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군
1. 개요
금원군은 조선 중종과 귀인 홍씨의 서 3남으로, 1520년 금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는 종을 시켜 사헌부 서리를 끌어내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고, 승려들과 내통하여 불사를 올린 일로 명종에게 추고를 받기도 했다. 1562년에 사망했으며, 묘는 경기도 양주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가 서울특별시 갈현동을 거쳐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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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년 출생 -
사나다 유키타카
사나다 유키타카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다케다 신겐을 섬기며 시나노 평정을 돕고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만년에 아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
1513년 출생 -
오만도코로
오만도코로는 센고쿠 시대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이며,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된 후 오만도코로의 호를 받았고 1592년 사망했다. -
1562년 사망 -
임꺽정
임꺽정은 조선 명종 시기에 양주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관아를 습격하고 빈민을 구제한 의적으로,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힌다. -
1562년 사망 -
앙투안 드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방돔 공작은 부르봉 가문 출신으로 방돔 공작 샤를 4세의 아들이자 앙리 4세의 아버지이며, 나바라 여왕 잔 3세의 남편으로서 나바라 왕국의 공동 통치자였고, 프랑스 종교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프랑스 왕국의 총사령관으로 활동 중 사망했다. -
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2. 생애
1513년 (음력 6월 9일) (7월 11일) 중종과 귀인 홍씨(훗날의 희빈 홍씨)의 서3남으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년) 8살 때 금원군(錦原君)에 책봉되었다.
1535년(중종 30년) 금원군은 자신의 종을 시켜 사헌부에 들어가 서리를 끌어내는 일을 저질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52년(명종 7년) 문소전과 연은전의 도제조를 겸하였고, 1553년(명종 8년) 사옹원 도제조, 1555년(명종 10년) 종부시 도제조, 1557년(명종 12년) 종친부 일을 맡았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년)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승려들과 내통하고 불사를 올리는 바람에 탄핵을 받았다.
1562년(명종 17년) 음력 4월 7일(5월 9일) 50세로 사망하였다. 장지는 거북점의 조짐이 좋지 못해 두 번이나 바꾼 후 이듬해인 1563년(명종 18년) 경기도 양주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묘는 1970년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이장되었다.
송인은 묘갈명에 금원군에 대해 사람이 순하고 소박하며 꾸밈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주색잡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내통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다.
2.1. 가계
1513년 (음력 6월 9일) (7월 11일) 중종과 귀인 홍씨(훗날의 희빈 홍씨)의 서3남으로 태어났다. 봉성군의 친형이며, 인종과 명종, 덕흥대원군의 이복형이다.
2.2. 왕자 시절
1520년(중종 15년) 음력 12월 27일, 8살 때 정식으로 금원군(錦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중종은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집을 짓는 역사를 지속했는데, 일부에서 이러한 역사가 사치스럽다는 지적을 하였다. 이에 중종은 감역관을 통해 법제를 위반하는지 조사케 하고, 금원군의 집에 있는 서청을 철거시켰다.
1535년(중종 30년) 음력 1월 4일, 금원군이 자신의 종을 시켜 사헌부에 들어가 서리를 끌어내는 일을 저질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대신들은 금원군에 대한 파출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년) 문소전과 연은전의 도제조를 겸하게 되었고, 1553년(명종 8년) 사옹원 도제조, 1555년(명종 10년) 종부시 도제조, 1557년(명종 12년) 종친부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년) 음력 11월, 금원군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승려들과 내통하고 불사를 올리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이때 명종은 이복형인 금원군에 대해 추고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여러 차례에 걸쳐 대신들이 올린 금원군 파직 상소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2.3. 사망
금원군은 1562년(명종 17년) 음력 4월 7일(5월 9일) 향년 50세로 사망하였다. 장지는 거북점의 조짐이 좋지 못해 두 번이나 바꾼 후 이듬해인 1563년(명종 18년) 음력 3월 7일 경기도 양주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금원군의 묘가 있던 지역은 훗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갈현동에 편입되었는데, 1970년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묘를 이장하였다. 인근에는 생모인 희빈 홍씨, 양자 하릉군, 하릉군의 양자 영제군의 묘소가 함께 있다.
2.4. 평가
송인은 묘갈명에 금원군에 대해 사람이 순하고 소박하며 꾸밈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주색잡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내통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고도 하였다. 금원군이 병이 들자 명종은 내의원을 보내어 치료케 하였으며, 금원군이 세상을 뜨자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