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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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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일권은 러시아에서 출생하여 만주와 일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만주군 장교로 활동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에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 육군 참모총장과 3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이후 외교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지내며 정치 활동을 했으며, 친일 행적과 정인숙 사건 관련 의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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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 정일권
1954년 정일권
이름정일권
본명정일진
청사
일본식 이름나카시마 잇켄 (中島一權)
러시아식 이름이켄 테이 (ИккЭн ТЭи)
출생일1917년 11월 21일
출생지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
사망일1994년 1월 17일
사망지미국 하와이주
종교개신교
국적대한민국
본관영광 정씨
배우자윤계원(사별), 박혜수(재혼)
자녀3남 4녀 (장녀 정영혜, 차녀 정성혜, 삼녀 정지혜, 장남 정기훈, 사녀 정희진)
부모정기영(부), 김순복(모)
친인척정좌진(친조부)
정도기(재종조부)
박종식(계취 장인)
이훈(첫째사위)
이동휘(둘째사위)
최상규(셋째사위)
이형근(사돈)
이상근(사돈)
최경록(사돈)
이창선(사돈)
이응준(사돈)
형제형 2명 (모두 어린 시절에 병으로 요절)
군사 경력
소속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41년 ~ 1945년 (만주국군)
1946년 ~ 1957년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대위 (만주국군)
대장 (대한민국 육군)
참전제2차 중일 전쟁
한국 전쟁
지휘대한민국 육군본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수상말레이시아 국왕 수호 훈장 명예 대훈장
정치 경력
직책대한민국 국무총리
임기 시작1964년 5월 10일
임기 종료1970년 12월 20일
대통령박정희
이전 총리최두선
다음 총리백두진
외교 경력
직책초대 튀르키예 주재 대사
임기 시작1957년 5월 13일
임기 종료1959년 4월 25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장면
외무부 장관조정환
외무부 차관김동조
튀르키예 대통령젤랄 바야르
튀르키예 총리아드난 멘데레스
기타 경력
정당무소속
기타대한민국의 국회의장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최고위원
웹사이트헌정회
두피디아

2. 생애

정일권은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 경원군만주 등지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만주 용정의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훗날 민주화 운동 지도자가 되는 문익환, 시인 윤동주, 사회운동가 장준하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1]

1935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1940년 졸업, 55기 해당)을 거쳐 만주군 헌병 장교로 복무했다. 이 시기 '''中島一權|나카지마 이켄일본어'''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계급은 만주군 헌병 상위(대위)였다. 이러한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등재되었다.[6]

광복 후 소련군 점령 하의 만주에서 잠시 활동하다 KGB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1945년 말 극적으로 탈출하여 월남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국군 창설 과정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채병덕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전쟁 초기 혼란 속에서 국군을 지휘했다. 특히 유엔군 사령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하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다.[3] 그러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군 내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제2군단장 등을 역임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을 지휘했으며,[4] 1957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군복을 벗은 뒤에는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터키, 프랑스, 미국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2] 1963년 박정희 정부 하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8개월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국무총리 퇴임 후에는 제8대부터 제10대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제9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91년 림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으며,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등 말년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4년 1월 17일, 치료 중이던 미국 하와이에서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2]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다음 날인 1월 18일에는 광명중학교 동창이자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문익환 목사가 별세하여, 두 사람의 극명하게 대조되는 삶의 궤적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 1. 생애 초기

정일권은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육군 통역관으로 일했으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가족과 함께 고향인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돌아왔다. 1930년에는 다시 만주로 이주하여 용정의 광명중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1]

1935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봉천군관학교(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에 추천 입학하여 1937년 9월 수석으로 졸업했다(제5기). 동기로는 김백일(당시 김찬규), 신현준 등이 있다. 졸업 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헌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뛰어난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40년 졸업(제55기 해당)하고 만주로 돌아와 헌병 장교로 활동했다. 1944년에는 만주국 육군고등군사학교에 입교했으나 재학 중 광복을 맞이했다. 종전 당시 계급은 만주국군 헌병 상위(대위)였다.

2. 1. 1. 출생과 가정 배경

한국 전쟁 당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김백일, 백선엽, 정일권(오른쪽)


정일권은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現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광 정씨 정기영(丁基永)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 김순복(金順福)으로, 셋째 아들이었다.[16]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읍이다. 할아버지 정좌진(丁座鎭) 대에 만주 간도로 이주했다. 정일권이 태어난 이듬해 첫째 형이 병으로 죽고, 1919년 둘째 형마저 요절하면서 사실상 4대 독자가 되었다.[17]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육군 극동군에서 통역관으로 일했으나,[1]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해임되었다. 혁명 후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였다. 정일권은 일본의 지배 하에서 자라며 中島一權|나카시마 잇켄일본어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받기도 했다.[1]

1924년 봄, 경원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3학년 때 아버지가 실종되었고, 1928년에는 아버지가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라고 지칭하던 말)으로 지목되어 집안의 농지가 몰수되었다. 이후 가족은 두만강을 건너 황무지를 개간하며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았지만, 정일권은 6년 만에 경원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봄, 가족은 다시 만주로 이주하여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정착했다. 정일권은 만주 간도성 용정에 있는 영신중학교에 진학했고, 우유 배달 등을 하며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1934년 5월, 학교가 통폐합되면서 광명중학교로 전학했다. 이 시기에 사회운동가 장준하,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목사인 문익환, 항일 시인 윤동주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1935년 5월, 광명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봉천군관학교(정식 명칭: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에 추천 입학했다. 입학 후 치치하얼 제3교도대에서 2개월간 부속 근무를 하고 길림헌병훈련처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재학 중에도 광명중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군인이 될 것을 권유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이주일, 최창언, 박림항 등 많은 후배들이 신경군관학교(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진학했다.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생 중 수석으로 졸업했다. 동기로는 훗날 대한민국 육군 중장이 되는 김백일(당시 김찬규)과 해병대 중장 및 외교관을 지낸 신현준 등이 있다. 졸업 후 만주국 수도 신경의 국도헌병단에 배치되었고, 같은 해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뛰어난 성적으로 동기인 김석범에 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되었다. 병과를 기병으로 변경하고 기병훈련처에서 갑종후보과정을 1년간 수료했다. 이후 소련 국경 최전선을 담당하는 독립헌병대에 배속되어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이 부대는 유사시 아무르강을 건너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폭파하는 임무를 가졌으며, 정일권은 이를 위해 계인주, 최남근 등과 일본 특수부대에서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았다. 최북단 헤이룽장성 막하(漠河)에 주둔하는 독립헌병대 제3연대에서 근무했다.

193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했다(일본 육사 55기 해당). 졸업 후 만주로 돌아와 길림헌병훈련처 연대 부교관으로 보임되었고, 요하(遼河) 방면으로 출동하기도 했다. 1941년 3월, 만주국군 헌병 중위로 진급했으며 이 시기에 결혼했다. 같은 해 신경에 있는 만주국군 총사령부 고급 부관실에서 근무했다. 1942년에는 모교인 광명중학교에서 만주국군 장교가 될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하여 간도(延吉) 분단 헌병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헌병총단 부관 신분으로 일본 육군대학교에 해당하는 만주국 신경의 육군고등군사학교(1943년 설립)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합격자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으나, 재학 중이던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종전 당시 계급은 만주국군 헌병 상위였다.

2. 1. 2. 학창 시절

러시아 제국 육군 통역 장교였던 아버지 정기영(丁基永)과 어머니 김순복(金順福) 사이에서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어릴 때 사망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아버지가 러시아 제국 육군 중위 계급으로 강제 전역(면직)되고 감시를 받게 되자, 1922년 어머니와 함께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도 처형을 면하고 뒤따라 경원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나카시마 이켄(Nakashima Ikken)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받기도 했다.[1]

1924년 봄, 경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1926년 3학년 재학 중 아버지가 실종되었고, 1928년에는 아버지가 불령선인이라는 이유로 할아버지 정좌진이 개간했던 농경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가족은 두만강변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극빈한 생활을 해야 했다. 정일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930년 경원보통학교 6년 과정을 마쳤다.

1930년 봄, 만주 북간도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신문팔이, 우유배달, 일본인 집 물지게 운반 등으로 직접 학비를 벌어야 했다.[18] 1934년 5학년 재학 중, 일제 관헌의 정책에 따라 영신중학이 학교법인 광명학원에 흡수되었고, 이듬해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특히 문익환은 훗날 대한민국 제3공화국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 정일권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1935년 광명중학교 졸업 후, 성적이 우수하여 봉천군관학교에 추천 입학했다.

2. 2. 군인 활동

정일권은 만주국 봉천군관학교(1937년 9월 졸업)와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55기)를 졸업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시기 '''中島一權|나카지마 이켄일본어'''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만주국군 헌병 상위(대위)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의 만주 침공 당시 잠시 소련군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월남했다.

1946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군사 훈련 중이었으나, 1950년 6월 30일 급히 귀국하여 중장으로 진급, 채병덕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쟁 초기 패주하던 국군을 재편성하고 유엔군 사령부와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2] 7월부터 8월까지 부산 교두보에 집결한 모든 한국군의 사령관을 맡았으며,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하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3]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의 책임을 지고 1951년 7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1952년 7월 귀국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사단장으로 강등되어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기도 했다. 석 달 후 미 제9군단 부사령관으로 진급하여 여러 공세와 방어 작전에서 최전방 유엔군을 지휘했으며, 다시 석 달 뒤에는 제2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4] 1957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며 군 생활을 마쳤다.

2. 2. 1. 사관학교 생활

1935년 5월 광명중학교 영어교사 장내원의 권유와 교련 교관의 추천으로 만주국의 초급 장교 양성기관인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런처)에 합격했다. 같은 해 6월 1일 치치하얼 제3교도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봉천군관학교에서 정식 과정을 이수했다.

봉천군관학교 재학 중에도 종종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군인이 될 것을 권유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이주일, 최창언, 박림항 등이 신경군관학교에 진학했다.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동기생 김석범에 이어[19]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병과를 보병에서 기병으로 변경했기 때문에,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 갑종후보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홋카이도에 위치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55기)에 1939년 입학하여 기병 전술을 배웠다. 이 시기 '''中島一權|나카지마 잇켄jpn'''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재학 중 다른 만주계 유학생들과 함께 우시마 미츠루 교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와 길림헌병훈련처 연대 부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에는 헌병총단 부관 신분으로 일본 육군대학교급인 만주국 신경의 육군고등군사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합격자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으나, 재학 중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이했다.

2. 2. 2. 만주군 장교 활동

1935년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9월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신경(新京)의 국도헌병단에 근무했으며, 뛰어난 성적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 대상자로 추천되었다. 유학 전 병과를 기병으로 변경하고 관련 훈련을 받았다.

1938년에서 1939년경, 소련 국경 최전선을 담당하는 독립헌병대 제3연대에 소대장(배장)으로 배치되어 근무했다. 이 부대는 유사시 아무르강을 건너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배치 전 계인주, 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 특수부대에서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았다.

1939년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 '''中島一權|나카지마 이켄일본어'''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1940년 육군사관학교(기병 55기 상당)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길림헌병훈련처 연대 부교관으로 보임되었고,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하기도 했다.

1941년 3월 만주군 헌병 중위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신경에 있는 만주국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했다. 1942년에는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하여 졸업 예정자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라고 연설하며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이후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하여 간도(延吉) 분단 헌병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만주국의 고급장교 양성기관인 고등군사학교(1943년 신징에 설립)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합격자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으나, 졸업을 앞두고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당시 계급은 만주군 헌병 상위였다.[6]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그는 만주군에서 헌병 상위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의 만주 침공 당시, 그는 잠시 소련군에 체포되어 KGB의 심문을 받기도 했다.

정일권의 만주국 군 장교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을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등재되었다.

2. 2. 3. 일본군 근무

태평양 전쟁 후반 일본군에 복무했다. 사학자 류연산은 정일권에 대해 '그는 간도헌병대 대대장으로 일본군 중령이었고, 해방 전 만주국 군대에서 계급이 제일 높은 조선인이었다. 그는 일제로부터 훈장을 여러번 수여받는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20]

1935년 5월, 광명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에 추천 입학했다. 6월 1일부터 치치하얼(齊齊哈爾) 제3교도대에서 2개월간 부속 근무를 했고, 이후 길림헌병훈련처에서 수학했다.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로 수석 졸업했으며, 동기로는 김백일(훗날 한국 육군 중장), 신현준(훗날 한국 해병대 중장, 외교관) 등이 있다. 졸업 후 신경(新京)의 국도헌병단에 근무했고, 같은 해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뛰어난 성적으로 평가받아 동기인 김석범(金錫範)에 이어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되었다. 병과를 기병으로 변경하고 기병훈련처에서 갑종후보과정을 1년간 수료한 뒤, 1939년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했다. 그는 또한 일본식 이름인 '''中島一權|나카지마 이켄일본어'''을 사용했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기병 55기 상당)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와 길림헌병훈련처 연대 부교관으로 보임되었다. 1941년 3월에는 헌병 중위로 진급했고, 같은 해 신경에 있는 만주국군 총사령부 고급 부관실에서 근무했다. 1942년에는 헌병 상위로 진급하여 간도(延吉) 분단 헌병대장으로 근무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그는 만주국군에서 군사 경찰(헌병) 장교로 복무한 것이다.

1944년, 헌병총단 부관 신분으로 일본 육군대학교에 해당하는 만주국 신경의 육군고등군사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합격자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으나, 재학 중이던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종전 당시 계급은 만주국군 헌병 상위였다.[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의 만주 침공 이후, 그는 잠시 소련군에 체포되어 KGB의 심문을 받았다.

2. 2. 4. 광복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만주국군 헌병 상위(대위)였던 정일권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를 모색했다. 종전 직전, 만주국 정부와 군 수뇌부는 소련군의 남하를 피해 퉁화(通化)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정일권은 헌병총단 사령관 류성화(劉昇華)의 희망에 따라 신징(新京, 현재의 창춘시)에 남아 잔무 처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화되는 치안 상황 속에서 헌병총단만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 재만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정일권은 신속하게 '만주교민보안대'를 조직하고 스스로 사령관이 되었다.[7][8] 이 조직에는 이한림, 최장언(崔昌彦), 최주종, 김석범 등 만주군 시절부터 정일권을 따르던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며칠 후에는 만주군 중좌(중령) 출신인 원용덕도 합류했다. 이들은 곧 조직의 명칭을 광복군으로 바꾸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간판을 바꾸었다.

1945년 8월 18일, 소련군이 신징에 진주하자 정일권은 조선인교민회, 베이징에서 파견된 독립연합민단장 신숙, 그리고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이한림, 최주종, 김동하, 윤태일 등과 협의하여 기존의 만주군 및 관동군 출신 조선인 군인 약 400명을 모아 '신경보안사령부'를 창설하고 다시 사령관을 맡았다.

1945년 9월, 정일권은 최주종 등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건국준비위원회의 박승환 등과 접촉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만주로 돌아왔다. 10월 중순에는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의 아들이자 국민혁명군 중장인 장경국과 접촉하여 무기와 예산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달, 김석범에게 신경보안사령부 사령관 자리를 넘겨준 직후 정일권은 소련 KGB에 연행되었다. KGB는 신경보안사령부를 해산시키고 무기를 회수했으며, 정일권에게 모스크바에서 6개월간 재교육을 받은 뒤 북한에서 군 창설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일권은 유학 시험에 불합격했고, 소련군을 비방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악질 분자'로 분류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질 위기에 처했다.

1945년 12월 중순, 정일권은 시베리아행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평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군관학교 후배인 백선엽의 집에 며칠간 머문 뒤,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 월남했다.

2. 2. 5. 소련군 포로생활과 월남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만주국 헌병총단 부관이었던 정일권은 신경(新京, 현 창춘시)에 남아 치안 유지 및 재만 조선인 보호를 위해 '신경보안사령부'를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었다.[7][8] 이 조직에는 최창언, 김석범, 원용덕 등 만주 인맥과 이한림, 최주종, , 윤태일 등이 합류하여 한때 병력이 400명에 달했으며, '동북지구광복군사령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정일권은 최창언, 최주종과 함께 서울로 가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박승환 등과 접촉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만주로 돌아왔다. 10월 중순에는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를 만나 무기와 예산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같은 달, 사령관직을 김석범에게 넘긴 직후 소련군 정보기관인 KGB에 연행되었다.

KGB는 정일권에게 신경보안사령부를 해산하고 무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며, 모스크바에서 6개월간 군사 재교육을 받은 뒤 북조선으로 가서 군대 창설에 참여하라고 제안했다. 정일권은 처음에는 소련 유학을 결심했으나, 유학 직전 자격시험에서 불합격했다. 이는 KGB의 비밀공작원이 된 중학교 동창 최 아무개가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치자"고 제안한 것을 정일권이 수락하면서 '반동분자'로 몰린 함정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감옥에서 소련 인민군을 비방한 사실까지 드러나 '악질분자'로 분류되어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1945년 12월 중순, 국부군 및 만주국 관료 출신들과 함께 시베리아행 열차로 이송되던 중, 정일권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만주군 시절 알고 지내던 고향(함경북도 경원) 출신 아편장수 김만옥의 도움을 받아 기차로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는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의 비서실에서 봉천군관학교 후배인 백선엽을 만났고, 며칠간 머문 뒤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경기도 개성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2. 3. 광복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만주국에 남아있던 정일권은 소련군 진주와 혼란 속에서 '신경보안사령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KGB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시베리아행 열차에서 탈출하여 1945년월남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국군 창설 과정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는 미국에서 군사 훈련 중이었으나, 급히 귀국하여 1950년 6월 30일 채병덕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전쟁 초기 패주하던 국군을 재편하고 유엔군 사령부와의 협력을 조율했으며, 특히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하여 전쟁 영웅으로 평가받기도 했다.[3] 그러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 후 잠시 좌천되기도 했으나, 이후 제2군단장 등을 역임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을 지휘했다.[4]

1957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터키, 프랑스,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2] 1963년부터는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71년부터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3차례 당선되었으며,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제9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1991년 림프암 진단을 받고 하와이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등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4년 1월 암이 재발하여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2]

2. 3. 1. 해방 정국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 정일권은 만주국 신경에서 만주국군 헌병총단 사령부 소속으로 잔무 처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신경의 치안은 악화된 상태였고, 1945년 8월 14일경 임시 거처에 도착한 정일권은 헌병총단을 떠나 재만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는 곧 신경보안사령부를 결성하고 스스로 사령관이 되었으며[7][8], 최창언, 김석범 등 만주 인맥과 만주국군 중좌 출신 원용덕 등이 합류했다. 이후 “동북지구광복군사령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8월 18일 소련군이 신경에 진주하자 이한림, 최주종, 김동하, 윤태일 등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이 추가로 합류하여 병력이 400명 규모로 늘어났다.

1945년 9월, 정일권은 최주종 등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여 건국준비위원회의 박승환 등과 접촉했으나 곧 만주로 돌아갔다. 10월 중순에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의 아들인 장경국과 접촉하여 무기와 예산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달, 김석범에게 신경보안사령관 자리를 넘겨준 직후 소련의 KGB에 체포되었다. KGB는 신경보안사령부를 해산시키고 무기를 회수했으며, 정일권에게 모스크바 유학 후 북한군 창설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유학 시험에 불합격하고 소련군 비방 사실까지 드러나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1945년 12월 중순, 시베리아행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평양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군관학교 후배인 백선엽의 집에 머물다가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 월남했다.

서울에 도착한 정일권은 1945년 12월 15일,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했다. 다음 해인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정위(대위)로 임관(군번 5번)했다.[21] 임관 후 국방경비대 제1연대 중대장을 시작으로, 제4연대장과 경비대 총참모장을 차례로 역임했다.[22] 1946년 5월 1일 조선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창설되면서 정식 대위 계급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 제4연대의 임시 연대장을 맡았고, 1947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조선경비대 총참모장을 거쳐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2. 3. 2. 대한민국 군인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의 만주 침공 이후, 만주국 신경(新京)에 남아있던 정일권은 재만 조선인의 보호를 명목으로 '신경보안사령부'를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었다.[7][8] 여기에는 최창언, 김석범, 원용덕 등 만주 인맥이 참여했으며, 이후 이한림, 최주종, 김동하, 윤태일 등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이 합류했다. 1945년 10월,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과 접촉하여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곧 KGB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소련 측은 그에게 재교육 후 북한군 창설 참여를 제안했으나, 소련군 비방 사실이 드러나 시베리아 유형 위기에 처했다. 1945년 12월, 시베리아행 열차에서 탈출하여 평양의 백선엽에게 잠시 머문 뒤,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 하 남조선국방경비대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군번 5번)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정위(소위)로 임관하여 제1연대 B중대장을 맡았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창설 초기 혼란 속에서 장교들의 이념 대립과 물자 횡령 등 기강 해이가 심각했는데, 정일권은 제1연대 영내 집회 사건, 제4연대 대대장 습격 사건 등의 수습에 관여했다. 이후 제4연대장 겸 대대장(1946년 5월), 육군사관학교 교장(1947년 1월), 국방경비대 총참모장(1947년 9월) 등을 역임하며 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참여했다.

장경근 국방부 차관(좌), 신성모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정일권(우)(1950년 촬영)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 작전참모부장을 맡았고, 1949년 2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3월 1일에는 지리산 지역 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어 남로당 유격대 토벌 작전(지리산 공비 토벌)을 지휘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미국 시찰 중이었으나, 6월 30일 급히 귀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수도 서울 함락의 책임을 물어 해임된 채병덕 장군의 후임으로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7월에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패주하는 대한민국 군대를 재편성하고 유엔군 사령부와의 작전 협력을 조정하는 데 주력했으며,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하며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3]

그러나 1951년 6월, 군 지휘부의 총체적 부실과 부패를 드러낸 국민방위군 사건과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낳은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감독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중장으로 진급하여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2년 7월 귀국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제2사단장으로 강등되어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3개월 뒤 미국 제9군단 부사령관으로 발탁되었고, 다시 3개월 후인 1953년 2월에는 제2군단장에 임명되어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군단을 지휘했다.[4]

한국 전쟁 휴전 후인 1954년 2월, 대장으로 진급하며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56년 6월에는 초대 합동참모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57년 6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며 군 생활을 마감했다.

'''주요 군 경력'''
연도내용
1946년 1월군사영어학교 졸업 (군번 5번),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정위 임관, 제1연대 B중대장
1946년 5월제4연대장 겸 대대장
1947년 1월육군사관학교 교장
1947년 9월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총참모장
1948년 8월육군 작전참모부장
1949년 2월육군 준장 진급
1949년 3월지리산 지역 전투사령부 사령관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1950년 6월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임명 (한국 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대한민국 육해공군 총사령관
1951년 6월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책임으로 참모총장 사임
1951년육군 중장 진급,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 유학
1952년 7월제2사단장
1952년 11월미국 제9군단 부군단장
1953년 2월제2군단장 (휴전 시까지)
1954년 2월육군 대장 진급, 육군참모총장 재임명
1956년 6월합동참모회의 의장
1957년 6월예비역 편입


2. 3. 3. 전역

1956년 6월 합동참모본부 의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프랑스 명예훈장과 미합중국 총사령관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말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서 남베트남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57년 5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2. 3. 4. 외교관 활동

1957년 대한민국 육군에서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4] 그해 6월 터키 주재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고, 1959년에는 프랑스 대사, 1960년에는 미국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미국 대사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그리고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두 차례 역임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옥스퍼드하버드 등에서 정치학과 국제 관계를 공부하기도 했다.[2]

1975년경 정일권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후 박정희 정부 하에서 1964년부터 1970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이는 제3공화국 시기의 주요 직책이었다. 국무총리 재임 중이던 1965년 1월부터 2월 사이에는 윈스턴 처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으며, 귀국길에 파리에서 일본 대표 기시 노부스케와 만나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한 3국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9] 또한,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으로부터 질문을 받던 중 국회 오물투척사건을 겪기도 했다.

1970년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상임고문을 맡았다. 1971년 7월부터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8대, 제9대, 제10대 국회의원을 연임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는 제9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후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을 맡는 등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 3. 5. 정치 활동

1957년 군에서 은퇴한 후, 터키 주재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2] 1959년에는 프랑스 대사, 1960년에는 미국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미국 대사로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그리고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두 차례 재임했다.[2]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옥스퍼드하버드와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과 국제 관계를 공부하기도 했다.[2]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외무부 장관(제11대)을 역임했으며,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제9대)를 지냈다.[2] 국무총리 재임 중이던 1965년에는 윈스턴 처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고, 귀국길에 파리에서 일본 측 대표인 기시 노부스케와 만나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한 3국 협의를 진행했다.[9] 또한,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으로부터 질문을 받던 중 오물 투척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제13대 외무부 장관도 역임했다.

1970년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상임고문을 맡았다. 1971년 7월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제9대, 제10대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는 제9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91년 3월, 림프암 진단을 받고 하와이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2]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고,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등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2] 그러나 1994년 1월, 암이 재발하여 하와이에서 입원 치료 중 사망했다.[2]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2]

연도주요 경력 및 활동
1957년 6월예비역 편입, 주 터키 대사 임명
1959년프랑스 대사 임명
1960년미국 대사 임명 ( ~ 1961년, 1962년 ~ 1963년)
1963년외무부 장관 임명 (제11대, ~ 1964년)
1964년국무총리 임명 (제9대, ~ 1970년)
1965년윈스턴 처칠 국장 참석 (영국 방문), 한일기본조약 관련 3국 협의 (파리)
(미상)외무부 장관 임명 (제13대)
1970년민주공화당 상임고문
1971년 ~ 1980년국회의원 (제8대, 9대, 10대 / 민주공화당)
1973년 ~ 1979년제9대 국회의장
1991년림프암 발병 및 치료 시작 (하와이)
1992년민주자유당 상임고문,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 지지
1994년 1월하와이에서 사망,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국장)


2. 3. 6. 장기영과의 갈등

정일권과 장기영은 겉으로 보기에 크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41] 특히 장기영이 부총리로 재직할 당시에는 나라의 경제 정책을 거의 혼자서 처리했으며, 대통령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고 총리인 정일권이 경제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해 두었다.[41] 정일권 스스로도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인정했고, 본래 다툼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장기영과의 직접적인 큰 갈등은 피했다.[41]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격이 존재했고, 정인숙 사건이 터지면서 갈등의 양상이 드러났다. 정인숙 사건이 국내 언론에 알려지자 중앙정보부는 즉시 언론 통제에 나섰으나, 당시 언론계에 있던 장기영은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계를 비호했다. 이 일을 두고 장기영이 정일권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공작을 벌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41]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장기영이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며, 정인숙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일권의 실각을 압박하려 했다고 전한다.[41]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기영은 정일권보다 3년 먼저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41]

2. 4. 생애 후반

1991년 3월 림프암 치료를 위해 미국 하와이주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유세를 펼쳤다. 1993년에는 정인숙의 자녀가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병인 림프암이 악화되어 1994년 1월 하와이의 병원에 입원했으나, 1월 17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으로 운구되어 1월 22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영결식을 거친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다음 날인 1월 18일에는 같은 중학교 출신인 민주화 운동가 문익환 목사가 별세하여,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이 언론에 의해 조명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어 총 11년간 옥고를 치렀다.

2. 4. 1. 정치 활동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으나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여,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민주공화당 의장 상임고문을 지냈다. 1971년 7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제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유신 헌법이 통과될 당시 민주공화당 의장을 맡았으며, 협력위원회 제8회 합동위원회 한국 측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재선에 성공했다.

유신 체제 하에서 입법부가 행정부의 결정에 따라 법안을 통과시키는 역할에 머물러 국회가 '통법부'나 '행정부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던 시기인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73년에는 국제의원연맹(IPU) 및 아시아의원연맹(APU) 한국지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79년 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3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연맹 회장에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 26일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도 약화되었고, 이후 주로 하와이에서 지냈다.

1989년 10월에는 일본에서 『원폭인가 휴전인가-전직 한국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 대장)이 밝히는 한국전쟁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책을 일본어로 출판했다.

1991년 3월, 림프암 치료를 위해 미국 하와이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고,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유세 활동을 벌였다. 1993년, 과거 스캔들 상대였던 정인숙의 아들이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병인 림프암이 악화되어 치료를 위해 다시 하와이로 출국했고, 1994년 1월 하와이 스트라우브 병원에 입원했다가 1월 17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으로 운구되어 1월 22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영결식이 거행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시기는 공교롭게도 같은 중학교 출신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던 문익환 목사가 별세한 다음 날(1월 18일)이어서,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이 언론에 의해 조명되기도 했다.

2. 4. 2. 정계 은퇴 이후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이후 내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내사 종결되었다. 같은 해 8월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이후 제5공화국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정치 원로이자 시민사회단체 원로로서 활동하며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제6공화국 시기인 1988년에는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89년에는 한국자유총연맹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민주자유당 출범 이후에는 상임고문을 지냈다. 1990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재선되었으며, 그해 초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서재에는 늘 박정희의 사진이 걸려 있었으며, 박정희를 언급할 때는 항상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박정희가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고 늘 '선배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1989년 10월에는 일본에서 『원폭인가 휴전인가-전직 한국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 대장)이 밝히는 한국전쟁의 진실』(일본공업신문사)이라는 제목의 책을 일본어로 출판했다.

1991년 3월에는 임파선 종양 치료를 위해 미국 하와이에서 요양을 시작했다. 미국에 체류하던 중, 과거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성일이 찾아와 친자임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이후에는 만남 자체를 피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는 김영삼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직접 전국을 돌며 지원 유세를 펼쳤다. 그러나 1993년 1월에 민주자유당을 탈당했다. 1993년 정성일은 다시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지병이 악화되어 신병 치료차 출국했고, 1994년 1월 미국 하와이 스트라웁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생전 6.25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금성 및 은성 태극무공훈장, 일등수교훈장 등을 받았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주 스트라웁병원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비행기로 한국에 운구되어 1월 22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고,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일권이 사망한 다음 날인 1994년 1월 18일에는 문익환 목사가 사망했는데, 두 사람은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서로 다른 삶의 궤적으로 인해 크게 비교되어 보도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가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어 총 7회, 11년에 달하는 옥중 생활을 겪었다.

2. 4. 3. 사망

1991년 3월, 림프암 치료를 위해 미국 하와이주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유세 활동을 벌였다. 1993년에는 정인숙의 자녀가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병인 림프암이 악화되어 다시 치료를 위해 출국했고, 1994년 1월 하와이주 스트라우브 병원에 입원했으나 1월 17일 사망했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귀국하여 1994년 1월 22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국회의원 이만섭의 주도로 영결식과 노제가 거행되었다. 이후 경찰의 호송 아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정일권과 같은 광명중학교 동문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문익환 목사가 비슷한 시기인 1994년 1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문 목사의 영결식은 한신대에서 시작해 대학로,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명이 참여한 노제로 치러진 반면, 정일권의 장례식은 현충원에서 주로 정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져 대조를 이루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태어나 같은 중학교를 다녔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갔으며,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익환은 민주운동가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옥중 생활은 7회 11년에 달했다.

3. 논란과 의혹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이 자신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1991년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42] 이 사건은 정성일의 생부 논란과 함께 정인숙 피살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혹까지 불러일으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 정성일의 주장, 주변 인물들의 엇갈리는 증언, 정일권의 금전 지원 의혹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정성일의 생부 설

1991년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자신이 정일권의 아들이라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42] 그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주장했다.[42] 정성일은 어머니 정인숙 사망 후 외가에서 자라다가 1985년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건너갔고 1990년 귀국했다.[42]

1989년 가석방된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43] 그는 정일권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서교동 집에 찾아왔고, 정인숙에게 아들을 낳아달라고 요청했으며, 출산 후에는 '성일'이라는 이름까지 직접 지어주었다고 증언했다.[44] 정종욱은 출소 후 인터뷰에서 자신은 동생을 죽이지 않았으며 정성일은 정일권의 아들이 확실하다고 거듭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45]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 역시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일권이 1971년 봄, 선우휘를 찾아가 이동원 외무장관과의 술자리에서 정인숙을 알게 되었고 아들을 낳았지만 공개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고 말했다.[46][43]

그러나 같은 해 정일권을 만난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으로부터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다.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하며 상반된 주장을 내놓았다.[47]

2000년대 이후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2007년 초 일요신문의 취재 결과, 당시 주변 관계자들은 정성일의 아버지가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일권이 생전에 정성일 측에게 상당한 금전적 지원을 했다고 증언했다.[35] 또한 이들은 정인숙 살해범으로 가족들조차 넷째 오빠를 지목하고 있다고 전했다.[35] 60~70년대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전직 국회의원 이 아무개는 정인숙의 넷째 오빠가 변변한 직업 없이 돈 문제로 가족 및 동생과 불화가 잦았으며, 사건 이후 가족들 모두 그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35]

정성일은 자신의 책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에서 1991년 11월 미국에서 정일권과 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했으며, 당시 정일권이 "아가야, 나는...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라고 말했다고 묘사했다.[48] 하지만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해서는 "최근 정씨(정일권)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하며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48]

정일권의 측근들 사이에서도 관련 증언이 나왔다. 한 전직 의원은 정일권 부인이 사건 전부터 남편이 밖에서 아들을 만들었다고 한탄했으며, 4대 독자였던 정일권이 아들을 원했다는 배경을 전했다.[35] 다른 측근인 김 아무개 전 의원은 정일권이 정성일 측에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음에도 계속 손을 벌려 관계가 멀어졌으며, 정성일의 범죄 소식에 분개했다고 전했다.[35] 또 다른 김 전 의원은 DNA 검사가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성일이 돈을 얻기 위해 친자확인 소송 소동을 벌여 정일권이 곤혹스러워했다고 말했다.[35] 그는 정성일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외가 및 정일권 측과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1991년 소송 당시 정일권 측이 거액으로 무마했지만 이후에도 정성일이 방송 인터뷰 등으로 문제를 일으켜 정일권 측이 매우 불쾌해하며 '상종 못 할 놈'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전했다.[35]

정성일은 2005년 12월 귀국 전까지 15년 이상 미국 LA에 거주했는데, 현지 한인 사회에서는 그가 자신을 '정 전 총리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씀씀이가 크고 스캔들도 많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정일권으로부터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도 무성했다고 한다.[35]

3. 2. 정성일 관련 의혹

1991년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정인숙)와 교제해 다음 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며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42] 정성일은 정인숙 사망 후 외가에서 자라다가 고등학생 때인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90년에 귀국했다.[42]

1989년 가석방된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43] 그는 정일권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서교동 집에 찾아왔고, 동생 정인숙이 '그이가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한다'며 상의해 가족들이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말했다. 또한 출산 후에는 정일권이 일주일에 한 번꼴로 찾아와 성일이를 안고 기뻐했으며,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소원을 이뤘다'는 뜻으로 '성일'이라는 이름도 직접 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정성일 역시 TV에 정일권이 나오면 '아빠'라고 소리치며 좋아했다고 덧붙였다.[44] 정종욱은 출소 후 인터뷰에서 자신이 동생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내 동생 아들 성일이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확실하다"고 재차 강조했다.[45]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 역시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일권 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이동원 외무장관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정 여인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고 말했다.[46][43] 그러나 같은 해 정일권을 만난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으로부터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47]

2000년대 이후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견해가 다시 제기되었다. 2007년 초 언론 취재 결과, 당시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일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요신문은 정성일의 판사 납치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 당시 여야 국회의원들을 만났고, 이들은 정성일의 친아버지가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일권이 생전에 정성일 측의 요구로 상당한 금전적 지원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정인숙의 살해범은 가족들조차 넷째 오빠로 확신하고 있다는 내용도 전해졌다.[35] 기자가 입수한 전직 국회의원 등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일권은 1994년 타계 전까지 금전적 도움을 주었으나 정성일 측이 자주 돈을 요구하여 관계가 멀어졌다고 한다. 또한 정인숙 살해범은 넷째 오빠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 공통된 진술이었다.[35]

60~70년대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이 아무개 전 의원은 정인숙의 둘째 오빠와 고교 동창이라 집안 사정을 비교적 잘 안다고 밝히며, "선친은 대구부시장을 지낼 정도로 집안이 괜찮았고 형제들도 모두 똑똑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넷째가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서 좀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다. 그런 오빠를 안타깝게 여겨 정인숙이 운전기사로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돈 씀씀이가 헤퍼 형제들은 물론 여동생과도 불화가 잦았다고 한다”고 전했다.[35] 이 전 의원은 “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친구를 비롯한 그 가족들 모두 넷째 오빠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다. 가족들이 그렇게 확신하는데 무슨 다른 의문이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지금도 넷째는 가족들과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친구는 ‘어떻게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나. 오빠가 동생을 돈 때문에 쏴 죽이다니. 정말 집안 망신이다’라며 심하게 자책했다”고 덧붙였다.[35]

정성일은 자신의 책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에서 1991년 11월 미국에서 정일권과 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한 상황을 묘사했다. 이때 정일권은 "아가야, 나는.....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48] 그러나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최근 정씨(정일권)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하며,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48]

정성일의 친아버지 논란에 대해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은 계속되었다. 앞서 언급된 이 전 의원은 “우리 친인척 중 한 분이 정 전 총리 부인과 이웃에 살며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정 전 총리 부인이 친구에게 자기 집 남편을 가리키며 ‘어디서 아들 하나를 만들었다’고 한숨짓고는 했다고 한다. 실제 4대 독자였던 정 전 총리에게는 딸만 셋뿐이었기에 생전에 그 모친의 아들 독촉이 아주 성화였다고 한다”고 전했다.[35] 또 다른 관계자는 “정 전 총리의 측근인 김 아무개 전 의원과 얼마 전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최근 납치범으로 보도된 정 씨에 대해 고개를 흔들더라. ‘(금전적으로)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도 툭하면 손을 내밀고 하더니, 그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런 흉악한 범죄까지 저질렀다’고 분개하더라”고 전했다.[35]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 전 의원은 금품 지원설에 대해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니 나 말고 정 전 총리의 비서를 지냈던 신 아무개 전 의원이나 김 아무개 전 의원 등에게 물어보라”며 즉답을 피했다.[35]

정일권의 비서를 지낸 또 다른 김 전 의원은 “어쨌거나 정확한 DNA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친아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정 씨가 넷째 외삼촌과 함께 돈을 얻을 생각으로 정 전 총리를 직접 지목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하느니 소동을 벌여 상당히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35] 그는 “정 씨(정성일)는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외가는 물론 정 전 총리 측과도 완전 결별하다시피 했다. 91년 그가 한국에 와서 친자확인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정 전 총리 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켰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한국에 나타나서 방송 인터뷰니 뭐니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 정 전 총리 측에서 아주 고개를 흔들 정도로 불쾌해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종해선 안 될 놈’이라는 막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고 전했다.[35]

한편, 정성일은 2005년 12월 귀국 전까지 15년 이상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머물렀는데, 당시 한인 사회에서는 그의 존재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 교포 사회의 한 관계자는 “이곳 현지 명문대 출신으로 화술이 좋고 생김새가 번듯했던 정 씨는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하는 일에 비해서 씀씀이도 컸고, 스캔들도 제법 많았다. 자신을 ‘정 전 총리의 아들’이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정 전 총리로부터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전했다.[35]

4. 평가와 비판

생애 동안 2인자에 만족하며 처세술에 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현실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50]

5. 가족 관계

아버지는 정기영(丁基永)이고 어머니는 김복순(金福順)이다. 3남 중 셋째 아들이며, 형 중 한 명은 정일권과 이름이 같았으나 어릴 때 사망했다.


  • '''배우자''' : 윤계원 (尹桂媛, 첫째 부인, 사별)
  • * '''장녀''' : 정영혜 (丁映惠)
  • ** '''사위''' : 이훈 (李薰)
  • * '''차녀''' : 정성혜 (丁聖惠)
  • ** '''사위''' : 이동휘 (李東輝)
  • * '''3녀''' : 정지혜 (丁智惠)
  • ** '''사위''' : 최상규 (崔相奎)
  • '''배우자''' : 박혜수 (朴惠秀, 둘째 부인)
  • * '''장남''' : 정기훈 (丁冀勳, 아명은 정세훈(丁世勳))
  • * '''4녀''' : 정희진 (丁姬陳)

6. 기타

1970년 이후 주요 경력
연도내용
1970년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1971년성우구락부 회장
1983년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연구
1983년영국 옥스포드대 교환교수
1983년한국 재향군인회 고문
1984년프랑스 DECORSE대 초청교수
1986년범민족올림픽유치추진중앙협의회 고문
1987년자유수호 구국연합 회장
1988년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
1989년제22대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1989년 ~ 1991년초대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1992년민주자유당 상임고문
1992년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
1993년 1월민주자유당 탈당



1989년 10월, 『원폭인가 휴전인가-전직 한국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 대장)이 밝히는 한국전쟁의 진실』을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판하였다.

1991년 3월, 림프암 치료를 위해 미국 하와이주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유세 활동을 벌였다. 지병 악화로 치료차 출국하여 1994년 1월 하와이주 스트라우브 병원에 입원했고, 1월 17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항공편으로 대한민국으로 운구되어 1월 22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중학교 동창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94년 1월 18일에 사망하여,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이 언론에 의해 조명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7차례, 총 1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6. 1. 정약용 추모 행사

정일권은 다산 정약용의 추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5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 있던 정약용의 묘소와 남양주시 조안면 팔당호변(당시 양주군 조안면)에 있던 여유당(與猶堂, 다산 정약용 선생 생전 거처) 주변을 정리하고 성역화하는 사업을 주관하였다. 또한 여유당에 휘호를 새로 작성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74년 10월에는 당시 경기도지사와 함께 여유당 정약용 유적지 정비를 기념하여 자연석에 친필로 새긴 기념비를 여유당 입구에 세웠다. 그러나 이 기념비는 2000년 누군가에 의해 정으로 쪼아져 훼손되었다.

6. 2. 정인숙 사건

정인숙 살해 사건 이후 그는 정인숙의 암살 배후로 의심받기도 했다.

1967년경 이후 대한민국 정계에는 고급 요정 직원이었던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가 대통령 박정희 또는 정일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정인숙과 그녀의 유족들은 아이 아버지로 정일권을 지목했다.

이 소문은 당시 가수 나훈아가 부른 '사랑은 눈물의 씨앗'(손석 작사, 유현석 작곡)의 가사를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개사하여 부르면서 더욱 널리 퍼졌다. 세간에는 아이가 정일권을 닮았다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일부 언론이 이를 보도했으나,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로 기사가 검열되거나 삭제당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정일권에게 문책성 사퇴를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오빠 정종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던 정인숙이 총에 맞아 살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미궁에 빠졌다. 이후 정일권은 같은 해 12월 20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사건은 점차 잊혀졌다. 훗날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이 정일권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정일권은 이를 거부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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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뉴스 駐美大使 丁一權氏內定 http://dna.naver.com[...] 196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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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뉴스 韓國繼續支持 http://dna.naver.com[...] 196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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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뉴스 (주말탐방) 국회 속기사들의 세계 http://www.seoul.co.[...] 2006-11-11
[35] 뉴스 (미스터리 추적) 정인숙과 그아들, 진실은 이것 http://www.ilyo.co.k[...] 2007-04-08
[36]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37] 뉴스 정인숙 미스테리···최대 권력 섹스스캔들 http://sports.khan.c[...] 스포츠경향 2010-03-19
[38]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39]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40] 뉴스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7-03-20
[41]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
[42]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43]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44] 뉴스 오빠 정종욱 씨가 밝힌 '정인숙 사건'의 진상 경향신문 1991-01-16
[45] 뉴스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6>정인숙 사건과 나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8-07-08
[46] 뉴스 정성일이는 내 아들, 정일권씨 71년 고백 경향신문 1993-02-20
[47]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48] 서적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49] 뉴스 문명자 회고록: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2) 대한매일 1999-10-06
[50] 뉴스 동아일보 199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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