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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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수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실학의 선구자로, 1563년에 태어나 1628년에 사망했다. 그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의 아들이자 경녕군의 후손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서양 학문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지식을 조선에 알렸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인조반정 이후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이수광은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와 실용적인 외교 정책, 개방적인 자세를 강조하며, 실학 사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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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다카마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다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 세키가하라 전투 후 분고 사이키 번주가 되어 성 축조와 성하마을 건설을 추진하고 막부의 여러 공사에 참여했다. - 1628년 사망 - 히라노 나가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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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수광 |
원어명 | 李睟光 |
정당 | 남인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종교 | 유교(성리학, 실학) |
경력 | |
직책 | 이조좌랑 |
임기 | 1585년 ~ 1588년 |
직책2 | 성균관 전적 |
임기2 | 1588년 ~ 1589년 |
직책3 | 함경도 안변부사 |
임기3 | 1605년 ~ 1606년 |
군주 | |
군주 | 선조 이연 |
군주2 | 선조 이연 |
군주3 | 선조 이연 |
가족 | |
기타 |
2. 생애
이수광은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희검과 문화 유씨(文化 柳氏) 사이에서 1남 4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의 서자 경녕군 이비의 5대손으로, 왕족의 후손이자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중종 때의 청백리 정승 류관(柳寬)의 외증손이었다. 1585년(선조 18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겸 지제교(知製敎) 등을 지냈다. 1590년(선조 2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으나 용인에서 패하였다. 이후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밀양부사 박진이 일본군의 침략을 보고 밀양성을 불지르고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를 비판하였다. 그 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그해 정유재란이 끝났다. 같은 해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Phùng Khắc Khoan)과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며 시를 주고 받았다.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1611년(광해군 3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등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9]
1613년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 《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 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다. 1625년 (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으며,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1628년 (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
2. 1. 가계와 생애 초반
이수광은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희검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1남 4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의 서자로 효빈김씨(孝嬪金氏) 소생 경녕군 이비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모양군 직이고, 증조부는 선사군이며 증조부 선사군은 할아버지 하동군 이유와 양 할아버지 신당군 이정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신당군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하동군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인 이희검이 신당군의 양자가 되었다.왕족의 후손이자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중종 때의 청백리 정승 류관(柳寬)의 외증손이었다. 류관은 정승의 신분임에도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고사가 전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희검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다.
이수광은 어려서 한성부 동대문 근처에 살았고 17세에 아버지 이희검을 여의었다. 그는 붕당에 거리를 두고 당색에는 초연하였으나, 훗날 그의 제자들과 그의 아들 이민구의 제자들은 대체로 남인과 북인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2. 2. 과거 급제와 임진왜란
1585년(선조 18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겸 지제교(知製敎), 병조좌랑 겸 지제교를 지냈다. 1590년(선조 2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음력 6월 23일 수찬에 임명되었다.[4]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에서 패하였다. 이후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밀양부사 박진이 일본군의 침략을 보고 밀양성을 불지르고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를 비판하였다.
朴晉|박진중국어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5]
그 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해 의주로 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의주에 파천한 조정을 따라 활동하며 1593년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등 삼사의 언관직을 거쳐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역임했다.
2. 3. 관료 생활과 외교 활동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그해 정유재란이 끝났다.같은 해 진위사(陳慰使)[6]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Phùng Khắc Khoan)과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기록했다.[7]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돌아왔고, 병조참의를 거쳐 승정원도승지[8]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그해 12월 예조참판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5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유변(劉汴)의《속이담(續耳譚)》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9] (→조선의 대외 관계) 귀국 후에는 대사간·대사헌 등의 언관직(言官職)과 지방 행정직을 맡았다.
2. 4. 지봉유설 저술과 후반생
1613년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 《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 1614년 (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으나, 1618년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 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 (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625년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628년 (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
3. 주요 저서
4. 사상과 평가
이수광은 총민강기(聰敏强記)하여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실학의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1][12] 당대에 단아하고 염정하며, 문학에 재주가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13]
4. 1. 실학 사상
이수광은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 정신을 발휘하여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2] 그는 중국에서 주자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 체계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고,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처음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11]또한 조선 중, 후기로 가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권신, 재상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질타하며, 탐관오리를 탄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은 남달리 청빈해야 하며, 검소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1]
4. 2. 외교와 국제 감각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6]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에서 온 풍극관(Phùng Khắc Khoan)과 만났고,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기록했다.[7]1611년(광해군 3년)에는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劉汴|유변중국어의 《속이담(續耳譚)》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9] (→조선의 대외 관계)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 베트남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베트남에 관한 글을 쓴 이수광과 베트남에 다녀온 조완벽은 조선 사회에 베트남이라는 국가의 존재와 풍습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5. 기타
그는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했고 한학과 고전 지식도 밝았다. 또한 일본어와 베트남어 역시 구사하고 통역, 번역할 수 있었다.
참조
[1]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
2008-11-13
[2]
서적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3]
서적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
2007
[4]
선조실록
선조실록 1616
http://sillok.histor[...]
1616-06-23
[5]
선조실록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1592-06-28
[6]
문서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2011-10-12
[7]
서적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
2007
[8]
문서
승정원 승지들의 우두머리로 국왕의 비서실장격
[9]
서적
조선명인전 3
일빛
2005
[10]
웹사이트
선원록_태종자손록
http://royal.aks.ac.[...]
[11]
서적
조선의 선비
스타북스
2006
[12]
뉴스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7-02-10
[13]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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