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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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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정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역사학자로, 1712년에 태어나 1791년에 사망했다. 그는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여 경세치용 실학을 연구했으며,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조선 역사의 정통성을 기자에서 시작하여 고려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단군과 발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천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만년에는 세손(정조)의 교육을 담당했고, 광성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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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씨명안 鼎福
휘리 가나안·정보쿠
출생 년월일'1712년'
사망 년월일'1791년'
직업문신
실학자
개인 정보
한글안정복
한자安鼎福
히라가나안 테이후쿠
가타카나안·정보쿠
공직자 정보
원어명安鼎福
출생일'1712년 12월 25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제천
임기'1772년 2월 1일 ~ 1773년 3월 31일'
임기2'1773년 3월 31일 ~ 1778년 9월 30일'
사망일'1791년 7월 20일'
사망지조선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 (노환으로 병사)
직책조선국 중추원 통정대부 겸 첨지중추부사
직책2조선국 중추원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
군주조선 영조 이금
군주2조선 영조 이금
조선 정조 이산
섭정2왕세손 이산
도승지 홍국영
본관광주(廣州)
정당남인 후예 세력
별명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시호문숙(文肅)
작위광성군(廣成君)
학력한학 수학
경력문신
정치인
실학자
성리학자
철학자
종교유교
부모안극(부), 이씨 부인(모)
배우자창녕(昌寧) 성씨(成氏)
자녀아들 안경증, 딸 안씨 부인(권일신의 부인)
친인척권일신(사위)

2. 생애

제천 태생으로, 성호 이익의 주요 문인이었다. 스승 이익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학풍을 계승하여 경세치용의 실학을 연구하는 동시에 성리학자로서의 깊이도 갖추었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을 받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절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스승의 《성호사설》을 보완한 《성호사설유선》과 다양한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雜同散異)》 등을 저술했으며, 후자는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역사가로서 《동사강목》과 《계갑일록》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으며, 《동사강목》을 통해 독자적인 역사관을 제시하고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다.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노년에는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을 중용하는 정책이 펼쳐졌으나 스스로 관직에 나아가기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특별한 명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1790년 이후 남인 내부에 천주교가 확산되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후 천주교 비판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으로 추증되었다.

2. 1. 생애 초반

1712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광주 안씨는 본래 명망 높은 집안이었으나, 남인에 속하면서 점차 세력을 잃어 안정복이 태어날 무렵에는 몰락한 상태였다. 유년 시절에는 할아버지 안서우를 따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1736년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에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나 집안 형편과 할아버지의 잦은 임지 이동으로 정규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주로 스스로 학문을 익혔다. 경학뿐만 아니라 역사, 천문,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갑술환국 이후 남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안정복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하며 실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2. 1. 1. 출생과 가계

1712년 (숙종 38년) 12월 25일 충청북도 제천 유원(楡院)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를 지낸 안서우(安瑞雨)이고, 아버지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안극(安極)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익령(李益齡)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 안서우는 한성부 청파리(靑坡里)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1717년(숙종 43년) 외할머니상을 당하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영광군 월산(月山)의 농장으로 내려가 생활했다. 1719년 할아버지 안서우가 한성부에서 벼슬을 하게 되면서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이사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가문인 광주 안씨는 본래 덕흥대원군의 사위이자 선조의 매부였던 6대조 안황(安滉)이 호성공신으로 가선대부 돈녕부 도정을 지내고 사후 형조판서 겸 광양군(廣陽君)에 추증될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남인에 속하게 되면서 점차 세력을 잃었다. 안정복이 태어날 무렵에는 몰락한 남인 가문으로서 기호 지방을 오가며 가난하게 살았다. 고조부 안시성(安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안신행(安信行)은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을 지냈으며 사후 통훈대부 사복시정으로 추증되었다. 안시성의 다른 아들 안건행(安健行)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그의 아들인 할아버지 안서우는 백부 안신행의 양자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안서우는 예조참의까지 올랐으나 경신대출척과 갑술옥사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조부 안서우는 사후 예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안극은 종2품 오위도총부 부총관이었으나 명예직에 가까웠다. 아버지 안극은 사후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광평군(廣平君)에 추봉되었다.

어머니 전주이씨는 학문적 소양이 있는 여성이었다. 안정복은 훗날 어머니(사후 증 정부인 이씨)가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었다고 회고했다.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유년 시절에는 하급 관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에서 생활했다. 1726년(영조 2년)부터는 무주에 자리 잡았던 그의 가족은 1735년 할아버지 안서우가 세상을 떠나자, 1736년(영조 12년) 안정복이 25세 되던 해에 선영이 있는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아버지 안극의 상황으로 인해 오랫동안 일정한 거처 없이 지냈다. 10세 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후 특별한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익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안정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갑술환국1701년 장희빈 관련 옥사로 인해 남인 세력이 몰락했고, 그가 청소년기를 보내던 1728년에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남인 대다수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안정복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평생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으며, 관직에 욕심이 없던 아버지로 인해 집안 형편도 어려웠다. 한때는 종중의 논밭(宗沓)을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지만, 노비와 함께 직접 숯을 구워 팔아 다시 그 논밭을 되찾기도 했다.

2. 2.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교류하며 지도를 받았다. 안정복은 주자학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삼으면서도, 스승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경세치용의 실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성리학자로서의 소양도 깊어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절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주요 저술로는 스승의 《성호사설》을 일부 수정하고 해설한 《성호사설유선》과 다양한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雜同散異)》 등이 있다. 특히 《잡동산이》는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는 역사서인 《동사강목》으로, 이 책을 통해 그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제시했다. 《동사강목》에서 그는 기자조선조선 역사의 정통으로 설정하고[3], 기자를 중화 문명의 보유자로 숭상하며 기자의 문물을 계승한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 반면,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설화 속 불교적 요소를 지적하며 기록의 신빙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2]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는데, 말갈의 역사로 보면서도[4][5][6] 고구려 옛 땅과의 연관성과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동국통감》의 체제를 따라 기록한다고 밝혔다.[8]

1775년에는 세손(정조)을 보필하는 세손익위사 익찬을 맡아, 정조가 왕세손 시절일 때 그를 가르친 스승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교해 달라는 세손의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고 이황은 선현의 뜻을 계승했으므로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790년 이후 남인 세력 내에서 천주교가 확산되자 이를 경계하며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사후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으로 추증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2. 2. 1. 실학, 성리학 수학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서, 그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스승과 연락하며 지도를 받았다. 안정복은 남인 성리학의 종통을 이은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에게 직접 글과 학문을 배웠다. 이익실학자이면서도 성리학 지식이 해박했으며, 허목으로부터 이어지는 남인 학통의 종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안정복은 그로부터 남인성리학과 경세치용의 학풍을 계승하였다.[9] 이익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신후담, 윤동규(尹東奎), 이병휴(李秉休) 등과 교류하며 학문적 교분을 쌓았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한 것은 그의 학문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성호 이익이 광주에 살고 있었기에 그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고, 평생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익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부터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노력했으며, 때로는 직접 현장을 답사하거나 변복을 하고 민심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다.

성리학자로서 안정복은 주자의 학설을 깊이 신봉하며 실천에 힘썼다. 스승 이익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과 달리, 안정복은 기존 학문의 실천을 더 중시하는 면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관과 사론에 있어서는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여 계승했다. 그는 주자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스승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경세치용의 실학을 연구하는 데 힘썼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세자시강원의 관료로서 영조의 명을 받아 이관(李灌), 한용화, 박사형, 이겸진, 심정진, 임정주 등과 함께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절을 풀이하고 해석하는 작업에 참여했다.[17] 또한 1775년 세손(정조)을 보필할 당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고 이황은 선현의 뜻을 계승했으므로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스승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했으며, 다양한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雜同散異)》를 저술했는데, 이는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광주 덕안에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문하생들을 가르쳤으며, 이기양(李基讓), 이가환(李家煥)[10], 황덕일(黃德壹), 황덕길(黃德吉),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등을 배출했다. 특히 이가환과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유명했으며, 권일신은 후에 안정복의 사위가 되었다.

2. 2. 2. 저술 활동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스승 사후에도 교류하며 지도를 받았다. 스승의 저작인 《성호사설》을 일부 수정하고 해설하여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또한 다양한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雜同散異)》를 저술했는데, 이는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복은 주자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스승 이익의 영향을 받아 경세치용의 실학 연구에도 힘썼다.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을 받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절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775년에는 세손(정조)의 스승 중 한 명으로서 세손익위사 익찬을 맡아 교육에 참여했는데, 당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깨달은 바가 크지만 이황은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므로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펼쳤다. 주요 저술 활동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737년: 요, 순, 우 삼대의 정통론을 기반으로 한 《치통도(治統圖)》와 사서육경을 학문의 중심으로 보는 《도통도(道統圖)》를 저술하였다.
  • 1738년: 지방 통치에 관한 《치현보(治縣譜)》와 향약 관련 저술인 《향사법(鄕社法)》을 지었다.
  • 1740년: 초기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한 《하학지남(下學持南)》 상·하권을 저술하였고, 중국 고대의 이상적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井田說)》을 발표했다.
  • 1741년: 주자의 사상을 본받아 여성 교육서인 《내범(內範)》을 저술했다.
  • 1744년: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을 접하고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후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자들과 교류하며 1775년에는 함께 유형원의 연보와 행장인 〈반계연보(磻溪年譜)〉를 편찬하였다.


역사가로서 안정복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동사강목》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자조선조선 역사의 정통으로 설정하고, 기자를 중화 문명의 보유자로 숭상하며 기자의 문물을 계승한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라고 주장했다.[1] 그는 《동사강목》의 서두에 "은나라 태사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 주나라 천자가 그를 봉했다"라고 기록했고, 조선 역사의 정통성이 기자에서 마한,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한족이 세운 위만조선한사군은 정통에서 제외하고, 특히 위만조선은 왕위를 찬탈한 도적의 국가("찬적(簒賊)")라고 비판했다.[3]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단군 설화에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동방고기 등의 책에서 말하는 단군의 일은 모두 황당하고, 환인이나 제석천 등은 법화경에 나오는 것으로 모두 승려들의 이야기다"라고 하여 단군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2]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동사강목》에서 그는 발해말갈의 역사로 기술하며, 건국자인 대조영 역시 말갈 출신으로 보았다.[4][5][6] 따라서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나,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고 신라와 국경을 접했다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동국통감》의 전례를 따라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다고 밝혔다.[8]

: 渤海不當錄于我史。而本爲高句麗故地,與我壤界相接,義關唇齒。故通鑑備書之。今從之[7]zho

: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며, 또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 의의는 실로 밀접하다. 이 때문에 "동국통감"도 발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동국통감"을 따라서 발해에 대해 기술한다[8]

: — 안정복, 《동사강목》

: 靺鞨大祚栄……[8]zho

: — 안정복, 《동사강목》 권4하·신라효소왕 9년조

1790년 이후 천주교가 남인 세력 내부에 확산되자, 이를 심각하게 우려하며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내용의 글들을 남겼으며, 이러한 활동은 사후 그가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으로 추증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동사강목
  • 《순암집》
  • 《임관정요》
  • 《천학고》
  • 《성호사설유선》
  • 《잡동산이》
  • 《하학지남》
  • 《치통도》
  • 《도통도》
  • 《치현보》
  • 《향사법》
  • 《정전설》
  • 《내범》

2. 2. 3. 동사강목 집필

그는 오랫동안 《동사강목》을 편찬하며 스승인 성호 이익의 지도와 감수를 받았다. 스승인 이익은 거침없이 조언하는 한편으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절단이 있으면 지인들을 통해 자료를 구하기도 했고, 주변의 지인과 측근, 다른 문인들을 통해서도 자료들을 입수하여 그에게 내주곤 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의 대표적인 역사 저술로, 그는 이 책을 통해 독자적인 역사관을 제시했다. 그는 기자조선-마한-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세웠으며[3],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 기자를 중화 문명의 보유자로 숭배하며 기자의 문물을 계승한 조선이야말로 중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 《동사강목》의 권두에는 "은나라 태사 기자 동래. 주 천자가 이를 봉했다"라고 기록했으며, 위만조선한사군한족 망명자가 왕위를 찬탈한 역사로 보아 정통에서 제외하고 비판했다.[3] 또한 신라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강조했다.

발해사에 대해서는 한국의 역사의 일부로 포함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며, 이러한 관점은 훗날 유득공의 《발해고》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구려-발해-고려만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신라 역시 정통으로 포함하는 등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저술 내 일부 기록에서는 발해말갈의 역사로 기술하고[4][5], 건국자인 대조영을 靺鞨大祚栄|말갈 대조영zho으로 표기하는 등[8],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사료의 한계 속에서 발해를 한국사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온전히 편입시키는 데에는 복합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6] 그는 발해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며, 또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 의의는 실로 밀접하다"고 평가하며 동국통감의 체재를 따라 발해사를 기술한다고 밝혔다.[8]

2. 2. 4. 관료 생활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1749년 결국 문음으로 출사하여 만령전 참봉에 천거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50년에는 의영고 봉사(義盈庫奉事)가 되었고, 1752년에는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를 지냈다. 1753년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상을 당하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 복직하여 다시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세자익위사 익찬을 역임하며 세자시강원에 배치되어 세자 교육에 참여하였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영조의 명으로 이관(李灌), 한용화(韓用和), 박사형(朴師亨), 이겸진(李謙鎭), 심정진, 임정주 등 다른 학자들과 함께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절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1775년에는 세손익위사 익찬으로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좌하였다. 이때 세손퇴계 이황율곡 이이를 비교하는 질문을 하자, 안정복은 이이는 스스로 자득(自得)하였고 이황은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하였다. 안정복은 정조가 왕세손 시절일 때 그를 가르친 스승 중 한 사람이었다.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정조가 즉위한 후 남인을 중용하는 정책을 폈으나, 안정복은 스스로 관직에 나아가기를 사양하였다. 이후 정조의 특별한 명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사후에는 천주교 비판의 공로로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에 추증되었다.

2. 3. 생애 후반

스승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교류하며 지도를 받았다. 스승의 저작인 《성호사설》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했으며, 다양한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가이자 실학자이면서도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도 강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을 받아 성리학의 중요 경전인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노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등의 노인직을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남인을 중용하는 정책을 폈으나, 안정복은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조는 특별 명령으로 그를 광성군(廣成君)에 봉했다.

만년에는 1790년 이후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점차 확산되고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자가 생겨나자, 이를 성리학적 질서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보고 경계하며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특히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포함시켜 민족사의 범위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사후에는 천주교를 비판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헌대부 광성군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정조가 세손 시절일 때 스승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2. 3. 1. 세손 사부와 지방관

세자시강원에 배치된 이후 사헌부감찰,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등을 역임하였다. 1772년에는 세손익위사 익찬과 위솔(衛率)이 되어 당시 세손(훗날의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1775년 세손익위사 위솔로서 세손을 보좌하던 중,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교하는 세손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퇴계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주는 근본이 있으므로 당연히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이황을 정통으로 평가하였다.

같은 해인 1775년, 65세의 나이로 외직인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부임하여 지방관으로서 3년간 임무를 수행했다. 임기를 마친 뒤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다시 부름을 받아 돈녕부 주부(主簿), 의빈부 도사(都事),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등을 잠시 역임하기도 했다.

2. 3. 2. 천주교에 대한 공격

성리학이나 실학 외에도 도교와 노장 사상까지 폭넓게 수용하였으나, 천주교만큼은 이단 사상으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배척하였다. 그가 천주교를 비판한 주된 이유는 천주교가 양반과 상민의 신분 질서를 부정하고, 천당과 지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평민과 노비는 물론 사대부가의 여성들에게까지 퍼져나가 사회 문제로 인식되자, 안정복은 1785년(정조 9년)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이 저술들에서 그는 천주교의 내세관이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이 있다며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는 제자이자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이 천주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천주교 신앙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안정복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설파하고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기존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정복은 천주교가 현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후 세계를 논하며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주장했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은 이러한 천주교 배척 논리를 체계화한 저술이었다. 그는 문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으며, 편지를 통해 천주교 교리의 이단성과 반사회성을 꾸준히 설득하고자 했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그는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안정복을 비롯한 당시 조선의 전통적인 사대부들이 서학(西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의 실학 사상은 당시 집권 세력에게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천주교에 대한 그의 강경한 비판적 입장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노론 벽파 정권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사후 그는 천주교 비판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으로 추증되었다.

2. 3. 3. 만년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후 남인을 중용하는 정책을 폈다. 정조는 안정복에게도 출사를 권유했으나, 그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겠다며 모두 사양했다.[11] 1784년 정조는 서용(敍用, 다시 벼슬에 씀) 명령을 내렸고[11], 이후 특별 명령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9월에는 미천서원(眉泉書院) 유생들의 요청을 받아 여러 차례 사양 끝에 서원 부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만년에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점차 퍼지면서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자가 나타나자, 안정복은 이를 경계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천주교가 사후 세계를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저술 《천학고》, 《천학문답》 등에도 나타난다.

1789년 1월에는 통정대부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미천서원 부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8월에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90년 6월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했고, 7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면서 다시 광성군에 봉해졌다. 이는 그의 6대조가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진 것을 이어받은 것(습봉, 襲封)이었다. 당시 정조는 날씨가 무덥다는 이유로 안정복에게 감사 인사를 위해 입궐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별 배려를 하기도 했다.

안정복은 1791년 7월 20일 광주 덕곡의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7월 23일 정조는 특명을 내려 부의(賻儀, 장례 비용을 돕는 물품이나 돈)를 보냈다. 사후에는 천주교를 비판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으로 추증되었다.

3. 사상과 학문적 치적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교류하며 지도를 받았다. 그는 이익의 대표 저서인 《성호사설》을 연구하고 일부 내용을 수정하여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또한 다양한 지식을 모아 정리한 《잡동산이(雜同散異)》를 저술했는데, 이 책의 이름은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안정복은 실학자이자 성리학자로서 균형 잡힌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을 받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절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1775년에는 세손(정조)을 보좌하는 세손익위사 익찬으로서 이황이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경종 1년(1721년) 학문의 길에 들어서 35세 때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 즉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학문에 두었다.

영조 25년(1749년) 만령전 참봉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내직으로는 감찰, 익위사 익찬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65세 때 목천현감을 역임했다. 스승 이익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주자학을 학문의 기본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스승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경세치용의 실학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학문과 실천의 일치를 강조한 《하학지남(下學指南)》을 저술하여, 조선 후기 양반 사회의 공허한 이기론 논쟁을 비판하고 실질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외에도 관리의 마음가짐을 다룬 《임관정요(臨官政要)》, 예법을 정리한 《가례집해(家禮集解)》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역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겨 《동사강목》, 《열조통기》, 《계갑일록》 등 중요한 역사서를 저술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남인이 중용되었으나, 안정복은 스스로 관직을 사양하였다. 이후 특명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1790년 이후 천주교가 확산되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사후 천주교 비판의 공로 등을 인정받아 1801년(순조 1년)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등에 추증되었고, 1871년(고종 8년)에는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1.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에 대한 인식

안정복은 주자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았으며, 스승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경세치용의 실학을 연구했다. 그는 조선 건국 이전의 역사 인식에서 기자조선을 중시하는 입장을 보였다.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였던 기자조선으로 와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보았으며, 기자를 '예(禮)와 문(文)', 즉 중화 문명의 보유자로 숭상했다. 안정복은 기자의 '예·문'을 계승한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

그의 저서 동사강목의 첫머리에는 "은나라 태사 기자 동래. 주 천자가 이를 봉했다"라고 기록하여 기자조선을 한국사의 시작점으로 강조했다. 그는 한국사의 정통성이 기자에서 시작되어 마한,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한족 출신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과 이후 설치된 한사군한국사의 정통성에서 제외했다.[3] 특히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한족 망명자가 왕위를 빼앗은 '찬적(簒賊)', 즉 도적이 세운 나라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편,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는 단군조선과 그 시조 단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단군 관련 기록에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점을 지적하며, "생각건대 동방고기 등의 책에서 말하는 단군의 일은 모두 황탄하고, 그가 이르는 환인제석천은 법화경에 나온다. 그가 이르는 바는 모두 중의 이야기다"라고 하여, 단군을 부정했다.[2] 불교372년한반도에 전래되었으므로, 그 이전 시기의 역사 기록에 불교적 내용이 나타나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3. 2. 발해사에 대한 인식

그는 발해사를 최초로 한국의 역사로 보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유득공발해고 저술로 이어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안정복은 고구려-발해-고려만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신라 역시 정통으로 보는 등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안정복은 그의 주요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발해말갈의 역사로 기술하였다.[4][5] 그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출신을 말갈로 보았으며, 따라서 발해조선의 역사로 직접 포함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6] 즉, 안정복은 발해를 한국사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고 지리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사강목》에 그 역사를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3. 3. 천주교 비판

성리학실학을 아우르는 학자였으나, 도교나 노장 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한 것과 달리 천주교만큼은 이단사상(異端思想)으로 간주하여 배척에 앞장섰다. 그는 천주교가 양반과 상민의 구별을 부정하고, 천당과 지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으로 사람들을 속인다고 비판했다. 특히 천주교가 평민, 노비, 사대부가의 여성들에게까지 퍼지며 사회 문제로 인식되자, 1785년(정조 9년)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이 책들에서 그는 천주교의 내세관이 지닌 현실 부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배척을 위한 논리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천학혹문(天學或問)》도 저술하여 천주교 비판 논리를 강화했다.

안정복은 자신의 제자이자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이 천주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여러 차례 서찰을 보내 천주교 교리의 이단성과 반사회성을 지적하며 천주교에 빠지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 및 신분 질서 부정은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반질서적 사상으로 여겨졌다. 그는 문인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는 것을 막고, 서찰을 통해 꾸준히 설득하려 노력했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그는 당시 천주교 박해를 당연시했는데, 이는 안정복을 비롯한 전통적인 조선 사대부들이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덕분에 안정복은 1791년 진산 사건(윤지충, 권상연의 위패 소각 사건)이나 1801년 신유박해남인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할 때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다만 사위 권일신1791년 이승훈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13]

1801년(순조 1년) 사헌부 장령 정한(鄭瀚)은 안정복이 서학을 배척한 공로를 들어 포상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그해 9월 20일,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던 노론 벽파 정권은 그의 천주교 비판 공로를 인정하여 순조의 특명으로 증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광성군(廣成君)으로 추증했다. 이후 1871년(고종 8년) 3월 6일에는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평가

(내용 없음)

5. 저서 및 작품

1737년 요순우 삼대 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 (治統圖)≫와 사서육경의 학문을 진리로 삼는 ≪도통도 (道統圖)≫를 저술하며 학문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738년에는 지방 통치에 관한 ≪치현보 (治縣譜)≫와 향약인 ≪향사법 (鄕社法)≫을 지었다.

1740년에는 초기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한 ≪하학지남 (下學指南)≫ 상·하권을 저술했으며,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 (井田說)≫을 발표했다.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본받아 ≪내범 (內範)≫을 저술했다.

1744년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 (磻溪隨錄)≫을 접한 이후, 그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자들과 교류하며 연구를 심화했다. 1775년에는 이들과 함께 유형원의 연보와 행장인 〈반계연보 (磻溪年譜)〉를 편찬하여 유형원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1759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완성했다. 이 책에서 안정복은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최초로 편입시키는 선구적인 시각을 제시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유득공의 《발해고》 저술로 이어졌다. 그는 고구려-발해-고려뿐만 아니라 신라 역시 정통으로 인정하며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의 저작 중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오늘날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으며, 관리의 도리를 다룬 《임관정요 (臨官政要)》는 후학인 정약용의 《목민심서》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 및 작품은 다음과 같다.

주요 저서 및 작품
분야저서명비고
동사강목 (東史綱目)》1759년 완성. 대표 역사서. 발해사를 한국사로 최초 편입.
열조통기 (列朝通紀)》조선시대 역사서.
《계갑일록 (癸甲日錄)》
〈반계연보 (磻溪年譜)〉유형원의 연보 및 행장. 1775년 찬술. (반계유형원행장)
≪치통도 (治統圖)≫1737년 저술. 요순우 삼대 문화 정통설 기반.
≪도통도 (道統圖)≫1737년 저술. 사서육경 학문 기반.
≪치현보 (治縣譜)≫1738년 저술. 지방 통치 관련.
≪하학지남 (下學指南)≫1740년 저술. 초기 학문적 성과 집대성.
≪정전설 (井田說)≫중국 고대 토지제도 해설.
≪내범 (內範)≫1741년 저술. 주자 사상 모방.
《임관정요 (臨官政要)》관리의 도리. 정약용의 《목민심서》 저술에 영향.
≪향사법 (鄕社法)≫1738년 저술. 향약.
《가례집해 (家禮集解)》
《천학고 (天學考)》
《천학문답 (天學問答)》
《천학혹문 (天學或問)》
《순암집 (順菴集)》문집.
《상헌수필 (橡軒隨筆)》
《홍범연의 (洪範衍義)》
《희현록 (希賢錄)》
《잡동산이 (雜同散異)》잡동사니 어원.
《성호사설유선》이익의 《성호사설》 선별.
《여용국전 (女容國傳)》


6. 가족 관계


  • 조부 : 안서우(安瑞羽, ? ~ 1735년 11월)
  • 조모 : 홍씨(洪氏, ? ~ 1741년 6월)

부** : 안극(安極, 1696년 6월 3일 ~ 1754년 2월)
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694년 윤5월 6일 ~ 1767년 8월 5일) - 이익령(李益齡)의 딸
* 본인** : 안정복(安鼎福)
* 아내** : 창녕 성씨(昌寧 成氏, 1709년 ~ 1775년 1월) - 성순(成純)의 딸
아들 : 안경증(安景曾, 1732년 1월 ~ 1777년 3월), 1762년 생원 합격
며느리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윤동열(尹東說)의 딸
* 손자 : 안철중(安喆重)
며느리 (재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박지종(朴志宗)의 딸
: 광주 안씨(廣州 安氏)
사위 : 권일신(權日身)
* 여동생** : 남편 오석신(吳錫信)
조카 : 오순(吳珣), 이세연(李世延)의 딸과 혼인
* 남동생** : 안재득(安再得), 5살에 요절
* 막내동생** : 안정록(安鼎祿), 박사정(朴思正)의 딸과 혼인
조카 : 안경연(安景淵), 이명복(李命復)의 딸과 혼인

  • 장인 : 성순(成純)
  • 장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참조

[1] 논문 16 世紀朝鮮知識人の「中国」認識 -許篈の『朝天記』を中心に https://ritsumei.rep[...] 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ー 2011-03
[2] 논문 日本人の檀君硏究 https://doi.org/10.1[...] 한일관계사학회 2021
[3] 뉴스 허연의 책과 지성 순암 안정복 (1712~1791) https://www.mk.co.kr[...] 2019-08-23
[4] 서적 민족인가, 국가인가? 소나무출판사 2006-12-30
[5] 뉴스 “한국사의 정통성은 신라에… 고구려 중심사관 폐기해야” https://www.donga.co[...] 2007-01-16
[6] 서적 동아시아의 발해사 쟁점 비교 연구 http://contents.nahf[...] 東北アジア歴史財団 2009-09
[7] 뉴스 사료라이브러리 > 발해사자료집 >東史綱目 >발해의 기록과 우리의 역사기록이 마땅하지 않다. http://contents.nahf[...] 東北アジア歴史財団
[8]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
[9] 웹사이트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 근대사회의 태동-문화의 새 기운 http://donation.enc.[...]
[10] 문서 채제공 사후 남인붕당에서 재상감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1] 문서 정조실록 18권, 정조 8년(1784 갑진 / 청 건륭(乾隆) 49년) 8월 2일(을유) 4번째기사 "상전에 대한 하교"
[12] 문서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7월 23일(병신) 2번째기사 "광성군 안정복에게 부의를 추가할 것을 명하다"
[13] 문서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11월 8일(기묘) 6번째기사 "이승훈을 삭직하고 권일신을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다"
[14] 문서 이하 경력은 안정복의 문집 《순암집》에 수록된 〈연보(年譜)〉에서 관직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이력을 간추린 것이다.
[15] 문서 습봉은 작위를 물려 받아 봉작되는 것이다. 안정의 6대조가 호성공신(扈聖功臣)이었으므로 습봉되었다.
[16] 문서 안정복이 받은 시호 문숙(文肅)의 뜻은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 '자신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것'을 '숙(肅)'이다.
[17] 문서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5월 3일(임인) 5번째기사 "《주자대전》 등의 언독에 참여했던 이술원·한용화를 의망해들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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