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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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두산은 과거 태백산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 건국 초에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처음 등장했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으로 불리며, 만주어로는 골민 샹기얀 알린으로 불린다. 백두산은 냉대 기후를 보이며, 화산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했고, 1909년 간도협약으로 백두산 북쪽과 동쪽이 중국 영토로 인정되었다. 1962년 조중 변계 조약을 통해 천지가 분할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천지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백두산은 한국과 만주족에게 숭배의 대상이며, 북한은 혁명의 성산으로 묘사한다. 최근 중국은 백두산 지역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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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량강도의 산 - 정일봉
정일봉은 백두산에 위치한 1,793m 높이의 봉우리로, 원래 장수봉이라 불렸으나 김정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명되었으며,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출생지로 선전되어 혁명 사적지로 활용되지만 우상화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백두산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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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백두산 (한국어) 창바이 산 (중국어) |
봉우리 높이 | 2744 미터 |
돌출 높이 | 2593 미터 |
산맥 | 창바이 산맥 |
국가 최고봉 | 예 |
울트라 봉우리 | 예 |
위치 | 삼지연시, 량강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푸쑹 현 및 안투 현, 지린성, 중화인민공화국 |
좌표 | 41°59′36″N 128°04′39″E |
산 종류 | 성층 화산 |
마지막 분화 | 1903년 3월 |
만주어 이름 | Golmin Šanggiyan Alin |
만주어 로마자 표기법 | Golmin Šanggiyan Alin |
한국어 이름 (한글) | 백두산 |
한국어 이름 (한자) | 白頭山 |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 Baekdusan |
한국어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Paektusan |
한국어 풀이 | 하얀 머리 산 |
중국어 이름 (한글) | 장백산 |
중국어 이름 (한자) | 長白山 |
중국어 병음 | Chángbáishān |
중국어 로마자 표기법 | Jangbaeksan |
중국어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Changbaeksan |
중국어 풀이 | 늘 하얀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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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적 정보 | |
화산 종류 | 성층 화산 |
마지막 분화 시기 | 1903년 또는 1925년 |
칼데라 호수 | 천지 |
화산재 분출량 | 100 ~ 120 세제곱킬로미터 |
문화적 중요성 | |
한국의 오악 | 오악 중 북악 |
추가 정보 | |
기타 | 장백산맥, 마천령산맥에 속함 |
2. 명칭
백두산은 과거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장백산 등으로도 불렸다. 1280년대에 쓰여진 《삼국유사》,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백두산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가 있는 성층화산이다. 969년(±20년) 화산 분출로 칼데라가 형성되었고, 이후 물이 차 천지가 되었다.[123] 이때 분출된 화산재는 멀리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된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에 편찬된 《고려사》의 고려 성종 10년(991년)조[122]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백두산이라고 칭하였는데,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이라는 명칭도 간간히 나타난다. 196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조중 변계 조약과 그 의정서에서도 이 산을 백두산()이라고 칭하였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 ), 만주어로는 '''골민 샹기얀 알린'''() 또는 '''골민 샨얀 알린'''()이라고 부른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태백산(太伯山)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제왕운기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 동국사략 · 동사강목은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 "백산(白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 산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 주변에 백산부(白山部)라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평안도 지방)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일연이 주장한 묘향산으로 보지 않고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원문: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방의 아사달에서 한반도 북부의 왕검성(지금의 평안도 일대)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백두산은 중국의 《산해경》에 ‘불염산(不鹹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또한 《후한서》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으로 불린다. 《위서》와 《수서》에는 ‘도태산(徒太山)’으로 언급되며, 《북사》에는 ‘종태산(從太山)’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도태산’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신당서》에서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불렸다.[5] 현재의 중국식 이름인 ‘장백산(長白山)’은 거란족의 요 그리고 여진족의 금 시대에 처음 사용되었다. 《요사》에는 서기 985년 장백산에서 온 30개의 여진족 부족장들이 요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의 여행기 《송막기문》에 따르면, 이 산은 “흰옷을 입은 관음의 거처”이며 새와 짐승들 또한 모두 흰색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8] 현대 만주어 명칭인 (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ᠠᠯᡳᠨmnc) 또한 ‘항상 흰 산’을 의미한다.
한국어 명칭인 ‘백두산(白頭山)’은 고려 성종 10년(991년) 《고려사》에 처음 등장하는데,[9] 조선 시대 초에 편찬되었다. ‘흰 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와 같은 다른 기록에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큰 흰 산’을 의미한다.[10]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가끔 ‘장백산(長白山)’과 ‘백산(白山)’으로도 불렸다. ‘백두산’을 음역한 또 다른 중국식 이름으로는 백두산(白頭山)이 있다.[11]
몽골어 명칭은 ‘온드르 차간 울(Өндөр Цагаан Уул)’이며, ‘높고 흰 산’이라는 의미이다.
현재도 사실상 지배하는 영토 지역은 아니지만, 한국은 “장백산”이라는 명칭이 중국에 의한 침략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국제적인 명칭 문제 운동을 전개하여 마찰을 빚어왔다.[73] 그 결과, 최근에는 “장백산”보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먼저 기재되거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알파벳 표기 Paektu(-san), Baekdu(-san)이 채택되면서 중국에서는 뒤처졌다는 반발이 일어나 “장백산”이라는 명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74]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백두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장백산(장백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3. 지리
산 정상은 매년 2cm씩 솟아오르는데, 이는 천지 아래 2,500m 지점의 마그마 활동 때문이다. 최고봉인 장군봉은 1년 중 8개월 동안 눈으로 덮여 있으며, 해발 1,800m까지는 경사가 완만하다.
백두산은 높이가 2,744m로, 백두대간과 장백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12] 흑요석 산지이기도 하며, 조선반도 북부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에 사용된 흑요석은 대부분 백두산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통해 흑요석을 매개로 한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9년부터 3년간의 조사 결과, 백두산 지하에는 태평양 플레이트의 스태그넌트 슬래브에 큰 구멍이 발견되었다. 이는 백두산 마그마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75]
2024년에는 백두산의 화산 활동 흔적이 남아있는 중국 측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지오파크로 지정되었다.[76]
; 천지
정상에는 천지라는 칼데라호가 있다. 쑹화강, 압록강, 두만강이 이 호수에서 발원한다. 천지는 둘레 12~14km, 평균 수심 213m, 최대 수심 384m이며, 10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얼음으로 덮여 있다.
천지 주변에는 해발 2,500m가 넘는 16개의 봉우리가 있다. 북한 측의 장군봉(백두봉)은 한국을 포함한 조선반도의 최고봉이며, 1년 중 8개월은 눈으로 덮여 있다. 중국 측의 는 동북부의 최고봉이다.
천지에서 북쪽으로 물이 흘러나가면서 높이 70m의 장백폭포를 형성한다.
; 산록
산록은 조선 측은 묘향산맥 등의 고원 지대이며, 중국 측은 완만한 경사가 동북평원까지 이어진다.
산록에는 고도에 따라 다양한 식생이 나타난다. 낙엽수림, 온대 활엽 혼합림, 침엽수림, 자작나무 숲과 고산 툰드라가 분포한다. 물푸레나무, 가문비나무, 만주 잎갈나무, 구주종비나무 등이 자라며, 시베리아호랑이, 흰죽지[77][78], 유럽살모사 등이 서식한다.
1979년 중국 영토 내 장백산 생물권 보호구, 1989년 북한 영토 내 백두산 생물권 보호구가 유네스코 생물권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77][78]
중국 측 산록에서는 인삼의 중국판인 장백산 인삼(중국산 인삼)이 재배되어 일본 등에 수출되고 있으며, 다양한 약초도 재배된다.
; 산사태 지형
약 1300년 전 화산 활동으로 인해 산사면에는 너비 200m가 넘는 산사태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79] 특히 천지 화구벽 주변에는 산사태 전조로 보이는 균열이 많아, 향후 백두산 근방 지진 발생 시 사면 붕괴 및 재해 발생이 우려된다.[79]
3. 1. 기후
냉대 기후의 백두산 지역은 산지 기후의 특징을 지녀 월평균 기온이 연간 34℃ 사이의 편차로 크게 변한다. 강수량은 연 1,400mm에 이르는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은 춥고 매우 길며, 여름은 온난 습윤하다.
백두산의 기후변화는 매우 고질적이다.[77] 산 정상의 연평균 기온은 -8.3℃이다.[77] 여름은 18℃ 정도이지만, 엄동기는 -47.5℃까지 내려갈 때가 있다. 백두산 정상부 일원에서 비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저기온은 -54.7℃이며, 앞으로 공식적 관측기록이 있다면 이보다 기온이 더 낮은 날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월의 평균기온은 -24℃, 7월의 평균기온은 10℃이며, 9월 하순부터 이듬해 6월 초순까지 연중 8개월은 영하로 내려가서 입산이 통제된다. 산 정상의 평균풍속은 초속 11.7m, 12월에는 평균 초속 17.6m의 강풍이 분다.
평균 습도는 74%, 연 강수량은 1,400mm 정도로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해양과의 거리가 가깝고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형이 높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리며, 쌓인 눈은 이듬해 6~7월이나 되어야 녹기 시작한다.
4. 역사
백두산은 과거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장백산 등으로도 불렸는데, 1280년대에 쓰여진 《삼국유사》,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에 편찬된 《고려사》의 고려 성종 10년(991년)조[122]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백두산이라고 칭하였는데,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이라는 명칭도 간간히 나타난다. 196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조중 변계 조약과 그 의정서에서도 백두산을 언급하고 있다.
백두산은 역사를 통틀어 한국인들에게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34] 한국 신화에 따르면, 백두산은 단군의 탄생지로 여겨진다. 단군은 고조선(기원전 2333~기원전 108년)의 건국자이며, 그의 부모는 하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이 변신한 여자 웅녀라고 전해진다.[35] 이후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 등 여러 한국 왕조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36][37]
고려(935~1392)는 이 산을 처음으로 ‘백두’라고 불렀다.[38] 조선(1392~1910) 시대에는 1597년, 1668년, 1702년 화산 폭발 기록이 있다. 15세기에는 세종대왕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방어 시설을 강화하여 백두산을 북방 민족과의 자연적인 경계로 삼았다.[39]
백두산은 남한과 북한의 국가 애국가와 한국 민요인 아리랑에도 언급된다.
백두산 주변의 울창한 숲은 일제 강점기 한국의 무장 저항 세력과 한국 전쟁 당시 공산당 게릴라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조직했으며, 북한은 김정일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40] 그러나 북한 이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41][42]
백두산(長白山)은 청나라 시대의 샤머니즘에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인 숙신과 여진족에게 가장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52]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건국자 태조(1335~1408) 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으로 설정되었다.[54]
근대적인 화산 연구는 1900년대 이후에 시작되었고, 활동 경위에 대한 해명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시대의 분화설이 제기되고 있다. 주변국의 역사 기록에는 백두산의 화산 활동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80]
- 일본기략에 따르면, 893년.
- 삼국사기에 따르면, 917년.
- 조선(李氏朝鮮) 시대의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 1597년, 1668년에 화산 활동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 분화한 것은 1597년과 1702년이라는 설도 있다.[80]
- 1597년 10월 6일부터 8일까지의 분화에서는, 분화에 수반된 지진의 진동이 서울에서도 감지되었다.[81]
백두산은 예맥족이 세운 고구려와 494년에 부여를 멸망시킨 말갈족 중 백산말갈이 이 산 주변에 살았다. 고구려 멸망 후 698년에 건국한 발해는 산 근처에 중경현덕부를 설치하였다. 926년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을 세웠다. 이후에는 흑수말갈에서 발전한 금의 영토,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변천해 갔다.
조선인이 백두산의 절반을 영유하게 된 것은 몽골의 쇠퇴 후, 조선의 세종(재위: 1418년 - 1450년) 때부터였다. 세종은 압록강·두만강 연안의 요새화를 추진하여 백두산은 조선 민족과 여진족의 경계가 되었다.
조선 왕조 말기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백두산을 조선인의 민족주의 상징으로 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의 국가와 조선 민족 대표 민요인 아리랑에서도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만주국과의 경계였기 때문에 백두산 산록의 침엽수 밀림은 반만항일 게릴라의 근거지가 되어, 자주 일본군에 의한 게릴라 토벌전이 벌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은 자신이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는 게릴라(항일 유격대)의 지도자이며, 1942년 2월 16일에 백두산밀영에서 김정숙과의 사이에 장남인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공표하고 있지만,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에 소비에트 극동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1988년에는 백두산의 일부를 구성하는 장수봉이 정일봉으로 개칭되었다.
4. 1. 조선-청 국경 분쟁과 백두산정계비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다. 정계비는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에 세워졌다.[100]조선인들이 만주 지역의 두만강 이북 지역인 간도로 이주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자, 1712년 청나라와 조선의 관리들은 백두산 분수령에 국경을 표시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여기에 적힌 국경을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는 표기의 해석을 두고,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는 청나라 측 주장과 토문강(송화강 지류)으로 보는 조선 측 주장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충돌하였다.[100]
19세기 이후 비문 해석은 일부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909년 간도협약은 일제강점기 시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었으며, 백두산의 북쪽과 동쪽을 중국 영토로 인정하였다.[55]
4. 2. 조중 변계 조약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다. 정계비는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에 세워졌다.[130]현재 백두산은 천지를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일성(金日成)이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천지(天池)를 분할하였다. 조약에 따라 백두산의 북서부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남동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며,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56][57][58][55]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天池)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와 비룡폭포(장백폭포)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130]
2007년 아시안 동계 게임이 중국 장춘에서 개최되었을 때, 대한민국 선수단 일부는 시상식에서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중국 스포츠 관계자들은 정치적 활동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며 국제올림픽위원회와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헌장에서 금지된다고 항의했다.[62][63][64]
; 청·조선 정계비
조선인들이 만주 지역의 두만강 이북 지역인 간도로 이주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자, 1712년 청나라와 조선의 관리들은 백두산 분수령에 국경을 표시하는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다. 여기에 적힌 국경을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는 표기의 해석을 두고,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는 청나라 측 주장과 토문강(송화강 지류)으로 보는 조선 측 주장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충돌하였다.[100]
; 중국-북한 압록강·두만강 경계조약
1962년에 체결된 중국-북한 압록강·두만강 경계조약(조중 변계 조약)에 따라 중국이 북한에 양보하여 천지 상에 중국-북한 국경선이 그어짐으로써 결론이 났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원래 백두산 전역은 중국 영토였지만, 이 조약에 따라 백두산 및 주변 지역을 포함한 약 1200km2의 토지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할양되었고, 천지의 54.5%가 북한, 45.5%가 중국 영토로 거의 반씩 분할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비판적이며, 중국 측 주장을 북한이 받아들였다고 비난하며, 송화강을 경계로 하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101]
; 한국에서의 주장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는 국경이 확정되었지만, 중국과 한국의 활동가 그룹 사이에서는 백두산 및 간도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있다. 한국의 활동가들은 중국 측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경제 개발, 문화 행사, 인프라 정비, 관광 자원 개발, 세계유산 등재 신청, 동계올림픽 유치 등은 모두 백두산 지역 전체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중국 측에서 이 지역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한국 측은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2007년 아시안 동계 게임에서 한국의 쇼트트랙 여자 대표 선수가 시상식에서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고 적힌 카드를 들어 중국 당국의 항의를 받는 등 영유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인지되게 되었다.[104]
5. 생태
백두산에는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최근 중국 CCTV의 영상을 통하여 검은담비, 큰곰, 반달가슴곰, 백두산사슴, 사향노루, 사슴, 산양, 스라소니, 수달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호랑이, 표범, 늑대 등 대형 맹수 대부분은 백두산에서도 멸종되었다. 조류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과 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멧닭, 올빼미, 원앙, 청둥오리 등이 있다. 어류로는 천지에 방류한 천지산천어가 있으며, 그 외에 북살무사·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다.
백두산은 다양한 식물이 분포한다. 과거 제3기(第三纪)의 식물에서부터 한국은 물론 시베리아, 일본, 유럽의 식물종도 있으며, 심지어 중국 남방의 아열대 식물종까지 발견된다.
해발 고도가 높고 지리적 위치가 독특하여 하곡(河谷)에서부터 주봉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온대, 냉대, 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식물이 집합해 있으며,지리학적으로 고산 수직 자연대(高山垂直自然帶)의 분포에 속한다.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입기 전의 식물종들이 자란다. 백두산 정상 호수에는 5종의 식물이 알려져 있으며, 호숫가를 따라 약 168종이 확인되었다. 중국 쪽 숲은 오래되었고 인간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수목한계선 근처에서 우점종을 이루고, 아래쪽에는 다른 종들과 섞여 소나무가 분포한다. 북한 쪽 산록에서는 광범위한 산림 벌채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시베리아 호랑이, 곰, 늑대, 멧돼지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31] 붉은여우는 이 지역에서 멸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해발 약 2000m까지 산을 뒤덮는 산림에는 백두산 노루가 서식한다. 까투리, 올빼미, 딱따구리와 같은 많은 야생 조류가 이 지역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은 흰죽지 개체군을 보유하고 있어 버드라이프 인터내셔널에 의해 중요조류보호구역(IBA)으로 지정되었다.[32]
산록의 식생은 다양하며, 고도에 따라 낙엽수림, 온대 활엽 혼합림, 침엽수림, 자작나무 숲과 고산 툰드라가 각각 분포한다. 산맥에는 물푸레나무, 가문비나무, 만주 잎갈나무, 구주종비나무 등의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산록에는 시베리아호랑이, 흰죽지가 서식하며[77][78], 유럽살모사의 고립된 개체군도 조금씩 서식하고 있다.
1979년에 중국 영토 내의 부분이 "장백산 생물권 보호구", 1989년에 북한 영토 내의 부분이 "백두산 생물권 보호구"로 유네스코의 생물권 보호지역에 각각 등록되었다.[77][78]
중국 측 산록에서는 인삼의 중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백산 인삼(혹은 중국산 인삼)이 재배되어 일본 등에 수출되고 있다. 이 외에도 중국 측에서는 다양한 약초가 재배되고 있다.
6. 화산 활동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를 이루고 있다.[123] 이 화산분출로 인한 화산재는 멀리 일본의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된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약 200 ~ 300만년 전 제4기 분출로 백두산의 천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300여 년 동안 3차례의 분출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현무암 대지, 경사진 현무암 고원 등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화산 분출 전후의 백두산이 빽빽한 삼림이었음을 증명한다.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史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세기와 10세기에 백두산의 분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946년 백두산 분화는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발해 멸망은 926년으로 20년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두산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10세기 중반에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멀리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날아갔다. 당시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분출한 화산재의 양은 100 ~ 150 km3로 추정되는데, 이는 2010년 유럽의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분출량(0.11 km3)의 1천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126][127][128]
사서(史書)의 기록 등에 따르면 1413년, 1420년, 1597년, 1668년, 1702년 등에 백두산이 화산재나 화산가스를 내뿜었거나 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세종 2년(1420년) 5월, 천지의 물이 끓더니 붉게 변했다. 소떼가 크게 울부짖었고 이러한 현상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 검은 공기는 인근지역으로 가득 퍼졌다."
- "현종 9년(1668년) 4월, 한양과 함경도 등 일대에 동시에 검은 먼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 "숙종 28년(1702년) 6월, 한낮에 함경도 지역 일대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린내가 나는 황적색 불꽃이 날아왔다. … 같은날 인근 지역 현성에서는 연기가 가득한 안개가 갑자기 북서쪽 지역에서 몰려들어 … 사방에 생선 썩는 냄새가 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눈송이 같이 날라 다니던 재는 1촌(약 3cm) 두께로 쌓였고, 재는 마치 나뭇조각 같았다."
이후 백두산은 1925년 마지막으로 분화한 후 90여년 넘게 화산활동을 멈추었다.[129]
다음은 백두산의 주요 분화 목록이다.[118]
시기 | 분화 기록 |
---|---|
900년대 | 939년, 946년, 947년 |
1000년대 | 1014년, 1016년, 1017년, 1018년, 1019년 |
1100년대 | 1124년, 1199년 |
1200년대 | 1200년, 1201년, 1265년 |
1300년대 | 1373년 |
1400년대 | 1401년, 1403년, 1405년, 1406년 |
1500년대 | 1573년, 1597년 |
1600년대 | 1654년, 1668년, 1673년 |
1700년대 | 1702년 |
1800년대 | 1898년 |
1900년대 | 1903년, 1925년 |
2005년 이후 천지의 지하 2~5 km 하부에 화산지진이 증가하고 있는데, 2003년 이후 활발한 지진현상과 함께 천지 주변의 외륜산 일부 암벽에서 균열과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지 주변 온천수의 수온이 최대 83도까지 높아졌고 화산활동 직전에 나타나는 헬륨과 수소 등 마그마성 가스성분이 증가하였으며, 백두산 천지 칼데라 주변의 암석 틈새를 따라 화산가스가 새어나와 주변 일부 초목이 고사되기도 했다.
천지의 10~12 km 지하에 규장질(알칼리유문암-조면암) 마그마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규장질 마그마는 상대적으로 높은 점성으로 인하여 엄청난 양의 용존 고압가스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이 마그마가 지표로 상승하여 임계조건을 넘으면, 일시에 고압의 화산가스가 팽창해 강렬한 화산쇄설물(화산재 및 부석)의 대폭발을 수반하여 분화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천지 지하에서 발생하는 잦은 화산성 지진으로 천지에 담겨 있는 20억t의 물이 지하 암반 틈새를 따라 지하 마그마하고 만나는 경우 더 큰 화산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폭발의 규모는 10세기의 대폭발보다는 훨씬 작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두산 대폭발 정도 규모의 분화는 지구 전체 규모에서도 수천 년에 한 번쯤 일어나는 매우 드문 현상이기 때문이다.[132]
지진과 함께 천지에서 20억톤의 물이 쏟아져 나오면, 천지의 물이 한꺼번에 쑹화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 흘러가 대규모 홍수 피해가 예상됨과 동시에, 북한하고 중국 일대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분출되는 화산재는 대한민국과 일본, 러시아, 대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133][134]
백두산의 지질학적 기원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주요 두 가지 이론은 열점 또는 백두산 아래로 침강하는 태평양판의 미지의 일부분이다.[13]
약 500만 년 전부터 백두산은 분출을 시작하여 일련의 현무암질 용암류를 방출하여 용암대지를 형성했다. 화산의 원뿔 형성은 약 100만 년 전에 시작되었는데, 분출 물질이 트라키트질 화산쇄설류와 용암류로 바뀌면서부터이다. 원뿔 형성 단계 동안 4만 4,800년 전, 6,760년 전, 8,580년 전, 그리고 2,450년 전에 주요 플리니식 분화가 발생하여 일본해에 화산재를 퇴적시켰다.[14] 원뿔의 성장은 널리 알려진 두 차례의 대규모 폭발적 분화, 즉 천지봉(Tianwenfeng) 분화와 밀레니엄 분화(Millennium eruption)에 의해 중단되었다.[14][15][16]
천문봉 분출은 천년 분출에 앞서 광범위하게 두꺼운 회색과 노란색 부석층을 형성한 사건이다.[14][15][16][17][18] 분출의 정확한 연대는 불확실하며, 서로 다른 연대 측정 기법에 따라 4, 51, 61, 74 ka로 추정되고 있다.[17][15] 이 분출로 인해 광대한 지역에 노란색 부석과 화쇄류가 쌓였다.[19] 천문봉 근처의 부석 퇴적층은 천년 분출의 퇴적층보다 더 두껍다. 이는 천문봉 분출이 상당한 규모이며, 어쩌면 천년 분출과 비슷한 규모일 수 있음을 시사하며, 따라서 천문봉 분출 또한 VEI 6~7로 추정된다.[15]
백두산의 칼데라는 946년에 발생한 엄청난 규모의 분화(화산폭발지수(VEI) 6)[20], 즉 "천년 분화" 또는 "천지 분화"로 인해 형성되었다. 이 분화는 지난 5,000년 동안 발생한 가장 강력한 분화 중 하나로, 타우포 호의 230년 분화(Hatepe eruption)와 탐보라 산의 1815년 분화와 비교될 만하다.[21] 이 분화로 인한 화산재는 일본 홋카이도 남부와 그린란드까지 발견되었다.[22] 분화는 화산의 정상을 대부분 파괴하여 오늘날 천지로 채워진 칼데라를 남겼다.
한국 역사 기록인 『고려사』에 따르면, 946년 화산에서 약 450km 남쪽에 위치한 당시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하늘 북소리 같은 천둥"이 들렸다고 한다.[23]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은 정종(Jeongjong of Joseon)에게 큰 공포를 안겨, 죄수들이 사면되어 풀려났다고 한다.[23] 흥복사 사찰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11월 3일 일본 나라에서 약 1100km 남동쪽에 위치한 백두산에서 "흰 화산재비"가 내렸다.[23] 세 달 후인 947년 2월 7일에는 백두산에서 약 1000km 남동쪽에 위치한 일본 교토에서 폭발음이 보고되었다.[23]
이러한 대규모 분화 이후, 백두산은 1668년, 1702년, 1903년에 적어도 세 차례의 소규모 분화를 일으켰는데, 이는 아마도 바구아묘 이그님브라이트(Baguamiao ignimbrite), 우하오제 미세 부석(Wuhaojie fine pumice), 그리고 류하오제 응회암 고리(Liuhaojie tuff ring)를 형성했을 것이다.[16]
2011년, 남한과 북한의 전문가들은 마지막 분화가 1903년이었고 백두산이 약 100년마다 분화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대규모 분화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24][25] 북한 정부는 제임스 해먼드(James Hammond), 클라이브 오펜하이머(Clive Oppenheimer), 케일라 이아코비노(Kayla Iacovino)를 포함한 여러 화산학자들을 초청하여 최근 화산 활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게 했다.[26][27] 이로써 이아코비노는 북한에서 연구를 수행한 최초의 외국 여성 연구자가 되었다.[28][29] 연구자들은 2016년부터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2020년 2월 백두산 연구 센터(Mt. Paektu Research Center)를 설립했다.[30]
산의 중앙부는 지하의 마그마 상승 압력으로 인해 매년 3mm씩 상승하고 있다. 또한 흑요석 산지이기도 하며, 조선반도 북부의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에 사용된 흑요석의 산지는 백두산인 경우가 많아 이미 흑요석을 매개로 한 교역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쇄류 등의 화산 활동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2024년에 중국 측이 유네스코 세계 지오파크로 지정되었다.[76]
약 1300년 전의 화산 활동의 결과로 산사면에는 너비 200m가 넘는 산사태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79] 특히, 천지의 화구벽 주변에는 산사태의 전조로 보이는 균열이 많이 있으며, 장래 백두산 근방에서 발생하는 모든 지진동은 사면 붕괴를 유발할 위험이 있으며 사면 재해의 발생이 우려된다고 지적되고 있다.[79]
근대적인 화산 연구는 1900년대 이후에 시작되었고, 활동 경위에 대한 해명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시대의 분화설이 제기되고 있다. 주변국의 역사 기록에는 백두산의 화산 활동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80]
- 일본기략에 따르면, 893년.
- 삼국사기에 따르면, 917년.
- 조선(李氏朝鮮) 시대의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 1597년, 1668년에 화산 활동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 분화한 것은 1597년과 1702년이라는 설도 있다.[80]
- 1597년 10월 6일부터 8일까지의 분화에서는, 분화에 수반된 지진의 진동이 서울에서도 감지되었다.[81]
백두산은 약 1만 년간의 활동 휴지 기간 후 946년 겨울[82][83]에 지난 2000년 동안 세계 최대급(겉보기 분출량 100km3, VEI-7[84])으로 추정되는 거대 분화를 일으켰고, 그 화산재는 편서풍을 타고 일본의 홋카이도와 동북 지방에도 떨어졌다(백두산 苫小牧 테프라(B-Tm)[85]。『흥복사연대기』에 “(천경 9년) 10월 7일 밤 흰 재가 눈처럼 흩어졌다”라고 적혀 있으며, 율리우스력 946년 11월 3일에 아마 나라에서 화산재가 내렸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것이 B-Tm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86]. 또한, 나라에서 북쪽으로 약 100km에 위치한 수월호의 SG06 코어에서도 SG06-0226 화산재가 B-tm에 대비되고 있으며[87], 수월호에서 화산재가 내렸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분출물의 지질 조사 결과[88]에 따르면 활동은 6단계로 나뉜다.
# A: 일련의 활동에 앞선 활동으로 생각되며, 이도백하 泥流堆積物(이도백하 니류퇴적물)을 형성한 활동으로, 현재 이도백하 최상류부에서 대붕괴가 발생했다.
# B: 프리니식 분화에 의한 백두강하경석층. 백두산의 동쪽에서 남동쪽으로 쌓인 회색빛 거친 알갱이의 강하 경석층을 형성했다.
# C: 장백산 화쇄류堆積物(장백산 화쇄류퇴적물)을 형성하는 활동으로 '''파국적 분화'''. 규장질 경석을 주성분으로 하며 평균 두께 수 미터로 산체 주변에 넓게 분포한다. 총 부피는 10km3으로 추정된다.
# D: 양강화산사력층. A와 C의 활동에 의한 분출물이 북쪽 산기슭에 쌓이고, 홍수·범람에 의해 단구를 형성하고 있다. 정상에서 70km 거리에서 10m 정도의 두께가 확인된 곳도 있다.
# E: 원지강하경석·화산재층. 정상에서 동쪽으로 분포하는 경석·화산재층을 형성한 활동. 모래가 바람에 의해 이동하여 각지에 사구가 형성되어 있다.
# F: 북쪽 산기슭의 해발 1100m 이상에 분포하는 백산화쇄류堆積物(백산화쇄류퇴적물)을 형성한 활동.
2002년부터 2005년경까지 백두산 주변에서 군발지진이 산발적으로 발생하여 지반 균열과 붕괴가 발생하고, 산 정상의 융기가 관측되었다.[89] 더 나아가, 2006년에는 위성 영상 분석을 통해 백두산 남쪽에서 온도 상승이 관측되었고, 러시아 재난관리부(러시아 민방위 문제·비상사태·자연재해 복구부)는 백두산에 폭발 징후가 있다고 발표했다.[90] 2002년 이후 지진 발생 횟수가 이전보다 약 10배 증가했고, 정상 융기, 천지(칼데라 호수) 및 주변 숲에서의 화산 가스 분출이 확인되었다.
이후 2010년 아이슬란드에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이 발생했고, 그 다음 해인 2011년 3월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계에서는 893년 백두산 폭발[91]을 거론하며, 그 영향이 광범위하게 미칠 수 있고, 향후 폭발 가능성이 있는 화산으로 제기되어 주목을 받았다.[92] 10세기 이후 모든 폭발 기록은 자세하지 않지만, 대략적인 활동 간격은 약 100년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며,[93] 10세기 수준의 규모로 폭발한다면, 그 규모는 에이야프얄라요쿨 폭발의 약 1000배에 달할 것이며, 극동 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우려와 함께 4~5년 이내에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대한민국 기상청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보도가 있었다.[94] 또한 2017년 백두산 근처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북한이 대규모 핵실험을 실시한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95]
7. 문화적 의미와 상징성
백두산은 역사적으로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장백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3세기 고려 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와 부여, 고구려를 설명할 때 '태백산'으로 언급되었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에 편찬된 《고려사》의 성종 10년(991년)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12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백두산으로 불렀으나, 장백산, 백산이라는 명칭도 간간이 나타난다. 196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조중 변계 조약에서도 이 산은 백두산으로 명명되었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중국어)이라 부르며, 만주어로는 '골민 샹기얀 알린'(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ᠠᠯᡳᠨ|Golmin Šanggiyan Alinmnc) 또는 '골민 샨얀 알린'(ᡤᠣᠯᠮᡳᠨ
ᡧᠠᠨ᠋ᠶᠠᠨ
ᠠᠯᡳᠨmnc|Golmin Šanyan Alin}})이라고 한다.
백두산 관련 신화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에게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 신화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 특별 취급받았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에 불함산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태백산, 도태산 등으로 불리다가 현대에는 '장백산'으로 통일되었다. 이는 만주어 '골민 샹기얀 알린'을 의역한 것으로, 요, 금나라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 여러 문헌에서 '태백산', '백두산', '백산' 등으로 표기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태백산 또는 백산으로 불렀으며, 백산부라는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주석했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는 별도 주석을 달지 않았다.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태백산으로만 표기하고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 고례, 예맥을 모두 단군의 자손으로 보았다. 묘향산 주석에 대해서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 묘향산이 불교 성지라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 인식 희박으로 백두산 신앙이 묘향산으로 이동했다는 설, 고조선 수도가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백두산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였으며, 김일성은 이곳에서 항일 운동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정일이 백두산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1988년 백두산의 일부 봉우리가 정일봉으로 개칭되었다.
백두산은 남북한의 국가와 민요 아리랑에 등장하며, 북한의 국장에도 새겨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69조는 백두산을 "혁명의 성산"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러 구호와 상품명에도 사용된다.
백두산(長白山)은 청나라 시대의 샤머니즘에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인 숙신과 여진족에게 가장 신성한 산이었다.[52] 금나라는 1172년 백두산에 "흥국영응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1193년에는 "개천홍성제"라는 칭호를 내렸다. 산신을 위한 사당은 북쪽에 세워졌다.[8]
중국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씨는 그들의 시조 부쿠리 융손(布庫里雍順)이 백두산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1682년, 1698년, 1733년, 1754년, 1805년에 청나라 황제들은 길림을 방문하여 백두산에 제사를 지냈다. 백두산에서 행해진 의식은 고대의 봉선(封禪) 의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 의식은 중국 황제들이 태산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었다. 강희제는 태산과 백두산이 동북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같은 산맥에 속하며, 산둥성에 이르기 전에 일부가 바다에 잠겨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백두산의 지리와 풍수는 아이신기오로씨의 중국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했다.[52]
백산흑수(白山黑水), 즉 백두산과 흑룡강을 가리키는 말은 금나라(1115~1234) 시대부터 중국 동북부의 전통적인 명칭이었다.[53]
중국 길림성과 북한 양강도의 국경 지대에 있는 이 산은 옛날에는 “불함산”, “백산”, “태백산”이라고 불렸다. 이 중 “백산”, “태백산”은 중국과 조선에서 후대까지 이 산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백산”이라고 불렀다.[72] 현재 북한과 대한민국(한국)에서 사용하는 백두산이라는 명칭의 기원은 불명확하다.
만주족의 만주어에서는 골민 샹기얀 알린(만주문자:,전사: golmin šanggiyan alin, 한자음차: 과륵민산연아림, 뜻은 “끝없이 흰 산”)이라고 금나라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나라에서는 장백산 (長白山|창바이산중국어)으로 한역되어 정착했다.
현재도 사실상 지배하는 영토 지역은 아니지만, 한국은 “장백산”이라는 명칭이 중국에 의한 침략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국제적인 명칭 문제 운동을 전개하여 마찰을 빚어왔다.[73] 또한, 영유권에 대해 역사 인식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는 “장백산”보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먼저 기재되거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알파벳 표기 Paektu(-san), Baekdu(-san)이 채택되면서 중국에서는 뒤처졌다는 반발이 일어나 “장백산”이라는 명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74]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백두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장백산(장백산)”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백두산은 예맥족이 세운 고구려( 압록강·혼강) 근처에 있으며, 494년에 부여를 멸망시킨 말갈족 중 굴말갈과 백산말갈도 이 산 주변에 살았다. 고구려 멸망 후 698년에 건국한 발해는 산 근처에 중경현덕부를 설치하고, 산을 둘러싸고 다섯 개의 경(京)을 두었다. 926년에 거란(요)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을 세웠다. 이후에는 흑수말갈에서 발전한 금의 영토,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변천해 갔다.
조선인이 백두산의 절반을 영유하게 된 것은 몽골의 쇠퇴 후, 조선의 세종(재위: 1418년 - 1450년) 때부터였다. 세종은 압록강·두만강 연안의 요새화를 추진하여 백두산은 조선 민족과 여진족의 경계가 되었다.
;조선 민족
백두산은 주변에 거주하는 민족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문화·신앙으로서 우선 한국과 북한 모두 『삼국유사』가 인용하는 “고조선”의 “단군신화”가 국정교과서에서 가르쳐지고 있으며, 최초의 조선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이후 평양으로 천도하였기에 백두산은 “조선 민족의 요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러나 그 근거가 되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산의 이름은 태백산이며, 지금(『삼국유사』가 쓰여진 당시의 지금)의 묘향산(북한의 평안도에 있는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96] 참고로 『삼국유사』 제3권에 포함된 “대산오만진신”과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것이 조선의 문헌에서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지만, 현재 강원도 내의 산이며 현재의 백두산이 아니다. 불교 관련 항목에는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등과 함께 불교 수행지로 등장한다.
이영훈은 현재 백두산은 조선 민족의 성지이지만, 이씨조선 시대의 백두산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역사관을 상징하는 산이었고, 조선 민족의 성지가 아니었으며, 20세기 식민지 시대 멸망 위기에 놓인 조선인들이 민족 의식을 공유하게 되면서 백두산이 조선 민족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778년, 서명응이라는 학자이자 고위 관료가 백두산에 올랐는데, 서명응은 “이곳은 중국 영토도 아니고 조선 영토도 아닌 먼 변방이며, 천 년에 한두 사람 오르거나 오르지 않는 곳이지만, 마침내 내가 올라와 보니 이 큰 못( 천지)에 이름이 없으니, 하늘이 내게 이름을 짓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태일택”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태일택”은 천지만물이 태극에 기원을 두고, 천지만물은 태극으로 귀일한다는 의미이며, 태극을 발상한 서명응에게 단군 옹이 강림한 곳이라고 흥분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서명응 외에도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여러 사람이 백두산 등산기를 남겼는데, 어떤 사람은 백두산을 천하 제일의 명성 높은 중국의 곤륜산의 맥을 정통으로 잇는 산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백두산에서 조선 영토를 내려다보며 기자의 나라가 펼쳐져 있다고 읊었다. 이조 시대의 백두산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역사관을 상징하는 산이었고, 20세기에 들어 일본의 압제를 받고 멸망 위기에 놓인 조선인들은 민족이라는 새로운 발견에 이르러 백두산이 민족의 성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백두산을 신성시한 최초의 인물은 최남선이며, 최남선은 백두산에서 발생한 벌함문명이야말로 조선 문명의 근원이라는 학설을 만들어 증명하기 위해 1927년에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진찬기』를 저술했는데, 최남선에게 백두산은 민족의 성지였고, 백두산은 사라져 가는 조선인이 다시 태어나야 할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었다.[97]
;고구려
고구려의 백두산 신앙은 직접적으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백두산과 압록강과 관련된 시조 전설이 있다. 동명성왕#천광수태 참조.
;말갈·여진
『북사』말갈전에는 “국남유종태산자, 화언태황, 속심경외지, 인부득산상수오, 행경산자, 이물성거”라고 하여 이 산의 오래된 신앙을 전하고 있다. 『위서』말갈전에는 “국남유도태산, 위언대백, 유호표피랑해인, 인부득산상수오, 행경산자, 개이물성”이라 하고, 『수서』여진전에는 “유도태산자, 속심경외, 상유웅피표랑, 개불해인, 인역부감살”이라고 적혀 있다.
;여진·청나라
여진족은 이 산을 영산으로 여겼고, 그들이 세운 금은 1172년에 산에 사는 신에게 “흥국영응왕”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1193년에는 “개천홍성제”로 고쳤다. 그들이 개명한 만주족이 세운 청은 여진어 명칭을 “장백산”으로 한역하고, 금과 마찬가지로 이 산에 대한 매년 의례를 행했다. 청나라 역사서 『만주실록』에 따르면, 청나라 황실 아이신기오로씨의 조상은 장백산 동북쪽에 있는 부쿠리산()에서 천녀의 세 자매 중 막내인 불고륜(佛庫倫, )이 목욕하던 중 신작(神鵲)이 물어다 준 붉은 과일을 먹고 잉태하여 낳은 아이라고 한다.
8. 관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거의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을 통해 백두산을 오른다.
대부분의 중국, 러시아, 한국 및 국제 관광객들은 중국 측에서 백두산에 오르며, 북한 측 백두산 또한 북한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중국 관광 지역은 중국 국가여유국에 의해 AAAAA급 관광지로 분류된다.[65]
백두산 북한 측에는 여러 기념물이 있다. 백두산 온천은 천연 온천으로 생수로 이용된다. 패개봉은 김일성이 이끌었다고 알려진 조선인민혁명군|조선인민혁명군한국어의 항일 투쟁 당시 야영지였다. 비밀 야영지들도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형제폭포를 포함하여 여러 폭포가 있는데, 형제폭포는 꼭대기에서 약 3분의 1 지점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1992년 김일성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산 옆면에 "혁명의 성산"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형 표지판이 세워졌다. 북한은 산 정상까지 이르는 계단이 216개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김정일의 2월 16일 생일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이 주장은 논란이 있다.[66] 백두산 북한 측에는 두 대의 차량이 있는 케이블카 시스템이 있다.[67] 김정태 전기기관차공장에서 제작한 새로운 케이블카는 2020년 10월 30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68][69]
; 중국 또는 북한을 통한 관광
중국 국가 5A급 관광지(2007년 지정)[108]. 대폭포와 온천 등이 있어 중국 정부는 관광지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대련완다가 개발하는 리조트 지역인 "장백산국제도가구"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스키장 등이 건설되고 하얏트, 쉐라톤, 웨스틴 등 외국계 호텔도 유치되고 있다.[109] 한편, 중국 정부에 의해 기존에 투자가 환영받았던 한국계와 북한계 호텔이 폐쇄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110] 일본과 한국에서 관광객이 방문할 경우, 주로 여름(7~9월경)을 중심으로 교통 등이 편리한 중국 측에서 주로 입산한다. 장백산공항이 있지만, 일반인은 보통 철도를 이용하여 장춘 또는 심양·통화에서 철도로 이도백하역까지 가서[111],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사륜구동차를 전세 내어 백두산 기상대까지 간 후, 하차하여 10분 정도 걸어 외륜산 천문봉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보거나 북한 쪽을 바라본다. 복귀길에는 백두산 온천 등을 경유하여 온천계란 장소에서 정차하여 눈앞에 있는 장백폭포를 바라보고 역으로 돌아온다.
북한 측(평양에서 전세 항공편을 이용하여 삼지연비행장으로 이동)에서의 투어도 있다.
9. 논란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100] 정계비는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에 세워졌으며,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는 국경 표기가 있었다. 이 토문강(송화강 지류)을 두만강으로 보는 청나라 측 주장과 토문강으로 보는 조선 측 주장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충돌하였다.
현재 백두산은 천지를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1962년 10월 12일 조중 변계 조약 체결에 따라 백두산과 천지는 분할되었다.[55] 백두산의 북서부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남동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며,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101]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130]
2007년 아시안 동계 게임이 중국 장춘에서 개최되었을 때, 대한민국 선수단 일부는 시상식에서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104] 중국 스포츠 관계자들은 정치적 활동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항의했다.[62][63][64]
한국은 “장백산”이라는 명칭이 중국에 의한 침략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국제적인 명칭 문제 운동을 전개하여 마찰을 빚어왔다.[73] 또한, 영유권에 대해 역사 인식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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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러 봉우리들 중 제일 높다고 하여 백두봉(白頭峰) 또는 장군봉(將軍峰)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병사봉(兵使峰, 조선 시대 육군 장군인 병마절도사의 준말)이라고도 부르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천황의 연호를 따서 대정봉(大正峰)으로 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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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1991년 8월 8일 강철와아어를 교체하던 작업 인부들의 부주의로 붕괴되고 말았다.
[125]
문서
망천후는 2,712m지만 16봉에 들어가지 않는다.
[126]
뉴스
'백두산 화산 폭발' 알려면 '마그마 시추'가 답이다
http://biz.chosun.co[...]
조선일보
2010-11-09
[127]
뉴스
백두산 화산폭발로 발해 멸망한 듯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4-07-12
[128]
뉴스
금세기 중 폭발說…휴화산 백두산이 끓고 있다!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7-05
[129]
뉴스
백두산 화산폭발 과거 기록 살펴보니..."검은 먼지가 하늘에서"
http://ens.vop.co.kr[...]
민중의소리
2010-10-30
[130]
뉴스
간도오딧세이 - 백두산 영유권 이제는 말할 때다
https://news.naver.c[...]
주간경향
2008-10-23
[131]
웹인용
中華民國年鑑『 九十二年版 』 第一篇 總論 第二章 土 地 第二節 大陸地區
http://www.gio.gov.t[...]
2009-01-28
[132]
뉴스
10세기 동북아 초토화 '백두산 대폭발', 다시 초읽기?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0-07-30
[133]
뉴스
뻥이요, 백두산 폭발설의 대폭발
https://news.naver.c[...]
한겨레21
2010-11-20
[134]
뉴스
10세기 동북아 초토화 '백두산 대폭발', 다시 초읽기?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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