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갑 (1922년)
1. 개요
김종갑은 1922년 충청남도 서천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연희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일본군 학도 지원병으로 복무했다. 광복 후에는 군사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9사단장, 제2훈련소장, 제5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 중장으로 예편 후 국방부 차관을 지냈으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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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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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임동원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군과 정부의 요직을 거쳐 나이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으나, 제2연평해전 발언과 불법 감청 혐의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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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와 도시히데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쿼크의 약한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로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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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사키 이사무
2. 생애
1922년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 말 학도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복무했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참여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10030번)한 이후 군에서 복무하며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제18연대장, 육군본부 방위국장, 제5군단장 등을 역임하며 육군 소장까지 진급했다. 군 복무 중에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1956년 중장으로 예편한 뒤에는 국방부 차관을 지냈고,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보령군·서천군)에 당선되어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72년에는 선인재단 이사를 지냈다.
2.1. 초기 생애와 학력
1922년 10월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부 모모야마 중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학도 지원병으로 징집될 상황에 처하자 여운형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당시 여운형은 "이 전쟁은 언젠가 일본이 질 것이다. 그때야말로 독립을 쟁취할 때다. 가면 3분의 2는 전사하겠지만, 독립하면 군대가 필요하다. 가서 살아남아 건국의 초석이 되어주시오"라고 말하며 군사 훈련을 받을 것을 권유했다. 이에 김종갑은 일본 후쿠치야마 육군 예비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기시와다의 독립 산포대에 배속되었고, 다네가섬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9월 귀국하였다. 이후 군인의 길을 걸으며 여러 군사 학교를 거쳤다.
2.2. 군 경력
학도 지원병 시절, 여운형을 찾아가자 여운형은 "이 전쟁은 언젠가 일본이 질 것이다. 그때야말로 독립을 쟁취할 때다. 가면 3분의 2는 전사하겠지만, 독립하면 군대가 필요하다. 가서 살아남아 건국의 초석이 되어주시오"라고 격려했다. 이에 후쿠치야마 예비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졸업 후, 기시와다의 독립 산포대에 배속되었고 다네가섬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1945년 9월 귀국하여, 1946년 1월 28일 군사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군번 10030번). 같은 해 3월 중위로 진급했으며, 4월에는 춘천시에서 제8연대 창설에 참여하여 A중대장을 맡았다. 12월에는 연대 편성이 완료되자 부연대장(대위)이 되었다.
1947년 3월 10일 육군본부 작전교육처장(소령)으로 임명되었고, 7월 20일에는 헌병학교 헌병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0월 30일 총사령부에 군기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초대 사령관에 취임했으며, 12월 1일에는 제6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949년 4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거쳐, 8월 12일 제18연대장(대령), 11월 13일 제7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시흥 전투 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5일 시흥 전투 사령부가 제1군단으로 개편되면서 군단 작전 참모가 되었고, 9월 16일에는 제1군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군단장을 보좌했다. 9월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1950년 12월, 제9사단장에 임명되어 후방 지역의 게릴라 토벌을 지휘했다. 1951년 3월에는 육군본부 방위국장을 맡았고, 이후 제5군단장을 역임했다. 1951년 11월에는 제2훈련소장으로 부임했다.
1952년 8월, 제5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동부 전선에서 조선인민군 제9사단과 351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5월에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4년 6월 귀국하여 다시 제5사단장으로 복귀했다.
1955년 8월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고, 이후 육군본부 관리국장 대리를 역임했다. 1956년 7월 중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