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원 (1892년)
1. 개요
김용원(1892년)은 대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3·1 운동 참여 후 임시정부 경무국원으로 활동했으며,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대동단을 조직하여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탈출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군자금 모금 중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 살해 등으로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지병으로 사망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사후 그의 공적을 다른 인물이 도용하려 한 사건이 발생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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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출신 -
김수장 (법조인)
김수장은 1945년 대전 출생으로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용되어 검사장까지 승진, 주요 검찰 요직을 역임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과 법무부 검찰인사위원장을 지냈으나 권인숙 성고문 사건 관련 논란이 있었다. -
대전광역시 출신 -
황인철 (1940년)
황인철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변호사, 사회운동가로서, 판사 출신으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민청학련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시국사건 변론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대표 등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
1934년 사망 -
민태원
민태원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언론인, 소설가, 번역가, 수필가로, 여러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작품을 번역하고 소설과 수필을 발표했으며, 김옥균에 대한 전기문을 집필하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
1934년 사망 -
김소월
김소월은 일제강점기 시인으로, 민요풍의 서정시를 통해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했으며, 대표작 〈진달래꽃〉이 수록된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대전 서구 원정동에서 태어났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보은, 공주에서 독립자금을 모으다가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원이 되었다. 1919년 9월부터 1920년 6월까지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에는 대동단을 조직해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탈출 공작에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상하이와 한국을 드나들며 항일운동을 벌이다 1924년 군자금 모금을 위한 독립 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영주 부석사를 거점으로 활동 중 충남 논산에서 일본 경찰을 살해하고, 1927년 경북 안동에서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지병으로 병보석되었다가 1934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6월 11일 대전지방경찰청(청장 황운하)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전경찰청 내 별관 강당 이름을 '무궁화 홀'에서 '김용원 홀'로 변경했다. 이날 대전경찰청 별관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용원 애국지사 추모식'을 개최했다.
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김용원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부터 1920년 6월까지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에는 대동단을 조직해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탈출 공작에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상하이와 한국을 드나들며 항일운동을 벌이다 1924년 군자금 모금을 위한 독립 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4. 대동단 활동과 의친왕 탈출 공작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보은, 공주에서 독립자금을 모으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부터 다음 해인 1920년 6월까지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에는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해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탈출 공작에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상해와 한국을 드나들며 항일운동을 벌이다 1924년 군자금 모금을 위한 독립 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5. 체포와 투옥, 그리고 죽음
1924년 군자금 모금을 위한 독립 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이후 영주 부석사를 거점으로 활동 중 충청남도 논산에서 일본 경찰을 죽이고 이듬해인 1927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잡혀 무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지병으로 병보석 되었다가 1934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사후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6월 11일 대전지방경찰청(청장 황운하)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전경찰청 내 별관 강당 이름을 '무궁화 홀'에서 '김용원 홀'로 바꾸었다. 이날 대전경찰청 별관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용원 애국지사 추모식'을 개최했다.
7. 독립운동 공적 탈취 시도와 진실 규명
2000년 김용원의 손녀 김옥경은 대전광역시 은평공원에서 조부의 유적비를 확인했을 때, 비문에는 김용원이 아닌 이돈직의 공적이 새겨져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2003년 '독립투사의 공적비가 변조된 사연'을 보도하며,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이 조부 이돈직의 공적을 부풀려 김용원의 독립운동 공적을 탈취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이인구 측은 오마이뉴스와 MBC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허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2006년 대전고등법원은 이인구 측의 소송을 기각했고, 재판부는 이돈직의 항일운동 행적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이돈직을 기리는 기념비는 한때 여러 곳에 있었으나, 2019년 현재 일부는 철거된 상태다. 이 사건은 권력을 가진 후손이 조상의 공적을 부풀리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7.1.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공적 도용
2000년 11월 22일, 김용원의 손자 김옥경은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은평공원에 있는 조부의 유적비를 확인하러 갔다. 그러나 비문 정면에 새겨진 생애비(높이 1.4m, 폭 1.8m)와 휘호비(높이 4.3m, 폭 1.4m)에는 김용원이 아닌 '이돈직'이라는 사람의 휘호와 공적이 새겨져 있었다. 김용원의 흉상은 없었고, 조부의 생애와 휘호는 비문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조사 결과, 은평공원 휘호비·생애비, 원정동 김용원 선생 공적비, 효평동 이돈직 공적비, 대덕구 비래동산(무궁화동산) 비문에도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조부 이돈직의 부풀려진 공적이 적혀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03년 12월, <오마이뉴스>는 '독립투사의 공적비가 변조된 사연'을 보도하며, "대전 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용원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에 무명의 '이돈직' 끼워넣기로 독립운동가를 만들려는 첫 시도"라고 고발했다. 또한 대전애국지사숭모회 등이 대전 곳곳에 세운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조부인 이돈직 비문에 새겨진 항일운동 행적과 김용원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고 무리하게 끼워넣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대전시 지원으로 은평공원에 세워진 이돈직 생애비와 휘호비는 당초 사업 목적에 맞지 않고, 휘호비는 '불법 조형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에 이인구 명예회장 등은 2004년 4월 <오마이뉴스>와 MBC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의 항일운동 행적은 '확인되지 않은 것'이라는 <오마이뉴스> 보도에 대해 "허위 내용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06년 10월, 대전고등법원은 이인구 명예회장 등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MBC에 대해서도 계룡건설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가 반일 항일투쟁을 하고 애국지사 김용원과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실증적인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대전시 보조금을 신청하면서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에 대해서는 사업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오마이뉴스> 보도가 진실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원고 측은 상고를 포기하여 소송이 종결됐다.
이돈직을 기리는 기념비는 2003년 당시 무궁화동산, 은평공원, 효평동 3곳에 있었다. 2019년 현재 월평공원 휘호비와 생애비, 무궁화동산 공적비와 휘호비는 철거되었다. 이는 힘있는 후손에 의해 조상의 공적이 부풀려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7.2. 언론 보도와 법정 소송
2000년 11월 22일, 김용원의 손녀 김옥경은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은평공원에서 조부의 유적비 건립 현황을 확인하던 중, 비문에 조부의 이름 대신 '이돈직'이라는 낯선 사람의 휘호와 공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용원의 흉상은 없었고, 조부의 생애와 휘호는 비문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조사 결과, 은평공원뿐만 아니라 원정동 김용원 선생 공적비, 효평동 이돈직 공적비, 대덕구 비래동산(무궁화동산) 비문에도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조부인 이돈직의 부풀려진 공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3년 12월, <오마이뉴스>는 '독립투사의 공적비가 변조된 사연'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 사건을 보도했다. 기사는 "대전 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용원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에 무명의 '이돈직' 끼워넣기로 독립운동가를 만들려는 첫 시도"라고 비판했다.
<오마이뉴스>는 또한 대전애국지사숭모회 등이 대전 곳곳에 세운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 이돈직의 비문에 새겨진 항일운동 행적과 김용원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고 무리하게 끼워넣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대전시 지원을 받아 은평공원에 세워진 이돈직 생애비와 휘호비는 사업 목적에 맞지 않고, 휘호비는 불법 조형물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이인구 명예회장 등은 2004년 4월 <오마이뉴스>와 MBC를 상대로 총 16억원(2심에서는 1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의 항일운동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오마이뉴스> 보도에 대해 "허위 내용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06년 10월, 대전고등법원은 이인구 명예회장 등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MBC에 대한 청구도 기각되었으며, 원고 측은 상고를 포기하여 소송이 종결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가 반일 항일투쟁을 하고 애국지사 김용원과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실증적인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한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국고를 지원받아 엉뚱한 사람의 공적비를 세웠다는 <오마이뉴스> 보도에 대해서도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대전시로부터 보조금을 신청하면서 계룡건설 이 명예회장 조부에 대해서는 사업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며 "진실에 부합된다"고 덧붙였다.
2003년 당시 이돈직을 기리는 기념비는 무궁화동산, 은평공원, 효평동 세 곳에 있었다. 2019년 현재 월평공원 휘호비와 생애비, 무궁화동산 공적비와 휘호비는 철거된 상태이다. 이는 힘있는 후손에 의해 조상의 공적이 부풀려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7.3. 역사적 진실의 중요성
2000년 11월 22일, 김용원의 손녀 김옥경은 조부의 유적비 건립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은평공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비문에는 김용원 대신 '이돈직'이라는 인물의 휘호와 공적이 새겨져 있었고, 김용원의 생애와 휘호는 뒷면에 있었다. 조사 결과, 은평공원뿐만 아니라 원정동 김용원 선생 공적비, 효평동 이돈직 공적비, 대덕구 비래동산(무궁화동산) 비문에도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조부인 이돈직의 부풀려진 공적이 기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3년 12월, <오마이뉴스>는 '독립투사의 공적비가 변조된 사연'을 보도하며, 김용원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에 이돈직을 끼워 넣어 독립운동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또한 대전시 지원으로 은평공원에 세워진 이돈직 생애비와 휘호비는 사업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휘호비는 불법 조형물이라고 밝혔다.
이에 이인구 명예회장 등은 2004년 4월 <오마이뉴스>와 MBC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의 항일운동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오마이뉴스> 보도에 대해 "허위 내용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06년 10월, 대전고등법원은 <오마이뉴스>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으며, MBC에 대한 청구도 기각했다. 원고 측은 상고를 포기하여 소송이 종결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의 항일운동 및 김용원과의 독립운동 주장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며, 기사 내용은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대전시 보조금을 신청하면서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를 사업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오마이뉴스> 보도가 진실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2003년 당시 이돈직을 기리는 기념비는 무궁화동산, 은평공원, 효평동 3곳에 있었다. 2019년 현재 월평공원과 무궁화동산의 공적비와 휘호비는 철거되었다. 이는 힘 있는 후손에 의해 조상의 공적이 부풀려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