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범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범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군인, 정치인이다. 1940년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1942년 제2지대장을 겸임하며 미국, 중국과 연합 작전을 수행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유도회 회장, 용인대학교 학장을 역임했고, 정치 활동으로 국방부 장관, 주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다. 족청(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하여 청년 운동을 이끌었으나, 4.3사건 진압, 한강철교 폭파 등에 관여하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한편, 파시스트적 성향, 청산리 전투 관련 역사 왜곡 등의 비판도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범석 - 국민의당 (1963년)
    1963년 창당된 국민의당은 야권 통합을 목표로 민주당, 신정당, 민우당 및 무소속계가 참여했으나, 대통령 후보 추대 문제와 선거 부진, 당내 갈등으로 1964년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 서북청년회 - 안두희
    안두희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으로, 1949년 김구 암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한국 전쟁 중 석방 후 군 복무를 재개했으나,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와 과거 행적에 대한 논란 속에 도피 생활을 하다 1996년 피살되었다.
  • 심근병증으로 죽은 사람 - 조지 마이클
    조지 마이클은 1963년 런던에서 태어나 2016년 사망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로, 듀오 왬!으로 활동하며 솔로 앨범을 발매하여 전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고, 그래미 어워드 등을 수상했으며 202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범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범석
원어명李範奭
1940년대 광복군시절
국적대한민국
출생일1900년 10월 20일
출생지대한제국 한성부 용동
사망일1972년 5월 11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심근경색)
본관전주(全州)
학력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학력 참고.
종교유교(성리학) → 대종교
별명(字)는 인남(麟男), (號)는 철기(鐵驥)
일명(一名)은 왕운산(王雲山), 왕인남(王麟男), 이국근(李國根), 왕국진(王國鎭)
서훈건국훈장 대통령장(1963년)
가족 관계
부모이문하(부)
연안 이씨 부인(생모)
김해 김씨 부인(계모)
배우자경주 김씨 마리야 김수란(재혼)
올레리야(러시아 여성이며 측실)
자녀이부흥(장남), 이인종(차남)
친인척#가족 관계 참고.
공직
직책초대 국무총리
임기1948년 7월 31일~1950년 4월 20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이시영
전임이윤영(서리)
후임이윤영(서리)
직책2초대 국방부 장관
임기21948년 8월 15일~1949년 3월 20일
전임2류동렬(미군정청 통위부장)
후임2신성모
대통령2이승만
부통령2이시영
총리2이범석
직책3제2대 중화민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임기31950년 12월~1951년 9월
전임3신석우
후임3김홍일
직책4제8대 내무부 장관
임기41952년 5월 24일~1952년 7월 22일
전임4장석윤
후임4김태선
직책5제5대 참의원
임기51960년 7월 29일~1961년 5월 16일
전임5(신설)
후임5(폐지)
군사 경력
1946년 10월 9일,
조선민족청년단 총재 직위에 추대된 철기 이범석
복무 기간1919년 1월~1946년 12월
군 복무대한 광복군
계급대한광복군 중장
지휘대한광복군 참모총사령관
근무대한광복군
참전청산리 전투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경력
경력국토통일원 고문
신민당 고문
한국독립당 고문
민주당 최고위원
국민의당 최고위원
호헌동지회 최고위원
자유당 상임위원
#저서 참고.
정당무소속

2. 생애

이범석은 1940년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광복군 제2지대장 나월환이 암살되자 제2지대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제2지대장 취임 후 미국 중국방면군과 연합작전을 성사시켰고, 독립군 장교들에게 OSS 특수훈련을 시켰다. 1945년 광복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18일, 이범석은 주중 미군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입국하여 김포비행장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저지로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1950년 4월 주 중화민국 한국대사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의 귀국 지시를 받고 귀국하여 정부를 따라 이동하였다. 1953년에는 6개월간 구미 각국의 정치·군사정세를 시찰하였다.

1970년 12월 25일 오전 2시 15분, 부인 김마리아가 신당동 자택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광주군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1972년 5월 17일 오전 2시, 김마리아의 유해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어 국가유공자 묘역의 이범석 묘역에 합장되었다.

2. 1. 생애 초기

2. 1. 1. 출생과 가계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에서 이문하(李文夏)와 연안 이씨(延安 李氏)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조선 왕족으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광평대군의 후손이었고[2] 광평대군의 셋째 손자인 청안군 이영의 셋째 아들이었던 정안부정 이천수(李千壽)의 15대손이었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15대조 정안부정에서 끝났고, 14대조 이한(李漢)은 음직으로 출사하여 배천군수(白川郡守)에 이르렀다. 이후 줄곧 벼슬을 배출하여 한성 근교에서 거주하였다. 그 뒤 증조부 이목연(李穆淵)의 대에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으로 이주하였으나 관료 생활을 하던 아버지 이문하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상경했다.

증조부 이목연은 형조판서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양자로 들어온 종조부 이인명(李寅命)은 예조판서와 의금부 판사를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이인천(李寅天)은 서자였으며 부사용과 학관을 지냈다.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교촌리에는 종조부 이인명 대부터 거주하던 집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버지 이문하


아버지 이문하는 구한말의 관료로 농상공부 참의와 궁내부 참사관을 역임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이문하는 당시 대한제국 관료였으며 농상공부의 비서관으로 근무하여 외근이 잦았으며, 어머니 연안 이씨는 심장병으로 와병중이었다. 위로는 형 이범홍, 누나 이범호, 누나 이범숙이 있었고, 후에 계모 김해 김씨에게서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 제물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풍족한 가정 환경과 개화 성향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나 불행하게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게 되었다. 1911년 아버지는 강원도 이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3]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개화 사상에 감화된 아버지 이문하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20여세 되던 노비 정태규(丁太圭)는 이범석의 집을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정태규는 어린 주인집 장남 이범석과의 정이 들어 집을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한다. 노비가 아닌데도 집에 두게 되어 지탄을 받게 되자 아버지 이문하는 정태규를 오씨 성을 쓰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의 대대에 병사로 넣어 주었다. 정태규는 이후 박승환 대대의 전투병으로 근무하며 군복 차림으로 종종 이범석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4]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고 16세이던 1915년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경성고보 시절 중국으로 망명했다.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명령이 하달되었다. 구한국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하면서 대대 병력은 서울 시내의 일본 군대에게 돌격하여 교전하였으나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경성의 민가에 무차별 난입하여 구한국 병사의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범석의 집에도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그날 초저녁 병정이 쓰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누이 이씨와 함께 마을 어귀로 나갔다가 검은 바지에 붉은 동을 맨 군복차림이던 정태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게 되었다. 그는 후일 이를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漢學)을 배웠다.[4]

10세에 부친 이문하의 재혼으로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20년 연하의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유년기의 이범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였으나, 그를 독립운동가로 키워 낸 것은 계모였다.[3]

계모 김해 김씨 부인


개구쟁이였던 이범석은 장난기가 심하여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못된 짓을 골라하였다. 말을 타고 마을 순시에 나선 일본인 순사를 향해 고무 새총을 쏘아 맞추어, 순사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3] 말에서 굴러 떨어진 일본인 순사는 아버지 이문하를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아버지 이문하는 이를 무마시켰다. 곡식을 넌 멍석을 끌어다 물에 집어던지고 도망치기가 예사였으며, 하루는 암소에게 뱀을 밀어 넣는 바람에 암소가 길길이 뛰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3] 짖궂었던 그는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의 다른 소들의 항문에도 뱀을 집어넣어 소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게 만들었다. 소 주인은 즉시 이문하를 찾아가 항의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왜인 순사의 항의에도 눈 하나 끄떡하지 않던 이문하는 이번에는 아들을 향해 도끼를 집어 던졌다.[3]

남편의 도끼를 보고 계모 김해 김씨는 아들을 변호하던 중 아들을 감싸려 달려들었고, 도끼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달려 든 계모의 무릎에 맞고 말았다. 이후 계모는 평생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됐다.[3] 계모의 아들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다. 가을이 되면 찹쌀로 떡을 빚어 이역만리 만주까지 독립운동에 겨를이 없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3] 이후 이범석은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에게 더욱 각별히 대하였다고 한다. 이범석은 만년에 집필한 저서 《우둥불》에서 개구쟁이였던 자신을 끝까지 믿고 신뢰한 계모 김해김씨에 대한 사모(思母)의 정을 구구절절이 회고하기도 했다.[3] 이범석에 의하면 계모 김해김씨는 인자하고 한문에도 능할 뿐 아니라 교양이 있던 분이라고 평했다.

2. 1. 3. 학창 시절과 망명

1910년 이범석은 경성부 장사동(長沙洞)에 있던 사립경성장훈학교 보통학급 1학년(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집에서는 훈장 대신 그의 외삼촌 이필승(李弼承)이 한학을 가르쳐 주었다. 종종 그의 집에 이필승의 동창이던 신익희가 방문했다. 이범석의 회고에 의하면 신익희는 가끔 놀러와 자신을 안아주곤 했다고 회상하였다. 이범석에 의하면 신익희는 당시 무척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해 8월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아버지 이문하는 3, 4일간 단식하며 통곡하였다. 이후 이문하가 강원도로 낙향하게 되면서 집안을 따라 이사, 1911년 전학하여 강원도 이천의 이천공립보통학교(伊川公立寶通學敎)를 다니게[5] 되었다.

강원도에 있을 당시 그는 강원도 산골에 은신해 있다가 잡혀가는 의병들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의병들의 은신처를 밀고하거나 수색에 앞장서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헌병보조원이었다. 그 중에는 무장해제 후 변절한 한국군도 있었다 하며, 이범석은 후일 헌병보조원들을 가리켜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며 개탄하였다. '공을 세웠다고 어깨 밑에 빨간 사람 인(人)자 모양의 견장을 달고 우쭐대는 헌병 보조원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1913년 3월 이범석은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3년 이범석은 집을 떠나 경성으로 유학, 당시 중학교이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추천으로 입학하였다. 이때 박헌영, 심훈 등을 만났고, 그들은 이범석의 동창생이 되었다. 경성고보 1학년, 2학년 재학 중 이범석은 명랑한 성격으로 교내 8선녀로 뽑히기도 했고, 경성 청년회관에 다니며 유도를 배웠다. 2학년 겨울 때에는 스케이트를 배우기도 했으며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에는 글짓기에 흥미를 두었다. 3학년 재학 중 그는 학교에 한시(漢詩)를 지어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글을 잘 지었던 그는 한문선생인 여자정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늘 이범석에게 신동이라 칭찬하면서 앞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라며 격려하였다.

경성고보 재학 당시 그는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등, 하교하였다. 일본인 재학생들은 그를 수시로 무시하였고, 3학년 1학기 초기에 사소한 말다툼이 감정이 되어 패싸움을 하였다. 교무실에 끌려간 그는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성질이 야만스러워 남을 존경할 줄 모른다는 모욕적인 꾸중을 듣게 되었다. 그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6] 수료하고, 이후 중국 항주체육학교를 졸업하였다.[6]

1914년부터 아버지 이문하에 의해 결혼이 준비되었다. 그는 1915년 당시 천안군 군수이던 김승현의 딸과 약혼하였고, 1915년 가을 김씨와 결혼하여 서울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부인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어 그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경성고보 재학 중이던[6]1915년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꿈꾸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가망이 없었다. 1915년 여름 이범석은 재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여운형을 만났다. 어느날 그는 여운형을 찾아가 중국으로 망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국내 학생들의 중국 망명을 주선하던 여운형은 그의 중국 망명 주선을 수락한다. 그는 이천의 집으로 내려가 아버지 이문하에게 중국 망명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아버지는 그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망명을 만류하였고, 아버지는 중국 망명에 뜻을 둔 아들을 계속 설득하였다.

1915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경성으로 상경할 때 아버지 이문하는 그에게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는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출국 전 이범석은 아버지 이문하가 재산의 일부를 한성은행에 예금한 것을 확인, 아버지 이문하와 친분이 있던 한성은행장 한상용을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한상용 댁을 수시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 한상용에게 집에서 전보가 왔는데 급히 토지를 매입하게 되어 돈을 출금하라는 전갈을 받았다고 하고, 돈 1,300원을 인출해왔다. 1,300원을 인출한 그는 여비를 넉넉히 마련하고자 누나 이씨의 집을 찾아갔다. 누나 이씨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망명한 신석우의 아내로, 남편의 뜻을 이해하던 누나는 자신을 찾아온 남동생에게 자신의 패물을 팔아서 마련한 돈 100원을 장만해주었다. 그는 '내가 떠난 후 1주일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집에 알리지 말라'고 애원한 뒤 이별하였다.

1915년 12월 하순 그는 이천을 떠나 영등포로 갔다. 이때 그의 친구 중 신필(申弼)만이 그를 전송해주었다. 여러 친구가 있었으나 그 중 비밀을 지킬 친구는 신필 한사람으로 본 그는 신필에게만 알리고 그에게 부모님에게 전하는 편지를 맡겼다. 일인학생을 가장하고 열차편으로 신의주에 도착,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만주 안둥현에 도착, 중국으로 망명했다.

안둥에 도착하여 중국인 옷으로 갈아입고, 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친구 이병삼(李丙三)에게서 배운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인으로 위장, 열차편으로 산해관, 펑톈에 도착했다. 펑톈의 고려 여관에서 여운형이 묵는 호실로 찾아가 해후했다. 그는 여비 부담을 우려하였으나 이범석은 여비가 있음을 알렸고, 그와 함께 난징으로 가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는 여운형에게 매부가 신석우임을 알렸고, 여운형은 신석우가 신규식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매부인 신석우를 찾아갔다. 그곳 불조계(佛租界)의 어양리(魚陽里)에서는 상하이 한인 지도자 신규식을 만났으며, 그의 집에 유숙하며 6개월간 항주(抗州)의 항주군관예비학교를 수료하였다. 신규식의 집에 유숙할 때 그의 집을 방문한 쑨원을 보게 되었다.

2. 2. 독립운동과 광복군 활동

1945년 5월 섬서성 서안 교외 두곡(杜曲)에서 이범석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정진대가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와 연합하여 국내 진공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았다.[10] 8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8월 18일 미군 중국전구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상하이로 되돌아온 뒤 그는 광복군의 잔여 사무정리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일본군 및 만주군 패잔병들을 설득, 귀순시켜 광복군에 받아들이는 활동을 지도, 전개하였다. 한편 그는 각국의 중흥사와 근대국가 건설에 관련된 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였고, 청년운동과 중국 손문의 삼민주의 이념에 관련된 서적도 구하여 독서하였다. 1946년 초 이범석은 비밀리에 광복군 간부 중에 유능하고 동작이 빠른 인물을 비밀리에 한국에 먼저 파견하여 국내 정세를 정탐하게 했다.

1946년 초 미군정청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가 보낸 밀사를 만났다. 한국 국방경비대의 한국인 책임자를 찾던 하지 중장은 미군 주둔군 경비대 사령관이었던 당시 현역 미국 육군 대령 버나드를 상하이로 보내 그에게 한국 국방경비대의 한국인 책임자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정에 참여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의 거부로 군정청 통위부장직은 류동렬에게 넘어갔다.

2. 2. 1. 독립 운동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가 제공되지 않아, '이범석' 위키 페이지의 '독립 운동'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요약과 원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드리겠습니다.

2. 2. 2. 청산리 전투

청산리에서 성과를 올린 뒤 그는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이주,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馬麓溝)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수 백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내 왔다. 1920년 이승만은 그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격려하였다.

1921년 1월 26일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8]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대한독립군서일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다.[8] 이범석도 이들을 따라 이만까지 갔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물주 자유시로 옮겨갔다.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 측의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죄다 반납한 채였다.[8]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8] 덕택에 이범석은 21년 6월 자유시 참변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21년 이승만은 그에게 서신으로 연락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그에게 유럽과 미국에 대외 선전, 홍보를 위한 자료를 요청하였고 이범석은 자료를 미국의 구미위원부로 발송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계속 군사 자금과 독립군을 위한 피복과 가죽 옷을 발송해주었고, 이범석의 이동 이후에도 서신연락으로 소재지로 격려 편지와 군 자금, 선물을 계속 보내왔다. 이승만의 계속된 후원과 편지에 감격받은 이범석은 후에 그를 돕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과는 달리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자서전에서 청산리 전투북로군정서 김좌진과 자신만이 참여한 것처럼 서술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싸운 것이며, 김좌진과 이범석이 그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56] 그러나 홍범도대한독립군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전투에 가담하여 싸웠다.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 단독의 전과라고 알려진 것은 전투 참가자 중 한 사람인 이범석이 《한국의 분노》라는 회고록에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57] 그는 후에 《우둥불》이라는 다른 회고록을 다시 발표, '홍범도 부대가 전투 직전 도망갔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 변명 또한 거짓임이 밝혀졌다.[57]

청산리 전투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함께 싸웠으며, 그 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도 특히 눈부셨다.[56]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연합으로 나와 있다.[56] 임정 발표에 의하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병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57]

이범석 회고록에 의하면, 청산리 전투전 작전회의에서 김좌진장군, 홍범도장군, 최명록장군을 지휘부로, 이범석을 전투지휘관으로 하고, 각 부대별 전투지역도 설정하였으나, 실제 이튿날 전투시에 해당 직전지역에 그 부대들이 존재하질 않아 할 수 없이 북로군정서가 단독으로 백운평의 소수병력에 의한 작전이 유리한 지역으로 옮겨 작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천수평전투시 홍범도부대가 그 일대에서 일본군에 포위 당한채 있던 것을 발견했고, 이범석부대가 천수평 적을 기습시 홍범도 부대가 협공을 하지 않고 안도현 방향으로 궤주하였고, 오히려 안도현 입구 우도양창 계곡에서 홍범도부대가 단독으로 야영하다가 큰 피해를 입은 사실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 청산리전투가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단독 작전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2. 2. 3. 고려혁명군, 광복군 활동

청산리 전투에서 성과를 올린 뒤 이범석은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이동,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일본군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수 백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 승전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냈다. 1920년 이승만은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격려하는 편지와 함께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냈다.[8]

1921년 1월 26일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대한독립군서일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었다.[8] 이범석도 이들을 따라 이만까지 갔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물주 자유시로 옮겨갔다.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 측의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죄다 반납한 채였다.[8]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8] 덕택에 이범석은 21년 6월 자유시 참변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21년 이승만은 그에게 서신으로 연락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그에게 유럽과 미국에 대외 선전, 홍보를 위한 자료를 요청하였고 이범석은 자료를 미국의 구미위원부로 발송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계속 군사 자금과 독립군을 위한 피복과 가죽 옷을 발송해주었고, 이범석의 이동 이후에도 서신연락으로 소재지로 격려 편지와 군 자금, 선물을 계속 보내왔다. 이승만의 계속된 후원과 편지에 감격받은 이범석은 후에 그를 돕게 된다.

1942년 4월 각지대 개편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그는 제2지대장을 자원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개편된 제2지대장직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2지대장으로 부임하여 시안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교육훈련과 항일투쟁을 하였다.

광복군 간부, 미국 OSS 요원들과 함께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이범석)


동시에 그는 윈난 강무학교 동기들과 선,후배들과 중앙 훈련단 시절의 동료, 선후배들과 연락을 통해 일본군 포로 중 한국인을 선별하여 광복군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시안지역 행형청 주임으로 있던 중국군 중장 원차오지(文朝籍)는 그의강무학교 동기로, 부대편성에 당시 그의 도움과 원조를 얻기도 했다. 원차오지의 협조로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한국인 포로를 선발해 광복군으로 편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후 이범석은 일본군 점령지에 광복군 공작원을 파견하여 초모공작과 정보 입수 및 선전을 위한 밀정 파견, 탈영하는 한국인 출신 병사들의 황하강 도하에는 중국군 집단군 총사령관 이연년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상부의 지시가 아닌 그의 강무학교와 중앙훈련단 당시의 인간관계에 의한 도움이었다. 1942년 겨울 국내 진공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중국으로부터의 원조 보다 연합군의 원조를 받으면 유리할 것이라 판단하여 그는 주중 미국군 공군사령관 웨드마이어와 교섭을 시도했다. 이후 임정 각주 김구, 구미위원장 이승만 등의 주선으로 미국과 연결 미 첩보국 OSS와 합동훈련을 시도하면서 특수훈련에 참여한다.

2. 3. 광복 이후

1945년 10월 조선유도협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16] 귀국 후 그는 조선유도협회의 회장직을 흔쾌히 수락하였으며 대한유도학교의 창립을 적극적으로 후원, 도와주었다.[17] 1950년 11월 대한유도연맹과 대한연무관이 통합하여 대한유도회로 개편되면서 대한유도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16]

1953년 6월 15일 대한유도학교의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18] 대한유도학교는 뒤에 교명을 용인대학교로 변경하였다.[18] 1953년 9월 이범석은 이승만으로부터 족청계 제거라는 압박을 받게 되었고 이는 이범석이 대한유도회 회장직과 대한유도학교 학장직을 수행하기 힘들게 하였다.[16] 10월 1일 대한유도학교 학장직을 사퇴한다.[18] 그 뒤 대한유도회 회장직만을 유지하다가 1954년 12월 대한유도회 회장직에서도 물러난다.

2. 3. 1.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1946년 봄, 이범석은 광복군 육군 중장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은 광복군을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하였다. 1946년 6월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정식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11] 6월 22일 비행기편으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 당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이후 이승만은 공식, 비공식 행사에 그를 대동하고 내외 귀빈에게 이범석을 소개하였다.

국내 정진군
(좌측 네 번째부터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 한사람 건너가 이범석)


귀국 직후부터 청년단체 조직을 추진하였다. 6월 말 미군정청 군정청 사령관 하지와 군정장관 아서 러치를 방문, '청년운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물질적 도움을 요청했다. 장준하를 불러 도움을 청했고,[11] 장준하김구의 양해를 구해 비서직을 사퇴하고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입단하였다.[12] 이후 여러 청년 및 광복군 인력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민족청년단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귀국 직후 국방경비대의 고문직을 5개월간 맡았다가,[13] 11월 국방경비대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귀국하여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 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청년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됐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미군정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반공주의에 투철함을 인정받아, 일본 도쿄에 주둔중인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원조계획을 상신, 맥아더는 하지와 러치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군정으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었다.[14] 한편 이승만, 김구, 김성수가 주도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는 다소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 3. 2. 조선민족청년단 활동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구호를 내건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창설한다.[15] 1946년 10월 8일자 대동신문에 귀국 소감을 발표하였다. 11월 24일 경기도 수원부 (수원역 근처)에 대지 5만 평, 건평 2천 평의 건물을 완공하고 전국 각지에서 선발한 청년 2백 명을 1기생으로 입소시켜 교육을 시작하였다. 설비는 부족하였으나 군정청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숙사, 교사 건물, 강당, 극장 등을 우선적으로 구비하였다. 이범석은 족청의 학과 담당 교수로 강의하였고, 안호상, 정인보, 배성룡, 강세성(姜世聲) 등을 강사로 초빙하였고, 객원 강사이자 정신훈화 교육으로 김활란, 이철원, 현상윤, 조소앙 등을 위촉하였다.

그 밖에 김관식, 김활란, 이철원, 현상윤, 이용설 등 32인을 족청 전국지역 위원으로 위촉하였고, 이사에는 최규동, 백낙준 등 12명, 상무이사에 김형원(金炯元), 노태준, 박주병(朴柱秉), 설린(薛麟), 김웅권 등을 위촉하였다. 군사 훈련과 이론 교육이 병행되었으며, 1개월간의 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각기 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여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는 7기생부터는 특별히 여성 대원들도 수용하였다.

이후 청년단체를 운영하며 안호상·장준하 등과 민족청년단을 이끌었으나 이범석과 안호상의 노선에 반발한 장준하는 족청을 탈퇴한다. 이후 이범석은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민족청년단은 서북청년단, 백의사 등과 함께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좌파 진영에서는 그의 민족청년단을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를 도조 히데키와 비슷하다며 비꼬기도 하였다. 또한 족청이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것을 들어 좌파 진영에서는 그를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1948년 3월 좌우대립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두한에 감형을 위해 지청천 등과 존 하지에게 진정을 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2. 3.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빈칸)

2. 3. 4. 정치 활동

1948년 10월 19일 이범석은 4·3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 반란의 의도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또한 유엔 승인 이전에 전복하려는 것'으로 보았다.[28] 그러나, 여수 주둔군 제14연대에서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제주도에 진압군으로 파견하기로 하자 제14연대 내의 좌익세력이 이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4·3 사건 진압 과정에서 그는 경찰권을 지휘하던 조병옥과 경쟁하기도 했다. 여수·순천 사건 소식을 접한 그는 강경 진압을 위해 공군을 추가로 증원, 파견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전 제한된 장비만 지원받은 한국공군에 제대로된 전폭기가 존재하지 않아 L-4 연락기를 무장시킨 그는 연락기에 경기관총을 장착시키고, 연락기는 폭장창이 없어 폭탄을 설치할 수 없어, 폭탄 대신 박격포탄을 설치해서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 고문인 로버트 장군은 그의 진압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비행기가 원거리를 비행하기 어려워, 가로수를 베고 도로를 비행장으로 개설하고, 3·8선 주변 병력 일부를 빼서 진압군에 파견하기도 했다. 여수·순천 사건은 곧 진압되었고, 관련자들은 체포·사살되었으며, 육군 소령 박정희 등 군대 내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 당시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라고 주장했는데,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 것이다.[28]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29]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30]"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30]"라고 밝혔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30]"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이범석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이범석 총리는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29]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신을 극우파로 지적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28][31]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32]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범석은 이승만의 측근 중 2인자격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의 세력인 족청의 강제해산을 권고했고, 지청천대동청년단과의 통합을 통해 족청을 자연스럽게 소멸시켜갔다. 족청이 해산되자 그는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곧 주 중화민국 대사로 전출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급히 귀국하였다.[33] 6월 27일 이승만의 호출을 받고 경무대를 방문,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으니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현대전은 옛날과 달라 명성있는 장군의 호령으로 되지는 않음을 지적하고 과학과 질의 전쟁임을 강조했다. 이승만과의 면담 직후 동일 27일 국방부에 들렸다가 북아현동의 집으로 귀가하던 중 모윤숙박순천이 찾아와 나라의 위기가 닥쳤음을 호소했다. 그는 서울의 운명은 27시간 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귀가했다.

서울이 함락되자 그는 자결을 결심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보고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비밀리에 정부가 천도한 대전으로 내려갔다.

한국 전쟁 중 비상국무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인민군경기도 북부지역으로 진입하자 그는 한강 철교의 폭파를 건의하였다.[34] 1950년 말부터 1951년까지 주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였고,[35] 귀국 후 1952년 자유당이 창당되자 자유당 부당수가 되었다.[7]

1950년 12월 주 중화민국대사로 발령받았다. 우방국의 지원과 파병이 필요했던 한국 정부는 그를 타이완으로 파견했는데,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를 비롯한 중화민국 정부 고위인사들이 그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며, 그의 군관학교나 중국군 시절 동료들이었다. 이때에도 그가 중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간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그는 중국대사로 가는 것이지 망명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라며 공식적으로 해명하기도 했다. 출발 전 그는 이승만에게 7, 8개월 뒤에 귀국하겠다고 알리고 출국했다.

중화민국 대사 재직 당시, 대사관 경비는 총 5백불로 그는 비용을 아끼고 쪼개서 활용하였다. 비용이 부족하자 중화민국은 그에게 진성(陳誠) 장군의 사택을 지원해 주었고, 기타 장제스 총통에게 빌리는 형식으로 여비를 지원받았다. 또한 중화민국 정부 각료들에게 한국 전쟁에 대한민국 지원과,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미국은 정치적 불개입정책을 통해 이승만을 유지시키기로 결정했다.[40] 그러나 이승만을 대신할 마땅한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그를 유지시키는 대신 주변의 과격한 세력으로부터 그를 격리시켜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이승만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본 인물로는 이범석, 원용덕, 임영신, 윤치영, 안호상 등이 있었지만 그 핵심은 이범석[40] 이 지목되었다. 부산 정치파동에 적극 가담한 결과 미국은 이범석 집단을 경찰조직과 대중조직을 장악하고서 테러와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위험한 세력으로 보았다.[40] 특히 미국이 경계한 것은 이승만과 이범석이 군대까지 장악하는 것이었다.[40] 그리고 그 후의 미국 문서에는 이승만과 이범석 분리공작의 경과를 보고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주한미국대사 무초는 '한국행정능력이 있으면서 온건하고 성실한 세력이 있는데, 이들이 이범석 집단을 대신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무초 자신이 그 동안 '이승만의 마음 속에 이범석 집단이 이승만 자신과 한국 그리고 유엔에 대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심어놓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40] 썼다. 이 보고서를 보낸 뒤 15일 뒤의 보고서에서도 무초는 '여러 사람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을 격리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노력한 일들이 목적에 달성되었다고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최근 나와의 면담에서 이범석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점이나 국무회의에서도 이범석이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켐페인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40]

이범석은 이기붕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41] 장택상과도 뒤에 화해하지만 앙숙이 되었었다. 1954년 3월 자유당 내에서 이범석의 족청계 조직이 무너지고 등장한 것은 이기붕을 중심으로 한 전직 관료 출신이 당조직의 실권자로 등장[42] 했다. 이후 그는 부당수에서 평당원으로 격하되고, 당내 부장직에 있던 이범석의 측근들은 축출되고 이기붕의 측근들로 대체되었다. 이범석은 1956년 1월에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2. 3. 5. 제2공화국 기간 중

제2공화국 당시에도 정변 모의의 주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그는 장면의 군 감축(감군)계획에 반발하였다. 장면 내각은 군대를 감축하고 감군으로 남는 비용으로 경제를 부흥시키겠다고 했고, 그는 이를 반대했다.

족청계 쿠테타 설을 접한 김옥윤은 왕년의 족청계 지도자인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의 집안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김옥윤이 그 설을 듣고 소문 확인 차원에서 안부 전화 겸 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범석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 벌컥 화를 냈다.[45][46]

몇 차례 안좋은 말이 오고 가다 김옥윤은 이범석의 인격을 문제 삼았고, 이범석은 여편네 운운하면서 대판 말싸움을 벌였다.[46][47]

족청계 쿠데타설은 박정희, 김종필 쿠데타설과 함께 장면미국에 수시로 입수되었고, 한때 족청계로 분류된 육군소장 박병권은 예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범석은 제2공화국 기간 중 이승만의 귀국운동에 동참했는데, 제2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윤치영, 장택상, 함태영, 허정 등과 이승만의 귀국을 추진하는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을 주도했다. 63년 1월 이승만 박사 환국추진회의 결성에 동참하였다.

2. 4. 생애 후반

1962년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선언하였으나 이루지 않자 윤보선, 장택상과 함께 박정희를 면담했다. 윤보선장택상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몰아세웠으나 그는 박정희를 비판하는데 소극적이었다.[48][49]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철회하지 않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였다.[50] 그 뒤 1963년 국민의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선되었고,[7]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민의 당 창당발기인대회에 참석하여,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하는데 참여했다.[51]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11월 충남 대전에서 제5대 국회의원에 입후보, 출마했으나 사퇴하였다. 이후 국민의 당 입후보자들의 당선을 위해 지원유세를 다녔으며, 한일협상 반대운동에도 참여했는데, 한일협상 회담에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굴욕적인 외교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1963년 말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국토통일원 특별고문에 임명되었다.[6] 같은 해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52]

1965년 7월 22일 이승만의 시신이 김포공항 비행장에 도착하자,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國葬)을 요구하며 시신을 영접하였다.[53] 대통령 박정희국민장(國民葬)을 추진하였으나, 이범석은 장택상, 허정, 윤치영 등과 함께 박정희에게 이승만에 대한 국장(國葬)으로 예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묵살하였다.

1966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 행사에 참석하였고,[53] 9월 서울 용산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1966년 12월 24일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54] 1967년 1월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4] 그러나 만년에 그는 국가원로로서 대우받았고, 1969년 다시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토통일원의 고문이자 국가 원로로 대통령 박정희에게 조언, 자문을 하거나 동아일보 등의 언론, TBC 동양방송 등에 출연하여 회고, 토론 등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1971년 7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승만의 묘비를 친필로 썼다.

1972년 5월 11일 서울 명동성모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타계하였다.[6] 저서로는 회고록 《우둥불》, 《방랑의 정열》, 《한국의 분노》 (1945), 논설집 《민족과 청년》 (1948), 《혈전 : 청산리 작전》, 《톰스크의 하늘아래》,《용의 굴》 등이 있다. 장례는 5월 17일 서울 남산광장에서 성대한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되었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됐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군사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55] 2007년, 2011년, 중국의 중앙관영방송인 CCTV에서 항일 명장열전 방영시 외국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범석 장군을 선정 방영하였다.

3. 평가 및 논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이념과 정신을 정립하고 국방 건설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59]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능한 장군으로도 알려져있다.[59]

이범석은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우익, 좌익 등 다양한 세력이 모인 군의 인적 구성을 고려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효율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9] 특히 그가 국방장관 재직 시 강력히 추진했던 국방부 제2국 정훈국과 정훈병과 창설은 군의 사상 통일을 위한 조치였으며, 대북 첩보 수집 및 교란을 전담한 제4국 창설은 파시스트적 독단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6.25 전쟁 발발 시 제4국의 필요성이 재조명되기도 했다.[59] 장관 직속 대북 첩보수집부대는 현재 국방정보본부와 국군정보사령부로 이어지고 있다.[59]

6.25 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로 인해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국군유엔군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2]

또한, 일본군 출신들을 군에 입대시킨 것은 신생 국방 인력 부족을 고려한 실용적인 조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6.25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59]

이범석은 족청 운영 당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독재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미군이 독재주의 성격을 띄고 있는 청년 운동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나치 추종자 또는 파시스트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다.[58] 그러나 파시스트라는 주장은 이범석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주로 사용한 비판이며, 이범석이 국방장관 재직시 추진했던 정훈병과 및 제4국 창설은 당시 혼란스러운 군의 인적 구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적하기 위한 효율적인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다.[59]

역사문제연구소는 이범석이 민족을 많이 외쳤지만 친일파 숙청에 반대했다며, 그의 민족지상이나 일민주의는 기만적인 것으로 민족주체성이 배제된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20] 그러나 이범석이 일본군 출신들을 군내 입대를 허용한 것은 신생 국방 인력 부족을 고려한 실용적 측면이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6·25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동시대 정치인 조봉암은 이범석을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60] 이범석은 부산 정치파동, 한강철교 폭파에 관여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범석은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해 "백척간두에 선 이 나라를 살리는 문제"가 중요했다고 주장했다.[61] 한편, 한강철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었고, 시행 과정에서 시민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평가가 많다. 부산정치 파동 당시 이범석은 내무장관 부임 1달이 채 되지 않아 업무 파악이 미흡했고, 실제로는 당시 치안국장이었던 문봉제와 대한청년단 출신 김창민이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다.[62]

3. 1. 긍정적 평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이념과 정신을 정립하고 국방 건설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59]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능한 장군으로도 알려져있다.[59]

이범석은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우익, 좌익 등 다양한 세력이 모인 군의 인적 구성을 고려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효율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9] 특히 그가 국방장관 재직 시 강력히 추진했던 국방부 제2국 정훈국과 정훈병과 창설은 군의 사상 통일을 위한 조치였으며, 대북 첩보 수집 및 교란을 전담한 제4국 창설은 파시스트적 독단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6.25 전쟁 발발 시 제4국의 필요성이 재조명되기도 했다.[59] 장관 직속 대북 첩보수집부대는 현재 국방정보본부와 국군정보사령부로 이어지고 있다.[59]

6.25 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로 인해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국군유엔군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2]

또한, 일본군 출신들을 군에 입대시킨 것은 신생 국방 인력 부족을 고려한 실용적인 조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6.25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59]

3. 2. 부정적 평가 및 논란

이범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과는 달리 자신의 자서전에서 청산리 전투북로군정서김좌진과 자신만이 참여한 것처럼 서술하여 논란이 되었다.[56]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홍범도대한독립군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연합하여 전투를 수행했다.[56][57] 이범석은 회고록에서 홍범도 부대가 전투 직전 도망갔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거짓으로 밝혀졌다.[57] 상해 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는 홍범도, 김좌진,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충돌하여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6][57]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 당시, 이범석은 특별한 근거 없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여 논란을 일으켰다.[28] 이범석은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김구를 지목했지만, 김구가 사건을 배후 조종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28][29] 10월 22일 포고문에서도 이범석은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극우정객'의 역할을 부각시켰고,[29] 10월 27일 김구는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은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다.

이범석은 족청 운영 당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독재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미군이 독재주의 성격을 띄고 있는 청년 운동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나치 추종자 또는 파시스트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다.[58] 그러나 파시스트라는 주장은 이범석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주로 사용한 비판이며, 이범석이 국방장관 재직시 추진했던 정훈병과 및 제4국 창설은 당시 혼란스러운 군의 인적 구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적하기 위한 효율적인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다.[59]

역사문제연구소는 이범석이 민족을 많이 외쳤지만 친일파 숙청에 반대했다며, 그의 민족지상이나 일민주의는 기만적인 것으로 민족주체성이 배제된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20] 그러나 이범석이 일본군 출신들을 군내 입대를 허용한 것은 신생 국방 인력 부족을 고려한 실용적 측면이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6·25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동시대 정치인 조봉암은 이범석을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60] 이범석은 부산 정치파동, 한강철교 폭파에 관여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범석은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해 "백척간두에 선 이 나라를 살리는 문제"가 중요했다고 주장했다.[61] 한편, 한강철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었고, 시행 과정에서 시민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평가가 많다. 부산정치 파동 당시 이범석은 내무장관 부임 1달이 채 되지 않아 업무 파악이 미흡했고, 실제로는 당시 치안국장이었던 문봉제와 대한청년단 출신 김창민이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다.[62]

4. 가족 관계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이경하와 외교관 이범진은 그의 먼 일족이었다.[63]


  • 고조부: 이의상(李義常, 1755년 ~ 1821년)
  • 증조부: 이목연(李穆淵, 1785년 ~ 1854년)
  • 조부 : 이인천(李寅天, 1845년 ~ 1876년)
  • 아버지 : 이문하(李文夏, 1872년~?, 조선 광평대군의 증손 정안부정의 14대손)
  • 어머니 : 연안 이씨(延安 李氏, ? - 1907년)
  • 누이 : 이범호(李範好)
  • 매부 : 신석우(申錫雨, 1895년~1953년, 독립운동가, 호는 우창(于蒼))[63]
  • 누이 : 이범숙(李範淑)
  • 매부 : 이기환(李起煥)
  • 계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1935년)
  • 남동생 : 이범혁(李範赫, 전 기업인·전 대림산업 감사)
  • 제수 : 박유순(朴有順)
  • 부인 : 안동 김씨(安東 金氏), 김승현(金升鉉)의 딸
  • 정인 : 올레리아(러시아 여인, ? - 1925년)
  • 부인 : 김마리아(金瑪利亞, 1903년 9월 5일~1970년 2월 10일), 러시아 출신[64], 러시아계 한국인으로 본관은 경주 김씨.
  • 외조부 : 이병재(李炳宰, 본관은 연안)

5. 저서


  • 《우등불》
  • 《방랑의 정열》
  • 《한국의 분노》 (1945)
  • 《민족과 청년》 (1948, 논설집)
  • 《혈전 : 청산리 작전
  • 《톰스크의 하늘아래》
  • 《철기 이범석 자전》 (1991년, 유고집)

참조

[1] 웹인용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 http://www.815academ[...] 2010-08-25
[2] 서적 김웅수 회고록 새로운사람들 2007
[3] 뉴스 경남일보 http://www.gnnews.co[...]
[4] 웹사이트 dongA.com http://www.donga.com[...]
[5] 백과사전 이범석 http://100.nate.com/[...]
[6] 라디오 mbc 라디오 프로그램 격동 50년 http://www.imbc.com/[...]
[7] 웹사이트 http://www.opm.go.kr[...]
[8]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9]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10] 서적 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2005
[11] 서적 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6
[12] 서적 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6
[13]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14] 기타
[15] 뉴스 대동신문 1946-10-08
[16] 웹사이트 대한유도회 :: Korea Judo Association http://judo.sports.o[...]
[17] 서적 무도론 대한미디어 2009
[18] 웹사이트 용인대학교 http://www.yongin.ac[...]
[19]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20] 서적 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 역사비평사 1995
[21] 뉴스 한국의 총리는 왜 용이 못 됐나 http://h21.hani.co.k[...]
[22] 백과사전 부완혁 http://100.nate.com/[...]
[23] 뉴스 "여순반란사건 인민재판은 없었다" 월간 말 1998-11
[2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2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26] 서적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II:기원과 원인 나남 1996
[27] 뉴스 주한미군 철수 小史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2-12-30
[28] 뉴스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8-08-29
[29] 뉴스 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1-10-26
[30] 뉴스 서울신문 1948-10-22
[31] 뉴스 한성일보 1948-10-28
[32] 간행물 국회속기록 대한민국 국회 1948
[33] 서적 KLO의 한국전 비사 지성사 2007
[34] 서적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사초)
[35] 서적 한국 외교 60년 http://www.mofat.go.[...] 2015-02-21
[36] 서적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등불 후편 외길사
[37] 서적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6
[38] 서적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등불 후편 외길사
[39] 서적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40] 서적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41] 서적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6
[42] 서적 한국현대정치론 1 오름 2006
[43] 웹사이트 공화당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nate.com/[...]
[44]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4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46] 서적 격동 30년:제1부 쿠테타의 새벽 1 고려원 1992
[4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48] 서적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한림출판사 1966
[49] 서적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 한국경제신문사 2006
[50]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4
[51] 서적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52] 웹사이트 이범석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53] 웹인용 광복 21주년 http://film.ktv.go.k[...] 1966-08-20
[54] 서적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6
[55]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56]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57]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58] 서적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59] 서적 우둥불 : 철기 이범석 장군 재조명 백산서당
[60] 서적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역사비평사 1999
[61] 서적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등불 후편 외길사
[62] 인터뷰
[63] 뉴스 古今淸談<58>安在鴻과 申錫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5-08-25
[64] 기타
[65] 뉴스 경향신문 1972-07-11
[66] 뉴스 경향신문 1973-05-11
[67]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2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 1990
[68] 서적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 역사비평사 1998
[69] 서적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70] 뉴스 그事件(사건) 그사람 後日譚(후일담) 鐵驥(철기)장군과 愛馬(애마)「雪姬(설희)」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3-05-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