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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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1945년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정 시기,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좌익 세력의 무장 봉기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군경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2만 5천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제주도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다. 민주화 이후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어져,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와 희생자 추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과 계엄령의 적법성, 추념일 지정 등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제주 4·3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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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지도에서 제주도가 빨간색으로 강조되어 있음
기본 정보
명칭제주 4·3 사건
한자 표기濟州四三事件
로마자 표기Jeju sasam sageon
일본어 표기済州島四・三事件
사건 개요
시기1948년 4월 3일 ~ 1949년 5월 13일
장소제주도
원인대한민국 분단 및 냉전의 영향
결과봉기 진압
수많은 민간인 희생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00년)
제주도민의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 심화
대부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
이승만 정권 기반 강화
교전 세력
전투 세력 1미국 육군 군정청 (1948년 8월까지)
대한민국 (1948년 8월부터)
서북청년회
대한청년단
전투 세력 2남조선로동당
지역 지지자
지휘관 1윌리엄 F. 딘
이승만
김익렬
조병옥
박진경
송요찬
유재흥
지휘관 2김달삼
박헌영
이덕구
병력 1미국군
남조선국방경비대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경찰
이승만 지지자
병력 2남조선로동당 당원
제주도민
사상자
사상자 11,091명 사망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 640명 등)
사상자 2수천 명 사망 (1949년 3월~5월에만 2,345명 사망)
민간인 사망자14,373명 확인 (진압군 86%, 무장대 14%에 의해 사망)
총 사망자 30,000명 추정 (전투원 포함)
일부 추정치는 80,000명에 달함
제주도 당시 도지사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60,000명
섬 외부로 도피한 사람 약 21만~24만 명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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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및 경과

1945년 9월 2일, 일본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한반도38선을 경계로 미국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남쪽에는 친미적인 이승만 정권이, 북쪽에는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정권이 각각 미소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945년 9월 10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제주도에도 설립되었고, 곧 제주도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시에서 남북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3월 10일, 제주도 전역에서 항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백색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 서북청년회반공주의를 내세워 제주도민을 탄압했고, 경찰은 이들을 배경으로 도민들의 저항을 진압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도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제주 4.3 사건)를 일으켰다.

2.1. 배경 및 발단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35년간의 일제 강점기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국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남쪽에는 친미적인 이승만 정권이, 북쪽에는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정권이 각각 미소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945년 9월 10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제주도에도 설립되었고, 곧 제주도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다. 1945년 12월, 미국은 소련 및 영국과 한국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했으나 합의에 실패했고, 결국 유엔에 이 문제를 회부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 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 결의를 거부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진입을 막았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에서만 선거를 강행했고, 소련은 1948년 8월 25일 북한에서 자체 선거를 실시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시에서 남북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3·1절 발포사건) 이를 계기로 3월 10일, 제주도 전역에서 항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백색 테러를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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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북청년회반공주의를 내세워 제주도민을 탄압했고, 경찰은 이들을 배경으로 도민들의 저항을 진압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도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제주 4.3 사건)를 일으켰다.

2.1.1. 당시 제주도 상황 (1946)

해방 직후 제주도는 극심한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21만 9천여 명이던 제주도 인구는 1946년 27만 6천여 명으로 급증했다. 이러한 인구 급증은 전국적인 흉년과 맞물려 제주 사회를 더욱 압박했다. 1946년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1943년과 1944년에 비해 각각 41%, 31%에 불과했다. 제조업체 가동 중단,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여름, 콜레라가 제주도를 휩쓸면서 2개월여 동안 최소 36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1.2. 남로당의 제주도 활동 (1947)

1946년부터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제주도에서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는 미군정 보고서가 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남로당은 활동을 강화했다. 본토에서 훈련받은 선동가와 조직가 6명이 파견되었고, 곧바로 500~700명의 동조자가 합류했다. 당시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제주도민 6만~7만 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과 어민들로, 경제 상황을 해결해주겠다는 남로당의 제안에 쉽게 넘어갔다.

2.1.3. 제주 3·1절 발포사건 (1947)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이 가두 시위를 벌이던 중, 기마경관의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경관이 이를 무시하자 군중들이 항의하며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은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여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시위와 관련 없는 구경꾼도 포함되어 있어 제주도민들의 분노를 샀다.

2.1.4. 2·7 사건 (1948)

1948년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민주주의민족전선남한 단독 총선거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2·7 사건이다.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의 전초전이 되었다.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제주 4·3 사건으로 이어졌다.

2.1.5. 제주도인민유격대 결성 (1948)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총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섬 전체의 모든 마을과 읍면에 공산주의 세포를 조직하였다. 각 세포조직은 지도자, 선전원, 보급책 등으로 구성되었다. 규모가 큰 읍면에는 미군정이 무너지면 민간 정부 역할을 수행하게 될 인원까지 있었다. 세포조직을 심는 것 외에도 조직을 군사부 중심으로 개편하고 조선인민유격대 예하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김달삼을 총사령관, 이덕구를 특별경비대장에 임명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전투부대 25부대와 직속부대 25부대, 그리고 각 읍, 면 단위로 한두 개의 유격중대와 자위대가 각각 편성되었으며, 제주도인민유격대 본부는 한라산에 설치되었고 애월면 샛별 오름 하단의 들판에 훈련장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인사장교가 임명되었고, 인원 모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폭동이 절정이었을 때, 제주도인민유격대 규모는 대략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갖춘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장병력 중 10% 미만이 소총으로, 나머지는 일본도와 지역에서 만든 창으로 무장했다.

5.10 총선거가 예정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자,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은 남로당 중앙당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무장폭동을 결정하였다.

2.2.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소속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제주 4.3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공격하였다.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증파하여 사태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국방경비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북청년단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 개입은 부적절하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하였다. 김익렬은 약 일주일 동안 비행기로 삐라를 산포하여 "사건 계속은 유해무익이므로 향토 평화 회복을 위하여 손을 잡자"는 뜻을 전하고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였으나, 산중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회답은 없었다. 이에 국방경비대 특별부대는 1948년 4월 27일 오전 10시경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

1948년 4월 28일, 김익렬은 무장대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회고록에는 '귀순공작')을 벌였다. 협상 결과, '①72시간 내 전투 중지,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 보장'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29일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이 납치, 행방불명되었고, 4월 30일에는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되어 그중 한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병옥은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경찰관에 협력한 대동청년단 형수라는 이유로 죽창에 찔려 죽었다"고 주장했다. '평화협상'을 결렬시킨 결정적 사건은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었다. 오라리 방화 사건의 주범은 불분명하나, 대동청년단이나 경찰이 국방경비대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3일, 김익렬은 비행기로 "형제 제위여, 평화적 해결을 위한 권고와 교섭은 지도자의 무성의로 수포가 되었다. 국방경비대는 20일 이상을 인내했다. 전투를 개시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동족상쟁'은 원치 않는다. 속히 귀순 투항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산포하였다.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1948년 5월 5일,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진압회의가 열렸으나, 김익렬조병옥의 충돌로 결론 없이 끝났다.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는 계엄상태에서 5·10 총선을 치렀다. 당시 선거위원 상당수가 피신하거나 납치되었다고 한다.

1948년 6월 말, 김달삼9월 해주에서 개최되는 최고인민회의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주도 사태는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7년 초부터 제주도에서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지만, 1948년 4월 3일은 제주 4·3 사건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날로 여겨진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노동당 당원 사냥'이 극에 달했고, 보도연맹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도 희생이 발생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지 구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4.3사건은 종결되었다.

2.2.1. 초기 (1948.4.3 ~ 1948.10.10)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과거 일본과 협력한 경찰관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김익렬 9연대장은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과 여러 차례 협상하며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러나 정부는 완전 항복을, 무장대는 지역 경찰 무장 해제, 섬 내 정부 관리 해임 등을 요구하며 합의에 실패했다. 5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무장대는 통신 시설을 파괴하고 도로를 봉쇄하는 등 선거를 방해했다. 남로당 여성 연맹은 주민들을 산악 지역으로 피신시켜 투표를 막았고, 선거 당일 정부 시설 공격으로 선거는 무효화되었다. 제주도의 투표율은 전국 최저였고, 국회 의석 두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조선로동당(WPNK)은 38선 이남 지역에서 "지하 선거"를 조직하여 무장대 세력을 강화했다. 이후 상황이 악화되자 대한민국 당국은 여수 주둔 14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려 했으나, 이들은 "제주도민 학살"을 거부하며 1948년 10월 20일 반란을 일으켰다.( 여수·순천 사건 ) 당황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반란 진압을 강화했다.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10월 20일 이후 해안선 5km 이상 중산간 지대 통행자를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는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 마을로 강제 이주되었다.

1948년 후반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도 주민
1948년 후반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도 주민

2.2.2. 강경진압시기 (1948.10.11 ~ 1949.3.1)

1948년 10월, 송요찬 9연대장은 중산간 지역 통행을 금지하고 무차별 총살을 허용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강경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진압군은 도피자 가족을 대신 학살하는 '대살'을 자행하고, 무고한 양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2.2.3. 종결기 (1949.3.2 ~ 1954.9.21)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고 유재흥 사령관은 사면 정책을 발표하여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다. 한국군은 게릴라 2,345명과 민간인 1,668명을 사살하는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1949년 6월 7일, 주요 반군 지도자 이덕구가 사망하면서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노동당 당원 사냥'이 극에 달했고, 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토와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등이 예비검속되어 집단 희생되었고, 4.3 사건 관련 수감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바다에 버려진 시체는 일본인에 의해 인양되어 대마도의 사찰에 안치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지 구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4.3사건은 종결되었다.

3. 피해 규모

제주 4·3 사건은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큰 피해를 남겼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대한민국 전체의 1.26%에 불과했지만, 실업자 수는 73,26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의 8.24%를 차지했다. 이는 제주도 전체 인구의 28.8%가 실업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많은 제주도민들이 부산 영도 등지로 피난을 갔다. 그 결과, 제주 출신 해녀들이 부산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제주은행 부산지점은 영도구 남항동1가에 위치하며, 그 옆에는 제주도민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제주도 다랑쉬굴 학살 재현
제주도 다랑쉬굴 학살 재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군은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예방적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주도에서는 수천 명이 체포되어 위험도에 따라 A, B, C, D 네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1950년 8월 30일, 대한민국 해군 정보 장교는 제주도 경찰에게 "9월 6일까지 C, D 그룹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총살하라"는 서면 명령을 내렸다.

3.1. 인명 피해

제주 4.3 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 2019년 12월 기준 4·3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총 희생자는 14,44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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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2011년 1월 26일 기준2019년 12월 기준
총 희생자14,032명14,442명
진압군(토벌대)에 의한 희생자10,955명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1,764명1,528명
유족31,255명72,845명


가해자 비율은 진압군 78.7%(7,624명), 무장대 15.7%(1,528명), 기타 5.6%였다. 기타 사망을 제외하면 토벌대 83.6%, 무장대가 16.4%였다. 이는 주한미육군사령부의 《제주도사건종합보고서》에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 사망한 것으로 보고한 내용과 일치한다.

진압군(토벌대) 전사자는 2011년 기준 군인 180여 명, 경찰 140여 명, 우익단체 639~744명으로 추정되었다. 2019년 기준으로는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 640명 등 총 1,091명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희생자는 유아 688명, 10~15세 399명, 16~19세 1,504명, 20대 5,916명, 30대 2,466명, 40대 1,419명, 50대 1,023명, 60대 614명, 70대 388명, 미상 25명이었다. 15세 이하 아동 희생자는 2,089명(14.5%)에 달한다.

사건 단계별 사망자 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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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단계사망자 수
4·3 배경과 기점 (1947.3.1.~1948.4.2.)104명
무장봉기와 5·10선거 (1948.4.3.~1948.5.10.)214명
초기 무력충돌기 (1948.5.11.~1948.10.10.)637명
주민 집단희생기 (1948.10.11.~1949.3.1.)9,709명
사태평정기 (1949.3.2.~1950.6.24.)2,668명
사건종결기 (1950.6.25.~1954.9.21.)800명
미상310명

3.2. 물적 피해

제주 4·3 사건 당시 165개 마을 중 87개 마을이 소개(疎開)되었는데, 이 중 중산간마을이 62개였다. 초토화된 마을들은 1950~60년대 지속적인 ‘난민정착사업’에 의해 복구되었으나, 원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폐허가 된 마을들이 생겨났다. 이들 ‘잃어버린 마을’은 현재 제주도 내에 134곳으로 조사·확인되었다.

학교, 관공서, 경찰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피해는 주로 무장대의 습격으로 빚어졌다. 특히 학교는 진압군 부대의 숙영지로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1948년 11~12월에 걸친 강경진압작전 기간에 중산간마을에 있는 학교나 관공서는 강경진압작전에 따라 주로 군부대에 의해 소각 파괴되었다. 1950년경 기준 피해액은 다음과 같이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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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피해액
공공시설1207~1428
수산1125
농산7352
기타1400
축산임산약초3224
공업183765064KRW

4. 사건 이후

*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남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다.
* 남로당 제주도당 수뇌부였던 김달삼1948년 8월 25일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기훈장 2급을 받고 '애국열사'로 추앙받았다.
* 제주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은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한다.
* 6.25 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 측으로부터 좌익 경력 공격을 받자, 제주도민들은 오히려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자신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과거사 정리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며 70%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 매해 4월 3일 같은 날 제사를 하는 제주도민이 상당수였다.
* 1970년대부터 제주 4·3 학살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했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금기시했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4·3사건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 2003년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 2003년 8월 28일 '4·3사건법'에 따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 2003년 10월 15일 4·3위원회가 작성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노무현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 2014년 1월 17일 박근혜 정부는 4월 3일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했다.
* 2018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과거 기독교인이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다.
* 2019년 1월 17일 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수형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며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3일 추념식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하고,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임을 선언했다. 유해 발굴, 배상·보상, 국가 트라우마센터 건설 등도 약속했다.
* 2019년 3월 4일, 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 2021년, 희생자 구제를 위해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 2022년, 희생자 1인당 9000만 원의 보상금 지급을 시작했다. 사건 발생부터 구제까지 74년이 걸렸다.
* 최근까지도 새로운 유골이 발견되며, 유전자 분석을 통한 신원 확인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5. 논란

월간조선, 재향군인회 등 일부 극우 단체들은 제주 4·3 사건이 남로당에 의해 주도되고 선동되었다고 주장한다.

김광동 한국 정책 연구소장은 4·3 사건의 근본적인 특징이 "체제 전복"이었지만, 반란 진압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왜곡되고 편향된 연구들이 많았다고 주장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에 맞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의 무장 투쟁이자 봉기였다"고 말했다.

장로교 목사 이종윤은 서울의 한 교회에서 "4·3 사건은 좌익 세력에 의해 발생했으며, 5·10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했고, 이 발언은 CTS 채널을 통해 방송되었다.

2010년 11월 20일,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영조는 "제주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명백한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5.1. 계엄령 적법성 논란

1948년 11월 17일 발효된 계엄령의 적법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위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계엄령을 발효한 것은 법률에 의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하도록 되어있는 제헌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적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계엄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사건이 1948년 8월 15일 이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지속된 것이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5.2. 폭동 논란

월간조선은 2000년 2월호에서 제주 4·3 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한 일본 산케이 신문의 글을 인용했다가 4·3사건 유족회에게 소송을 당해 1, 2심에서 패소했으나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일부 우익 단체들은 제주 4·3 사건을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1999년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과 이들을 흡수 합병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했다.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원장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체제 전복'이었음에도 이를 진압한 우리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 투쟁이자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장로교(통합) 목사 이종윤은 서울교회(강남구 대치동 소재) 예배시간에 "4·3 사건은 공산당 프락치 등 좌익 세력들이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케이블방송 CTS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2010년 11월 20일 이영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제주 4.3 사건에 대해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이라 주장했다.

2014년 6월 10일 총리로 내정된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2012년 교회 강연에서 ‘제주 4.3사건’을 폭동이라 규정하며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5.3. 추념일 날짜 논란

박근혜 정부는 2014년 1월 17일 국무회의(의장 박근혜)를 통해 4월 3일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일로 입법 예고했다.

2018년 4월 3일, 홍준표는 "4월 3일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인 김달삼이 350명의 무장 폭도를 이끌고 새벽 2시에 제주경찰서 12곳을 습격했던 날"이라며, "이날을 제주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날로 잡아 추념한다는 것은 오히려 좌익 폭동과 상관없는 제주 양민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할 때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