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888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일성(金一成, 1888 ~ 1926)은 한말과 일제강점기 의병장으로, 본명은 김창희이며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항일투쟁을 시작하여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였다. 1926년 순국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외사촌 형인 설린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북한 김일성이 그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육군 준장 - 고운기 (독립운동가)
고운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 활동 지원, 한국독립당 가입 후 항일 투쟁, 민주당 창당 참여 및 제헌 국회의원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 전쟁 중 납북 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상하이 고려공산당 - 김시현 (1883년)
김시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2대 및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 상하이 고려공산당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2. 생애
김일성(金一成, 이명: 金日成, 1888년 ~ 1926년)은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의병장이다. 본명은 김창희(金昌希)이며,[3]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황곡리 출신이다.[4] 부친은 함경북도 온성군수를 지낸 김두천(金斗天)이고, 모친은 설씨(薛氏)이다.[1][2][5] 본관은 전주(全州)이다.[5]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6][3] 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고 전해진다.[6][3] 1926년 전투 중 전사하여 순국하였다.[6][3]
그의 행적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많지 않으나, 단천군 출신 월남민들의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2] 김일성(金一成)은 백두산 일대에서의 항일 투쟁으로 널리 알려져, 일제강점기 민간에 퍼진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실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9][10] 북한의 김일성이 그의 이름과 공적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9][10]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3]
2. 1. 초기 활동
본명은 김창희(金昌希)이며, 김일성(金一成 또는 金日成)이라는 이명으로 활동했다.[3]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황곡리에서 출생했으며[4], 부친은 함경북도 온성군수를 지낸 김두천(金斗天, 1868~?)이고, 모친은 설씨(薛氏)이다.[1][2][5] 본관은 전주(全州)이다.[5]동향 출신 지인 유석인(劉錫仁)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 향리(鄕里)의 사숙(私塾)에서 공부하였고, 1912년 단천 일진소학교(日進小學校)를 졸업한 후 한성부의 배재학당을 졸업했다고 한다.[1]
1907년 8월 군대 해산 후 기의하여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6][3] 『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항쟁사』 (1970)에는 김일성(金一成)이 1907년 군대 해산 후 기의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며, 순국할 때까지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군(日軍)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고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26년에 민족 투쟁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순국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6]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당시 보훈처 공적 기록에 따르면, 함남 단천(端川) 사람으로 1907년 8월 군대 해산 후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백두산(白頭山)을 중심으로 일군(日軍)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올리다가 1926년에 전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되어 있다.[3][7][8][6]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은 소략하나 단천군 출신 월남민들의 증언이 많다.[2] 생졸년도에 이설이 있다.[1]
2. 2. 항일 무장 투쟁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3][6] 주로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3][6] 이로 인해 일본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6] 1926년 전투 중 전사하여 순국하였다.[3][6]『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항쟁사』에는 "김일성(金一成)은 단천인(端川人)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기의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순국할 때까지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군과 수십 차의 격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고 일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926년(丙寅)에 민족 투쟁사에 찬란한 빛을 남기고 순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당시 국가보훈처 공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으로, 1907년 8월 군대 해산 후 의병장이 되어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올렸으며, 1926년에 전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3][7][8][6]
그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한 당대 기록은 부족하지만,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 월남민들의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2] 생몰년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1]
동향 출신 지인 유석인(劉錫仁)은 그가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의 주역 김일성이라고 증언했으며,[1] 단천 출신 월남민들은 그가 보천보 사건과 관련된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김창희의 집안이 천도교를 신봉했고, 당시 단천군 수하면에 천도교 신자가 많았다는 점[2]을 고려할 때 조국광복회와의 관련 가능성도 제기되나, 문헌상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는다.
김일성(金一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김창희는 백두산 일대에서의 항일 투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 민간에 퍼진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실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북한의 김일성이 그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1][9][10]
그의 외사촌 형 설린(薛麟, 본명 설관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11] 해방 후 정치대학(현 건국대학교) 사무장으로 활동했다. 설린은 해방 직후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 장군'이 자신의 고종사촌 동생 김창희인 줄 알고 1946년 4월 평양을 찾아 면회를 신청했다가 구금되는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간신히 풀려나 월남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가 불명확하다.[1][10][12] 설린은 일제강점기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으며[11], 천도교 활동에도 관여한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13] 당시 "천도교에는 네 명의 '린(麟)'이 있으니, 최린(崔麟), 이종린(李鍾麟), 임린(林麟), 설린(薛麟)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레닌(Lenin)이 아니라 조선의 네 린(四麟)이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14] 공산주의 활동 전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설린은 남한에 남아 정치 활동을 했으며, 이범석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에 이사로 참여하기도 했다.[15][16]
2. 3. 사후 평가 및 논란
『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항쟁사』(1970)는 김일성(金一成)을 단천 출신으로 기록하며, 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고 서술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1926년에 순국했다.[6]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3] 국가보훈처의 공훈록과 공적조서 역시 그가 의병대장으로서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다 1926년 전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명시하고 있다.[3][7][8][6]김일성(金一成)은 백두산 일대에서의 항일 투쟁으로 인해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민간에 퍼진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실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9][10] 그러나 그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부족하며, 주로 해방 이후 단천 출신 월남민들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2] 그의 출생 및 사망 연도에 대해서도 다른 설이 존재한다.[1]
일부 증언은 그를 1937년 보천보 습격 사건의 주역[1] 또는 사건 관련 조직인 조국광복회의 조직자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의 고향인 단천군 수하면에 천도교 신자가 많았고 김창희의 집안 역시 천도교를 신봉했다는 점[2]을 근거로, 천도교 계열 인사가 다수 참여한 조국광복회와의 관련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문헌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가장 주요한 논란은 북한의 김일성이 그의 이름과 공적을 도용했다는 주장이다.[1][9][10]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로 그의 외사촌형 설린(薛麟, 본명 설관건)의 일화가 언급된다. 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11]으로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하던[13] 설린은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 장군'이 자신의 고종사촌 동생 김창희(김일성)일 것으로 생각하고 1946년 4월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찾던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북한 김일성)임을 확인하고 곤욕을 치른 뒤 월남했다고 전해진다.[1][10][12] 설린은 공산주의 활동 경력[11][13]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남한에서 이범석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에 이사로 참여하는 등[15][16] 활동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가 불명해졌다.[1][10][12]
단천 출신 김일성에 대한 논란은 해방 직후부터 제기되었으며, 이북(李北)이 1950년에 저술한 『소련의 괴뢰 김일성 위조사』[10]는 이러한 주장을 담은 대표적인 초기 기록이다. 이 책은 '진짜' 김일성 장군은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김경천의 경력과 혼동된 것으로 추정됨) 3.1 운동 후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1922년 동상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북한의 김일성(김성주)은 가짜이며, 그의 이야기는 진짜 김일성 장군의 투쟁사를 이용해 조작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책은 단천 출신 설린을 진짜 김일성 장군의 외숙(외사촌의 오기)으로 언급하고, 설린이 평양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아님을 강조했다.[10] 책 서두의 화보에 실린 김일성 장군 사진(사진 보기)은 김경천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 단천 출신 의병장 김일성일 가능성이 제기되며, 저자 이북이 설린을 통해 이 사진을 입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3. 증언 및 기록
김일성(본명 김창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소략한 편이나,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 월남민들의 증언이 다수 전해진다.[2] 그의 생몰년도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이 존재한다.[1]
김일성과 같은 고향 출신이자 지인이었던 유석인(劉錫仁)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 고향의 사숙(私塾)에서 공부했으며, 1912년 단천 일진소학교(日進小學校)를 졸업한 후 한성부의 배재학당을 졸업했다고 한다.[1]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가 1970년에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항쟁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6]
:김일성(金一成)은 단천인(端川人)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기의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순국할 때까지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군과 수십 차의 격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고 일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926년(丙寅)에 민족 투쟁사에 찬란한 빛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할 당시 보훈처의 공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3]
- '''독립유공자 공훈록''':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기의하여 의병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백두산(白頭山)을 중심으로 일군(日軍)과 수십 차례의 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6년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5면[7],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89면[8],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634면[6])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이명 김일성(金日成). 1907. 8. 군대해산 후(軍隊解散 後)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어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일군(日軍)과 수십차 격전(激戰)을 벌여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으며 1926年 전사 순국(戰死 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김일성(金一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김창희(金昌希)는 백두산 일대에서의 항일 투쟁으로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퍼진 유명한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김일성이 그의 공적을 도용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1][9][10] 해방 이후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조국광복회 연루설이나, 이북(李北)의 저서를 통한 주장 등 다양한 증언과 기록이 존재한다.
3. 1. 조국광복회 연루설
김창희(김일성)의 지인이었던 유석인(劉錫仁)은 그가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의 주역 김일성이라고 주장했다.[1] 또한 단천 출신 월남민들은 그가 보천보 사건과 관련된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창희의 고향인 단천군 수하면에는 천도교 신자들이 많았고, 그의 집안 역시 천도교를 믿었기 때문에 천도교 신자들이 다수 참여한 조국광복회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명확한 확인은 어렵다.한편, 그의 외사촌인 설린(薛麟, 본명 설관건)은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이 자신의 고종사촌인 김창희라고 생각하고 1946년 4월 평양을 찾아갔다가 구금되는 등 곤욕을 치른 일화가 있다.[1][10][12] 설린은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졸업하고[11] 서울에서 공산주의 및 천도교 관련 활동을 했던 인물로[13], 당시 "천도교에는 네 린이 잇스니 왈(曰) 최린(崔麟), 이종린(李鍾麟), 임린(林麟), 설린(薛麟). 그러나 러시아(露西亞)의 네린(레닌?)이 아니요, 조선인 4린(四麟)."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14] 공산주의 활동 전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는 남한에서 이범석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이사(理事)로 참여하기도 했다.[15][16] 설린은 평양에서 간신히 풀려나 월남했지만,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가 불분명해졌다.[1][10][12]
3. 2. 이북(李北)의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
단천 출신 김일성에 대한 일제 강점기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고, 해방 후의 기록과 증언만 알려져 있다. 그 중 가장 이른 것은 이북(李北)이 1950년에 쓴 『소련의 괴뢰 김일성 위조사(蘇聯의 傀儡 金日成 僞造史)』에 나오는 내용이다.[10] 이 책은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며, 진짜 김일성 장군은 따로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책에 인용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四. 金一成將軍과 金一星
:우리의 자랑 金一成將軍은 日本 陸軍士官學校를 卒業하시었다. 蔣介石氏도 日本 陸軍士官學校에서 修業을 하였는데 氏의 三年 後輩로서 金一成將軍은 第二位의 成績으로 卒業하시었다. 恒常 民族解放의 高邁한 理想에 獻身할 것을 計劃하던 一成將軍은 銳意 學業에 全力을 다하는 한편 活動하실 때의 萬一을 生覺하시어 人相의 正確한 露顯을 두려워하셔서 記念 寫眞을 撮影할 때마다 外面하시어 卒業寫眞帖에도 正面으로 찍힌 寫眞은 一枚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日 金一成將軍을 逮捕하라는 命令이 日本官憲에게 나렸을 때에도 將軍의 正確한 人相을 알길이 없어서 甚히 苦悶하였다는 것이다. (八ㆍ一五 解放後 日本 宇垣 大將의 告白)
:將軍은 그의 天賦的인 高尙한 人格으로해서 비록 敵일지라도 日本의 有數한 將校들게에도 崇拜를 받었다.
:宇垣 大將과도 그는 個人的으로 書翰交換도 한 일도 있었다 한다.
:日本陸士를 卒業하신 金一成將軍은 서울로 돌아와 學生運動에 從事타가 三ㆍ一運動이 爆發되매 日本官憲의 逮捕網을 벗어나 長白山脈에 飛躍하시어 義兵을 모아 飛虎처럼 神出鬼沒하며 日本軍討伐隊를 무찌르다 哀惜하게도 翌年 – 一九二二年에 甚한 凍傷에 쓰러진바가 되었던 것이다. 그대 나이 四○歲였다. (金一成將軍의 外叔 咸鏡南道 端川 出身 薛麟氏의 解放直後 陳述)
:* 註 上記 薛麟氏는 뜻밖에도 解放後 金一成(實은 金日成) 將軍이 北韓에 돌아오셧다는 말을 듣고 三八線을 넘어 平壤을 찾어 外甥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金日成은 뜻밖에도 三二歲의 철不知 靑年이엇드라는 것이다. 外甥 나이 六八歲를 손곱은 薛麟氏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唐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薛麟氏는 그 後부터 監獄사리 身勢가 되고말어 아직도 消息이 杳然하다.
:長年에 걸쳐 民族解放運動에 從事치 못한 金一成將軍의 鬪爭史를 奇貨로 金成柱의 金日成僞造史는 꾸며젔던 것이다.
위 인용 내용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책에서 언급된 일본 육사 졸업 경력 등은 실제로는 김경천의 행적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설린(薛麟)을 '외숙'(外叔)으로 언급했는데, 실제 관계는 외사촌형이었다[1][10][12]. 이 점은 책에서 다루는 인물이 단천 출신의 김일성(본명 김창희)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해석된다. 또한, 책 서두의 화보에 실린 김일성 장군 사진 역시 김경천과는 다른 인물로 보여, 단천 출신 의병장 김일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있다. 저자 이북이 설린과 개인적인 관계가 있었고, 그를 통해 사진을 입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 [https://www.unamwiki.org/w/파일:단천출신_김일성_장군.jpg 사진 보기]
4. 가족 관계
본관은 전주(全州)이다.[5] 아버지는 함경북도 온성군수(穩城郡守)를 지낸 김두천(金斗天, 1868~?)이고, 어머니는 설씨(薛氏)이다.[1][5] 형 김창원(金昌元)과 동생 김창도(金昌道)가 있었다.
외4촌형(外四寸兄, 어머니의 사촌 형제)으로 설린(薛麟, 본명 설관건 薛寬建)이 있다.[1][11] 설린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11] 서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11] 천도교 활동에도 관여하여[13] 당시 "조선인 4린(四麟)" 중 한 명으로 불리기도 했다.[14] 해방 후에는 정치대학(건국대학교 전신) 사무장을 지냈으며,[1] 이범석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이사로 참여하는 등 남한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15][16]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평양에 나타난 소위 '김일성 장군'이 자신의 고종 동생 김창희(김일성의 본명)인 줄 알고 면회를 신청했다가 구금되는 곤욕을 치렀다. 간신히 풀려나 월남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가 불명하다.[1][10][12]
김일성의 지인이었던 유석인(劉錫仁)은 설린을 이종형(姨從兄, 이모의 아들)이라고 증언했으나,[1] 김일성의 어머니가 설씨(薛氏)인 점을 고려하면 외가 쪽 사촌인 외4촌형일 가능성이 높다.
참조
[1]
간행물
金日成의 정체(正體)에 對한 고증(考證) : 以北의 金日成은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이 아니다
http://dlps.nanet.go[...]
신사조(新思潮社)
1963-09
[2]
서적
단천군지(端川郡誌)
http://www.nl.go.kr/[...]
단천군지증보편찬위원회
1971
[3]
웹사이트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http://e-gonghun.mpv[...]
1991
[4]
웹사이트
함경남도(咸鏡南道) 단천군(端川郡)
http://encykorea.aks[...]
[5]
웹사이트
김두천 (金斗天, 1868~?)
http://db.history.go[...]
[6]
서적
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항쟁사
http://e-gonghun.mpv[...]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0
[7]
서적
韓國獨立運動史
애국동지원호회
1956
[8]
서적
韓國獨立史. 上,下
http://www.nl.go.kr/[...]
獨立文化社
1970
[9]
서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10]
서적
소련의 괴뢰(蘇聯의 傀儡)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
https://terms.naver.[...]
三八社
1950-11-20
[11]
서적
코민테른의 밀명을 띠고 온 동방노력자공산대학졸업생 검거의 건 (コミンテルンノ密命ヲ帶ベル東方勞力者共産大學卒業生檢擧ノ件)
http://e-gonghun.mpv[...]
황태완
1993
[12]
뉴스
진위 김일성 열전 (50회) 단천 출신 의병장 김일성 장군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1974-08-14
[13]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
[14]
웹사이트
百人百話 / 개벽 신간 제1호
http://db.history.go[...]
[15]
뉴스
資質向上訓練(자질향상훈련) 民族靑年團發足(민족청년단발족)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6-10-20
[16]
웹사이트
조선민족청년단 (朝鮮民族靑年團)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