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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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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일본군 강제 징집 후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잡지 '사상계'를 창간하여 독재 정권을 비판했다. 1962년에는 라몬 맥사이사이상을 수상했으며, 1967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유신 체제 반대 운동 중 1975년 의문사했으며,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의 저서 '돌베개'는 그의 사상과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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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4년 초의 장준하
출생일1918년 8월 27일 (호적으로는 1915년, 일본군 명부 기록으로는 1918년 7월 20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
사망일1975년 8월 17일
사망지대한민국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국적대한민국
별명가명 김신철(金信鐵)
가족배우자 김희숙, 슬하 3남 2녀
학력대관보통학교 졸업
숭실중학교 전학
신성중학교 졸업
도요대학 예과 철학과 중퇴
일본신학교 중퇴
한신대학교 학사
종교개신교 (장로회)
웹사이트장준하 기념사업회
공직
소속 국가대한민국 대한민국 제1공화국
직책대한민국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임기1950년 3월 2일 ~ 1953년 4월 30일
대통령이승만
장관안호상 문교부 장관
백낙준 문교부 장관
김법린 문교부 장관
차관박종만 문교부 차관
최규남 문교부 차관
고병간 문교부 차관
허증수 문교부 차관
소속 국가대한민국 제2공화국
직책국토건설단 기획부장
대통령윤보선
총리장면 국무총리
장도영 내각수반
임기1960년 11월 28일 ~ 1961년 5월 20일
전임신설
후임폐지
소속 국가대한민국 제2공화국
직책국토건설단 단장
임기1961년 5월 20일 ~ 1961년 12월 18일
대통령윤보선
총리장도영 내각수반
송요찬 내각수반
의장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전임장면
후임조성근
군사 경력
1944년 초의 장준하
복무일본 육군
국민혁명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복무 기간1944년 1월 ~ 1944년 7월 7일 (일본 육군)
1944년 8월 ~ 1945년 2월(국민혁명군)
1945년 2월 20일 ~ 1945년 11월 23일(광복군)
계급국민혁명군 준위
한국 광복군 대위
참전중일 전쟁
정치 활동
정당무소속
경력신민당 당무위원 겸 최고위원
국민당 상임고문 겸 최고위원
내각장면 내각
서훈
훈장건국훈장 애국장

2. 주요 이력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입대했으나, 같은 해 7월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국민혁명군 준위가 되었다.[30][31] 1945년 2월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 한국광복군 소위로 복무하며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했다.[1][2]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김구의 비서를 지냈고,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다.

제1공화국에서 서기관으로 임용되어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3] 1953년 잡지 《사상계》를 창간하고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사상계》는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제2공화국에서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참여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 남로당 경력을 비판하여 옥고를 치렀다.[32] 1967년부터 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2013년 1월 24일 무죄를 선고받았다.[33]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5]

3. 생애

장준하는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했고,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으나[30][31] 1944년 7월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국민혁명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쓰촨성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소위로 복무하며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 활동을 통해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 대기 중 8.15 광복을 맞았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김구의 비서,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으로 임용,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사상계》는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고, 제2공화국에서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등을 역임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및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을 전개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아 옥고를 치렀고[32], 신민당과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 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2013년 무죄를 선고받았다.[33]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거사를 준비 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가명은 '''김신철''', 창씨개명 이름은 '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이다.[45]

3. 1. 어린 시절

장준하(1944년)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9]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관계하여 여러 곳을 전전했고, 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동양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파 일본신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창씨개명 당시 "장안준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0] 평양 주둔 제41연대 보충대(조선 제42부대)에서 훈련을 마친 후,[11][12] 2월부터 중국 전선에 참전, 강소성 서주시 제65사단 수송대(전7991부대)를 거쳐 같은 지역의 독립보병 제58대대(대대장: 병타세쓰 대좌)에 배속되었으나,[13] 같은 해 7월 7일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과 함께 탈영했다.[14]

3. 1. 1. 출생과 가계

1915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로교 목사이던 장석인(張錫仁)과 김경문(金京文)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살 즈음에 삭주군으로 이사와 해방 후 월남할 때까지 삭주에서 살았다. 어려서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장남이 되었으므로, 할아버지 장윤희(張潤熙)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이후 동생으로 장익하, 장명하(張明河)와 장창하(張昌河), 여동생 장영하(張英河) 등이 태어났다. 할아버지 장윤희는 일찍 개명한 개화 인사로서,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 장로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한학에 밝아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한의사와 한학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고향 의주에 양성학교(陽成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윤희는 상투를 틀지 않았다고 하며, 과거를 보기 위해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며, 신학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어 가족까지 전도하여 기독교 가정을 이룩했다. 이후 깊은 신앙심으로 아들을 개신교 목사로 길러냈으며, 이는 아들 장석인과 손자 장준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장준하는 기독교 집안이었지만 후에 아내가 된 김희숙을 따라 천주교로 종교를 바꾸게 된다.

아버지 장석인은 지식인으로 기독교 학교인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숭실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았던 아버지 장석인은 숭실학교 교목 외에도 후에 원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34]와 연희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35], 그리고 감천중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내의 가정교회)[36] 등에서 담임목사로, 장로교신학대학의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3. 1. 2. 유년기

1920년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의주군에서 삭주군으로 이사했다. 교육자였던 아버지 장석인은 사재를 들여 대관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훗날 리영희가 이 대관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13세에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입학했다.[37] 1933년 삭주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근무하던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아버지 장석인이 선천 신성중학교교목이 되면서, 장준하는 아버지를 따라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신성중학교 교장 장이욱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자, 장준하는 학생대표를 동원해 교장 석방을 위한 동맹시위 운동을 주도했다가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성중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전도사로 목회 활동을 했다.

3. 1. 3. 교사생활과 도일 유학

1938년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숭실전문학교가 폐쇄되자, 장준하는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뒤 친구인 마라톤 선수 김익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되고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에 유학하였다.[38]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장준하는 1941년 4월 도요 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2년 4월 장로교 계통인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장준하가 입학할 무렵 전택부, 문익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같은 학교에 있었다.[37][52] 일본신학교 재학 중 장준하는 선배 박영출 목사가 담임하는 숭덕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3년 11월 장준하는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김준덕과 노선삼의 맏딸인 김희숙과 결혼하였다. 김희숙의 집은 부친 김준덕의 중국 망명으로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았고, 김희숙은 이러한 사정을 장준하에게 알렸다. 결혼을 하는 것이 김희숙을 보호하는 길이라 확신하게 된 장준하는 김희숙의 편지를 받고 바로 귀국하여 김희숙과 결혼하였다.[39] 결혼식은 1944년 1월 5일에 올렸다.

3. 2. 청년기

일제강점기에 장준하는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9]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관계된 탓에 여러 곳을 전전했고, 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양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파 일본신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면서 '장안준하'라는 창씨개명 이름을 사용했다.[10] 평양 주둔 제41연대 보충대(조선 제42부대)에서 훈련을 받은 후,[11][12] 2월부터 중국 전선에 참전하여 강소성 서주시 제65사단 수송대(전7991부대)를 거쳐 독립보병 제58대대에 배속되었다.[13]

1944년 7월 7일, 장준하는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과 함께 일본군을 탈영했다.[14] 안후이성 푸양에서 먼저 탈영했던 김준엽과 합류한 후,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입대하여 국민정부군 준사관으로 임관되었다.[15] 1945년 1월 31일에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에 가담, 김구의 비서가 되었다.

1945년 2월, 장준하는 미군 전략정보국(OSS)의 이글 프로젝트(Eagle Project)에 발탁되어 정보·통신 훈련을 받았다.[15] 5월 1일에는 경성지역 투입조에 배치되어 정보와 조직 책임을 맡았고, 8월 4일 훈련을 마쳤다.[15] 당시 가명은 "김신철"이었다.[16]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광복군의 작전은 변경되었고, 8월 11일 이청천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진입군에 종군했다.[17] 8월 18일 미군 수송기 C-47로 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여의도 활주로에 착륙, 항복한 일본군에게 일정한 지시를 내린 후 8월 20일 귀환했다.[17][18]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2월에 귀국한 장준하는 귀국 직전 서안에서 박정희와 처음 만나, 일본군의 규율을 광복군에 적용하려던 박정희와 충돌했다(장준하의 비서였던 이철우의 증언).

3. 2. 1. 일본군 입대와 탈출

1943년 일본군 입대를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으로 끌려가는 친구 최기일을 기차역까지 마중나가 전송했다. 당시 장준하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장준하가 학도병에 자원 입대했다고 진술했다.[42]

최기일에 따르면, 장준하는 어떤 뜻을 품고 일본군에 입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42] 장준하 역시 자서전 《돌베개》에서 자신의 자원 입대 사실을 밝혔다. 그는 부친이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목사로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기 때문에, 학병을 기피하면 가족과 주변에 가할 탄압을 우려하여 학병에 지원했다고 설명했다.[43] 또한, 중국에 파견되면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44]

1944년 1월 20일 일본 육군에 학도병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평양 주둔 제30사단 치중대에서 치중병으로 복무하였다. 2월 17일 중지나 주둔 일본군 제65사단 치중대(센(専) 7991부대)에 배속[45]되었고, 7월 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하였다.

1944년 7월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동지들과 함께 쉬저우에서 일본군을 탈영, 중국 팔로군에서 김준엽, 노능서 등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만나 함께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까지 갔다. 일본군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어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갔으며, 민간인 복장을 갖추고 충칭으로 향했다. 이때 장준하는 하늘의 별을 보며 성경에 나오는 돌베개를 생각하고,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선조들의 모습을 반성하며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들이 되자고 다짐했다. 그의 자서전 돌베개는 이때 떠올린 야곱의 돌베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장준하는 탈영 후 만난 김준엽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군입대 전 장준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니혼신학교에, 김준엽은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도쿄 유학생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최기일은 이 둘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최기일김준엽과 신의주고보와 게이오기주쿠 대학 동창이었고, 장준하와는 삭주군 대관동에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살아온 고향 친구였다.

1944년 3월 29일 새벽, 김준엽이 먼저 탈영했고,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탈영했다. 김준엽은 장준하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라고 기록했다.

3. 2. 2. 탈출과 이동

1944년 1월 20일, 장준하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평양 주둔 제41연대 보충대에서 훈련을 받았다.[10][11][12] 2월부터 중국 전선에 참전하여 장쑤성 쉬저우 제65사단 수송대와 독립보병 제58대대에 배속되었다.[13]

장준하는 일본군에 자원 입대 형식으로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강제 징집이었다. 그는 돌베개에서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학병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의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목사로,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가족과 주변에 가해질 탄압을 우려하여 학병에 지원했다는 것이다.[43] 또한, 그는 중국에 파견되면 일본군을 탈출하여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44]

1944년 7월 7일, 장준하는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과 함께 일본군을 탈영했다.[14] 안후이성 푸양에서 먼저 탈영했던 김준엽과 합류한 후,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입대하여 국민정부군 준사관으로 임관되었다.[15]

이후 시안에서 탈출한 장준하와 김준엽 등 50명은 노하구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원봉은 이들을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확신하여 거절했다.[46] 장준하는 김원봉이 충칭까지 비행기 편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의심했다.[46]

김원봉의 제안을 거절한 장준하 일행은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에 도착,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52][47] 1944년 8월 임천군관학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48] 그 후 장준하와 김준엽 등은 쓰촨성 충칭에 도착하였다.

3. 2. 3. 충칭 도착과 광복군 입대

1944년 시안에서 탈출한 장준하와 김준엽 등 50명은 노하구에 도착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김원봉은 장준하 일행을 광복군 제1지대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여 충칭까지 비행기 편을 주선해 준다는 약속조차 의심하며 거절했다.[46]

김원봉의 영입 제의를 거절한 장준하와 일행들은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에 도착,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臨川分校)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52][47]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48] 그 뒤 장준하와 김준엽 등은 쓰촨성 충칭에 도착하였다.

1945년 1월 31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49] 장준하는 1945년 2월 20일 광복군에 편입하여 광복군 장교(소위)가 되어 충칭 토교대(土橋隊)에 거주하였다. 그는 친구인 김준엽 등과 함께 임정 요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고담을 듣기도 했고, 등불 3·4·5호를 발간하였다.

1945년 4월 29일 18명과 함께 서안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던 중, 이승만, 김구, 이범석 등의 주도하에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의 합동훈련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5월 1일 광복군 육군 중위로 진급, 이후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국 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였다.

3. 2. 4. 광복군 활동

1945년 1월 3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 도착했다.[49]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은 장준하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장준하는 임시정부 내부 파벌 다툼에 염증을 느껴 이들을 비판했다.[49] 그는 임정 요인들의 분열상을 규탄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임정을 폭격하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김구는 이러한 장준하를 만류하여 김원봉 비판을 그만두게 했다.

1945년 2월 20일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에 편입, 소위로 임관하여 충칭 토교대(土橋隊)에 거주하였다.[52] 4월 29일에는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었고, 이승만, 김구, 이범석 등의 주도로 광복군과 미국 육군 간 합동훈련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했다.[52] 5월 1일 광복군 육군 중위로 진급,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국 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광복군의 작전은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8월 11일 이청천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진입군에 종군했다.[17] 8월 18일 미군 수송기 C-47로 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여의도 활주로에 착륙, 항복한 일본군에게 일정한 지시를 내린 후 8월 20일 귀환했다.[17][18]

3. 2. 5. 신익희와 갈등

1943년 일본군 입대를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으로 끌려가는 친구 최기일을 전송한 장준하는, 이후 일군에 자원 입대했다.[42] 이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아버지로 인해 가족에게 가해질 탄압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43] 또한 중국에 파견되면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44]

임정 요인 신익희는 광복군과 탈출 청년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이 과정에서 장준하와 갈등을 빚었다.[50] 신익희는 한국청년당 대표로 임정에 참여했는데,[50] 장준하는 신익희가 "1인 1당의 고독한 당" 대표였다고 평가했다.[50]

신익희는 일본군 탈영병들이 광복군에 편입된 후에도 이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려 했다. 신익희는 광복군 훈련장을 방문하거나, 장준하 등 대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내 임정 내무부 관할 '경위대'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51] 장준하 등은 동료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신익희의 달변에 매료된 젊은이들은 충칭으로 떠났다.[51]

이에 분노한 장준하는 신익희 등 정당인들을 규탄하는 전단을 만들어 임정 청사로 찾아갔다. 이들은 '경위대 해체',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으나, 신익희는 이미 피신한 뒤였다.[50]

3. 3.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장준하는 1945년 1월 31일 중경으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에 가담하여 김구의 비서가 되었다.[14] 같은 해 2월, 미군 전략정보국(OSS)의 이글 프로젝트(Eagle Project)에 참여하여 5월 1일 경성지역 투입조에 배치되어 정보와 조직 책임을 맡았다.[15] 8월 4일 모든 훈련을 마쳤으나,[15] 8월 10일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광복군의 작전은 변경되었다. 8월 11일 이청천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진입군에 종군하여, 8월 18일 미군 수송기 C-47로 여의도 활주로에 착륙, 항복한 일본군에게 일정한 지시를 내린 후 8월 20일 귀환했다.[17][18]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2월에 귀국했다. 귀국 직전 서안에서 박정희와 처음 만나 일본군의 규율을 광복군에 적용하려던 박정희와 충돌했다는 증언이 있다(장준하의 비서였던 이철우의 증언).[54][55] 김구이승만의 제휴에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7년 이범석이 설립한 조선민족청년단 교무처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1950년 3월 교육부 국민정신계발담당관, 1952년 교육부 산하 사상연구원 기획과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후 1953년 4월 사상연구원을 사임하고, 잡지 사상계를 창간하여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에 따라 『사상계』도 정권 비판의 색채를 짙게 했고, 1958년 기사 때문에 일시 구속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장면 총리에 의해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을 거쳐 국토건설단장이 되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 유네스코 홍보분과 위원장도 역임했다.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해 『사상계』에 지지 성명을 게재했으나,[9] 이후 군정 영속화·박정희 정권의 독재화에 따라 비판으로 돌아섰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반대 운동, 1966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 및 복역, 1967년 제7대 총선 옥중 출마·당선되어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9]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 게재로 『사상계』는 강제 폐간되었다. 1972년 유신 이후 1973년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고 9차례 투옥되었고,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2월 건강 악화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으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에서 등산 중 의문사했다. 경찰은 추락사로 발표했으나, 타살설이 제기되었다. 시신은 경기도 파주시 나사렛 공원에 매장되었고,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훈4등)이 추서되었다. 2012년 8월, 경기도 파주에 "장준하공원"이 조성되었고, 유골을 이곳으로 이장했다.[19][20]

2013년 1월 10일, 장호권의 재심 청구에 따라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에 대한 재심이 시작되었다. 같은 달 24일 서울지방법원 재심 공판에서 긴급조치 1호는 위헌·무효로 무죄를 선고받았다.[21]

2020년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으로 구속된 장준하의 유족에게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으나, 문재인 정부는 항소하여 불만을 샀다.[22] 2022년 11월 정부는 상고를 포기하고, 장준하의 유족에게 약 7.8억을 배상하게 되었다.[23]

2012년 유골 이장 후,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대한법의학회는 추락사로 발표했으나,[25] 타살설을 주장하는 법의학자도 있다.[24] 정의화(전 한나라당 소속)는 타살설을 지지했다.[26] 유족 측도 타살설을 주장하고 있다.[25]

3. 3. 1. 해방과 귀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모든 군사작전이 백지화되었고, 장준하는 광복군 대위로 진급했다. 8월 14일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은 서울로 가기 위해 미군기에 탔으나,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중국 시안으로 돌아가야 했다.[52]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 임정 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군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김구의 비서로 정치,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9월 초, 광복군 장교였던 장준하는 중국 서안에서[53][54] 박정희를 만났다는 주장이 있다. 장준하의 측근 이철우는 장준하가 박정희를 질타했다고 증언했다.[54][55]

장준하와 박정희가 해방 전에 만났다는 사람들에 따르면, 장준하는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자진해서 탈출하지 않은 점,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한국 독립투사를 학살했을 것이라는 점, 기회주의적인 자세 등을 들어 크게 비판했다고 한다.[54][55] 그러나 언론인 조갑제와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 등은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조갑제는 장준하와 박정희가 이때 만난 적이 없다고 했으며,[55][56] 장호권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강조했다.

3. 3. 2. 광복 직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장준하는 광복군 대위로 진급했다. 광복 직후, 김원봉은 장준하를 비롯한 인물들에게 자신의 세력으로 영입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장준하는 이를 거절했다. 장준하는 훗날 김원봉이 '미인계'를 써서 자신을 현혹하려 했다고 비판했다.[57][58][59]

당시 김원봉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려 했다. 장준하는 자신의 저서 돌베개에서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통해 일본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했다고 주장했다.[60] 장준하는 김원봉 등이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려 한다고 판단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정보를 이청천에게 보고했다.[60]

광복군 내 일부의 횡포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심었다.[62] 1945년 10월 7일 충칭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이 상하이로 왔을 때, 일본군 출신 부대는 이청천에 대한 사열을 거부했다. 장준하는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했는데, 훗날 이를 '회유작전이었다.[62]'고 회고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계획을 '간계[62]'라고 평가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계획을 알리고, 그의 대리인 노릇을 했던 황모와 이소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그들을 불신임시켰다.[62] 장준하의 설득은 효과가 있었고, 이청천은 직접 사열을 받게 되었다.[61]

3. 3. 3. 해방 정국 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광복을 맞이한 후, 장준하는 광복군 대위로 진급했다. 그는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서울로 가려 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중국 시안으로 돌아갔다.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과 함께 경기도 김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했다.[52] 귀국 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로 정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9월 초, 장준하는 중국 서안에서 박정희를 만났다는 주장이 있다.[53][54] 장준하의 측근 이철우는 장준하가 박정희에게 일본군 장교 경력을 질타했다고 증언했다.[54][55] 그러나 언론인 조갑제와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를 부인했다.[55][56] 장호권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장준하와 박정희는 서로 몰랐다고 주장했다.

귀국 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했고,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에도 참여했다.

3. 4. 관료, 언론 활동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이승만의 공보비서였던 친구 최기일과 함께 이승만김구의 협력을 위해 노력했으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실패하고, 김구의 남북협상 대신 정부수립을 지지했다.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하고,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64]

1950년 문교부에서 국민정신개조 사업을 담당하고, 1952년 국가 이념 연구 기관 책임자를 역임하며 사상계를 창간했다.[3] 1953년 4월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을 사퇴하고, 사상계를 통해 언론 활동에 집중했다.[65] 1956년에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신인 작가들을 발굴했다.[67][38]

1958년 사상계함석헌의 글이 실려 함께 연행되기도 했고, 1959년에는 2.4 보안법 파동에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에 저항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및 단장을 역임했다.[64][72]

3. 4. 1. 정부 수립 직후

1946년부터 1947년까지 2년간 이승만의 공보비서였던 친구 최기일과 만나 이승만김구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고 합작을 추진했으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인해 실패했다.[64] 합작 실패 이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부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당분간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했고, 같은 해 2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6월에 졸업했다.[64] 동아일보 등에 사설이나 칼럼을 발표하며 언론 활동에도 참여했다.

1950년 문교부에서 국민정신개조 사업을 담당했고, 1952년에는 국가 이념 연구 기관의 책임자를 역임했다.[3] 사상계를 창간했다.[3]

3. 4. 2. 제1공화국 관료 활동

이범석의 곁을 떠난 장준하는 1950년 3월 대한민국 행정부 행정서기관(4급)에 임관되어,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이 되었다.[64] 1952년 3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이 되었고, 이후 국민사상연구원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64]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사상적, 이념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는 길만이 북한을 이기는 길이라 확신하여 국민 계몽을 위한 칼럼, 강연활동 등을 하였다.

1952년 12월 잡지 사상계 12월호 (4호)까지 발간 후, 전쟁 중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자 재정 문제로 일시적으로 발행을 중단하였다. 1953년 4월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을 사퇴, 짧은 공무원 생활에서 퇴직하였다.[65] 같은 해 4월, 사상계를 창간하여 활동하였다.[65]

1952년 휴전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휴전이 된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6·25가 일어났다. 당연히 받을 채찍이 땅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백성을 공산역도( 共産逆盜 )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은 것이다.[66]"

3. 4. 3. 언론 활동

1952년 3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한 장준하는 1953년 4월 사상계를 창간하였다.[65] 1953년 9월 사상계는 부산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여 계속 발행되었다.

1956년에는 소설가 김동인을 추모하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 등 여러 문인들을 발굴하였다.[67][38]

1957년 10월 10일 최남선 사망 당시, 장준하는 사상계에 그를 옹호하는 글을 게재하여 논란이 되었다.[68][69] 장준하는 최남선의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의 민족 운명과 문화 소장에 대한 본의는 사실로 밝혀졌다고 주장하며 옹호했다.[68][69][70]

1958년 8월 사상계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이 실리면서, 함석헌과 함께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1959년 2월에는 2.4 보안법 파동에 대해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였다.

1960년 3월 3·15부정선거 이후,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자유당의 횡포를 비판했다. 4·19 혁명 이후 5월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 및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3. 4. 4. 제2공화국 관료 생활

1960년 4·19 혁명 이후, 7월 장면(張勉) 내각이 출범하면서, 장준하는 국무총리 장면의 후원으로 국제문제연구소를 조직하였다. 이 연구소는 민주당 정권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며 경제정책 연구 개발을 담당했다.[71] 국무총리 장면은 여러 차례 장준하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장준하는 장면의 거듭된 부탁을 받고 입각한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왼쪽 끝)


장면 정권의 실력자인 재무장관이자 사상계 동인이던 김영선(金永善)의 지원으로 사상계사의 부채를 청산하기도 했다.[71] 1960년 10월에는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으로 위촉되었고, 1961년 1월에는 대한민국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에 발탁되었다.[64] 이후 국토건설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72]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장준하는 사실상 국토건설단의 운영을 책임지고 총괄, 지휘하였다. 또한 대졸 미취직 청년들의 국가관과 사회관 교육을 위해 함석헌, 주요한, 박순천 등을 강사로 초빙하여 학생들의 심성 수련과 교육을 담당하게 했고, 장준하 자신도 국토건설단 강사로서 정신교육을 맡았다.

1961년 2월 국토건설단 수료식

3. 5. 정치 활동

1950년 문교부에서 국민정신개조 사업을 담당했고, 1952년에는 국가 이념 연구 기관의 책임자를 역임했다. 문교부에서 두 가지 직책을 더 맡았고, 사상계를 창간했다.[3] 1956년에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사상계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시절 문교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 이후 한일협정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반대했다. 196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과 대한민국 노동당 활동 경력을 문제 삼아 윤보선을 지지했고, 국가원수 모욕죄로 투옥되었다. 출옥 후 윤보선신민당[4],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1972년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73년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여 9차례 투옥되었다.[9]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2월 건강 악화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석방되었다.[19]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중 경기도 포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정부는 장준하의 사망 원인을 등산 중 실족사로 발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준하의 죽음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졌지만,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5]

3. 5. 1. 5·16 군사 정변 전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준하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73] 이는 제2공화국 정부 여당인 민주당 내 신파, 구파 싸움(윤보선 세력과 장면 세력)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74]

윤보선 대통령이 5·16 군사 정변을 추인하면서 5월 20일 장면 내각은 총사퇴했고, 제2공화국이 붕괴된 후 장준하는 주로 언론 활동에 종사하였다. 장준하는 군정 초기에 군사정변을 지지하였으나, 박정희가 민간 정부로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 집권을 추진하면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군정이 장준하가 태완선에게 1천만 환을 빌린 것을 문제 삼아 그를 부패 언론인으로 규정하고 정치 활동 금지 대상자로 묶자, 장준하는 군사정변 지지를 철회했다.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장준하는 강원용에게 인수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조선일보 출신 언론인 부완혁에게 사상계를 넘겼으나, 부완혁과 갈등하게 되었다.[52][65] 1962년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장준하는 군사 정변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칭찬했는데, 이는 군사정권이 친미(親美) 노선을 걸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81] 장준하는 적극적인 친미주의자였으며, 반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81] 장면 정권의 혼란에 실망하고 반공 논리로 무장한 군사정권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81]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지한 것도 장준하가 군정을 지지한 주요 원인이었다.[81][82]

장준하는 군정 초기 군정 세력과 미국 세력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81] 1961년 7월 초 창경원에서 열린 파티에는 미국 측에서는 버거 대사와 하비브 정치참사관이, 군정 세력에서는 장도영 일파만이 참석했다.[81][83] 그러나 박정희 계열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장도영과의 관련설이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

3. 5. 2. 5·16 군사쿠데타 지지와 철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해 《사상계》는 권두언을 통해 쿠데타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73] 이는 제2공화국 정부 여당인 민주당 내 신파(장면 세력)와 구파(윤보선 세력) 간의 갈등에 대한 실망감 때문으로 추정된다.[74]

윤보선 대통령이 5·16을 추인하면서 5월 20일 장면 내각은 총사퇴했고, 제2공화국 붕괴 후 장준하는 주로 언론 활동에 전념했다. 장준하는 군정 초기에는 군사정변을 지지했지만, 박정희가 민간 정부 이양 없이 집권을 추진하자 노선을 바꿔 박정희 비판에 나섰다. 군정에서 장준하가 1천만 환을 빌린 사실을 문제 삼아 그를 부패 언론인으로 규정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자, 그는 군사정변 지지를 철회했다.

1961년 7월, 장준하는 《사상계》 권두언에서 〈긴급을 요하는 혁명 과업 완수와 민주 정치에로의 복귀〉를,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발표하여 군사정권과 갈등을 빚었다.[81]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은 5·16 쿠데타를 "4·19 혁명이 입헌 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며 사실상 지지했다.[71][75][76] 그러나 이 권두언은 필자가 밝혀지지 않아 장준하의 글인지, 쿠데타 세력의 압박에 의한 대필인지 확실하지 않다.[79] 다만, 발행인으로서 장준하의 책임은 면할 수 없으며, 해당 호에는 박정희장도영의 사진 화보까지 실렸다. 김삼웅은 《사상계》 1961년 6월호를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80] 이후 7월호에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군사혁명 우회 비판 글이 실렸지만, 《사상계》는 이후에도 상당 기간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76]

장준하가 5·16 군사 정변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며 극찬한 이유는 군사정권이 친미(親美) 노선을 걸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81] 장준하는 적극적인 친미주의자였으며, 당시에는 반공을 최우선으로, '친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81] 이러한 배경에서 장준하는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고 반공 논리로 무장한 군사정권에 지지를 보냈으며, 미국의 군정 지지 역시 장준하의 지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81][82]

장준하는 군정 초기 군정 세력과 미국 세력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81] 이는 쿠데타 주역들과 미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파티였다.[76] 당시 군정 세력은 군 내 비주류였기에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장준하는 이를 개선하고자 1961년 7월 초 창경원에서 파티를 열었다.[81] 이 파티에는 미국 측에서 버거 대사와 하비브 정치참사관, 군정 세력에서는 장도영 일파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81][83] 박정희 계열 인사들은 불참했고, 이는 훗날 장도영과의 관련설이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 등 쿠데타 주역들은 대부분 군 내 소외된 비주류 세력이었고,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미국이 쿠데타를 현실로 인정했음에도 양측 관계는 좋지 않았다.[76] 이에 미국통인 장준하는 《사상계》 이름으로 7월 초 창경원 파티를 통해 양측 핵심 인사들을 초청,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76]

3. 5. 3. 필화 사건 전후

1958년 8월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인해 함석헌과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장준하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박정희가 민정 이양을 하지 않고 집권을 추진하면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73]

김종필은 《사상계》 1961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칼럼(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86])을 문제 삼아 장준하를 심문했다.[86] 김종필은 장준하가 장도영과 같은 고향이라는 점을 들어 장도영과의 관련성을 의심했지만, 장준하는 이를 부인했다.[87][90]

장준하는 중국 쉬저우에서 장도영과 함께 있었던 과거와, 탈영병을 처단하려는 장도영과의 충돌, '잔반 거부 운동' 등으로 두 사람이 반목했던 사실을 진술했다.[87][90][91]

1961년 7월 중순, 군사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는 장준하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93] 육군 소령은 김영선에게서 받은 돈에 대해 반말로 추궁하며 모욕적인 심문을 했다.[93][94] 김영선은 장준하의 빚 3천만 환을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1천만 환만 보냈다.[94] 장준하는 이 돈을 받았다고 사실대로 진술했고, 집문서를 담보로 제공했었다.[95]

장준하는 여러 차례 더 조사를 받았고, 1961년 연말까지 1천만 환을 갚기로 하고 풀려났다.[95] 1962년 3월 빚을 청산했지만, 집문서는 되찾지 못하고 집이 넘어가고 말았다.[95]

3. 5. 4. 정치정화법과 야당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장준하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73] 이는 제2공화국 정부 여당인 민주당 내 신파, 구파 싸움(윤보선장면의 대립)에 대한 실망감 때문으로 추측된다.[74] 그러나 박정희가 민간 정부 이양 약속을 어기고 집권을 추진하면서 장준하는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군정은 장준하가 태완선에게 빌린 1천만 환을 문제 삼아 그를 '부패 언론인'으로 규정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는 경영난에 빠진 《사상계》를 인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조선일보 출신 언론인 부완혁에게 《사상계》를 넘겼지만, 부완혁과 갈등하게 되었다.[52][65]

1962년 3월 16일 군정은 정치활동정화법을 발표했는데, 장준하는 '부패 언론인'으로 지목되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96] 이로 인해 《사상계》 판매 부수가 급감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이후 윤보선을 지지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8월, 장준하는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 상을 받고 귀국했다.

3. 5. 5. 제3공화국

1962년 3월 16일 군정에 의해 정치활동정화법이 발표되었는데, 장준하는 이 법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96] 정치와 무관한 그가 정치정화법에 걸린 것은 '부패 언론인'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선에게서 받은 돈 1천만 환 때문에 집이 넘어갔음에도, 그는 정치행위 금지자 4,734명 속에 포함되었다.[96]

정치에 뛰어들 생각을 못해본 장준하에게는 정치정화법이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가 부패 언론인으로 지탄받아 정정법에 묶였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사상계 독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여 판매 부수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부패 언론인이라는 오명은 장준하에게 치욕적인 멍에였는데, 독자들에게 해명하기도 어려웠고, 해명한다 해도 한번 난 소문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96] 이후 그는 윤보선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1962년 8월 필리핀으로 가서 막사이사이 상(賞)을 받고 귀국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한국-일본 협정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반대했다. 196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과 대한민국 노동당 활동 경력을 문제 삼아 윤보선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국가원수 모욕죄로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윤보선신민당[4],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중 경기도 포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준하의 사망 원인을 산에서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사망 후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준하의 죽음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5]

3. 5. 6. 제4공화국

1972년 유신 이후 장준하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3년에는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여 9차례나 투옥되었다.[9]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건강 악화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석방되었다.[19]

석방 후 장준하는 더욱 활발하게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에서 등산 중 의문사했다. 그의 시신은 귀 뒤에 피켈이 박힌 듯한 큰 상처가 있는 채로, 높은 절벽에서 추락한 형태로 발견되어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경찰은 추락사로 발표했다.[19]

2013년 1월 10일,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의 재심 청구에 따라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에 대한 재심이 결정되었다. 같은 달 1월 24일 서울지방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위헌·무효라며 무죄를 선고했다.[21]

무죄 판결 이후, 유족들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된 장준하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정부는 법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고, 이에 대해 일부에서 불만이 제기되었다.[22] 2022년 11월, 정부는 상고를 포기하고 장준하의 유족에게 약 7.8억을 배상했다.[23]

2012년 이후 장준하의 유골 이장과 함께 뼈 검시가 가능해지면서, 그의 죽음이 타살인지 사고사인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두개골 골절 후 추락했다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법의학자도 있었고,[24] 대한법의학회는 추락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25] 특히 신경외과 의사 출신 국회의원 정의화(전 한나라당 소속)는 "많은 두개골 손상 환자를 치료한 경험으로, 유골을 보는 순간 타살이라고 생각했다"며 타살설을 지지하는 주장을 여러 번 밝혔다.[26] 유족 측도 다른 부위의 골절이 적다는 점을 들어 타살설을 주장하고 있다.[25]

3. 5. 7. 출소와 병원 입원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다.[52] 그러나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고혈압과 협심증 등으로 10개월 20일 만에 출감[113]한 그는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광현내과 203호실에 입원하였다.[113] 출감 직후 "죽어서야 나올 줄 알았는데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니 가슴이 아프다."[113]라고 심경을 밝혔다.

출감 직후 부인 김희숙과 가족 외에 김옥길 등이 교도소에 방문했고, 입원 후에는 함석헌의 방문을 받았다.[113]

3. 6. 생애 말기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중 경기도 포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5] 대한민국 정부는 장준하의 사망 원인을 산에서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5] 정부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준하의 죽음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5]

석방 후 민주화 운동에 더욱 헌신했으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에서 등산 중 의문사했다. 시신은 귀 뒤에 피켈이 박힌 듯한 큰 상처가 있고, 높은 절벽에서 추락한 형태로 발견되어 타살설이 제기되었으나, 경찰은 추락사로 발표했다. 시신은 경기도 파주시 나사렛 공원에 매장되었고,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훈4등)을 추서받았다. 2012년 8월, 경기도 파주에 "장준하공원"이 조성되었고, 전년도 호우로 무너진 묘소에서 장준하의 유골을 이곳으로 이장했다.[19][20]

2013년 1월 10일,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이 요구했던 재심 청구에 따라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가 결정되었다. 같은 달 2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서 긴급조치 1호는 위헌·무효라고 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21]

무죄 판결 이후, 유족들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으로 구속된 장준하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한국 정부(당시 문재인 정권)는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기 때문에 일부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22] 최종적으로 2022년 11월 정부는 상고를 포기하고, 장준하의 유족에게 약 7.8억을 배상하게 되었다.[23]

유골 이장과 함께 뼈 검시가 가능해짐에 따라 2012년 이후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인지 사고사인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일어났다. 두개골 골절 후 추락했다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법의학자도 있고,[24] 대한법의학회는 추락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25] 특히 신경외과 의사 출신 국회의원 정의화(전 한나라당 소속)는 "많은 두개골 손상 환자를 치료한 경험으로, 유골을 보는 순간 타살이라고 생각했다"는 등 타살설을 지지하는 주장을 여러 번 밝혔다.[26] 또한, 유족 측도 다른 부위의 골절이 적다는 점을 들어 타살설을 주장하고 있다.[25]

3. 6. 1. 모종의 거사 시도

1975년 4월 민주통일당을 탈당한 장준하는 그해 들어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과 만나고, 함석헌, 홍남순과 접촉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115] 김영삼이 동남아 여행 중이라 귀국한 뒤인 8월 20일경으로 계획은 연기되었다.[115]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 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었으며,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116][117] 1976년 4월, 장호권 자신이 테러를 당했을 때 주한 미 대사 하비브가 찾아와 “당신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118]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거사를 계획했으며,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8월 20일경으로 예정되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119]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 김재규와 만난 적이 있는데,[120] 당시 2군단장이던 김재규는 장준하의 국방위 의정활동과 청렴상에 감동하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박선호를 시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121][122] 200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호권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이 김재규 등이며, 10·26도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124]

3. 6. 2. 최후

1975년 8월 17일, 박정희 정권의 감시가 심해지던 중,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125] 등산 중 추락사했다는 것이 공식 발표였으나, 석연치 않은 정황과 증언들로 인해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5]

사망 당일, 장준하는 자신의 측근 임춘원을 집으로 초대해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125] 임춘원은 장준하가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말과 임시정부 태극기 등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장준하는 며칠 전 망우리에 있는 부모 묘소에 다녀왔다며 벌초로 갈라진 손바닥을 보여주기도 했다.[114]

식사 후, 장준하는 호림산악회 회원들과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125] 당시 경찰은 장준하가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고 발표하며 추락사를 뒷받침하려 했다.[114] 그러나 임춘원은 장준하가 이미 아침 식사 자리에서 벌초로 인해 손바닥이 갈라졌다고 증언하여, 경찰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다.[126]

장준하의 죽음은 단순 사고사가 아닌,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5]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며 의혹을 덮으려 했다.[5]

3. 7. 사후

유족에 의해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다. 함석헌, 계훈제 등 지인들과, 김대중, 정일형 등 정치인,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등 1백여 명이 빈소를 찾았다.[127]

8월 21일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김홍일, 천관우 등 각계 인사들과 시민 1,500여 명이 참례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현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안장되었다.[128]

사후 1개월 뒤인 9월 17일에는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비문에는 민주주의, 사회 정의, 민족 통일을 위한 장준하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1999년 11월 1일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12년 8월 17일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장준하 공원이 건립되었으며, 장준하의 유해는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되었다.[129]

파주시 장준하 공원에 위치한 장준하의 묘소 (2012년 공원으로 이장)

4. 평가

안병욱은 '사상계'가 펜으로 칼에 맞서 지성으로 권력에 대항했으며, 계몽과 비판, 자유와 민권의 목소리를 냈다고 평가했다.[52] 함석헌은 장준하를 두려움 없는 참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덕목을 갖춘 인물로 묘사했다.[52]

김준엽은 '사상계'가 자유·민권, 통일, 경제 발전, 문화 창조,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추구하며, 지성인들을 결집시켜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52] 지명관은 '사상계'가 지식인들에게 앙가주망(참여)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며, 장준하를 다시 없을 인물이라고 칭송했다.[52] 영문학자 여석기는 '사상계'를 좋은 잡지이자 잘 팔리는 잡지로 평가하며, 이런 경우가 다시 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52] 언론학자 정진석은 '사상계'를 1950~60년대 대표 잡지로, 장준하를 잡지 언론인 제일인자로 평가하며,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52]

한겨레 21 설문조사에서는 장준하가 해방 이후 민족주의를 계승하고,[130] '사상계' 창간으로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130] 막사이사이상 수상은 그의 업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승만 정권 시절 언론 통제 관련 부서에 근무했고, 5·16 군사정변 초기에는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는 등 정치적 태도 변화로 인해 "부패한 언론인"이라는 비판도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장준하는 언론인, 독립운동가, 민주화 운동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사상계를 통해 언론 자유를 육성하고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지식인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며,[14]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여 그의 업적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9]

4. 2. 부정적 평가

사상계 창간 목적과 그 활용을 둘러싼 논란이 존재한다. 5·16 군사정변 초기에는 이를 지지하는 듯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이후 군사 정권의 연장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화에 반대하며 비판으로 돌아섰다.[9]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적이 있는 문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모순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그의 반공주의적 시각과 김원봉에 대한 비판 역시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5. 기타

장준하는 가명으로 '김신철'을 사용했으며,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은 '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였다.[45] 3공, 4공 시절 박정희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 중 한 명으로, 일각에서는 그를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에 대비하여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장준하의 미망인을 방문하여 박정희 시대의 탄압 행위에 대해 사과를 구했다. 이에 대해 장준하의 부인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치를 해주십시오"라고 답했다.[27][28] 2012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였던 박근혜는 장준하 타살 의혹 조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장준하의 장남은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의 잔당과 어울리는 정치를 한다면, 타살 의혹에 대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박 후보는 진상 규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야 한다"고 비판했다.[20]

장준하의 아들 장호준 목사는 박정희의 아들이자 박근혜의 남동생인 박지만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내는 글"[139])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장준하와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존경하는 인물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인 『돌베개』에서 김원봉을 "틀에 박힌 공산주의자"라고 혹평했다.[29]

5. 1. 병적 기록부 발견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전병헌일본군 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증거와 병적기록부(유수명부)를 발굴해냈다. 이는 2004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언론에 공개되었다.[45]

전병헌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유수명부(留守名簿)>에는 장준하의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 소속부대(제7991부대), 생년월일 및 본적지(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 258), 부친의 성명(장석인·張錫仁), 역종·병종 및 계급, 공탁금 번호와 상단에 탈출일자 및 탈출지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45] '유수명부'는 일본군의 해외파견 군인·군속의 명부로, 탈출(逃亡) 및 이탈, 사망 등 행방불명된 자의 기록을 날짜와 장소와 함께 기록한 것이다. 전체 11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출한 한국인 병사들에 대한 기록은 각 권 뒷부분에 따로 정리되어 있다.[45]

병역 내용에 따르면 1944년 1월 20일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되었으며, 같은 해 7월 7일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徐州)에서 탈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부 상단에는 ‘도망(逃亡) 쉬저우’라고 기재하여 장준하의 탈영 사실을 밝히고 있다.[45] 이는 장준하가 생전에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힌 내용과 일치한다.[45]

5. 2. 김원봉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장준하는 조선의용대의 수령이자 한국광복군 1지대장이었던 김원봉을 '판에 박힌 공산주의자'[46], '공산당 노선을 취한 자'[140]라며 혹평했다.

1944년 일본군 탈출 직후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제의를 거절했다.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설득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주장했다.[46]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이나 학도병 탈영자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141]이었다고 비판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광복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고 비난했다. 그는 김원봉이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을 펼친 의도 역시 의심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김원봉이 월북함으로써 그의 주장은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김원봉이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김원봉이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62]고 주장했다.

6. 학력

7. 기타 약력


  • 1932년 4월, 평양의 숭실중학교 입학. 동아일보사의 ‘브나르도 운동’에 참여[9]
  • 1941년, 친구인 마라톤 선수 김익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 일본 도쿄에 유학[9]
  • 1941년 4월, 도요대학 예과 입학[9]
  • 1943년 11월, 신안소학교 시절의 제자이며 하숙집 딸이었던 김희숙과 결혼.[9]
  •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10]
  • 1945년 1월,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1]
  • 1945년 8월 18일, 독립군 신분으로 서울에 들어왔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다시 돌아감.[17]
  • 1946년 4월 26일, 김규식이 만든 한국청년회에 가입. 그러나 곧 한국청년회를 탈퇴하고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으로 건너감.[3]
  • 1947년 12월,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가입.[3]
  • 1952년 9월, 월간 《사상》을 창간.[3]
  • 1956년, 동인문학상 제정.[3]
  •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상 수상.[9]
  • 1965년 '조국 수호 협의회'에 참여하여, 한-일 조약 반대 투쟁.[9]
  • 1966년 아버지 목사 장석인 사망
  • 1967년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 의원에 당선.[9]
  • 1970년 2월, 새로운 민족 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신당 운동 추진.[4]
  • 1970년 4월, 윤보선 등이 신민당을 탈당할 때 함께 탈당, 이후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 저서 돌베개 출간.[4]
  • 1970년 윤보선, 박기출 등과 선명여당 국민당 창당에 참여
  • 1971년 '민주 수호 국민 협의회'에 참여.[4]
  • 1973년 양일동 등과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통일당 최고위원에 선출.[4]
  • 1975년 4월 민주통일당 탈당.[4]
  • 1975년 8월 모종의 거사 계획 중 의문사.[5]
  •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19]
  •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 추서.[19]
  • 1999년 11월 1일, 잡지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1급) 추서.[19]
  • 2013년 1월 24일,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21]
  • 2022년 11월, 국가배상 소송에서 승소하여 유족에게 약 7.8억 배상.[23]


8. 저서


  • 《돌베개》
  • 《민족주의자의 길》
  • 《지식인과 현실》 (세계사, 1992)

9. 방송


  • 1999년 8월 15일 MBC 다큐멘터리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 2004년 1월 9일 KBS 인물현대사 26편 장준하 1부 민족주의자의 길[142][143]
  • 2004년 1월 17일 KBS 인물현대사 27편 장준하 2부 거사와 죽음의 진실[144][145]

10. 상훈

11. 기타

장준하의 유족들은 무죄 판결 이후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으로 구속된 장준하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문재인 정부는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다.[22] 이에 일부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2022년 11월, 정부는 상고를 포기하고 장준하의 유족에게 약 7.8억을 배상하게 되었다.[23]

장준하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2년 유골 이장과 함께 뼈 검시가 가능해지면서 타살설과 사고사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대한법의학회는 추락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25] 법의학자 중에는 두개골 골절 후 추락했다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24] 신경외과 의사 출신 국회의원 정의화(전 한나라당 소속)는 "많은 두개골 손상 환자를 치료한 경험으로, 유골을 보는 순간 타살이라고 생각했다"며 타살설을 지지했다.[26] 유족 측도 다른 부위의 골절이 적다는 점을 들어 타살설을 주장하고 있다.[25]

11. 1. 가족 관계

張俊河중국어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조부장석인(張錫仁)
조모김경신(金敬信)
부친장석우(張錫禹)개신교 목사[9]
모친이성숙(李聖淑)
장익하(張益河)
남동생장정하(張正河)
여동생장명하(張明河)
배우자김희숙(金喜淑)
장남장호권(張豪權)27년간 해외 생활 후 귀국, 인터넷사상계 창간[27]
차남장호성
3남장호경
장녀장호정제주특별자치도로 시집감[27]
차녀장소영미국으로 이민[27]



장남 장호권은 아버지 장준하의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27년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생활하였다.[27] 2004년경 한국에 귀국하여 2005년사상계』의 복간을 목표로 『인터넷사상계』를 창간하였으나, 사이트 투자자의 사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27]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27]

12. 장준하를 연기한 배우들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장준하를 연기한 배우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13. 관련 자료


  • 오마이뉴스 기사

:* 2013년 8월 12일, ""김대중 선생, 1975년 8월 18일 장준하 선생 사망 소식 듣고 오열""[46]

:* 2013년 8월 13일, ""박정희, 장준하 암살 직접 지시""[47]

:* 2013년 8월 13일, ""장준하, 유신 반대 국민지지 얻자 박정희가 제거""[48]

  • 단행본

:* 장준하, 《돌베개》, 세계사, 1992년

:* 김삼웅, 《장준하 평전》, 시대의창, 2013년

:* 김희선, 《아버지 장준하와 아들 김희선》, 내일을여는책, 2013년

  • 논문

:* 김광동, 〈장준하의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역사비평》, 2013년 가을호

  • 방송 프로그램

:* 그것이 알고싶다, SBS, 2013년 8월 17일, "944회: 누가 그를 죽였나? - 장준하 사인 미스터리"

  • 언론 기사

:* 한겨레, 2013년 8월 13일, "장준하 선생 의문사, 풀리지 않는 의혹들"[49]

:* 경향신문, 2013년 8월 14일, "[단독]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검찰 재수사 착수"[50]

:* 조선일보, 2013년 8월 15일, "장준하 선생 사인 논란, 진실은 무엇인가"[51]

14.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제7대 총선국회의원7대신민당36,929표57.59%1위당선
제9대 총선국회의원9대신민당29,045표23.87%3위낙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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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장준하 선생 부활은 유신 부활 막으라는 불호령" https://www.ohmynews[...] 2012-08-17
[21] 뉴스 "チャン・ジュナ先生に謝ります" 裁判所、39年ぶりに無罪宣告 http://japan.hani.co[...] 2013-01-24
[22] 웹사이트 장준하 선생에게... 문재인 정부가 항소라니요 https://www.ohmynews[...] 2020-08-02
[23] 웹사이트 민주화운동가 고(故) 장준하 유족 제기 국가배상소송 상고 포기 https://www.moj.go.k[...] 2022-11-02
[24] 웹사이트 “故장준하 선생, 머리에 둔기 맞아 숨진 뒤 추락했다” https://www.donga.co[...] 2013-03-27
[25] 웹사이트 대한법의학회 "장준하 추락사했다"... 타살 아니다? https://www.ohmynews[...] 20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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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사이트 김구 "臨政을 눈엣가시로 여긴 사람", 장준하 "판에 박힌 공산분자" https://www.chosun.c[...] 201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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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뉴스 아버님은 암살당했다 신동아 1983-08
[147] 뉴스 “주검 보자마자 ‘각본이구다’ 생각 들어”“두개골 상처에 성냥개비 넣으니 다 들어갔다“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2-08-16
[148] 뉴스 민주 "장준하 타살의혹" 朴 "조사이뤄져"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2-08-17
[149] 뉴스 대를 이은 악연, '박근혜 심판' 광고로 여권 반납당한 고 장준하 아들 장호준 목사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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