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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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환(1963년)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1986년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필명 '강철'로 주체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1991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를 느껴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2012년 중국에서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주체사상에 실망하여 전향했으며, 이석기 등 일부는 주체사상을 지속적으로 추종한다는 주장이 있다. 저서로는 《김영환, 시대정신을 말하다》, 《포스트 김정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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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환 (196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원어 이름 | 金永煥 |
| 별칭 | '강철서신'의 저자 |
| 출생일 | 1963년 |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
| 국적 | 대한민국 |
| 직업 | 시민운동가 |
| 소속 |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
| 학력 | |
| 학력 | 서울대학교 공법학과 학사 |
| 경력 | |
| 경력 | 데일리엔케이 논설위원 |
2. 주요 활동
김영환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1980년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주체사상을 알기 쉽게 설명한 '강철서신'을 작성하여 당시 학생운동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1], 구국학생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대표적인 주사파 이론가로 알려졌다.
1991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경험 등을 통해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사상적으로 전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전향 이후에는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동 방향을 바꾸었다. 2012년에는 중국에서 북한 인권 관련 활동 중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114일간 구금되었으며, 석방 후 구금 중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5][6]
2. 1. 구국학생연맹과 '강철서신'
1986년에 설립된 구국학생연맹은 대한민국 학생운동 역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김영환은 1985년 말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 운동가가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식의 글, 이른바 '강철서신'을 작성했다. 이 글은 주체사상을 알기 쉽게 소개하여 당시 학생운동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2. 2. 방북 및 사상 전향
1991년 북한 측이 제공한 반잠수정을 타고 비밀리에 방북하였다.[2] 방북 당시 주체사상 학자들과의 토론을 요구하여 황장엽의 제자들인 40대 학자들과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 김영환은 이 토론에서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북한 학자들이 명확한 답을 피했다고 주장하며,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2] 또한, 방북 기간 중 김일성을 두 번 만났는데, 김일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오히려 그 사람이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고 주장했다.[3]이러한 방북 경험 이후, 김영환은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동 방향을 바꾸었다. 2012년 중국과 북한의 국경 근처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국가안전위해죄 혐의로 체포되어 다른 한국인 3명과 함께 단둥시의 한 수감 시설에 구금되었다. 당시 여러 북한 인권단체들은 이 사건이 중국과 북한 보위부의 합작일 가능성을 제기했다.[4] 같은 해 6월 20일, 김영환 등 구금된 4명의 가족 대표는 당시 중국 주석 후진타오에게 석방을 청원하는 서한을 보냈다.[5] 구금된 지 114일 만에 풀려난 그는 7월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중국 구치소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6]
2. 3. 북한 인권 운동과 중국 구금
199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이 제공한 반잠수정을 타고 비밀리에 방북했을 당시, 김영환은 주체사상 학자들과의 토론을 요구하여 황장엽의 제자들과 장시간 토론했다.[2] 그는 이 경험에 대해 "주체사상 토론 중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 하면 어찌하겠느냐'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그들은 엉뚱한 대답만 할 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며,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2] 또한 김일성을 두 차례 만났으나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오히려 주체사상 관련 책을 한 번이라도 읽었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회고했다.[3]이러한 경험 이후 김영환은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동 방향을 바꾸었다. 2012년, 그는 다른 대한민국 국적 활동가 3명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경 근처에서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국가안전위해죄 혐의로 체포되어 단둥 시의 한 수감 시설에 구금되었다. 당시 여러 북한 인권단체들은 이 사건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위부의 합작품'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4] 6월 20일, 김영환 등 구금된 4명의 가족 대표는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었던 후진타오에게 석방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다.[5] 구금된 지 114일 만에 풀려난 김영환은 7월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중화인민공화국 구치소에서 구금되어 있는 동안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6]
3. 김영환 이후의 주체사상파
김영환과 하태경을 비롯한 일부 주체사상파는 주체사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 이상 이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7] 반면, 하영옥과 이석기 등은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했다는 주장이 있다.[8][9][10] 이석기의 경우, 이후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3. 1. 이석기와 경기동부연합
하영옥과 이석기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뒤에도 활동을 계속한다는 주장이 있다.[8][9][10]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석기는 당권파의 뿌리로 알려진 소위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다. 이석기는 1990년대 후반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민혁당의 당원이었다. 경기동부연합의 자금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석기는 2005년 2월, 정치 컨설팅 및 홍보 기획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CNP전략그룹'을 설립했다.[8]
2014년 2월 17일, 이석기는 1심 재판에서 내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1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4년 8월 11일 열린 항소심에서는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로 판단되었으나, 내란선동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으로 감형되었다. 최종적으로 2015년 1월 22일, 대법원은 항소심과 동일하게 전 국회의원 이석기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내란선동 혐의는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9년을 확정했다.
3. 2.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
하영옥과 이석기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뒤에도 계속 활동한다는 주장이 있다.[8][9][10]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석기는 당권파의 뿌리로 알려진 소위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90년대 후반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민혁당의 당원이었다. 또한 경기동부연합의 자금 조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석기는 2005년 2월 정치 컨설팅 및 홍보 기획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CNP전략그룹'을 설립했다.[8]2014년 2월 17일, 이석기는 1심 재판에서 내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1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14년 8월 11일 열린 항소심에서는 내란 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내란 선동 혐의만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으로 감형되었다. 2015년 1월 22일,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확정하여, 전 국회의원 이석기에 대해 내란 음모 혐의는 무죄로 판단하고 내란 선동 혐의만을 인정해 징역 9년을 최종 선고했다.
4. 저서
- 포스트 김정일, 사단법인 시대정신, 2011년 12월 23일
- 김영환, 시대정신을 말하다, 사단법인 시대정신, 2012년 7월 16일
참조
[1]
뉴스
김영환은 누구인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9-09-09
[2]
뉴스
(시론) 주사파였던 제가 황 선생을 보내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칼럼, 김영환 〈계간시대정신〉 편집의원
2010-10-10
[3]
뉴스
강철 김영환, "나를 꺾은건 고문 아닌 北현실"
http://www.dailynk.c[...]
데일리 NK
2007-06-27
[4]
뉴스
전향 후 北인권 위해 싸우는 김영환… 北엔 눈엣가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기자 전현석·이옥진
2012-05-17
[5]
뉴스
"김영환 석방" 후진타오에 청원서
http://joongang.join[...]
중앙일보 기자 김수정·최형규
2012-06-21
[6]
뉴스
김영환 “中 구금 당시 가혹 행위 있었다” 주장, 정부 부적절 대응 논란
http://www.cbci.co.k[...]
CBC뉴스 기자 홍성완
2012-07-26
[7]
뉴스
김영환·이석기, 82학번 주사파의 '엇갈린 30년'
http://news.khan.co.[...]
경향신문 기자 안홍욱
2012-05-18
[8]
뉴스
이석기, 김영환(「강철서신」·민혁당 창당 주역) 전향 후에도 지하활동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최재혁 기자
2012-05-18
[9]
뉴스
통합진보 당권파 vs 비당권파 전면전,“이석기 배후엔 민혁당이?…설마 北지령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기자 윤완준
2012-05-09
[10]
뉴스
정보당국 "하영옥씨 행적 살피고 있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윤완준 기자
201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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