http://www.consumern[...]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2008-05-05
[12]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3] 문서 삼봉집 제3권 / 서(序) 포은의 봉사고 서 병인 [圃隱奉使藁序 丙寅] 심지어 여기서 정도전은 정몽주에 비해 학식과 인품이 비천하고 졸렬하다라고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또 삼봉집 제1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제공의 시에 차운하다[次諸公韻] 시에서는 정몽주가 우리나라 도덕과 문장의 으뜸이라고 다시 극찬을 하기도 했다.
[14] 문서 실제로 정몽주의 정치적 활동은 이색보다 정도전과 가까웠다.
[15] 문서 정몽주가 정도전에게서 부패사회 개혁과 농민해방의 사상을 배웠다는 정확한 근거자료가 요구됨.
[16] 문서 정도전이 신돈의 전횡에 스스로 낙향했다는 이야기의 정확한 출처가 요구됨
[17] 문서 정도전이 우왕 초에 토지 개혁과 불교 배척을 주장했다는 이야기의 정확한 출처가 요구됨.
[18] 서적 조선의 킹메이커 역사의 아침 2008
[19] 서적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평단문화사 2009-03-11
[20]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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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뉴스 피플[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8> 한양정도와 정도전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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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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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문서 태조실록 (1413)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8]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9] 문서 박기현, p.52
[30] 서적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조선 역사의 56가지 진실 혹은 거짓 21세기북스 2009
[31] 서적 정도전을 위한 변명 푸른역사 1997
[32] 뉴스 ::: 경인일보 ::: http://www.kiib.co.k[...]
[33] 문서 승정원일기 고종 9년 임신(1872년) 3월 23일자 기사
[34] 웹인용 ‘삼봉학’ 국내 넘어 국제무대로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http://www.hani.co.k[...] 2009-04-29
[35] 서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6] 서적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7
[37] 뉴스 애물단지 부동산, 이대로 가다간…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2-07-13
[38] 논문
[39] 간행물 곡정삼봉(哭鄭三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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