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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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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국광복회는 1935년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코민테른의 인민전선론에 영향을 받아 결성되었으며, 오성륜, 김일성 등이 참여하여 계급, 성별, 종교 등을 초월한 전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했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기관지 발간과 무장 투쟁을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내 지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계의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 조국광복회는 신간회와 달리 무장 투쟁을 통해 광범위한 반일 세력을 통합한 최초의 단체로 평가받으며, 해방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역사적 배경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났다.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인민전선론'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1]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하여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 천도교인, 지주까지 참가했다.[2]

조국광복회의 파생 조직은 원산, 함흥, 길주, 흥남, 성진 등지까지 그 규모를 확대했으며, 그중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곳은 갑산(甲山)공작위원회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1937년에 항일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되어 기관지 <화전민>을 발행하는 한편, 지하 조직 건설, 군사시설 파괴, 군사수송 방해 등 항일운동을 폈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부대와 함께 만주에 있는 관동군에 대한 대대적인 유격전과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했는데, 1937년 당시 김일성이 지휘했던 동녕현성전투와 보천보 전투가 대표적이다.

1937년 10월부터 1938년 10월 사이 739명이 검거되어 188명이 기소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1938년부터 만주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저항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주국군 소속의 간도특설대 등이 대대적인 색출 및 토벌 작전을 개시하자 1940년경 대부분의 유격대는 소련으로 넘어갔다. 조국광복회는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3]

2. 1. 결성 배경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만주에 있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인민전선론'이 대두되었다.[1]

원래 남만주, 동만주 일대는 '독립군'으로 칭해지던 민족주의 계열 항일 군사조직과 '빨치산'으로 칭해지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 군사조직이 이념 차이로 인해 자주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전선론의 영향으로 오성륜(吳成崙)·김일성(金日成)·엄수명(嚴洙明)·이상준(李相俊) 등은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창립했다.[1]

2. 2. 창립과 주요 강령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났다.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오성륜(吳成崙), 김일성(金日成), 엄수명(嚴洙明), 이상준(李相俊) 등 적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론에 기반한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창립했다.[1]

3. 주요 활동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만주 지역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 사이에서 인민전선론이 대두되었다. 오성륜(吳成崙), 김일성, 엄수명(嚴洙明), 이상준(李相俊) 등은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창립하고, '전 민족의 계급, 성별, 지위, 당파, 연령, 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했다.[1] 이후 국내외 조직을 확대하여 기관지를 발간하고 무장 투쟁을 하였으나, 1937년 10월부터 1938년 10월 사이에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3]

3. 1. 국내외 조직 확대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구성되었으며,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기관지 <<3·1월간>>을 발행하여 항일 의식을 높였고,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었지만 반일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자, 천도교 신자, 지주까지 참여시켰다.[2]

조국광복회의 파생 조직은 원산, 함흥, 길주, 흥남, 성진 등지까지 확대되었으며, 그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곳은 갑산공작위원회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1937년 항일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되어 기관지 <<화전민>>을 발행하고, 지하 조직 건설, 군사 시설 파괴, 군사 수송 방해 등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 부대와 함께 만주에 있는 관동군에 대한 대대적인 유격전과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는데, 1937년 당시 김일성이 지휘했던 동녕현성 전투와 보천보 전투가 대표적이다.

1937년 10월부터 1938년 10월 사이에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1938년부터 만주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저항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주국군 소속의 간도특설대 등이 대대적인 색출 및 토벌 작전을 시작하자, 1940년경 대부분의 유격대는 소련으로 넘어갔다. 조국광복회의 이름으로 조직은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3]

3. 2. 무장 투쟁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만주 지역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 사이에서 인민전선론이 대두되었다. 오성륜(吳成崙)·김일성·엄수명(嚴洙明)·이상준(李相俊) 등은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창립하고, '전 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했다.[1]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부대와 함께 만주에 있는 관동군에 대한 대대적인 유격전과 국내진공작전을 폈다. 1937년 당시 김일성이 지휘했던 동녕현성전투와 보천보 전투가 대표적이다.[3]

3. 3. 조직 와해

1937년 10월부터 1938년 10월 사이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이 와해되었다.[3] 1938년부터 만주국군 소속 간도특설대가 만주에 있던 동북항일연군 등 저항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및 토벌 작전을 개시하자, 1940년경 대부분의 유격대는 소련으로 넘어갔다. 이후 조국광복회는 재건되지 못했다.[3]

4. 의의 및 논쟁

신간회는 좌우합작을 기반으로 했지만, 내부의 일제 타협론자들의 움직임과 국내에서의 합법적인 운동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대규모 무장 투쟁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조국광복회는 타협론을 배제하고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광범위한 반일 세력을 통합한 최초의 무장투쟁단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4]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측 학계는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상부구조에 관련된 인물이었음을 인정한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초기에 천도교 신자들과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정권 형성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해방 전 조국광복회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과 천도교 신자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공산주의자들이 독점적인 정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이들은 대부분 도태되거나, 실질적으로 조선로동당의 우당이 된 천도교청우당으로 흡수되었다.

4. 1. 항일 무장 투쟁의 통합

신간회는 좌우합작을 기반으로 했지만, 내부의 일제 타협론자들의 움직임과 국내에서의 합법적인 운동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대규모 무장 투쟁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조국광복회는 타협론을 배제하고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광범위한 반일 세력을 통합한 최초의 무장투쟁단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4]

조국광복회에서 김일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에서 논의되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 가짜설이 정설로 여겨졌고, 김일성은 항일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는 마적단 수장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조국광복회 창설을 주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당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김일성 가짜설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라는 의견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면서, 김일성이 조국광복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계에서는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창설의 실질적인 주도자였고, 해방될 때까지 조국광복회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여러 역사 정황을 고려할 때,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상부구조에 관련된 인물이었음은 양측 학계 모두 인정하고 있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초기에 천도교 신자들과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정권 형성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해방 전 조국광복회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과 천도교 신자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공산주의자들이 독점적인 정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이들은 대부분 도태되거나, 실질적으로 조선로동당의 우당이 된 천도교청우당으로 흡수되었다.

4. 2. 김일성의 역할 논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조국광복회에서 김일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논의해 왔다.[5]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198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 가짜설을 지지하여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창설을 주도하지 않았고, 해당 단체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김일성 가짜설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라는 의견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면서, 김일성이 조국광복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계는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창설을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해방될 때까지 조국광복회에서 독점적인 지위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여러 역사 정황을 고려할 때,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상부구조에 관련된 인물이었음은 양측 학계 모두 인정하고 있다.[6]

4. 3. 해방 이후의 영향

신간회는 좌우합작을 기반으로 했지만, 내부의 일제 타협론자들과 합법적인 운동 방식으로 인해 대규모 무장 투쟁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조국광복회는 타협론을 배제하고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광범위한 반일 세력을 통합한 최초의 무장투쟁단체였다는 의의를 갖는다.[4]

조국광복회에서 김일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 가짜설이 정설로 여겨졌고, 김일성은 항일조직에 가담한 적 없는 마적단 두목으로 조국광복회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김일성 가짜설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면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령관이었던 김일성이 조국광복회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소수설이 되었다.[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계는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창설을 주도했고, 해방까지 조국광복회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여러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상부구조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점은 양측 학계 모두 인정한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정권 형성에는 천도교 신자들과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해방 전 조국광복회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들은 대부분 도태되거나, 실질적으로 조선로동당의 우당이 된 천도교청우당으로 흡수되었다.

참조

[1] 논문 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1994
[2] 논문 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1994
[3] 서적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4] 논문 1930년대 천도교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연구 - 갑산ㆍ삼수ㆍ풍산ㆍ장백현 지역의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0
[5] 논문 '반민생단투쟁'의 정치사적 의의 : 김일성 부상과 조국광복회 성립의 동인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8
[6] 논문 '반민생단투쟁'의 정치사적 의의 : 김일성 부상과 조국광복회 성립의 동인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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