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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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춘삼은 자서전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자신의 생애를 밝힌 인물이다. 8세에 어머니를 찾아 대구로 간 후, 청년기에는 '거지왕'으로 불리며 부랑아 구제 사업을 했으나, 1960년대 서울에서 강도 및 조직폭력 행위로 현상수배를 받았다. 그는 고아원 원생들을 착취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악행을 저질렀으며, 자녀들에게도 가혹한 행위를 했다. 1969년 한국무용단을 창립하고 환경운동에 참여했으며, 1997년에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6년 사망했으며, 그의 생애를 다룬 작품들이 미화 논란을 빚었다. 조선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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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춘삼 |
현지어 표기 | 金春三 |
출생일 | 1928년 2월 1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덕천군 |
사망일 | 2006년 11월 26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서울보훈병원 |
배우자 | 남윤자 |
자녀 | 슬하 2남 1녀 |
군사 복무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50년 ~ 1953년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상사 |
지휘 | 분대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공해추방국민운동중앙본부 총재 (1994년) 신한국당 특임행정촉탁위원 (1996년)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촉탁위원 (2001년) |
2. 생애
김춘삼은 자서전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1][2] 강원도 철원 외가에서 누이와 살다가 8살 때 경상북도 대구로 개가한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김춘삼은 서울특별시 중부시장 일대에서 강도와 조직폭력 행위를 일삼았고,[4] 고아원 원생들을 착취하는 악행을 저질렀다.[5]
1969년 5월 대한자활개척단 단장을 하면서 가칭 한국무용단을 창립했고, 1994년에는 공해추방국민운동중앙본부를 세워 환경운동을 하기도 했다. 1997년 12월에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 지원을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6년 11월 26일 서울보훈병원에서 폐질환과 패혈증으로 사망했으며,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6] 그의 생애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으로 미화되었으나, 실제로는 악명 높은 조직폭력배였다는 점에서 역사 왜곡 논란이 있다.
2. 1.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청년기
김춘삼은 자서전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1][2] 강원도 철원 외가에서 누이와 살다가 8살 때 경상북도 대구로 개가한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고 밝혔다.청년기에 김춘삼은 전국의 걸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지왕’으로 불렸다. 1950년대에는 전쟁 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전국 10여 곳에 세워 부랑아 구제 사업에 나섰다.[3]
그러나 실제 김춘삼은 1960년에 서울특별시 중부시장 일대에서 강도와 조직폭력 행위를 했고,[4] 이로 인해 현상수배를 당하자 서울특별시에서 광주광역시로 도주한 인물이었다. 또한 고아원의 원생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5] 그는 당대의 주먹패 중 최악의 인물로, 다른 주먹패들은 자칭 협객이라며 여자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김춘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에게도 상습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김춘삼은 자녀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보육원에 보낼 정도로 비정한 아버지였으며, 이로 인해 자녀들의 가슴에는 원망과 한이 남았다. 그는 자녀들을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구타하고 가혹행위를 했으며 인격적으로 무시했다. 즉,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극한까지 고통으로 몰고 갔다. 자녀들은 “그저 매 맞고 기합받았던 기억뿐입니다.”, “너무나 엄격해서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죠.”라며 아버지를 회상했다.
2. 2. 부랑아 구제 사업과 이면의 악행
1950년대에는 전쟁 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전국 10여 곳에 세워 부랑아 구제 사업에 나섰다.[3]그러나 실상은 1960년에 서울특별시 중부시장 일대에서 강도와 조직폭력 행위를 했고,[4] 이로 인해 현상수배를 당하자 서울특별시에서 광주광역시로 도주했다. 또한 고아원의 원생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5] 당대의 주먹패 중 최악의 인물이었으며, 다른 주먹패들은 자칭 협객이랍시고 여자들에게 함부로 대하진 않았지만 오직 김춘삼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에게도 상습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김춘삼은 자녀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보육원에 보낼 정도로 인간쓰레기 그 자체였으며, 이로 인해 자녀들의 가슴에는 원망과 한으로 남았다. 김춘삼은 자녀들을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구타하고 똑같이 가혹행위하며 똑같이 인격적으로 무시했다. 즉,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극한까지 고통으로 몰고 갔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그저 매 맞고 기합받았던 기억뿐입니다.”, “너무나 엄격해서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죠.”라고 추억했다.
2. 3. 사회 활동과 정치 참여
1950년대에는 전쟁 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전국 10여 곳에 세워 부랑아 구제 사업에 나섰다.[3] 그러나 실상은 1960년에 서울특별시 중부시장 일대에서 강도와 조직폭력 행위를 했고,[4] 이로 인해 현상수배를 당하자 서울특별시에서 광주광역시로 도주했다. 또한 고아원의 원생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5]1969년 5월 대한자활개척단 단장을 하면서 고유 민속 무용을 보급하기 위해 가칭 한국무용단을 창립했다.
1994년부터는 공해추방국민운동중앙본부를 세워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1997년 12월에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 지원을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2. 4. 사망
김춘삼은 2006년 8월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폐질환에 패혈증까지 겹치면서 중환자실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그해 11월 26일 서울보훈병원에서 향년 79세로 별세하였고 대전현충원 묘역 사병1-38-24747에 묻혔다.[6]3. 논란과 비판
김춘삼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에서 미화된 이미지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조직폭력배이자 아동 학대 가해자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4][5]
3. 1. 미화된 이미지와 역사 왜곡
김춘삼의 생애는 영화 ‘거지왕(王) 김춘삼(金春三)’, 드라마 ‘왕초’, 다큐멘터리 ‘불효자는 웁니다’ 등 여러 작품으로 나왔는데, 실제로는 악명 높은 조직폭력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좋게 포장되어 역사 왜곡 및 허위사실 논란이 있다.[4][5]실제 김춘삼은 1960년에 서울특별시 중부시장 일대에서 강도와 조직폭력 행위를 했고,[4] 이로 인해 현상수배를 당하자 서울특별시에서 광주광역시로 도주했다. 또한 고아원의 원생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5] 당대의 주먹패 중 최악의 인물이었으며, 다른 주먹패들은 자칭 협객이랍시고 여자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김춘삼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에게도 상습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김춘삼은 자녀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보육원에 보낼 정도로 인간쓰레기 그 자체였으며, 이로 인해 자녀들의 가슴에는 원망과 한으로 남았다. 자녀들을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구타하고 똑같이 가혹행위하며 똑같이 인격적으로 무시했다. 즉,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극한까지 고통으로 몰고 갔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그저 매 맞고 기합받았던 기억뿐입니다.”, “너무나 엄격해서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죠.”라며 추억했다.
3. 2. 인권 유린과 아동 학대
김춘삼은 1950년대에 전쟁 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전국 10여 곳에 세워 부랑아 구제 사업을 했다고 알려졌다.[3] 그러나 실상은 1960년에 서울특별시 중부시장 일대에서 강도와 조직폭력 행위를 했고,[4] 이로 인해 현상수배를 당하자 서울특별시에서 광주광역시로 도주했다. 또한 고아원의 원생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5]김춘삼은 자녀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보육원에 보냈으며, 자녀들에게도 다른 원생들과 똑같이 구타하고 가혹행위를 하며 인격적으로 무시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너무나 엄격해서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4. 명예 박사 학위
5.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김춘삼의 자서전 내용을 간추림
http://www.imbc.com/[...]
[2]
웹인용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김춘삼 자서전)
https://web.archive.[...]
2010-09-14
[3]
뉴스
빈민 구제 앞장, '거지왕' 김춘삼 씨 별세
http://news.sbs.co.k[...]
SBS
2006-11-27
[4]
뉴스
1960년 7월 1일자 동아일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60-07-01
[5]
뉴스
1959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59-06-25
[6]
웹사이트
대전 현충원 김춘삼 묘
http://www.snmb.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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