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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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원군은 조선 중종과 귀인 홍씨의 서 3남으로, 1520년 금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는 종을 시켜 사헌부 서리를 끌어내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고, 승려들과 내통하여 불사를 올린 일로 명종에게 추고를 받기도 했다. 1562년에 사망했으며, 묘는 경기도 양주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가 서울특별시 갈현동을 거쳐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이장되었다.

금원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조선 중종의 왕자
영(齡, 岭, 岺)
아버지중종
어머니희빈 홍씨
출생일
사망일
능묘금원군 묘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
가족 관계
배우자파징군부인 해주 정씨
자녀1녀(+ 양자 1남) - 딸 이견복, 양자 하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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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13년 (음력 6월 9일) (7월 11일) 중종과 귀인 홍씨(훗날의 희빈 홍씨)의 서3남으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년) 8살 때 금원군(錦原君)에 책봉되었다.

1535년(중종 30년) 금원군은 자신의 종을 시켜 사헌부에 들어가 서리를 끌어내는 일을 저질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52년(명종 7년) 문소전과 연은전의 도제조를 겸하였고, 1553년(명종 8년) 사옹원 도제조, 1555년(명종 10년) 종부시 도제조, 1557년(명종 12년) 종친부 일을 맡았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년)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승려들과 내통하고 불사를 올리는 바람에 탄핵을 받았다.

1562년(명종 17년) 음력 4월 7일(5월 9일) 50세로 사망하였다. 장지는 거북점의 조짐이 좋지 못해 두 번이나 바꾼 후 이듬해인 1563년(명종 18년) 경기도 양주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묘는 1970년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이장되었다.

송인은 묘갈명에 금원군에 대해 사람이 순하고 소박하며 꾸밈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주색잡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내통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다.

2.1. 가계

1513년 (음력 6월 9일) (7월 11일) 중종과 귀인 홍씨(훗날의 희빈 홍씨)의 서3남으로 태어났다. 봉성군의 친형이며, 인종과 명종, 덕흥대원군의 이복형이다.

2.2. 왕자 시절

1520년(중종 15년) 음력 12월 27일, 8살 때 정식으로 금원군(錦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중종은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집을 짓는 역사를 지속했는데, 일부에서 이러한 역사가 사치스럽다는 지적을 하였다. 이에 중종은 감역관을 통해 법제를 위반하는지 조사케 하고, 금원군의 집에 있는 서청을 철거시켰다.

1535년(중종 30년) 음력 1월 4일, 금원군이 자신의 종을 시켜 사헌부에 들어가 서리를 끌어내는 일을 저질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대신들은 금원군에 대한 파출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년) 문소전과 연은전의 도제조를 겸하게 되었고, 1553년(명종 8년) 사옹원 도제조, 1555년(명종 10년) 종부시 도제조, 1557년(명종 12년) 종친부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년) 음력 11월, 금원군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승려들과 내통하고 불사를 올리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이때 명종은 이복형인 금원군에 대해 추고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여러 차례에 걸쳐 대신들이 올린 금원군 파직 상소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2.3. 사망

금원군은 1562년(명종 17년) 음력 4월 7일(5월 9일) 향년 50세로 사망하였다. 장지는 거북점의 조짐이 좋지 못해 두 번이나 바꾼 후 이듬해인 1563년(명종 18년) 음력 3월 7일 경기도 양주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금원군의 묘가 있던 지역은 훗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갈현동에 편입되었는데, 1970년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묘를 이장하였다. 인근에는 생모인 희빈 홍씨, 양자 하릉군, 하릉군의 양자 영제군의 묘소가 함께 있다.

2.4. 평가

송인은 묘갈명에 금원군에 대해 사람이 순하고 소박하며 꾸밈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주색잡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내통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고도 하였다. 금원군이 병이 들자 명종내의원을 보내어 치료케 하였으며, 금원군이 세상을 뜨자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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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조부성종조선 제9대 왕
조모정현왕후
부왕중종조선 제11대 왕
외조부홍경주
외조모안동 권씨권금성(權金成)의 딸
생모희빈 홍씨
남동생봉성군
장인정승휴좌찬성 행충훈부도사에 추증
부인파징군부인해주 정씨
이견복(李堅福)
사위남관
외손자남이성(南以聖)
외손녀남란(南蘭)
외손자남이현(南以賢)
양자하릉군덕흥대원군의 차남
며느리평산군부인 신씨신여종(申汝悰)의 딸
양손자영제군하원군의 3남
며느리(측실)억금(億今)양민 출신
서손자교성도정 이선(李善)
서손자이현(李賢)
며느리(측실)순화(順花)노비 출신
서손녀이팔옥(李八玉)

금원군은 해주 정씨 정승휴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부인 정씨는 파징군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정씨는 딸만 하나 낳았으며, 딸은 남관에게 시집을 가 2남 1녀를 두었다. 훗날 금원군의 후사는 이복 남동생 덕흥군 (창빈 안씨의 차남)의 차남 하릉군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